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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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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김태동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2. 생애[편집]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후 전라북도에서 무주군수, 고창군수 등을 지냈고 조선총독부 전매국 총무과 사무관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에 의해 전매국 사무관에 임명되어 전매사업과장, 염삼과장 등을 지냈다. 염삼과장 재직 당시 홍삼 수출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 대표로 홍콩에 파견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서기관으로서 외무부 정무국 기획과장을 지냈으며, 1950년에 주일대표부 정무국장을 맡으며, 대일 관계 교섭 실무진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52년에 한일회담 정무국장을 지냈고 1956년에 부흥부 조정국장을 지냈다. 그 후 1958년에 세계은행 경제연구원을 수료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 군정에서는 1962년 당시에 국방부 차관보를 지냈으며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1964년에 교통부 차관을, 1966년에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냈다.
그러다가 1968년에는 체신부 장관이 되었고 1969년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었다. 보건사회부 장관에서 물러난 1971년에는 가족계획연구원 이사장이 되었고 한국알루미늄 사장도 지냈으며 1973년에는 한미경제연구원 이사장, 일간내외경제신문 사장을, 1974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를 지냈다.
1976년에는 국제사회개발기구 한국지부장을, 1978년에는 한국신문협회 이사를 지냈으며 1979년에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0년에는 코리아헤럴드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82년에 일본을 방문했다가 숙소인 뉴저팬호텔에 화재가 나서 사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관료 부문에 등재되었다.
여담으로 딸 김영식(金英植)이 구본무의 아내며 사위가 구본무 3대 LG그룹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