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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애치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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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51대 국무장관
딘 구더햄 애치슨
Dean Gooderham Acheson


출생
1893년 4월 11일
미국 코네티컷주 미들타운
사망
1971년 10월 12일 (향년 78세)
미국 메릴랜드주 샌디스프링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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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재임기간
제51대 국무장관
1949년 1월 21일 ~ 1953년 1월 20일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
2.3. 말년
3. 기타 자료



1. 개요[편집]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1]


딘 애치슨은 미국의 51대 국무장관으로, 해리 트루먼 시기에 재임했다. 냉전 시기 미국 외교정책의 서문을 연 인물이다.

6.25 전쟁 직전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때문에 한국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189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예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그 후 애치슨은 민주당에 가입하고,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재무 부장관에 임명된다.

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편집]


루스벨트가 타계하자, 후임 대통령에 취임한 해리 S. 트루먼에 의해 국무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애치슨은 소련에 회유적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그 역시 서유럽에서 대소 강경노선으로 점차 기울어졌다. 1949년 트루먼이 재선되면서, 애치슨은 트루먼의 2기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미국이 주도하는 NATO 결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는 서유럽에서 소련에 맞서는 데 치중했던 나머지 아시아 정세에는 어두웠다. 1950년 초의 애치슨 라인 선언 당시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의 발언은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었고, 수개월 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53년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2.3. 말년[편집]


공직을 떠난 후에도, 그는 외교계 원로로서 후임 정부들에 자문을 제공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케네디 행정부의 요청을 받고 정책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소련과의 일전 불사를 포함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그보다는 온건한 쿠바 봉쇄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애치슨은 위기 당시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아데나워 서독 수상 등으로부터 쿠바 봉쇄에 관한 지지를 얻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애치슨은 케네디의 피살 후 들어선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도 일정 수준의 자문을 했다. 당초 그는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개입을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하였다. 후임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헨리 키신저도 애치슨의 자문을 받았다.

이후 1971년, 메릴랜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뇌졸중으로 눈을 감는다. 향년 78세. 유해는 워싱턴 조지타운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자료[편집]


트루먼 도서관acheson paper에 애치슨이 남긴 자료들이 있다.
특히 프린스턴 세미나(Princeton Seminars File) Transcript of Princeton Seminars Discussion, Reel 2, Track 2, October 10, 1953 15p에서, and, when Korea came along, which had nothing to do with this except to prove our thesis, it created the stimulus which made action, and the action was all made on the vasis of a thought which i think was a sensible thought. (...) NSC 68- I wish you could see this document. it isn't very long, as a document, but it has tables and tables and tables and tables at the end of it, which are the result of bringing together all the statistical knowledge about the Soviet Union and ourselves and our allies which was available to us. 라고 발언하며, 한국과 NSC 68을 언급한다.

Princeton Seminars Files, 1953–1970
October 10-11, 1953 [2 of 2]

nsc 68 자료는 트루먼 도서관 자료가 가장 깔끔해서 가독성이 좋다.
트루먼 도서관 nsc-68
윌슨 센터 nsc-68



[1] "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고 소련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챙길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