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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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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소개
2. 줄거리
3. 기타


Limelight


1. 소개[편집]




1952년 찰리 채플린이 제작한 영화이다. 채플린이 1948년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갔고, 그는 이 영화에 런던,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연극 무대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담았다.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시티 라이트와 줄거리가 유사하며, 채플린의 실질적인 유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만든 두 편은 채플린의 비중이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 정성일은 노쇠한 채플린의 작별 인사이자, 보면 볼수록 쓸쓸해지는 영화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2. 줄거리[편집]


한물 간 희극 배우 칼베로(찰리 채플린 분)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젊은 발레리나 테리(클레어 블룸 분)[1]를 구해주고 그녀의 마비증을 치료해 무대에 서도록 도와준다. 마침내 그녀는 극장의 스타가 되자만 무대에 서려는 칼베로의 시도는 실패한다. 테리는 칼베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칼베로 본인은 자취를 감춘다. 그는 테리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발레 음악 작곡가 네빌을 사랑한다고 믿은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칼베로는 테리와 다시 만나고, 자신을 위해 마련된 특별공연에서 칼베로는 마지막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후 무대 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다. 이어서 테리가 칼베로가 죽은 줄도 모르고 관객들 앞에서 발레를 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3. 기타[편집]


  • 제목의 라임라이트는 19세기 초중반 영국 뮤직홀이나 극장에서 쓰였던 석회를 원료로 하는 조명을 일컫는다. 한국어로 하면 석회등인 셈. 때문에 영어로 in the limelight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다와 뜻이 같다. 이 석회등은 19세기 후반 들어서 전기를 쓰는 호광등에 밀려 사라졌는데, 주목받는 테리를 남긴 채 쓸쓸히 퇴장한 칼베로를 암시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 채플린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대거 출연시켰는데 자신의 아내인 우나 채플린이 여주인공 클레어 블룸의 대역으로 출연했다. 그 외에도 우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이 제럴딘, 조제핀, 마이클이 거리의 구경꾼으로, 전처 리타 그레이 사이에서 낳은 26살의 시드니와 27살의 찰스도 출연했다.

  • 채플린의 라이벌이자 유명한 배우였던 버스터 키튼이 출연했다. 키튼은 유성 영화로 인해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단 평가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는데, 채플린은 편집을 할 때 본인의 출연 장면은 줄였지만, 키튼이 출연한 장면들은 전부 남겨두었다. 이 영화에 출연한 후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 채플린은 이 영화를 찍은 후 우나와 아이들에게 자신의 고국을 보여주고 싶어서 라임라이트를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1952년 9월 17일 퀸 엘리자베스 호에 몸을 실은 채플린 일가는 출항 2일 후 라디오 방송으로 법무장관이 채플린의 미국 비자를 말소시켰다는 보도를 들었다. 혐의는 도덕성, 공중위생, 정신착란, 공산주의 찬동, 공산주의 또는 친 공산주의 단체 참여를 이유로 입국을 금지시킬 수 있다는 이민법 조항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이 영화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시절을 마감하는 영화가 되고 만다.

  • 로버트 알드리치가 조감독을 맡았다.



[1] 이 영화 이외엔 더 헌팅의 시어도라 역으로 유명하다. 이 당시만 해도 작중 역할과 비슷한 신인 연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