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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젠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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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젠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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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로버트 뱅크스 젠킨슨
Robert Banks Jenkinson
출생
1770년 6월 7일
런던
사망
1828년 12월 4일 (향년 58세)
서리 주 킹스턴어폰템스
재임기간
제22대 총리
1812년 6월 8일 ~ 1827년 4월 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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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제2대 리버풀 백작[1]
부모
아버지 찰스 젠킨슨, 제1대 리버풀 백작
배우자
루이자 젠킨슨(1767~1821 / 1795년 결혼, 1821년 사별)
메리 젠킨슨(1777~1846 / 1822년 결혼)
학력
차터하우스 대학교
정당
토리당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1. 개요[편집]


제2대 리버풀 백작 로버트 뱅크스 젠킨슨[1]은 영국의 정치인이자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설립(1801)된 이후 최연소, 최장 임기(1812-1827)를 지낸 영국의 22대 총리이다.


2. 생애[편집]


조지 3세의 고문이었던 초대 리버풀 백작 찰스 젠킨슨과 첫 번째 아내로 인도계의 피를 가진 아멜리아 왓츠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웨스트 민스터에 있는 세인트 마가렛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서리 주 공립학교, 차터 하우스 스쿨에서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를 졸업했다.

1790년에 서식스주 라이 선거구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01년 헨리 에딩턴 내각에서 외무 장관으로 입각하였고 1802년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음으로써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종결되었고 기나긴 혁명전쟁에 쉼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 성과로 젠킨슨은 혹스베리 남작으로서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

1년의 휴전은 그저 휴식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야심을 드러냈고 영국도 몰타 섬 점령으로 응수하여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소 피트의 마지막 내각(1804년-1806년)에서는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윌리엄 그렌빌이 퇴진한 이후 소 피트의 계승자들인 토리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캐번디시 벤딩크 내각에서 내무장관에 재임명되었다. 1809년 스펜서 퍼시벌 내각에서 전쟁-식민지장관에 취임하였다. 1808년 초대 리버풀 백작이었던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그는 리버플 백작 작위를 승계하였다.

1812년 퍼시벌이 암살당하면서 장관이었던 젠킨슨은 내각을 물려받았다. 리버풀 백작이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42세였으며, 현재까지 역대 후임자 중에서 가장 젊은 나이이다. 젠킨슨은 총리 시절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는 억압적인 조치로 유명했지만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급진적, 불안한 시기에 정국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젠킨슨 내각은 아서 웰즐리 장군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19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하여 마침내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분쇄하며 기나긴 나폴레옹 전쟁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1814년 빈 회의에 외무 장관 캐슬레이를 보내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케이프 식민지와 실론 섬, 프랑스가 차지했던 몰타 섬을 정식으로 획득하는 데 성공하며 나폴레옹 전쟁 승전 4대강국(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중 하나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빈 회의 시기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도 웰즐리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나폴레옹군에게 대승을 거둔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던 1812년에는 영미전쟁도 벌어졌다. 대륙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1814년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미국의 거센 저항으로 1815년에 물러섰다.

1814년, 젠킨슨은 영국의 견습공 제도를 법적으로 뒷받침해 온 장인법을 폐지하였다. 이는 자본가의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확립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장인과 수공업자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1815년에는 영국 지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곡물의 수입을 제한하는 곡물법을 제정하였다. 젠킨슨 내각의 정책에 분노한 수공업자 등 민중은 1819년에 세인트 피터 광장에 모여 의회 개혁과 참정권 요구를 외쳤으나 정부는 기병대를 동원해 이른바 피털루 학살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이 무렵엔 나폴레옹 전쟁과 전후에 심화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궁핍때문에 과격한 시위와 무력 충돌이 빈발했는데 젠킨슨은 여섯 개의 법(Six Acts)으로 그들이 반정부, 개혁요구 활동을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며 사형, 강제해산 등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에 독립투쟁이 번졌으나, 젠킨슨은 이들이 영국에게 중요한 시장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빈 체제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에 반대하였다. 이후 산업혁명의 성과와 맞물려, 실제로 영국은 라틴아메리카 신흥국에 대한 투자 붐으로 큰 수혜를 입어서 1820년대 초 경제 호황을 누렸다. 호황 속에서 젠킨슨 내각은 민중운동 탄압 위주의 정책을 완화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824년에 결사법을 폐지하여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퇴역 영국군이었던 조지 맥그리거의 라틴아메리카 내 가상국가 포야이스(Poyais)라는 희대의 사기극등으로 주식 버블이 붕괴하자 은행들이 줄도산하며 1825년 영국에 금융 위기가 발생하였다. 당시 젠킨슨 총리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영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고 나서야 위기를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젠킨슨의 행동은 영국의 금융시스템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각국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의 효시가 되었다.

임기 말에 그리스 독립 전쟁, 가톨릭 해방법에 대한 논쟁과 갈등 속에서 리버풀 백작이 해결하지 못하자 사퇴 압력을 받게 되었고 결국 1827년 2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총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토리당의 후예 일부는 젠킨슨과 달리 영국의 자유주의 개혁을 선도해갔다. 이듬해 1828년에 사망했다.


3. 평가[편집]


리버풀 백작은 전통적인 토지 소유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며 노동운동과 자유주의를 억제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으나, 나폴레옹 전쟁과 그 후속 처리, 산업혁명에 따른 사회적 변화의 정치적 요구라는 두 가지 큰 혼란을 15년 임기 동안 안정시켰다. 이는 세계의 패권이 대륙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임기 말 그는 결사법을 폐지하고 젊은 자유주의적 토리들을 입각시키고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정치 감각도 있었기에 장기집권이 가능했을 것이다.


4. 여담[편집]


그의 사후 150년 동안 40대 총리는 선출 내지 임명되지 못했었지만 해럴드 윌슨의 총리 재직으로 그러한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



[1] Robert Banks Jenkinson, 2nd Earl of Liverpool KG P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