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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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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한(大韓)
2.1. 황실
2.1.1. 재석의 가족
2.2. 소왕파
2.3. 내관
2.4. 조정
2.5. 군인
2.6. 기타 관원
2.7. 종교인
2.8. 민간
2.9. 유림
2.10. 상인
2.11. 번국
2.11.1. 심왕부
2.11.2. 대명동
2.11.3. 술루국
2.11.4. 조홀국
2.11.5. 하와국
2.11.6. 주산군도
2.12. 미주
3. 대아주
3.1. 청
3.2. 후금
3.3. 후송
3.3.1. 배상제회(태평도)
3.4. 서
3.5. 일본
3.6. 유구
3.7. 아모국
3.8. 대남국
3.9. 섬라
3.10. 무굴국
3.11. 벵골 칸국
3.12. 준가르 칸국
4. 대유주
5. 대미주
5.2. 신불랑국[1]
6. 대삼주
7. 대상주
7.1. 애집투[2]



1. 개요[편집]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들.
실존 인물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2. 대한(大韓)[편집]




2.1. 황실[편집]



조선 제21대 국왕


대한 제7대 태황
영종 원평제 | 英宗 元平帝

영종익문선무장의희경영철현효태황
英宗 翼文宣武莊義熙敬英哲顯孝太皇

출생
1763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782년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재위
대한 태황
1782년 ~ 1829년
(음력 1782년 ~ 음력 1829년)
연호
원평(元平)
황릉
양주 숭릉(崇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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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금(昑)
부모
부황 목종 영태제, 모후 남양 홍씨
부인
황후 파평 윤씨

  • 영종 원평제 이금(英宗 元平帝 李昑)[3]
4부 시작 시점인 1823년의 대한 태황이자 재석의 할아버지. 1763년생. 적자 둘을 병으로 잃고,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 태자 이순이 망나니라서 고심이 크지만, 고조할아버지인 중종도 소싯적에 망나니였다가 개과천선한 전례 때문에 근데 그거 재석이가 빙의해서 그런 건데 태자에게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폐태자하지 않고 참고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게 만들고도 반성의 기색조차 없는 태자에겐 희망이 없다 판단했는지,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재석이 빙의하면서) 성숙해진 것으로 보이는 태손에게 기대를 품는다. 원역사의 이금처럼 매우 권위적이고 엄격한 성격이어서 자식, 손자들에게 사석에서도 폐하라고 부르게 하고,[4] 황제의 권위를 중시해 나폴레옹을 찬탈자에 참칭자라 비난하고 신불랑국에 대해서 불랑국의 번국 취급을 하며,[5] 멕시코 제1제국,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도 같은 이유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는 즉위 초인 1788년 부황의 후궁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벌인 무신지변을 겪은 영향도 있는 듯. 태자 외에 후궁 소생 아들 다섯(그중 둘은 요절), 서녀 셋을 두었다. 한편 미식가 기질이 있어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며 서양딸기를 대한에 처음 도입했다고 한다.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써 의학에도 관심이 많고 담배나 아편 등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몹시 싫어한다. 재위 중 장조 이래 200년 넘게 유지되었고 3부의 숙조 때도 폐지를 고려했었던 재한 네덜란드인들의 간택단자 제출 의무 예외를 폐지하고, 미주 백성들에게도 간택단자를 제출하게 해서 은근히 쌓인 불만을 해소해주는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다. 신덕왕후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고. 또한 원역사 영조처럼 압슬을 폐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넘어가던 부분들을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등 원 역사의 옹정제에 비견될만한 통치를 했다.
태손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안 좋아져서 며칠이지만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쉬고, 식욕도 떨어져 평소 좋아하던 딸기와 수박도 한 조각 먹고 물린다. 이것도 내관이 조금이라도 드시라고 간청해 억지로 먹은 것. 그래도 대리청정을 하는 태자가 사고 안 치고 무난하게 정사를 돌보는 것에는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토실에 석탄을 그만 떼고 광혜원으로 돌리라면서 삶을 정리하려는 모습이 마지막 등장이 되었고 결국 재석이 진주만에 있을 때 폐렴으로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재석은 7년간 든든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며, 멕시코에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 황후 → 황태후 → 정성태황태후 윤씨
파평 윤씨 가문 사람으로, 성격이 원평제와 달리 인자해 손주들에게 할마마마라고 부르라고 명했다고 한다. 태손이 어머니를 잃은 후 1년간 자신 곁에 두고 직접 키웠다. 태자가 아들 둘을 잃고 둔 막내인지라 애지중지하다가 버릇을 잘못 들였다 한다. 광덕제가 사망하며 마지막 남은 자식까지 먼저 보내게 되고,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태황태후가 된다. 남편을 잃은 후에는 고양이 키우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으며, 재석이 여성 의무교육을 시작하기로 하자 사재를 내어 사대부 여식에게 현모양처 교양을 가르칠 여학교인 이화학당(李花學堂)을 세워 재석에게 힘을 실어준다. 재석이 비행선을 직접 탄 것을 목격하고 몹시 진노해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노괴 재석을 당황하게 만드는 엄한 면모도 있다.


조선 제22대 국왕


대한 제8대 태황
헌종 광덕제 | 憲宗 廣德帝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태황
憲宗 經文緯武明仁哲孝太皇

출생
1795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34년 음력 9월 17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희궁 침전
재위
대한 태황
1829년 ~ 1834년
(음력 1829년 ~ 음력 1834년)
연호
광덕(廣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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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순(峋)
부모
부황 영종 원평제, 모후 파평 윤씨
부인
추존 순원황후 안동 김씨, 황후 반남 박씨

  • 황태자 → 헌종 광덕제 이순(憲宗 廣德帝 李峋)
4부 초기 대한 태자이자 재석의 아버지. 1795년생. 삼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요절했기에 태자가 되었다. 재석이 평하길 원본 성친왕이나 홍이 같은 놈. 어릴 때부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그래도 살인이나 강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 등 폐태자될 일은 피하는 얍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금에게 다른 적자가 없는데다 과거 성친왕이 재석의 빙의 후 개과천선했던 사례 때문에 태자 자리는 잃지 않았다. 여색을 좋아하는데 4부 시작 시점에서 이미 정식 후궁만 넷이고 황손으로 인정받은 서자만 아들 둘에 딸 넷인데, 그후 4년 만에 7명이나 자식을 더 본다(...) 제위에 오르고 2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자식이 (영유아기에 일찍 죽은 아이들 빼고 살아있는 자녀들 숫자만 세어도)20명으로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남긴 자식 숫자는 29명.[6] 취향이 아주 확실한지 조금만 미모와 몸매가 망가져도 바로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외에도 여자를 많이 두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녀도 여럿 있다고 한다. 미주 방문 중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한 미주 원씨 가문에게 역적 원균의 후손이라고 폭언을 하여 원씨 당주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며,[7] 음주가무에 빠져 미주 백성들을 위무한다는 원래 목적은 팽개쳤으며, 자기 정실부인과 아들이 탄 마차를 몰면서 음주운전으로 폭주하다가 아내를 사고로 죽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부황의 명으로 1년간 북한산성에서 근신했는데, 우연한 사고였는데 내가 뭘 반성하냐는 식으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음주와 여색, 사냥 등 할 거 다 하는 것도 모자라 문안인사를 안 왔다고 어린 아들을 구박하고 큰딸에게 하루 8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강요하는 등 막장부모 짓까지 벌여 재석을 분노케 한다.[8] 여성 교육에 대해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다. 재석은 이런 자가 군주가 되면 틀림없이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기에 막아야 한다 생각하지만, 엄연히 혈통상 부친인 태자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은 참으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다만 태황이 된 후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자신의 뜻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일부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잦은 모습이 과거 무종이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지라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100% 막장은 아닌 것이, 재석이 어린 나이에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어릴 때는 마음껏 놀아야 한다며 다정하게 굴고[9] 재석이 그간 마포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자 몰래 암행에 동참시켜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서 재석을 의아하게 만든다. 게다가 장조와 중종의 예를 들며 재석에게 군주는 변란에 대비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승마, 궁술, 생존기술 등을 출중한 솜씨로 시범을 보인다거나 공부에 대해서 대놓고 자기는 '일부러' 지나치게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한다고 말하고, 측근들도 부귀영화를 위해 몰려든 아첨꾼들과 국가를 위해 자신이 성군이 되길 바라는 충신들을 구분해서 전자는 지금은 같이 놀지만 즉위하면 손절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처신을 보인다. 태자비 박씨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고 싶어서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재석을 미주 순행에 보내달라며 베겟머리 송사를 하자 그대로 부황에게 요청하고 성사시키지만 태자비의 검은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으며, 본인은 재석이 나폴레옹을 만나 외교적인 성과를 올려 태손의 지위가 굳건해지기를 바래 미주로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주변에선 태손이 너무 치켜세워지면 이를 질투한 태자가 아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점으로 나오는 부분을 보면 의외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태손이 미래의 태황감으로 각광받을수록 그 아비인 자신의 입지도 단단해진다며 좋아하는 중.[10][11]
재석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악화된 원평제가 명해서 사흘간 대리청정을 하는데, 눈치껏 성실하게 국정을 돌보고[12] 자신의 서양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유창한 영어로 영국 대사를 접견했으며 그 이후에는 유흥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재석이 귀국하는 동안 원평제가 붕어하면서 제위에 오른다. 전 장인인 김조순을 보내서 재석을 맞이하게 하고, 노예재석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태자'라고 칭하며 반기며 엄격했던 조부와 달리 자신을 '아바마마'라고 부르게 하고, 전례를 깨고 국상 기간 중에 태자 책봉식을 개최하여 정식으로 태자로 임명한다. 그렇게 재석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본인이 귀찮아하던 빈소 지키는 일도 재석에게 떠넘겨버린다. 그와 별개로 재석이 생각한 것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나폴레옹에게 캐나다 서부 땅을 사는 것에 동의하고, 재석이 생각했던대로 건주 양국에 재석을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구상을 밝히며, 놀이 친구들은 손절해서 조정의 호감을 사고, 국상 중임에도 재석의 태자 책봉을 밀어붙이는 정치력을 발휘한다. 막상 뚜껑 열어보니 군주로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재석이 북경에 간 사이 중종 건흥제의 유지를 대놓고 어기는, 유구를 동군연합으로 만들어 실질적으로 병합하겠다는 폭탄 같은 구상을 밝히고 일본을 달래기 위해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겠다는 구상을 밀어붙이며 재석과 독자들이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주변국 모든 황실에 자기 딸들을 시집보내 혈연으로 묶어 동양의 외조부가 되겠다는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안은 재석이 뜯어말려 일본과만 조카들을 통혼시키는 것으로 축소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복동생 전왕에게 딸을 일본에 시집보내라고 강압적으로 통보하는 등 이복동생들에게 원한을 스스로 쌓아가고 있어 독자들은 제 명에 못 살고 암살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소왕의 테러 음모를 다 꿰뚫어보고 있으면서 재석에게 수사 책임을 맡겼다.
즉위한 후 눈치볼 상대가 없어지자 운동을 그만둬버리고 음주와 여색은 그대로 몰두한 바람에 점점 비만이 되어가고 있어 성인병이 우려되었다. 일단 태의들은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하여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줄 알았으나... 후금에서 선물로 받은 한혈마를 타고 고선지, 나폴레옹 흉내를 내며 금강산을 무리하게 등산하려다가 낙마하여 10미터 절벽을 굴러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어 사망하고 만다. 다발성 골절과 내장파열이 더쳐 결국 복막염으로 악화됐는데도 치료가 실패할까 두려워서 수술을 거부하고 마취약으로만 버티다가 결국 사고 15일 만에 붕어했다. 평소 내가 내일모레 마흔인데 살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겠느냐며 태자에게 나랏일을 미리 가르쳐놔야 한다고 틈만 나면 재석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모두들 지금은 건강하니 놀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알고보니 사망 플래그였다.
재석에게는 애증이 교차한 인물이었지만[13]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은 군주였다. 그의 재위기간 약 6년 동안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도 없었고, 작황도 전반적으로 좋았던데다가, 임금이 유흥을 즐기는게 흠이 되는 시대도 아니고 노는 것도 국고를 축내거나 백성을 약탈하는 일 없이 돈 많은 한량 수준으로만 개인적으로 놀았으며,[14] 태자를 굴려서 국정도 빈틈없이 운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훗날 실록에서 재석이 이 시기에 대리청정을 수시로 하며 사실상 국가를 통치한 것이 드러난다면 "운이 좋았을 뿐인 범군과 암군 사이의 군주" 정도의 평가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그의 재위기간은 작중 조선 왕실/대한 황실을 기준으로 하면 예종, 문종, 정종, 단종 다음으로 짧다.[15]
상희 대신 등장한 새로운 3번째 현대인 빙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주 한 사람이 이 제국을 다스릴 수 없는 시대라며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한편 재석에게 의회제도를 도입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하고, 재석을 태자로 책봉하며 선물로 내린 명마의 이름을 부케팔로스로 붙이고, 서양 음악과 오페라를 즐기며 세익스피어 전집을 읽고자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대한의 사상과 문화보다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찬양한다. 그외에도 간간히 아내들과 자식들을 모두 모아 파티를 열면서 다양한 양념의 무종계, 남만전, 흑장면, 탕수육을 메뉴로 내고 아이들이 손으로 뜯어먹어도 전혀 꾸짖지 않으며, 맥고국을 메히코가 아닌 멕시코로 부르고 아직 21세밖에 안된 청년이던 박규수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동안 무조건 거세를 시키던 양매창을 말라리아 감염법으로 치료하도록 하는 등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 서양빠이자 서양 사회의 장점만 보며 내로남불하는 국까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었으나 재석이 빙의한 후 처음 만났을 때는 "네가 혼이라도 바뀌지 않은 이상 그렇게 조리있게 말할 리가 없다"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황제가 된 이후엔 재석에게 일을 다 시키는 와중에 재석이 문서들 틈에 태황만 볼 수 있는 금위사 보고서가 섞여있는 것을 보고 이를 바치자 금위사 문서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다가, 곧 언젠가 봤겠거니 하면서 그냥 보라고 하고 인생은 연극과 같다는 묘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이후에는 등선군의 명칭을 해병대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는데, 굳이 등선군이라는 명칭을 바꿀 실익도 없을 뿐더러 해병대라는 단어가 작중 시기에서 떠올리기에는 좀 어색한 현대적인 명칭이다. 또한 만주에서 유정을 찾을 때 다칭유전부터 찾으라고 하여 석유 개발이 지연되거나, 수에즈 운하, 시나이 반도 등 당시 대한인들에게 생소할 중동 지명에 대해 잘 알고, 반영 성향이면서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황실에서도 우선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영어고 영국인들에게 유독 친근히 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며 의혹이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임종 때 재석에게 순원황후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내가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미 다른 이들이 많은 일들을 해놓아 내가 끼어들 필요도 능력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들은 금방 쓸모없는 게 되어버렸다. 이제 이 꿈을 끝내고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노라."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이 결정타. 독자들은 그가 재석, 상희처럼 원 역사에서 온 빙의자가 역시 맞았으며 재석이 무종 때부터 일으킨 변화로 인해 대한이 이미 대제국이 되어있어 원 역사 세계에서 갖고 온 지식도 별 쓸모가 없어지자 그냥 태자→군주라는 초특급 금수저 코스 인생(...)을 한껏 즐겨보기로 하고 즐겁게 살다가 명이 다하자 원래 삶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16][17] 사후 재석이 그의 유언을 곱씹으며 생각하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사실상 확정. 광덕제가 자신과 같은 현대인 빙의자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하게 된 재석은 내심 경악했으나, 그가 살아서 함께한 12년 동안 지켜봐온 모습을 돌이켜보며 위험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며 일단 그가 이 삶에 만족했다고 하고 죽었으므로 자신처럼 윤회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혹시 다음 윤회에서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굳이 선빵치지는 않기로 한다.
광덕제 이순의 아내이자 이진의 어머니.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원평 23년(1805년)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성품이 곧아 남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1822년 태자 시절의 광덕제 일으킨 음주운전 마차 사고로 끔살당한다. 아들을 끌어안아 감싼 채로 죽었으며 그래서 재석은 빙의 초장부터 눈떠보니 피투성이 시체의 품안이라 충격과 공포를 제대로 맛본다. 자녀로는 장녀 화원군주, 요절한 장남 이윤, 차남 황태손 이진, 삼남 이운이 있었다. 효비라는 시호를 받고, 훗날 남편이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로 추존된다. 원역사에서는 68세까지 살았으나 이 세상에서는 훨씬 빨리 죽고 만 대체역사의 피해자.
  • 화원군주 → 화원공주 → 화원장공주 이○○
효비 김씨가 낳은 적장녀로 이 생에서 재석의 친누나. 1811년생. 광덕제의 자녀들 중 가장 맏이로 봉작도 가장 먼저 받아 작중 초반에는 군주였다가, 부친이 제위를 계승하며 공주로 승작되었다. 광덕제의 양악 취향 때문에 6살부터 강제로 매일 8시간씩이나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1824년 조식의 후손인 창녕부위 조선창과 결혼하면서 막장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만, 바이올린 연습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려서 지금도 매일 4시간씩 한다고 한다. 또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남은 동생들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 또한 강해서 동생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대신해준다. 손아래지만 황태손이라는 이유로 재석에게도 존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 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황족으로써 갖는 책임감도 강한듯 하다.
  • 황손 이윤(李奫)
광덕제가 태자 시절 낳은 적장남으로 재석의 친형. 재석 빙의 전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 순친왕 이운(順親王 李鄖)
광덕제의 적삼남. 1820년생. 효비 김씨의 막내아들로 이 생에서 재석의 친동생. 형 이진(재석)을 잘 따른다. 나이를 먹자 공부를 시작했으나 학업에는 별 뜻이 없고 주로 장난감과 만화책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래도 후계자가 아닌 이상 그냥 종친으로 살 운명이라 큰 문제는 안 되고 있다고.[18] 하지만 재석은 이운이 만화책만 좋아하다가 황후 소생 이복동생들과 비교당할까봐 이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재석이 즉위한 후 친왕들에게 주어지던 시강원과 익위사를 폐지하고 종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자 땡땡이를 일삼으며 낚시에 푹 빠져 있는 등 공부를 계속 멀리하고 있다. 외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공부를 싫어해서 땡땡이를 치는 것이 아니라 재석의 엄청난 능력과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감을 갖고 공부를 포기한 것이고,[19] 그나마 낚시 솜씨로 부황 광덕제에게 생전에 유일하게 관심을 받은 후로 낚시에 몰두하며 좌절감을 잊으려 하는 것이라고 묘사되어 이것이 어떤 복선으로 보인다.
  • 순친왕비 남씨
전 학무대신 남명한의 손녀.
  • 태자비 → 황후 → 황태후 박씨
원평 41년(1823년) 겨울에 간택된 광덕제의 계비로 재석의 계모. 1809년생. 반남 박씨 가문으로 서경 요양부윤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4남 박종선[20]의 딸. 최종 경쟁자인 풍양 조씨, 경주 김씨 가문의 여식보다 가문의 힘이 약간 약하므로 현재의 권력구도를 크게 뒤흔들 일이 없다는 정치적인 고려를 국상 정약용이 원평제에게 진언하여 간택되었고, 3년동안 아들을 둘을 낳고 셋째도 임신해 입지를 굳힌다. 그다지 부유한 편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보니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해, 남편이 기분이 좋을 때마다 선물하는 휘황찬란한 보석들만 보면 기뻐서 아주 환장을 한다. 이에 남편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가만히 있으며 순종 내지 방관하는 등 철저히 비위를 맞추는 한편, 더한 부를 얻기 위해 자기 소생의 아들을 보위에 올릴 궁리 끝에 태손을 미주에 특사로 치우라보내라고 광덕제(당시 태자)를 충동질한다.
일단 여리고 순하게 자란 배경 탓인지 궁중암투를 벌일 담은 없어서 예왕처럼 암살자를 고용하는 선은 저지르진 않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선물받은 폐물을 팔아서 젊은이들을 포섭하고 소생 자식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두각을 드러내게 하려고 한다. 광덕제는 아내의 배겟머리 송사를 받아들여 재석을 미주로 보내게 했지만 그녀의 검은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고 후계자를 바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그녀가 매달리는 것을 즐기고 그녀 소생의 자식들을 귀여워할 뿐이다. 재석이 미주 방문 동안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죽기를 바랬으나 무사히 돌아오고, 재석의 평판을 깎으려고 힘들테니 쉬라고 권했으나 5회차 인생인 재석이 그 속을 다 꿰뚫어보고 쉬지 않고 원평제의 빈소를 지킨데다 광덕제가 서둘러 재석을 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부들부들거리지만 티도 못 내고 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원평제의 장례식에서 무리했다가 넷째아이를 조산한 후 건강을 해쳐 다시 임신하기 힘든 몸이 되고 만다. 재석이 유구 복속까지 성공하고 돌아오자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재석을 태자로 지지할테니 자기 소생 황자들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의사를 밝히고 화해한다. 소왕의 역모 구상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최근에는 중전은 수주대토만 하는 선에서 멈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현명하다는 평이 생겼다. 광덕제가 사망하며 황태후가 되며 재석과의 동맹도 유지하고 있다.
  • 숙친왕 이용(李瑢)
광덕제의 적사남으로 1825년 생 박씨 소생의 장남. 상당히 영특하긴 하지만 어머니의 헛된 꿈 때문에 조기교육으로 혹사당할 운명에 처해졌다. 하지만 본인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스스로 한 게 없기에 재석은 별다른 유감이 없고 오히려 귀여워하는 편이다. 어머니가 태자를 바꾸려는 야망을 포기하고 재석과 동맹하여 공부 압박에서 벗어나나 싶었으나, 재석 즉위 후에도 종학에서 하교하자마자 독선생들에게 과외를 계속 받느라 놀 틈이 없다고 한다. 공부에 시달리는 삶 때문에 차라리 비행선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동생 경친왕에게 말한다.
  • 경친왕 이전(李佺)
광덕제의 적오남으로 1826년 생 박씨 소생 차남. 형과 같이 어머니가 강요하는 과도한 공부에 시달리고 있지만 형과는 달리 공부에 나름 재미를 붙였다.
  • 황녀 이○
광덕제와 박씨 소생 장녀. 1827년생. 나이가 차면 공주로 봉작될 것이다.
  • 황녀 이○
광덕제와 박씨 소생 차녀, 1829년생. 박씨가 원평제 장례식에서 무리하다가 임신 8개월만에 조산으로 태어난다. 대한이 유구를 복속하면서 나이가 차면 유구국과 정략결혼을 할 것임이 결정된다. 당시 겨우 3살의 나이였으며, 당시 광덕제가 사돈을 맺기로 한 상육이 아직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대와 약혼하게 된 셈이다.
  • 재인 → 황빈 → 황비 홍씨
광덕제의 후궁. 1800년 생. 하와국 왕비가 된 현순공주 이아지의 생모. 미주 출신으로,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다. 정실 박씨 못지않게 온갖 패물을 자주 선물받았고, 광덕제가 임종 때 12명이나 되는 후궁들 중 유일하게 따로 유언을 남겨 챙겨준 후궁도 그녀다. 장장 20년 동안 총애를 잃지 않아 원하기만 했다면 귀비, 황귀비도 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본인이 칭호에는 별 욕심이 없어 광덕제 생전 내내 빈으로만 머물렀는데, 이 때문에 다른 후궁들의 봉작도 빈 이상이 아무도 없게 되는 의외의 불똥이 튀었다. 광덕제 사후에야 빈에서 비로 승작된다. 사위인 하진교를 통해 재석에게 로비를 하거나, 미주에서 동빈의 부친 김재정의 경거망동을 수습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보이고 있다.
  • 석왕 이헌
광덕제의 서자. 1824년생. 홍씨 소생 외아들로 아지의 동복동생.
  • 석왕비 성씨
창녕 성씨. 법무대신을 역임한 성수재의 딸.
  • ○○옹주 이○
광덕제의 서녀. 홍씨의 막내딸.
  • 선시 → 귀인 최씨
광덕제의 후궁. 본래 광덕제가 궁궐 밖에서 끼고 놀던 기생 출신으로, 그로 인해 첫 아들을 대궐이 아닌 곳에서 출산했다. 광덕제는 아이 엄마를 궁궐로 데려와 후궁으로 들어앉히며 문제를 해결한다.
  • 황자 이신
광덕제의 최 선시 소생 서자. 1827년생. 나이가 차면 왕으로 봉작될 것이다. 궐 밖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사생아였다. 당연히 친자 논란이 있었지만 '문제의 기생 출신 후궁은 광덕제가 따로 집을 마련해 준 뒤로 다른 남자와 만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어찌어찌 가라앉았다.[21] 재석은 이 아이를 볼 때마다 궐 밖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 때문에 1부에서 상희와의 사이에서 가졌던 아이(후일 조홀국 정씨왕조의 시조가 되는 그 아이, 뱃속에 있을 때 자신이 죽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본) 생각이 나서 씁쓸해한다.
  • 황녀 이○
광덕제의 최 선시 소생 서녀. 동복오빠와 연년생인 1828년생. 나이가 차면 옹주로 봉작될 것이다.
  • 영빈 이씨
광덕제의 후궁.
  • 미순옹주 이○○
광덕제의 서녀, 1823년생. 4부 시작 시점 가장 막내...였지만 이후로도 동생들이 1년에 2명씩(...) 숨풍숨풍 태어나 곧 그 타 이틀을 잃는다.
  • 선시 김씨
광덕제의 후궁.
  • 효왕 이정(李嵉)
광덕제의 서장남이자 재석의 이복형. 1814년생. 측실인 김 선시 소생으로 달리 동복형제는 없다. 어른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못 받았는지라 애정결핍으로 심한 소외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어[22] 적자인 이복 남동생들을 피해다니고 재석이 불러도 통 오지 않는다. 1827년 청송 심씨 규수와 혼인해 출궁했다.[23] 혹여 그가 3부의 예왕처럼 될까 두려운 재석이 형을 직접 찾아가 형으로 대접하며 공을 들인 끝에 마음을 열었고 3부의 현왕처럼 재석과 사이가 좋아졌다. 재석이 미주에서 귀국하자 눈물을 쏟으며 반겼다. 분가 후로도 옛날 월산대군처럼 사람도 안 만나고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지만, 그나마 아내와는 금슬이 좋다고 한다. 광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소왕의 암살 타깃 리스트에 올랐지만 얼마 못 가 소왕이 자멸해버리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집에 틀어박혀 몸을 사리고 지내는 모습이 안타까워진 재석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의미로 청나라 봉선 의식 축하 사절로 임명해 보낸다.
  • 숙빈 오씨
광덕제가 마지막으로 들인 후궁. 1818년생으로 재석보다 두 살이나 어린 소녀이다. 광덕제의 금강산행에 동행했다가 사고를 목격한다.
  • ○○옹주 이길현(李吉賢)
광덕제의 서녀. 1818년생.
  • 정왕 이철(靖王 李悊)
광덕제의 서자. 1822년생.
  • 황자 이○&이○
광덕제의 쌍둥이 서자들. 1833년생. 조선시대부터 헤아려 4백년 대한 역사상 임금의 자식이 쌍둥이로 태어난 최초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2살만에 아버지를 잃게 됐다.

  • 영왕 이선
원평제의 서자. 1788년생. 이복동생인 광덕제와 달리 멀쩡한 상식인이라고 하며 이하 이복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광덕제가 태자 시절에는 '저 행실로 보아 결국 폐태자될 것 같은데 그러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했던 듯하나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있다. 이건 전왕도 마찬가지.
  • 경흥공 이○
영왕의 장남.
  • 명주공 이결
영왕의 차남. 1818년생, 소왕의 난이 발각되면서 사촌동생 종성공의 부인으로 예정되었던 도쿠히메와 얼떨결에 대신 결혼하게 된다.
  • 명주공부인 덕희(德姬, 도쿠히메)
쇼군의 조카, 히로시마 번주의 딸. 1819년생. 어눌하지만 한국어를 어느정도 익혀왔으며 겉으로는 순진한 척 하지만 정치적인 머리는 잘 굴러가는 인물로 보인다. 키가 작고 귀여운 전형적인 일본 미소녀 스타일 외모라고 한다. 사촌동서들인 재석의 아내들 중 자신과 똑같이 바다를 건너온 김 선시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 공자 이○○
1837년 생 명주공의 적장남.

  • 전왕 이종
원평제의 서자로 광덕제의 이복동생. 1798년생. 이청의 친형. 광덕제가 그의 딸을 일본 간인노미야 친왕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강압적으로 통보하자 광덕제에게 불만을 품지만 결국 체념하고 분부대로 한다.
  • 황양현주→황양공주 이○(黃壤縣主→黃壤公主 李○)
이종의 차녀. 1819년생. 13세에 간인노미야의 나루히토의 아내감으로 간택되어 화번공주로 승작되고 혼인을 한다. 이후 나루히토 사이에서 딸을 낳는다.

  • 신혜옹주 이○○
현종 이영의 막내딸로 원평제의 막내고모. 1765년생. 부황이 40세에 얻은 늦둥이라 실제 나이는 원평제보다 두살 어린 탓에 원평제와 거의 남매처럼 자라 매우 친하다.[24] 남편이 3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됐다. 태손빈 권나현의 조모이며 맏손녀 나현을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예뻐하며 빡세게 조기교육을 시켰다. 본래는 나현을 심왕부로 시집보내려 했으나[25] 심왕부 측에서 이번에는 청나라 공주를 세자빈으로 들이기로 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며 광덕제의 두번째 비 간택 때는 촌수가 가깝고 간택 연령에 맞지 않는 등 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그 후 들어온 광덕제의 서장자 이정과의 혼담은 손녀가 아깝다며 직접 거절하였다. 그녀의 까탈스러운 손녀사위 고르기에 진절머리가 난 아들 권세직[26]이 딸을 혹여 노처녀로 만들까 걱정하며 이제 다 그만두고 적당한 명문가에 시집보내자는 소릴 했다가 모친에게 호통만 듣고[27] 기껏 들어온 혼담도 다시 옹주가 걷어차 버릴 정도로 손녀사윗감 고르기에 까탈스럽게 굴었다. 그러다가 태손빈을 간택한다는 소식과 국혼을 당긴 그 뒷사정을 듣고서는 하늘이 내린 마지막 기회라며 손녀가 간택에 뽑히도록 전력을 다해 밀어붙였다. 간택에 뽑힌 나현이 태손만 미주로 가면 자신도 생과부로 죽은 인선황후 꼴이 날까봐 두려워 편지를 써 조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절대 자기 손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한걸음에 달려와선 나현의 이야기를 듣고 황후와 원평제에게 청을 올려 손녀와 잉첩으로 뽑힌 후궁 셋[28]을 태손인 재석과 함께 미주로 보냈다.

  • 수복장공주 → 수복대장공주 이○○
원평제의 동복동생. 1771년생으로 원평제보다 8살 어리다.

2.1.1. 재석의 가족[편집]


  • 태손빈 → 태자비 → 황후 권나현(權娜賢)
1814년생으로 이번 생의 재석보다 2살 연상. 안동 권씨로 권훤의 6대손이자 현종의 막내딸 신혜옹주의 손녀로 현종의 현손인 재석에게는 재종고모(7촌)가 된다. 모 아역 출신 배우를 닮은[29] 상당한 미녀이며 키도 상당히 크다.[30] 신혜옹주가 원래는 심왕비로 보내려고 조기교육을 시켰는데 결국 심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대신 태손빈이 되어, 미주행 직전에 만 14세의 나이로 재석과 혼인한다. 아직 어리지만 6대조 권훤과 이마리 부부룰 닮아 총명하고 강단있는 성격으로 본인 스스로 태황에게 청하여 측실 3명까지 모두 이끌고 미주까지 동행한다. 재석은 태손빈은 당연히 상희일 것이라며 근거도 없이[31] 확신하다가 결혼식 날 밤 연산군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걸 보고 그녀가 상희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크게 실망한 뒤 천녀를 원망했다.[32] 하지만 권씨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게 사실인지라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미주로 가는 배 안에서부터 권씨를 아내로 대하기 시작했고, 제법 잘 지내게 된다. 아직 12살인 연하남 남편이 사실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130년 묵은 노괴란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귀엽게 여기면서 남동생처럼 대하며,[33] 어려서 친모를 잃은 재석에게 모성애 비슷한 것을 느끼는 듯한 묘사도 있다. 신혼 시절에는 재석이 몸도 작고 아직 2차 성징을 하지 않아 성관계를 미뤄왔으나 재석이 13살이 되자 성장하여 키 차이도 5cm 정도로 따라잡았고, 신불랑 방문 중 누벨오를레앙에서 처음으로 부부관계를 시작한다. 재석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자동으로 함께 태자비가 되고, 조모의 조기교육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금세 내명부를 장악한다. 1833년 초에 첫 출산을 하는데, 결혼 7년 만에야 겨우 얻은 아이가 딸이라서 실망하지만 재석이 나름 위로해준다. 광덕제가 사망하고 재석이 즉위하면서 중전이 되었다.

측실들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남편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라기보단 막내남동생을 둔 누나들처럼 친하게 지냈으며, 여느 십대 소녀들처럼 수다를 떨고 놀기도 했다. 다만 재석이 밤일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미묘하게 경쟁과 긴장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다들 20대에 접어들며 4명 중 3명이 자기 소생 아이(모두 딸이었지만)를 갖고 난 후에는 자매 같던 분위기는 옛이야기가 되었고 확실하게 라이벌이 되었다. 1837년 드디어 첫아들을 출산하면서 라이벌들을 확실히 제압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석의 백두산 봉선 의식에 동참하려고 여성 제관들이 참여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통과되긴 했으나 중전은 도성을 지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현귀비 최씨에게 대표 여제관 역할을 빼앗기게 되었다. 하지만 상궁들의 정보망을 통해 재석과 최씨의 동침과 성관계 횟수까지 전부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으며, 최씨나 김씨가 아들을 낳으면 그들의 친정인 북한이나 미주가 뒷배가 되어 원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해 아들을 낳을 경우 먼저 손을 쓸 생각도 하고 있는 등 이전 재석의 삶들과 달리 내명부에 피바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 황녀 이○○
재석과 권씨의 장녀. 1833년생. 나이가 차면 공주로 봉작될 것이다.
  • 원자 이창(李閶)
재석과 권씨의 장남. 1837년생. 출생과 동시에 원자가 되었으며, 7세가 되면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 양원 → 재인 → 현빈 → 현귀비 최진영
태손빈 간택에서 삼간택까지 올랐다 탈락한 후보로 그대로 재석의 측실이 된다. 1814년생으로 재석보다 2살 연상이며 북인 계열 집안 출신이다.[34] 권씨처럼 미인이며 키도 크다고 한다. 이건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다. 본인 포함해 모두가 함께 대화하는 걸 보면 걸그룹 같다고 할 정도. 이는 원평제 부부가 여색을 밝히는 광덕제를 의식해 태손도 그리 될까 염려하여, 원래 군주가 여색에 심하게 빠질까봐 너무 미녀로 뽑지 않던 관례와 달리[35] 최대한 외모를 보고 손자며느릿감을 뽑았기 때문. 세 후궁 중 가장 연장자라 맏언니 노릇을 하고 있고 비록 후궁이지만 가장 먼저 태손의 아이를 낳아 가문의 위상이라도 높이고 싶어할 정도로 나름 야심이 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재석의 아내들 중 처음으로 임신하여 품계도 재인으로 승작하고 광덕제에게도 선물을 많이 받아 콧대가 높아졌다. 재석이 즉위한지 3년째에 백두산 봉선 의식을 치룰 것이 결정되면서 북방 출신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대표 여제관 역할을 맡아 재석을 수행하게 되고 그 덕분에 품계도 귀비로 올랐다. 북방 순행 당시 백성들이 그녀를 중전으로 오해하고 중전마마 만세를 외치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중전 자리에 대한 야심도 느꼈으나 중전 권씨의 무서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색하지는 않는다. 황자 이목을 낳자 북인들은 아예 황귀비로 승작하자는 여론을 일으켜 중전의 경계심을 산다.
  • 황녀 이예지
최씨의 장녀. 1832년 12월 생. 이번 생에서 재석의 첫 아이다. 나이가 차면 옹주로 봉작될 것이다.
  • 황녀 이윤지
1835년생.
  • 황자 이목(李坶)
1836년생, 흥녕제의 서장남.

  • 양원 → 선시 → 수빈 송세련
태손빈 간택에서 삼간택까지 올랐다 탈락한 후보로 그대로 재석의 측실이 된다. 1815년생으로 재석보다 1살 연상이며 동인 계열 집안 출신이다. 세 후궁 중 가장 어리고 순진한 성격으로 3부의 정비 김씨처럼 딱히 야심은 없고 소설에서나 꿈꾸던 일이 이뤄져 기쁨에 빠져 있다. 유일하게 자식이 없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최씨가 또 임신하자 울먹이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딸이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설정 변경으로 사라졌다.

  • 양원 → 선시 → 동빈(桐嬪) 김주희
태손빈 간택에서 삼간택까지 올랐다 탈락한 후보로 그대로 재석의 측실이 된다. 1815년생으로 재석보다 1살 연상이며 미주 출신으로 외가가 미주 토인 올로내족 대추장으로 3부에서 재석을 도왔던 김대송의 후손이다. 미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자신을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고자 집에만 두고 엄하게 키운 부친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나름 권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친의 경거망동 때문에 중전 권씨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는 등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황녀 이민지
김씨의 장녀.

2.2. 소왕파[편집]


  • 소왕 이청
원평제의 서자로 광덕제의 이복동생. 1802년생. 이종의 친동생. 광덕제와 같은 망나니가 적자라는 이유로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현실에 분노하여 불만분자들을 모아 역모를 꾸미고 있다. 익명의 상소를 보내 광덕제와 재석의 사이에 불화를 유발하려 하는(이건 실패했다) 한편 합병당한 유구국 충신 또는 북구주 탈환을 외치는 일본 존황파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광덕제와 그 태자 재석, 덤으로 효왕 이정[36]까지 동시다발 테러로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할 음모를 세운다. 막대한 지참금과 역모 후 일본의 지원을 노리고 도쿠가와 막부에서 도쿠히메가 시집오게 되자 자신의 며느리로 들이겠다고 먼저 나선다.
그러나 공범들의 실수로 폭탄 제조 중 집이 불타버렸고, 그냥 실화라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인지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공식적으로 수사가 시작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재석에게 보호를 명분으로 감금당해 손도 못 쓰는 상태로 재석은 암살 음모의 진상을 다 파헤쳐버렸다. 이후에도 심문 중 자기 집에서 진행된 폭탄 제조에 대해 무조건 모른다고 발뺌하면 됐을 일을 약재와 불꽃놀이용으로 쓰려고 화약 재료를 샀다고 둘러대는 등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 역모는 시작도 하기 전에 자멸해버렸지만 국제정략결혼이 예정된 군왕이 태황과 태자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면 심각한 국제망신이 될 것이기에 재석의 안배로 '모든 음모는 남응중 등 문객들이 꾸몄으며 소왕은 멍청해서(...) 이를 전혀 몰랐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벽지로 떠난다'고 공표되고 온 일가가 현토도(사할린 섬)으로 평생 유배형에 처해져 그나마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유배가 아니라 자진 이주하는 것이므로 부동산을 제외한 재산은 보전할 수 있었고, 그동안 위세를 부리느라 막대한 노비세를 물면서 사노비를 40여명이나 유지하고 있었는데 역모와 연루되거나 화재로 죽은 노비들을 제외한 생존자 20여명을 다 데리고 갔으며 현지에서 사람들에게 베풀기도 하고 서당을 여는 등 처신을 잘해 현토도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고 한다.
3부의 예왕 포지션에 해당하는 국내 정적 빌런 포지션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지나치게 허술한 인물로 첫 등장부터 전혀 긴장감을 못 주는 빌런이라는 평을 들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처럼 어설픈 암살범이 초대형 사고를 친 사례는 많으며 광덕제도 방심하고 허술한 면모를 보여줬기에 암살 자체는 성공할 것 같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공범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본인의 멍청한 대처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몰락해버렸다.[37]
  • 소왕비 최씨
소왕의 정실부인. 첩 둘은 자식이 없어 소왕의 자식들을 혼자서 모두 낳았다. 남편의 음모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아들 중 한명과는 평생 생이별을 하고 온 식구가 현토도로 귀양가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 종성공 이훈거동빅 존존 화이트
소왕의 아들. 1819년생. 재석과 친분은 거의 없었으며 키가 작다. 재석은 1부의 종성순이 떠오르는 불길한 봉호라고 생각한다. 야심가인 부친과 달리 소시민적인 성격으로, 어린 나이에 십삼경을 마스터한 사촌형 태자의 천재성에 질려 자신은 절대 태황 따위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3살 때 소왕의 주도로 도쿠히메와 약혼했지만, 그 직후 소왕의 반란 기도가 들통나며 역적의 아들이 된다. 이후 정작 역모를 저지른 소왕은 비교적 관대한 처벌인 현토도로 유배갔으나, 도쿠히메와 약혼 상태였던 종성공은 파혼 사유를 만들기 위해 연기 흡입으로 사망했다며 사망 처리되고 역모에 단순 가담했던 소왕가의 머슴 '거동'이라는 위장신분을 받아 혼자 머나먼 해우도로 유배간다.
소왕은 자신의 잘못을 가장 크게 뒤집어쓴 이훈에게 미안해서 노잣돈을 많이 주며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그를 일개 머슴 출신 역적으로 아는 관원들에게 죄다 빼앗겼고, 한양에서의 사치스러운 삶도 부유한 일본 미소녀와의 결혼도 잃어버린 이훈은 우울증에 걸려 수 차례 자살 시도를 하거나 섬 내에서 가출을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진짜 신분을 모르던 해우도 판관 장덕순은 정신이 불안정한 놈이니 건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고 그 또한 해우도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이후 해우도에 다윈이 탑승한 비글 호가 정박하자 대한 선박들과 달리 감시가 느슨할 것이라 판단하고 밀항해서 탈출한다. 장덕순은 거동이 또 가출했다고 생각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이후 절벽에서 거동의 신발이 발견되자 거동이 이번에는 진짜로 자살했다고 생각하여 종성공의 탈출 사실은 한참 후에나 재석에게 알려진다. 재석은 역모에 가담조차 하지 않았던 13살 소년이 죄를 뒤집어쓴 것에 미안함도 있었고 위협이 되지도 않으리라 생각해서 추적할 필요는 없으니 불문에 부치도록 지시한다.[38]
한편 비글 호에 탑승한 이훈은 '빅 존'이라는 이름을 받고 선원이 된다. 우연히도 하와국 역적 쿠아이와가 같은 비글 호에 합류하며 '리틀 존'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후 모든 것을 잃은 역적이라는 동병상련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재밌는 점은 덩치가 훨씬 큰 쿠아이와가 리틀 존, 덩치가 작은 이훈이 빅 존이라는 것. 잉글국에 도착한 후 잉글국에서는 딱히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추적이 붙을 수도 있으니 함께 미주합중국으로 가기로 한다. 잉글국에 도착한 후 피츠로이 선장이 '존 화이트'라는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어줬는데,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주합중국에 간 이후에는 다른 가명을 쓸 계획이다.
  • 명천공
소왕의 아들. 종성공 이훈보다 2살 어리다.
  • 이성
소왕의 아들. 종성공 이훈보다 6살 어리다.

  • 남응중[39]
소왕의 측근. 본래 광덕제의 태자 시절 술친구 중 하나였으나 광덕제가 태황 즉위 후 손절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소왕에게 붙었다. 광덕제와 태자를 한번에 날려버리겠다는 폭탄 테러 계획을 짠다. 이 시대까지의 암살은 단검이나 활 등 냉병기를 쓰거나 독살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폭탄을 암살용으로 쓴다는 발상은 없었고 관련 경호 대책도 없는데, 이 상황에서 인류 최초의 폭탄 테러를 이용한 암살을 생각해냈으니 나름 창의력은 뛰어난 인물이다.[40] 하지만 발상만 좋았을 뿐 폭탄 관련 전문 지식은 없었기에 책을 보면서 독학으로 폭탄 제작 중 소왕의 집을 반쯤 개박살내버리는 사고를 친다.[41] 함께 폭탄을 제조하던 공범들은 즉사했고 본인은 중상을 입고 살아서 탈출했으나 멍청하게도 잠적하는 대신 자기 집에서 치료하다가 그대로 체포당했고 고문 끝에 모든 것을 실토했으며, 황실의 위신 및 일본측과의 외교 문제를 우려한 광덕제와 재석에 의해 폭탄 테러 미수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건 이름에 자기 이름이 붙게 된다. 부상당한 상태로 고문을 받았으니 얼마 못 가 장살되어, 역적 일당의 사형이 집행[42]될 무렵엔 이미 죽은 뒤였다.


2.3. 내관[편집]


  • 권진동
원평제의 전담 내관으로 내시부 수장인 상선이다. 오랜 세월 원평제를 보필하며 함께 늙어왔으며, 원평제가 건강이 악화되고 가뭄에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심신을 돌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의견을 숨겨서 원평제가 총애한다.

  • 송현승
이진의 전담 내관으로 재석이 빙의한 직후 마차에 갇힌 재석을 들어올린 뒤 태자비 김씨의 시신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준 인물. 이 사람의 솥뚜껑만한 손이 자기 얼굴 전체를 덮는 것을 보고 재석은 자신이 어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패닉한 재석이 송 내관의 손을 깨물어서 손에 큰 흉터가 남았다. 1부 시절의 이름 없는 내관 아저씨와 김처선 이후로 재석이 가장 가깝게 여기는 내관.

  • 홍진성
효왕 이정의 전담 내관. 이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으며 혹시 이정이 어른들 앞에서 말실수할까봐 자신 앞에서라도 감정을 마음껏 풀 수 있도록 상전의 한을 다 받아주고 있다. 이정이 분가해서 출궁한 후에는 궁중 창고 관리직을 잠시 맡다가 순친왕의 전담 내관이 되어 효왕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순친왕의 속앓이에 대해 알게 된다.

2.4. 조정[편집]


효비 김씨의 아버지. 이진(재석)의 외조부. 원평제가 원역사의 정조처럼 사돈을 맺었으나 효비가 이순의 음주운전 마차 사고로 죽게되었고, 원평제는 이를 미안해하여 아들인 김유근을 재석(이진)의 스승으로 가르치게 한다. 과거 미주합중국과의 육로 교역 문제를 놓고 외교 교섭을 담당했었다. 원 역사처럼 젊었을 때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를 썼다고 한다.[43] 삼국지연의도 한글로 번역해서 4부 시점에서 대한의 표준 삼국지연의 판본이 되었다고. 장남이 태손을 수행해서 미주로 가있는 동안 부인상을 당했다. 새 태자비 박씨의 음모를 알고 자식들과 함께 이를 막을 방법을 궁리하는데, 세도정치가 없는 세계라 국가가 잘 되어야 가문도 번창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며 대의를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귀국한 재석을 조정의 대표격으로 영접하는데, 당연히 빈전을 지켜야 할 그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자 재석은 벌써 태자비 박씨 일가에 의해 밀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부황 나름의 배려였으며 재석의 우려를 짐작하고 즉각 안심시켜주는 노회한 모습을 보인다. 1831년 정약용과 함께 은퇴하더니 문병 간 재석에게 자신이 집필한 소설들의 원고를 물려주고 원역사와 같은 1832년 음력 4월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뜬다.

김조순의 장남이자 이진(재석)의 외숙부. 태손 강서원 사로 재석의 스승이기도 하다. 조카이자 제자인 태손이 공부보다 각종 세계사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처음에는 당황하고 공부 진도를 못 빼니 마뜩치 않아 하지만 힘든 일을 겪은 조카라 그런지 할당량이 끝나면 설명해주곤 한다. 재석은 왕 노릇을 3번이나 하면서 배우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지만 티를 내면 피곤해질까봐 모르는척 연기를 했는데 김유근은 재석의 진짜 정체는 몰라도 어른의 통찰로 공부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그런 어린아이답지 않게 과시욕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역사 이야기를 미끼로 진도를 빠르게 빼거나 남다른 식견을 이끌어내고 이를 근거로 진도를 심화시키는 데 이용한다 악순환.[44] 재석은 이를 갈지만 1, 2부에서처럼 현직 왕이라 원하는 자료에 다 접근할 수도 없고, 3부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알려줄 정호찬, 이형준 같은 측근도 없기 때문에 환생 공백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호응해주고 있다. 물론 외숙부로서 (그에겐 총명해도 어린아이에 불과한) 태손에게 예민한 정치적 문제들도 인지할 수 있도록 얘기해주고, 광덕제(당시 태자)에게 끌려다닐 때는 안쓰러워서 수업에 사정을 봐주기도 하는 등 가족으로서 역할도 충실히 한다. 신불랑과 회담 때 스승이자 협상대표의 일원으로 재석을 수행한다. 미주를 떠날 때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가문에서 예쁨받았던 여동생이었던 효비의 아들이자 모친이 그녀가 세상에 남긴 후손인 태손을 그녀처럼 아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귀국 권유를 거절하고 재석을 끝까지 수행하기로 한다. 귀국 후 재석이 완벽하게 국상을 수행하자 스승인 그의 명성과 가문의 위상도 더 높아지는 수혜를 입었고 한성판윤 직을 받았다가, 1831년에는 내무대신으로 승진한다. 재석의 즉위 후에는 좌참정대신을 맡고 있었으나, 후송 영강제의 조문 사절로 남경에 갔다가 원 역사처럼 중풍으로 쓰러진다.
경화사족의 일원이지만 능력있는 관료이며 서연관답게 학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교수 능력을 갖췄으며, 세도정치가 없는지라 김정희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다만 실존 인물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는지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미주에서 개신교가 하층민들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이는 관이 역할을 다 못 하고 있는 것임에도 "어차피 큰 일을 할 수도 없는데 뭐든 배우면 좋다"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1823년 시점의 국무총리대신. 원 역사보다 천주교가 빨리 공인되었기 때문에 증조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난데다가, 신유박해황사영 백서 사건도 없기 때문에 18년 유배생활 없이 더 오랜기간 조정의 관료로 활약해서 국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되었다. 원평제가 내밀한 속내까지 털어놓을 정도의 최측근이며, 반남 박씨 규수가 새 태자비로 간택되는데에도 관여했다. 증기기관으로 가동되는 이동식 기중기인 기상(機象)을 발명하고 수원 화성은 물론이고 부산과 의주에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우는 등 전국적으로 토목 인프라 재개발 업무도 잘 수행했다. 1830년 시점까지도 국상인데, 광덕제도 인정하는 천재로 중종 이후 셋 밖에 없었던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을 제수받은 명신. 하지만 원평제와 같은 세대라 그런지 재석과 광덕제가 추진하는 마리아나 제도와 서부 캐나다 구입에 대해 반대하는 등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고루한 면도 보인다. 1831년 노환으로 은퇴한다. 은퇴 후 얼마 안 가 사망한 김조순과 달리 건강이 좋아 저술 활동 등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광덕제 사후 조문한다.

직접 등장은 없다. 광덕제의 서장자 효왕 이정이 어렸을 때 그의 집에서 피접을 했다는 것을 볼때 동생처럼 고관직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언급되기로는 50세에 퇴직하고 그 후로는 취미인 해양생물 연구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하니 이 세계선에서도 자산어보를 집필했을 듯 하다. 1830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1823년 시점의 학무협판으로 광덕제도 인정하는 천재. 이 세계에서는 세도정치당파싸움도 없기에 유배생활 없이 순탄하게 관료로 활동하며 안동 김씨인 김유근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작중에서는 한문뿐 아니라 라틴어프랑스어에도 명필에 서양화에도 조예가 있게 되었으며 재석의 미주 방문 때 서예, 미술 강사로 임명받아 동행하며 재석을 고통받게 하지만 배멀미로 고생한다. 광덕제가 즉위한 후 학무대신이 되며, 광덕제에게 여성 의무교육을 계속 주청했지만 거부당했으나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후 김정희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 윤시현
광덕제의 큰외숙부로 파평 윤씨 가문의 수장. 공무대신, 육군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한 실력자로 태자 때부터 광덕제를 확고하게 지지했다.

  • 심세원
1828년 시점의 외무대신. 청송 심씨. 효왕의 장인으로 왕실 사돈이다. 재석이 자신의 사위에게 호감을 보이고 잘 해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재석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미주행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 김조순, 정약용 은퇴 후 우참정대신으로 승진한다.

  • 박지순
중추원 첨사로 신불랑과의 협상에서 협상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한다.

  • 박규원
태자비 박씨의 오빠로 첫 등장 때는 집현전 정7품 박사로 재직하다가 점차 승진하여 매제인 광덕제가 즉위한 후 정4품 한림원 학사가 되었고, 재석의 태자 책봉식도 주관하게 된다. 태자비의 소생을 보위에 올리려는 계획에 동조하고 있지만, 예왕처럼 극단적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게 단속하면서 태자가 젊은 만큼 이후 태손을 전폭 지지하는 노신들이 아닌 젊은이들을 포섭해서 미래를 대비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태손보다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며 조카들을 교육시켜달라는 부탁도 받는데, 내심 직접 본 태손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학식과 인품에 감탄하고 안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빡세게 교육을 시키기로 한다. 스승으로도 꽤나 뛰어났는지 조카들을 상당한 수준으로 키웠지만, 재석이 귀국 후 태자로 책봉되고 완벽하게 의례를 수행하는 모습에 조야의 평가가 높아지자 조카들의 평온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의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다고 내심 생각한다. 재석의 외교 방문을 수행한 후로는 확실한 재석파가 되어 누이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대놓고 설득한다. 광덕제게 금강산 유람을 갈 때 수행하며 국정을 돌보라고 간언하다가 짐을 실은 노새를 관리하며 따리 오라는 명으로 행렬 뒤로 밀려나 먼 발치에서 광덕제의 낙마를 목격하고, 현장을 수습한 후 귀경 후 상세한 내용을 재석에게 보고했다.[45]

좌참정대신이다가 1831년 국상 정약용이 노환으로 물러나자 후임으로 국상이 된다.

  • 한승룡
흥녕 2년 우참정대신.

  • 복주후(福州候) 권세직
홤후 권나현의 친정아버지. 재무대신. 어머니나 딸과는 달리 소심한 성격인데 재무대신을 맡으니 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전전긍긍한다. 소심해서 발언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말한다.
  • 국대부인 김씨(國大夫人 金氏)
황후의 모친.

  • 박헌수
정2품 지의금부사. 의금부의 실질적인 수장. 1부에서 홍길동을 체포한 박헌과 2부 때 금위사장 박희성의 후손.

  • 이언신
금위사장 겸 의금부 동지사. 이인좌의 후손.

  • 김진범
1834년 시점의 의무대신. 학질이 매독의 치료법이라는 현상을 보고 받자 광덕제가 내세운 매독 환자의 거세 금지법에 동조한다.

2.5. 군인[편집]


  • 이신환
태황 어승선인 동진 함의 선장인 수군 정령. 태손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지 매일 세번씩 항로를 보고하러 찾아와서 재석을 귀찮게 한다. 그와 별개로 괜히 어승선의 선장이 된 것이 아닌지 망망대해에서 와가촌으로 바로 배를 모는 뛰어난 항해술을 갖고 있다.

  • 이희권
이순신의 8대손이자 하와첨사. 귀국하는 길에 재석을 영접하며, 원평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 날뛰는 재석을 진정시킨다.

  • 공승일(公勝日)
요동에 거주하는 왜인여진 군관으로 2부에서 권율 휘하로 참전해 단밀현 전투의 대승에 크게 공헌한 공개선의 직계자손이다. 재석이 공개선의 공로를 되새기며 치하하자 크게 감격한다.

몰래 권씨랑 데이트를 나온 재석을 경호한다. 원역사에서는 본명은 신관호이고 후에 신헌으로 개명했지면 여기서는 처음부터 신헌으로 등장한다.

  • 홍명규
좌포도대장. 충무대왕 이순신의 사돈 홍가신의 후손.

  • 민홍석
종2품 군기총관 겸 의금부 동지사. 3부 재석의 처남이었던 민지상의 후손.

  • 김귀훈
군기시 제조로 2부에 나온 발명가 장군 김지의 후손. 1835년 세계 최초로 리볼버 권총을 발명한다.

  • 김시형
누손주에 복무 중인 군의관. 매독 환자 여섯 명이 학질에 걸리고 난 뒤 매독 증세가 낫는 현상을 조정에 보고한다.

  • 이한제
해군제조, 이순신의 6대손.

강무관 소속 생도로 원역사랑 달리 출세 속도가 좀 더 빠르다.
  • 이희영
이순신의 8대손이자 하와첨사 이희권의 형. 누손주 병마사로 조상 이순신을 닮아 깐깐한 원칙주의자.

2.6. 기타 관원[편집]


  • 안기성
3부에서 디에고와 함께 키니네 원정대에 다녀왔던 안돈이의 후손으로 의관으로 출세의 정점인 정 3품 광혜원 정에 재직 중이다.

  • 동계수
1부에 나왔던 일본인 포로 동고로의 자손. 외수사 관원으로 아모국에 20년째 주재관으로 재직 중이다.

박지원의 손자이자 태자비 박씨의 사촌. 아직 21세로 과거 급제도 못했지만 당시 태자였던 광덕제의 추천으로 재석의 미주행에 종사관으로 동행해서 협상을 보좌한다.[46] 총명한 젊은이라 김유근, 김정희도 그를 살갑게 대하고 재석 역시 그를 나쁘게 볼 이유가 없어서 대화에도 자주 끼워준다. 미주로 가던 중 호주가 수도를 어디에 두는게 좋겠냐는 토의를 하다가 그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본국과 연계를 중시한 다른 이들과 달리 큰 항구를 둔 동남부를 선택하겠다며 원 역사와 같은 답을 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신불랑국과 미국이 모두 대한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해서 조심스러워해야 함에도 협상이 타결되자 대한의 강역이 넓어진 것에 대놓고 기뻐하는 젊은이답게 미숙한 모습도 보인다.

  • 김원근
김조순의 차남이자 김유근의 동생. 나이는 한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과거에 10년 늦게 합격해서 품계가 아직 정8품에 불과하다. 형이 미주에 가있는 동안 모친상을 당해서 대신 상주를 선다. 1833년 부친상을 당하여 또 시묘살이를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더니 말라리아에 걸려, 결국 그 해를 못 넘기며 줄초상이 나고 만다.

김조순의 삼남이자 김유근의 동생. 유흥을 즐기기 때문에 장문 김씨 삼형제 중 그나마 광덕제와 사이가 좋은 편이며, 한량으로 살면서 여행을 즐겨서 대한 본국 구석구석과 북한, 물론이고 구주, 유구까지 가봤다고 한다. 재석의 미주행에 형 김유근과 함께 가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막는다. 그 후 원 역사보다 8년이나 빠른 34살에 대과에 합격해서 재석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가게 된다. 국가의 공식 사절이면서도 가는 곳마다 제공받는 성상납을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아먹고 심지어 먼저 나서서 요구하는 추태를 부리고, 유비의 고향인 탁현 누상촌에 재석 일행이 관광 갔을 때 주민들에게 속아 쌍고검 모조품을 유비의 진품 쌍고검이라고 거액을 주고 사오는 등 머리는 좋지만 한심스런 면모를 보인다.[47]

  • 임승훈
충민공 임경업의 후손으로 종2품 의주 부윤 겸 평안북도 관찰사. 정약용이 새로 건설한 의주부를 유능하게 관리하고 있다.

  • 종의질(宗義質)
종의지의 후손. 하카타 대관이다.

  • 김두원
서학당 총장. 화학 전공이지만, 의학이나 생물학같은 타 분야에 관한 학식이 있어 자연발생설이나 서양 의사들의 비위생적인 행동에 대해 유교적인 논리로 비판한다.

하와이 주하사. 김유근 형제의 육촌형제.

원역사에서처럼 이 세계에서도 정약전의 수제자. 광덕제에게 종5품 해우도 판관으로 특채되었다. 죄인 종성공이 비글 호에 밀항한 것을 뒤늦게 안 죄로[48] 3년 더 해우도에 있는 벌을 받게 된다.[49]

  • 이재현
삼성부사.

  • 김복겸
순원부사.

  • 김성준
항가호(한카호) 감호관

  • 유재업
벵골 주재 외수사 상관장. 후송의 일부 마약상으로 변질된 덕성도인들과 작당해서 아편 중개업으로 막대한 뒷돈을 챙기고 있다.

  • 김원태
누손주 도독.

2.7. 종교인[편집]


천주교 제26대 조선교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원역사에서는 초대 교구장이었으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만주의 한 교우촌에서 그만 병으로 선종하여 입국조차 좌절되고 말았는데, 작중에서는 건강하게 현직 주교로 있다. 대한의 문화에 대한 이해심도 깊어 재석도 호감을 갖고 있다.

마포성당 주임신부. 정약용의 조카. 1828년 마포성당을 구경하러 온 재석을 안내한다. 대한령 미주에서 가톨릭보다 개신교가 더 퍼진 비화를 얘기해주면서 연신 죄스러워 한다. 원 역사에서는 천주교가 박해받아 몰래 신앙을 유지하며 숨어 살았고, 결국 처형당해 순교하면서 사제가 되려던 목표도 이루지 못했지만[50] 여기서는 오래전 천주교가 공인되었으므로 별 탈 없이 성직자가 되어 잘 사는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되었다. 다만 원 역사의 업적은 박해로 인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며 쌓은 것이라, 천주교가 탄압받지 않고 이미 한참 전에 조선 출신 추기경[51]까지 나온 작중 세계에서는 그만큼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52]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

  • 해원
불교의 최고 승려인 도사. 1772년생, 덕망 높은 고승이다.

  • 해명
승병군 총사령관인 도총섭. 해원과는 동갑에 동문이며, 승려이지만 무과와 강무관을 거친 정규 무관 출신이기도 하다.

2.8. 민간[편집]


  • 윤원성
윤시현의 3남으로 광덕제의 외사촌동생. 공부와 담을 쌓고 주색잡기에 골몰하여 과거는커녕 문음에도 불합격하고 가문 덕에 겨우 명목상의 정7품 자리를 받았다. 태자 시절 광덕제의 가장 친한 술친구로 그의 비위를 맞췄으나, 즉위 후 손절당한다. 6품으로 품계가 올랐지만 그걸로 끝. 그나마 이게 태황 사촌이라는 이유로 좀 나은 대접을 받은 거였다. 나머지 술친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못 받아먹고 완전히 버려졌으므로.


2.9. 유림[편집]


원 역사에선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인물로 본작에선 경기도 양평에서 화서학파를 이끌고 있는 명성 높은 선비. 황후 박씨가 포섭 대상으로 삼는다.

원 역사에선 위정척사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본작에선 지방관을 몇번 지낸 후 사직한 명성 높은 선비. 황후 박씨가 포섭 대상으로 삼는다.


2.10. 상인[편집]


이 세계선에서는 외수사에 들어가려 했으나 외수사는 송상이 독점하고 있어 받아주지 않자 해외로 떠나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와서, 3부에서 중종이 도입한 압력솥과 석탄가스를 이용해서 홍삼 제조법인 구증구포법을 혁신해서 만상과 송상의 관계를 역전시킨 대상인이 되었다. 나라에 기부금도 많이 내어 영종이 정3품 검교재무참의 명예직도 내렸다. 재석을 수행해서 청나라에 가서 인삼 교역 협상을 맡았으나, 재석이 북경에 온 것을 얕본 청나라 상인들이 원 역사처럼 협상조건을 후려치려는 수작을 부리자 홍삼을 불태우는 시위로 역전시켰다.

  • 김민생
의사의 아들로 미주행 배의 요리사 일을 하다가 염장반찬에 질린 선장의 구박에 대처하기 위해 궁리하다 병조림을 발명한다.

  • 박춘제
제물포에 사는 철공으로 김민생이 만든 병조림의 단점이 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조림을 발명하고 석관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김민생과 동업하여 통조림 회사인 춘생식행을 세워 사업에 성공한다.

  • 임병진
양무공 임꺽정의 10대손으로 임꺽정이 세운 전통에 따라 등선군 군졸로 군 입대하여 정 5품 정위까지 오른 후 퇴역하고 가업인 마장동 양무관을 이어받는다. 조상인 임꺽정을 꼭 닮아 하와국왕 하진교보다도 더 체구가 크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재석의 백두산 봉선 의식 때 제물로 쓴 짐승들을 도축할 백정들의 총책임자로 동행했다가 여흥으로 열린 씨름대회에서 4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진교를 꺾고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

  • 왕중선
누손주 최대 상단인 송현상단 도방.

  • 민재홍
여흥 민씨 집안 서자로 학문보다는 상업에 재능이 있어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도 누손주에 있는 민씨 가문 농장 최고관리자로 일하며 많은 성과를 올린다.

2.11. 번국[편집]



2.11.1. 심왕부[편집]


  • 이제원
이인호의 차남, 5대 심왕으로 후금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키는 보통이고 뚱뚱한 체격이나 의외로 승마는 잘 한다고 한다.
  • 이경신
6대 심왕. 세자빈은 청나라 공주이자 후금 대칸의 조카이다.


2.11.2. 대명동[편집]


  • 주계신
제10대 대명공. 형인 9대 대명공이 아들 없이 죽어 대명공이 되었다. 주씨 가문을 후대하는 대한 황실에 감사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본인은 자식뻘인 재석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등 미묘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 주성진
주계신의 장자인 대공자. 만 11세의 소년이지만 영민한 성격으로, 한때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현재는 자신들의 상전인 대한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 재석의 북경 방문길에 조상의 무덤인 명십삼릉을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동행하는데 처음에는 분위기 파악을 살짝 못하다가 재석의 압박을 받고 나중에는 눈치를 탑재한다.

  • 오문욱
한양에서 대명관을 관리하는 대명관 봉사. 본래 그의 조부는 서나라의 대한 주재관이였으나 서나라 몰락 후 본국과 연락도 단절되고 청나라나 후송에 귀부하는 것도 싫어 대명공에게 귀부를 선택하여 대명동 소속이 되었다.

2.11.3. 술루국[편집]


  • 술루국왕 이계성(아우구스틴 1세)
4부 초반 시점의 5대 술루국왕.
  • 술루왕비 → 대비 발레리아
아우구스틴 1세의 왕비이자 가스파르 1세의 어머니. 스페인계. 늦둥이 시동생 볼내공을 미워하여 해치려 들었다.

  • 비수공 → 술루국왕 이원석(가스파르 1세)
이계성의 셋째아들이자 술루국 세자인 비수공, 28살에 부왕이 훙서하여 왕위에 올랐다. 거만한 성격으로 4살 위인 삼촌 디에고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가 삼촌을 경쟁자로 보고 암살하려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대한에 머무르게 하려고 츤데레짓을 한 것이었다.

  • 볼내공 이계진(디에고)
3부의 술루국왕 디에고 1세의 현손자로 선대 술루국왕 펠리페 1세와 한인계 후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틴 1세의 이복동생. 본래 술루국왕의 차남에게 하사되는 볼내공 작위를 아우구스틴 1세의 차남이 요절하면서 대신 받고 술루 왕실의 전통에 따라 대한에 와서 친위대 참령으로 복무하다가 태손 경호대장인 태손위종사 별좌로 임명받아 재석을 경호한다. 조상인 디에고 1세와는 반대로 신불랑, 맥고국 아가씨들에게 들이대는 플레이보이이다. 재석이 즉위하자 참장으로 승진하고 친위대 보병 1대대장이 된다.

  • 조르조 벨라르디
이탈리아 연대 연대장이자 대령. 볼내공 디에고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다. 3부에 나온 조르조 벨라르디의 직계 후손으로, 3부 조르조가 사실은 건흥제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였을 거라는 암시가 있었는데, 이 조르조도 얼굴이 아우구스틴 1세와 매우 닮아서 사람들이 펠리페 1세의 사생아 아니냐고 수군댈 정도였다 하니 확실히 건흥제의 혈통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재석은 그가 늘어놓는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조르조가 2부의 정일한처럼 전생의 자신의 숨겨진 후손임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2.11.4. 조홀국[편집]


  • 충정왕(忠貞王) 정인선
5대 조홀국왕. 조홀 태조 정명완의 증손자로, 조부 광현왕 정주신이 확장시킨 조홀국을 안정시키고 전쟁보다는 교역과 산업 진흥에 힘쓰고 있다. 1827년 사망.
  • 왕비 궁본씨(宮本氏)
정인선과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 관탄공 정윤성
조홀국왕 정윤진의 동생. 원평제의 국상에 조문하러 와서 재석과 만난다. 형의 암군짓에 불만이 많아서 내심 이대로 가면 형왕과 조카인 세자가 폐위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갑자기 각성했을 뿐만 아니라 아편 재배 같은 미친 짓도 하지 않아서 자기가 건흥제라도 되냐며 어이없어하며 내심 고마 플랜테이션 농장이 망하기를 기도한다.
  • 피낭후 정윤식
조홀국왕 정윤진의 이복동생. 형왕의 명을 받들어 대삼주(남미)에 가서 현지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고무나무 종자를 잔뜩 구해 돌아와 형왕의 칭찬을 받는다. 상당히 유능한 인물인지 종자를 가져오는 목표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용으로 현지인들이 고무를 이용해서 만든 물건들도 함께 가져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 정윤진
6대 조홀국왕으로 정인선의 장남이다. 부왕과는 정반대로 주지육림에 빠진 암군으로, 늘어난 국가 수입을 모두 향락에 퍼붓고, 간언하는 충신들을 전부 몰아내고 간신배들로 조정을 채웠다. 어차피 대한군이 지켜줄텐데 용병들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최정예 고참 왜병들을 전부 해고하고 총병력을 4만에서 1만으로 줄여버리는 등, 자원의 저주에 걸리고 번국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 교체될 것 같이 보였으나...
대한 본국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어 조홀국의 주력 산업인 주석 광업에 타격이 예상된다는 보고를 받고 각성하는 반전을 보였다. 주석 외의 주력 산업을 찾아내라고 신하들을 들들 볶더니, 신통치 않은 답변들만 나오다가 세자 정호석이 과거 대한에서 들은대로 고마(고무)를 새로운 주력산업으로 육성하자고 진언하자 가납하고 즉시 원정대를 구성해서 남미로 보내서 고마나무 종자를 가져와서 플랜테이션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그 회의에서 양귀비를 재배하자는 미친 소리나 나오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조정을 차지하고 있던 술친구들을 모두 몰아내고 옛 충신들을 다시 등용하는 모습을 보여 옛날 건흥제가 각성하던 모습 같다는 평을 받는다.[53]
  • 정호석
정윤진의 삼남이자 현 조홀국의 세자. 부왕의 암군짓에 불만이 많았던 것을 보면 정상인으로 보인다. 부왕이 대한 본국에서 주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소식에 각성한 후 차기 주력 산업에 대해 고민하며 토의하는데 신통찮은 의견들만 나오자 기억을 쥐어짜서 대한에서 재석에게 들었던 고마 산업에 대해 진언하고 부왕은 이를 가납한다. 이후에는 불만이 줄어든 듯.


2.11.5. 하와국[편집]


  • 하성왕(夏成王) 하민상(칼라니오푸)
하와국 8대 국왕. 선왕 하원호가 장수해서인지 47세가 되어서야 즉위했다. 1833년 제1왕비 칼레이아가 죽은 후 제2왕비 카네카폴레이의 참소에 넘어가 하진교를 폐세자하고 쿠아이와를 세자로 삼는 뻘짓을 하지만 하진교의 정난으로 결국 하진교에게 양위를 한 후 대한 본국에서 살게 된다. 광덕제는 그가 초성왕 같다고 아직 살아있는데도 하성왕이라는 시호를 미리 내리고 환영 연회에서도 곰발바닥 요리를 메인으로 내어 조롱한다.[54] 본인은 유배갈 줄 알았는데 저택에 별장까지 하사받고 대한에서 편한 노후를 보내게 되자 나름 만족하며 카네카폴레이와 쿠아이와를 바로 손절하는 태도를 보이고, 하진교와도 얼마 안 가 화해한다. 심지어 하진교가 자신의 정변을 극화한 연극 공연에 초대하자 좋다고 구경을 올 정도.
  • 순정왕후 정씨(順貞王后 征氏)
하진교의 모친.
  • 폐비 공씨(카네카폴레이)
하민상의 제2왕비, 체구가 크고 풍만한 점이 하민상에게 어필되어 총애받는다고 한다. 성질이 억세어 자기 자식 쿠아이와를 세자로 올리기 위해 남편을 들볶아 뜻을 이루었으나 하진교가 가만히 있지 않고 정난을 일으킨다. 아들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기토 자리에 난입해 곧바로 하진교의 승리를 인정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대로 투옥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당해 재판을 받은 후 현토도(사할린)으로 귀양간다. 한식 성은 공(攻)이다. 현토도에 가서는 몰락한 것에 대한 충격으로 폐인이 되어 2년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 하원교(쿠아이와)리틀 존존 블랙
하진교의 이복동생으로 카네카폴레이 소생. 학문과는 담을 쌓은 전형적인 하와인 전사 타입이다. 어머니의 책동으로 새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대한에서 수련한 하진교가 정난을 일으키자 갑옷을 입고 일기토를 벌였지만 완패, 투옥당하고 모친과 한양으로 압송당한다. 재석에게 단지 왕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한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어머니와 함께 현토도로 귀양간다. 현지에서 사냥꾼이 되어 폐인이 된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2년째 겨울에 죽자, 다음해 비글 호가 대해우 연구를 위해 해우도에 갔다가 돌아올때 현지에서 고용한 니부히족 선원들 틈에 섞여 탈출한다. 비글 호를 따라갔던 하진교에게 중간에 들키지만 그를 측은히 여긴 하진교가 눈감아줘서 무사히 영국으로 떠난다. 비글 호에서는 '리틀 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빅 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종성공 이훈과 서로 정체를 알게 된 후 동병상련으로 단짝으로 지낸다. 비글 호가 영국에 도착한 후 호구지책을 위해 둘이 함께 미주합중국으로 가기로 한다. 잉글국에 도착한 후 피츠로이 선장이 '존 블랙'라는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어줬는데,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주합중국에 간 이후에는 다른 가명을 쓸 계획이다.

  • 하와국왕 하진교(카나이나)
하민상의 칠남으로 하와국의 세자. 어머니 칼레이아가 과잉보호하면서 학문에 힘쓰도록 한 덕에 지성은 뛰어나지만 운동부족으로 심한 비만 상태이다. 재석은 처음에는 첫인상만 보고 비호감이라고 생각했지만 붙임성 좋은 성격이 마음에 들어 대한에 가면 살을 빼주겠다고 결심한다. 대한에 와서는 재석의 말동무 역할을 하고 있다. 본작의 개그 캐릭터. 재석의 북경 방문길에 동행했다가 심왕부에서 베푼 사냥대회에서 하와국 익위사 군사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다. 재석의 일본 방문도 동행하는데, 재석 일행이 부산까지는 육로로 이동하는 동안 하진교는 제물포에서 동진을 타고 부산으로 이동해, 닷새 간 유일한 승객으로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일본에 가서는 요시와라 유곽에 쳐박혀 시간을 보내 재석이 한심스러워 할 정도. 그래도 5년간 함께하며 대한에서 수련해 단순한 비만 한량에서 문무를 겸비한 전사가 되었고, 재석과 친형제처럼 매우 친해졌으며, 재석의 이복누이인 현순옹주를 마음에 두게 되었는데 광덕제가 혼인을 허락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혼인 후에는 유흥도 끊고 부인에게만 충실해졌다.
하지만 그 사이 어머니 칼레이아가 죽고 계모 카네카폴레이의 수작에 폐세자당하는 위기를 맞았지만, 재석이 붙여준 호위무사 40명을 데리고 본궁에 쳐들어가[55] 쿠아이와를 꺾고 승리, 광덕제가 하민상에게 양위를 명해 9대 국왕으로 올랐다. 재석이 딱히 작정하고 가르치려고 한 적이 없는데도 함께 하며 자연스레 배우고 들은 검술, 승마, 사냥, 역사지식 등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자신의 상황에 적절히 맞춰 활용한 것인데, 이에 재석도 놀라며 난 놈이라고 평가했다. 대한에 가기 전에는 정말 인기 없는 세자였다고 하는데, 몰라보게 달라져서 돌아온[56] 뒤 보여준 이런 모습으로 인해 지지자가 늘어났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하와국보다는 즐길거리가 많은 대한 본국을 더 좋아하여 광덕제 조문 핑계로 대한에 와서는 왕비가 둘째를 낳았으니 아이가 배를 탈만큼 클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며 3년이나 놀다가 재석이 등을 떠밀어서 겨우 귀국하는 등 여러 핑계를 대며 대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재석이 등떠밀다시피 하여 3년만에 귀국해서도 호랑이를 들여오겠다느니 하는 한심스런 생각을 하여 왕사 이동연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다.
  • 현순옹주 → 현순공주/하와국왕비 이아지(賢順翁主→賢順公主 李阿只)
광덕제의 서녀. 1818년생. 미주 출신인 황빈 홍씨 소생. 동갑내기 이복자매인 길현과 친한 듯하다. 하와국 세자 하진교와 결혼하며 화번공주로 승작된다. 생모인 홍씨는 딸을 멀리 보내기 싫어 결혼을 반대했지만 본인은 하진교와 금슬이 매우 좋다. 혼담이 오가기 전부터 내심 호감이 있었다고 하며, 하와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신했을 정도. 하와국 도착 직후 아들을 낳는다.
  • 카니파후
하진교와 현순공주의 장남.

  • 하성교(리홀리호)
하진교의 이복동생. 어렸을때는 쿠아이와처럼 하진교를 무시했지만 대한에서 돌아온 하진교가 문무를 겸비한 용사가 된 것을 보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하진교에게 충성한다. 거북섬에 연례 거북사냥을 하러 갔다가 영국 탐험선 비글 호와 만난다.

  • 이성원
강녕왕과 하와인 첩의 5대손. 태황 친위대 소속 하와국 병사들의 지휘관(정 6품 정위)으로 태손 경호부대인 태손위종사 좌장사 직에 있다. 재석이 태자가 되면서 그대로 태자익위사로 변경되었다.

  • 이보열
강녕왕의 증손자로 와가촌의 사또이다.

  • 맹수동(猛首銅)
태손위종사→태자익위사 소속 종 7품 우종사. 충치가 심한데도 발치를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다가 발치보다 더 고통스러운 황산 신경치료를 받고 앓아눕고, 미주에서 잡은 회색곰을 산채로 하와국에 데려가겠다고 고집하는 등 개그 캐릭터로 활약한다. 함경도에서 냉면 맛집으로 암행을 갈 때 같이 갔는데 재석이는 냉면을 시켰는데 눈치없게 자기는 수육이 먹고싶다며 수육을 시키는 개그신을 선보인다.

  • 윤호원
대한에서 보내진 왕사. 하민상이 세자를 하진교에서 하원교로 바꾸자 본국에 이를 알렸고, 하진교가 돌아오자 하진교의 외삼촌인 카마우아와를 보내고 그를 통해 대책을 제시한다. 하진교가 말을 듣지 않고 무력으로 보위를 차지한 것이 속으로는 못마땅했지만 하진교가 태종처럼 했다고 말하는 바람에 윤호원은 반박할 말이 원천봉쇄되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즉위한 하진교는 아예 나라를 비우고 한양에서 지내버려서 이에 골머리를 앓다가 하진교가 재석에게 등 떠밀려서 돌아오고 후임자 이동연이 오자 날아갈듯한 마음으로 하와국을 떠난다.

  • 카마우아와
하민상의 제1왕비 칼레이아의 오빠이자 하진교의 외삼촌. 윤호원의 명을 받고 하진교가 폐세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렸고, 정난에 함께한다.

  • 이동연
윤호원 후임 왕사. 하진교가 멧돼지 대책 핑계로 호랑이까지 들여오기로 하고 하와인 대신들도 적극 찬동하는 것을 보고 멘붕에 빠진다.

2.11.6. 주산군도[편집]


  • 안문중
주산군도에 주재하는 익문사 별좌. 후송에 있는 대한 첩보망을 컨트롤하는 화이트요원이다.
  • 오청주
오공충의 9대손으로 주산방 방주. 친분이 있던 후송 장문성의 부탁으로 후송 한왕 조심원과 우림위 상장군 고문휘의 주산군도 망명을 도와준다.

2.12. 미주[편집]


  • 남양 홍씨 규수
3부에서 미주총관부 판관으로 미주에 가솔을 모두 데리고 온 홍주원의 자손으로, 광덕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의 친언니. 원평제가 태자빈을 처음 간택할 때 미주인으로는 최초로 재간택 후보 10명 중에 들어, 온 미주가 기뻐 열광했다. 최종적으로는 뽑히지 못했지만 탈락자들에게 위로의 뜻으로 잔뜩 내리는 후한 선물을 혼수품으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간 뒤 좋은 가문과 혼인했다고 한다. 광덕제도 마음에 들었었는지 8년 후 미주 순행 때 이 규수를 잊지 않고 찾아봤으나 이미 시집간 뒤라 대신 그 여동생을 후궁으로 삼고 총애한다.

신불랑이 건국되면서 증가한 외교 사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설된미주 주재 외무부 특설 주재관. 천주교가 공인된 후 수세기가 지난 이 세계에서는 역적이 되지 않고 대한의 충실한 외교관으로 잘 살고 있다. 재석이 미주에 갔을 때 현황을 보고하고 협상단의 일원으로 실무를 수행한다.

  • 이종우
미주대총관. 업무 차 나와있다가 재석을 뒤늦게 영접하고 지나치게 벌벌 떠는 심약한 모습을 보이며, 그가 협상 얼굴마담이라고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 남흥덕
북미주지사. 재석의 국혼 소식은 들었으나 태증손을 보고 넘어올 줄 알고 공무를 수행하다가 뒤늦게 알고 영접하면서 김성권 mk.2가 될까봐 두려워서벌벌 떠는 심약한 모습을 보인다. 재석은 광덕제가 태자 때 미주에 왔을때 벌인 만행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 장승원
동변관리사.

  • 원대철
밀열공 원사웅의 9대손으로 미주 원씨 가문 현 당주. 13년 전 광덕제가 미주에 순행왔을 때 미주 원씨를 역적의 후손이라고 폭언하여 이에 충격받은 선친이 돌아가신 슬픔을 재석에게 하소연하다 하마터면 황실모독죄를 저지를 뻔 했으나 재석이 못들은 척 말을 고칠 기회를 줘서 무사히 넘어간다.
  • 원재현
원대철의 장남으로 독실한 개신교도. 아버지가 실언을 한 이후로 재석을 수행한다.
  • 원재신
원대철의 차남으로 재석이 광덕제가 원씨 가문에 막말을 한 것을 알고 이를 보상하려고 보내달라고 요청한 영어 통역관으로 협상을 수행한다. 선교사에게 배운 동부 억양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뉴욕에서 공부해서 목사가 되고 싶어한다.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다.

  • 태원백 김재정
재석의 후궁 동빈 김씨의 아버지. 과거 태자비 간택 때 홍씨 규수의 사례를 보고 자기 딸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고자 매우 애지중지하며 엄격히 키웠고 결국 태손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 백두산 봉선 소식을 듣고 봉선 의식의 의미를 오해해 재석이 미주로 왕림하여 미주에서도 봉선 의식을 해주십사 하는 연명 상소를 미주 유력자들에게 받으러 다니다가 역모 누명을 쓸 뻔 하고 본국으로 소환된다. 재석은 용서하는 대신 박규원에게 성리학 특별 과외를 몇달동안 하루종일 받는 것으로 벌을 갈음하도록 한다.

  • 종이를 넘기는 곰
미주야인 유트족 추장. 대한 조정에서 내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충성하고 있다.

  • 이용갑
신불랑과의 협정으로 대한령이 된 멕시코 서북부를 동미주로 안정화시키기 위해 파견되는 안핵사. 미주 태생으로 본국 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요직을 거치는 등 능력은 뛰어나나 탐욕스러운 성품을 가져 재석이 우려하는데, 독자들은 원역사의 조병갑, 이용태처럼 미주에서 큰 사고를 칠 복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57] 이후 외전에서 추가로 묘사된 것을 보면 예상과 달리 복합적인 인물로, 미주 출신으로 공직생활 내내 차별을 겪었음에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굳건하고 재물은 부수입이나 조금 챙기는 정도에, 자기가 조직한 아파치 사포대들이 민폐를 끼치는 것을 자기 출세에 지장이 올까봐 은폐하긴 하지만 따로 경고를 해서 자제시킬 정도로 생각이 아예 없는 탐관오리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가 편입되고 미주인들이 정체성을 확립해가며 공화파들이 늘어나서 더 섬세한 통치가 필요한 미묘한 시기에 적합한 인물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신규필
이용갑의 종사관으로 역시 미주 태생. 미주 개척 200년이 넘도록 미주 출신들이 관직에서 차별을 당하고 미주대총관 등 요직도 본국인들만 임명되는 현실에 분개하고 신불랑에서 건너온 천부공화론을 공부하여, 태황은 그대로 모시되 모든 관직과 법률은 미주에서 자체적으로 정하는 자치권 획득을 바라고 있다.

  • 김용관
이종우 후임 미주대총관. 김재정이 미주에서도 봉선 의식을 해달라는 연명 상소를 미주 유력자들에게 받고 다닌다는 것을 흥녕제에게 보고한다.

3. 대아주[편집]



3.1. 청[편집]


  • 광종 계정제 애신각라 윤선(光宗 契正帝 愛新覺羅 胤鐥)
청의 10대 황제, 소포도의 손자,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지만 군사적인 천재성을 발휘해 15세때인 1778년 서나라가 안남, 후송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서나라의 수도권인 사천성을 강습, 성도와 중경을 함락하고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삼궤구고두례를 받고 서나라를 운남으로 몰아넣는 대업을 이룬다. 하지만 정복한 사천 지역에서 백련교를 탄압하다가 1793년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고, 황궁까지 백련교 자객들이 침입하여 직접 자객들과 총으로 싸워야 할 정도로 4년이나 고생하게 된다.[58]

  • 도광제 애신각라 면녕(愛新覺羅 綿寧)
청의 11대 황제, 계정제의 아들로 부황 계정제 사후 제위에 올랐다. 모후는 후금 대칸 특이호의 딸이다. 후금의 황위 계승 내분을 뒤에서 조장하며 아예 후금을 청나라가 합병하여 건주일통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한에서 재석이 백두산 봉선을 올리자 자신도 태산에서 봉선을 올리기로 한다.

  • 애신각라 덕명
면녕의 황태자. 원평제 조문 사절로 대한을 방문한다. 나이는 이진(4부 재석)보다 다섯살 많다. 대한에 대해 할말은 하는 등 만만치 않은 상대다. 후금 황위 계승 경쟁자 중 가장 뒷배가 없는 륵극덕혼을 재석에게 소개하며 지원을 요청한다.

  • 송균(松筠)
한양 주재 청나라 공사. 몽골계로 문무의 요직을 역임하고 서나라가 몰락할 때 청군 선봉대로 사천에 입성하는 등 여러 업적을 쌓은 명신.


3.2. 후금[편집]


  • 덕창제 애신각라 박락(德昌帝 愛新覺羅 博洛, 아이신기오로 보로)
후금의 11대 대칸, 부수의 현손으로 청나라 공주인 대복진에게서 적자가 없고 서자만 3명 있어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천주교 국가인 후금의 특성상 후계가 불안하다. 본인은 동생들보다는 자신의 서자들 중 하나를 태자로 삼고자 하여 대복진이나 서자들이 동생들을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굴마훈이 후계자 다툼에서 승기를 잡자 내심 굴마훈을 태자로 인정하게 된다.

  • 대복진 고륜숙신공주(固倫淑愼公主)
박락의 황후로 청나라 광종의 딸. 자신의 불임을 시동생들이 흑주술을 부린 탓으로 생각하여 증오하고, 박락이 원하는 서자들의 양자 입적도 더러운 첩년의 피를 들이밀지 말라고 대놓고 박락과 싸우는 등 조카인 청나라 태자 덕명도 비판할 정도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서자들이나 시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도 겪어 친정 청나라에서 200명의 바야라(호위병)를 받아 곁을 지키게 하는 한편 여전히 자식을 가지는 걸 포기 안 하고 어떻게든 아들을 얻고자 궁리하고 있다. 심지어는 40이 넘어 폐경이 되었는데도 구약성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세에 하느님의 권능으로 아들을 낳았으니 자기도 그럴수 있다며 나이가 들수록 광신도가 되어가고 있다.

  • 애신각라 아파태(愛新覺羅 阿巴泰,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
박락의 바로 아랫동생인 이패륵. 셋째 두도의 지지를 받아 막내동생 찰니, 세 조카들과 황태제 자리를 놓고 목숨이 달린 경쟁을 하는 중이다. 결국 복어 독을 먹고 암살당하는데, 정황상 굴마훈이 범인으로 추정된다.
  • 진국공 애신각라 연신(愛新覺羅 延信, 아이신기오로 얀신)
아파태의 장남. 아버지를 암살한 범인이 사촌 한대라고 오해하고 한대를 암살하지만 나중에 굴마훈이 진범임을 깨닫고 굴마훈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며 와신상담 중이다.

  • 애신각라 두도(愛新覺羅 杜度)
박락의 둘째동생인 삼패륵. 형 아파태를 황태제로 밀어주기로 하며, 대한 태자(재석)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굴마훈에게 다른 경쟁자들이 다 암살당하거나 망명당했음에도 끝까지 굴마훈과 맞서고 있다.

  • 애신각라 찰니(愛新覺羅 察尼, 아이신기오로 차니)
박락의 막내동생인 사패륵, 원평제 승하에 대한 조문 진위사로 대한을 방문했을때 자신을 황태제로 밀어달라는 로비를 하여 아파태와 두도에게 미움을 받는다. 굴마훈의 음모로 도적 두목 누명을 쓰자 측근 70명과 함께 초원을 달려 러시아 옴스크로 망명한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군사를 빌려 후금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알렉산드르가 허용치 않고 있다.

  • 다라순승군왕 애신각라 륵극덕혼(多羅順承君王 愛新覺羅 勒克德渾, 도로이 다하스훈 군왕 아이신기오로 럭더훈)
박락의 서장남. 1808년생. 박락이 화석숙신공주와 국혼하기 전에 들인 평민 출신 측복진의 소생. 서장자라는 명분과 다른 두 다라군왕에 비해 모계가 한미하여 청나라의 입맛대로 다룰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청나라 태자 덕명의 지원을 받으며,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덕명의 주선으로 북경에서 재석을 만나 지원을 요청한다.[59] 전쟁에서 적을 처치하고 얻은 한혈마를 광덕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로 보내나 광덕제가 그 말을 타다 낙마하여 사망하자 장례식에 바로 달려와 사죄를 한다. 하지만 사인을 은폐하려는 대한 조정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들 다 있는 곳에서 전말을 언급하는 등 뛰어난 무인이기는 하나 머리 회전이 둔한 단점을 보여주었다. 결국 굴마훈의 모략에 넘어가 대칸의 애첩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60] 청나라로 도망친다.

  • 다라극근군왕 애신각라 고이마혼(多羅克勤君王 愛新覺羅 固爾瑪渾, 도로이 키치허 군왕 아이신기오로 굴마훈)
박락의 서차남. 1816년생. 만주 귀족 동가씨 출신 측복진의 소생. 황위 계승 경쟁자 중 가장 권력욕이 강하고 손속이 악독하여 대복진, 이복형제들, 삼촌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암살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북경산 복숭아 통조림을 즐겨먹는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복형제 및 삼촌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악랄한 행보를 직접 보여 다른 후계자 후보들을 대부분 암살하거나 모략으로 축출하고 부황에게도 인정을 받아 후금 칸위의 계승자에 가장 가까워졌다.

  • 다라통달군왕 애신각라 한대(多羅通達君王 愛新覺羅 漢垈, 도로이 하푸카 군왕 아이신기오로 한다이)
박락의 서삼남. 1823년생. 몽골 보르지긴씨 출신 측복진의 소생. 아파태가 독살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를 의심한 얀신에 의해 사냥 중 20여발의 화살에 맞아 암살당한다.
  • 애신각라 석탁(愛新覺羅 碩託, 아이신기오로 쇼토)
덕창제의 사촌.

  • 합달나랍 탁혜(哈達那拉 托惠)
한양 주재 후금 공사. 만주 명문가 합달나랍씨 일족으로 문관이다.

카타이 교구 주교. 교황청에서 자신의 서자들을 적자로 인정하게 해달라는 대칸 박락의 요구에 시달려서 스트레스가 심하다.


3.3. 후송[편집]


  • 영강제 조형윤
후송의 8대 황제, 소태제 조승번의 차남. 태자이던 형 조형연과 부황이 모두 조졸하는 바람에 15세 나이에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즉위하였고 처음 3년간은 모후 왕씨가 섭정을 맡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뒤 친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부 태녕제의 사치와 황음으로 망가져버린 재정에 부황 소태제가 촉발한 덕성도의 난 뒷수습을 하고 나니 나라 꼴이 완전히 당나라 말기처럼 도통사들에게 휘둘리고 있어 이를 극복하는데만도 힘들어한다. 그래도 직할지의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한 갖은 노력 끝에 국고를 채우고 금군과 직속인 2개 도통부를 강화시켜 직할지 내에서 반독립적이던 3개 도통부가 다시 황실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그만큼 명군의 자질이 있지만 그래도 나라 전체를 예전으로 돌리기에는 아직 버겁다. 하지만 어리석은 장남 조심창을 태자에서 폐하고 똑똑한 후궁 소생 4남 조심원을 태자에 세우려다가 태후 송씨의 음모로 인해 46세란 젊은 나이에 독살당한다.
  • 태후 송씨
조형윤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친아들 조심창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 환관들을 포섭해 남편을 독살하고 후궁 소생 친왕들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감금하며, 암군인 조심창 대신 국정을 이끌고 있다. 태산에서 봉선을 올리지 않으면 이는 곧 북벌의 포기라는 큰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단지 대한과 청의 봉선의식을 질투하여 형산에서 봉선의식을 올리기로 하며, 폐세자를 지지했다는 것만으로 많은 관료들을 숙청하고, 천길이라는 방술사의 말을 맹신하는 등 원역사의 서태후와 비슷한 행보를 걷는다. 의외로 군사 등 자신이 모르는 분야는 확실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고문휘, 임칙서 등을 중용하려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임척서의 진언으로 친왕들을 지지했던 관료들은 석방하지만 친왕들은 봉선이 끝난 다음날 모두 처형하여 잔혹하다는 악평을 듣는다.
  • 청민공주
조형윤의 막내딸. 조형윤이 후금에 새 황후로 보내겠다는 제안을 해서 후금과 청,대한을 이간질시키려는 음모의 장기말로 이용하려 한다.
  • 한왕(韓王) 조심원
조형윤의 4황자. 부황의 신임과 대신들의 신망을 받았으나 태후 송씨가 부황을 독살하면서 유폐된다. 태후는 함화제가 봉선을 올리기 전에 그를 죽이면 부정을 탈까봐 봉선이 끝나면 죽이려 했으나, 후송의 충신인 고문휘와 장문상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주산군도로 망명한다. 고문휘에게 포섭된 금의위 교위 이진성이 한왕이 고문휘를 죽이고 자택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송태후는 그가 죽은 줄로만 안다. 주산군도를 통해 대한으로 망명하자 재석은 그의 망명을 굳이 숨기지 않음으로써 후송 내부를 동요시키고, 한왕이라는 작호가 대한과 겹치므로 헌왕(獻王)으로 작호를 고치게 하고 누손주에 2천석 짜리 농장 하나를 빌려주어 생활하게 한다.

  • 함화제(咸和帝) 조심창
후송의 9대 황제, 1813년생. 조형윤의 유일한 적자. 성품이 어리석고 무능하여 부황에게 폐태자될뻔 했으나 모친 송씨가 부황을 암살하고 황위에 올렸으며, 즉위 후에도 국정은 다 모친에게 맡기고 후궁에 틀어박혀 주지육림에 빠져있는 암군이다. 그나마 유부녀는 건드리지 않는 등 선은 지킨다. 일을 안 하지만 하면 딱히 안 되는 일을 벌이지도 않는 게으름뱅이 스타일이라 임칙서는 송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전권을 받아 국가를 대신 운영하며 나라가 무난하게 굴러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정영담
환관 우두머리인 태관총감. 어린 나이에 갑자기 황제가 된 조형윤을 26년간 정성껏 보필하여 조형윤도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다. 본인은 충신인것 같지만 그를 포함하여 환관의 힘이 매우 커진 것도 도통사들의 할거와 마찬가지로 후송이 당나라처럼 망조가 들었다는 징조를 보여준다.

  • 이성원
한양 주재 후송 공사로 태황 원평제가 건강이 악화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광덕제(당시 태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를 올린다.

  • 서호증
좌승상 격인 좌추밀원지사.

  • 장문성
황제가 유일하게 직접 임명할 수 있는 도통사인 회주도통사. 3부에 나온 장호원의 자손으로 조상 장호원처럼 성실하고 꼼꼼한 성품으로 영강제의 큰 신임을 받는다. 초급장교인 천총 시절 수군이 퇴역시킨 고물 인력철갑선을 억지로 떠맡게 되어 속이 터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덕성도의 난도 피해가고 청과의 전쟁에서 공도 세워 결국 도통사 자리까지 올라, 그 배를 행운의 배로 생각하고 계속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송태후가 영강제를 독살하고 함화제를 올린 후 전횡하자, 고문휘를 도와 한왕 조심원을 주산군도로 망명시킨다.

  • 고문휘
우림상장군으로 3부에 나온 고구의 자손. 조상 고구처럼 사석에서는 놀기 좋아하지만 공무에는 매우 엄정한 성격으로 영강제의 큰 신임을 받는다. 조상 고구와 장호원의 인연도 계속 아름답게 이어져 고문휘도 장문성과 호형호제 하는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송태후의 전횡에 분노하여 자신과 한왕의 죽음을 위장하고 한왕 조심원을 구출해 모시고 주산군도로 망명한다. 정작 송태후는 정치적 욕심이 별로 없고 군사적 능력이 탁월한 고문휘를 좋게 평가하며 계속 중용할 생각이었다. 대한에 망명하여 대면한 재석도 그를 좋게 본다.
  • 고벽진
고문휘의 장남, 시위군 정4품 편장군.

  • 송위호
한양 주재 후송 공사. 유구의 복속을 축하하는 축하연 자리에서 광덕제에게 "대한이 대동양 전역을 다 차지하셨는데 그 한가운데 이방 국가 하나가 남아있으니 거슬리지 않으심?"하고 대한과 일본을 이간질시키는 발언을 대놓고 했으나 광덕제가 잘 받아넘기자 그 이방 국가가 일본이 아니라 신기니아를 말한 것이라고 발뺌하면서 분위기를 수습한다.

  • 조귀염(趙貴閻)
송위호 후임 후송 공사.

강소안찰사로 복건 출신이지만 홍씨 일족이 아니라 황제가 있는 조정에 출사했고,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명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인은 달라졌지만 원 역사와 똑같이 사회 문제로 부상한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게 됐다. 그 외에 반독립적인 도통사 제압,[61] 아편 유통을 막기 위한 덕성도 공인,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유럽 국가들에 대사 파견 등을 제안하며, 2세기가 지나서인지 중원만을 천하로 인식하는 변화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후 4부에서 후송의 핵심 인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광덕제의 조문 사절로 대한을 방문하는데, 자신이 아는 호복+변발의 노인 임칙서와 달리 단령을 입고 상투를 튼데다 아직 중년인 모습이 원역사와 달라서 재석은 속으로 재미있어한다. 영강제의 폐태자 계획에 대해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며 반대했기 때문에 송태후 집권 하에서도 중용되고 있다.

  • 천길(天吉)
추종자를 많이 거느린 방술사로 송태후의 친정 송씨 가문에서 송태후에게 소개해줘 송태후도 그를 맹신하게 된다.

  • 이진성
금의위 교위. 고문휘가 평소 뇌물로 구워삶아 꽌시를 만들어 둔 덕에 고문휘가 한왕 조심원을 탈출시키는 계획에 협조하고 송태후에게는 한왕이 고문휘를 살해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 홍명강
3부에서부터 정주도통부를 세습하고 있는 홍승주 가문의 후손으로 현직 정주도통사. 임지평에게 혼인동맹을 제의한다.

  • 임지평
3부에 나온 임용완의 자손으로 현직 양광총독. 대한에서 유학하고 온 주치의 덕분에 기생충 감염 위험성을 알게 되어 짐승의 생고기나 생피는 절대 먹지 않는다.

3.3.1. 배상제회(태평도)[편집]


배상제회의 천왕. 젊은 시절 덕성도 접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불의 아우를 자처하며 배상제회를 창시하면서 원 역사와 다르게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이단이 되었다.[62] 원역사의 홍수전과 비교도 안 되게 유능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덕성도 시절 의술을 배워서 의원 노릇을 하기도 하며 배상제회 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후송 전역은 물론 적국인 청나라, 심지어는 외국으로 팔려가는 쿨리들 속에 선교사를 끼워넣는 식으로 대한, 일본, 동남아시아 전역에 태평도 비밀지부를 설립하고 있으며, 장차 이를 바탕으로 천하를 거머쥘 계획을 갖고 있다. 원 역사의 홍수전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하렘이나 차리고 논 것과 달리 천왕이 된 후에도 청렴하게 살고 있다. 아마도 원 역사의 홍수전은 한량이 기독교 교리를 겉핥기로 배우고 이단을 만든 것과 달리 작중의 홍수전은 덕성도의 정식 성직자로 교육받으면서 시조인 광진이 성공한 것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4. 서[편집]


  • 복흥제(復興帝) 장인경
서나라 7대 황제. 함녕제의 3황자로 성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 황족 중 유일하게 탈출하여 운남으로 들어가 서나라의 명맥을 잇는다.
  • 장세흠
장세직의 형. 호족들을 숙청하고 중앙집권을 할 계획을 세우다가 호족들에게 암살당한다.

  • 영무제 장세직
서나라 8대 황제. 장인경의 아들. 지방 호족들이 세워놓은 명목상의 황제에 아편팔이로 국가를 연명하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3.5. 일본[편집]


  •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막부 13대 쇼군, 이에시게의 차남으로 이에토시의 5대손이다.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키고 있다.

  • 도쿠가와 무네타케
1821년생, 이에츠구의 차남이나 장남이 2세때 죽어 사실상 장남으로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다. 대한에서는 세사(世嗣)로 예우한다. 재석을 따라 대한을 방문하였다. 재석과는 달리 평범한 어린아이지만 특별한 사고 없이 무난히 활동을 하고 귀환하였다.

  • 도쿠가와 이에모토
이에츠구의 유일한 친동생,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 도쿠가와 요시하루
히로시마 번주, 이에츠구의 사촌.

  • 도쿠가와 나리하루(德川斉温, 덕천제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가문이지만 존왕파이다.

  •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덕천제소)
9대 미토 번주. 도쿠가와 가문이면서 존황양이 파벌의 수장이다.

일본의 덴노.

닌코 덴노의 아들.

  • 나루히토(愛仁)[63]
간인노미야 5대 당주, 이에츠구의 누이 아들이자 왜황의 당질. 제2차 경인조약에 따라 대한과 국혼을 맺을 당사자로 지목된다. 여담으로 이름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애인이라 읽혀서 광덕제가 살짝 거북해했다. 전왕의 딸 황양공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는다.

히코네 번주. 에도 막부의 다이로. 유구-아모국 처분 문제로 일본을 방문한 재석을 영접 책임자로 맞이한다. 존왕파를 피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기차로 무정차 통과하였다. 재석이 돌아간 이후 이에츠구와 대화하다 재석이 여색에 관심이 없던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그가 사실 슈도를 즐기는게 아니냐는 황당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관록있는 외교관으로 쇼군 이에츠구의 신임을 받는 원로로 막부의 로주 직위에 있으며, 1831년 봄 아모국을 방문해 아모국이 일본의 번국이 되었음을 통보한다.

막부의 로주, 국혼을 치루는 도쿠히메를 모시고 온 사절의 대표이다. 원각사에 예물로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만냥 가치의 금동탑을 바쳐 광덕제의 심기를 불편케 한다.[64] 광덕제의 조문 사절로 온 뒤 얼마 후 사망한다.
  • 미즈노 타다쿠니
타다아키라의 아들, 사절단 정사.

  • 오쿠보 다다이치로
대한 주재 일본 관수.

오사카의 존경받는 학자로 원역사처럼 흉년이 들었는데도 곡물가를 올리려는 대상인들과 부패한 봉행들에게 분노해 반란을 일으켜 봉행들을 죽였지만, 진압당하고 머리에 탄환을 맞고 사망한다. 이때 이순신이 쳐들어 왔을 때도 불타지 않았던 오사카가 반절이나 불타버렸고, 이 반란 때문에 이에츠구는 대한 봉선 의식에 사자를 보내는 것을 취소하게 된다. 또한 얼굴에 총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오시오는 가짜이고 내가 진짜 오시오라는 반란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고 그중 일부는 존황양이파와 손을 잡는 등 막부 통치에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 아토베 요시스케
오사카 동정봉행. 오시오의 난 때 즉사한다

  • 호리 도시카타
오사카 서정봉행. 오시오의 난 때 치명상을 입는다.

  • 카이쇼 히데야스
오사카성 수성봉행.

3.6. 유구[편집]


  • 대흥제 상호(大興帝 尙灝)
유구 6대 황제, 조카 상성이 4세에 요절하여 즉위했다. 한때 나쁘지 않은 군주였던 것으로 보이나 유구 멸망 시점에서는 치매에 걸려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는 상태.
  • 상응(尙膺)
상호의 차남, 상육의 동생. 요절했다.
  • 대리왕 상돈(大里王 尙惇)
상호의 삼남, 상육이 쓰러진 틈을 타 재석에게 형을 볼모로 끌고가시고 자신을 번왕으로 세워줄 것을 부탁하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재석은 황제 자리가 중산왕으로 격하되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 보위나 탐내는 모습을 보고 한심해하며 이 자를 볼모로 끌고 가기로 결정한다. 한국에 온 뒤 이를 알게 되지만, 이번에는 태황에게 잘 보이면 자신이 중산왕에 봉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정신승리해 재석이 그 긍정왕스러운 면에 감탄한다(...)

  • 성평제 → 중산왕 상육(成平帝 → 中山王 尙育)
병든 상호를 대신하여 대리청정 중이다. 재석이 유구에 오자 설마 하면서 희망회로를 굴리다가 유구의 독립을 박탈한다는 태황의 친서를 받고 절망한다. 재석에게 태황께 용서를 구할테니 제발 취소해달라고 사정하나 대명공과 에도에서도 찬성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치매 걸린 심신상실자가 한양에 와서 선양 의식을 치룰 수는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유구 제위를 양위받아 유구 7대 황제 성평제가 되었는데, 유구 백성들은 이를 상육이 하루라도 황제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런다고 오해하고 '하루살이 황제(一日帝)'라고 비웃는다.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대한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고 중산왕으로 책봉받는다.

  • 마덕무
유구의 재상인 삼사관 중 하나. 태황의 친서를 받고 그동안 자신들이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 모집공
삼사관 중 가장 연장자. 재석에게 분부를 거두어 주시면 자기 딸이라도 바치겠다고 읍소한다.

  • 향정해
삼사관 중 한명. 키는 6척이 넘고 체중은 120kg을 가뿐히 넘을 만한 거구의 가라테 고수로 노인임에도 호위병들이 긴장할 만한 외견을 지녔다. 외교관으로 각국에 파견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이 일본에 유구를 댓가로 아모국을 팔아치웠음을 눈치채고 아모국의 가치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유구를 지키려 한다.


3.7. 아모국[편집]


  • 야마우에노 오토코(山上大男)
아모국 최대의 도시인 무역항 토카부치의 영주. 토카부치 지역도 다른 아모국 부족들처럼 주민들이 추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나, 선대 추장인 그의 아버지가 용병을 고용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장직을 세습 영주로 바꿔버리고, 아모국의 다른 추장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미주 방문길에 아모국에 들른 재석의 아버지 광덕제에게 향응을 베풀어 그가 말한 덕담 한마디를 대한 황실의 인정이라고 선전하며 세습제를 굳혔다.[65] 선대 추장도 본인도 친일파로 일본 문화에 젖어있어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었을 정도. 아이누어 이름은 불명. 재석이 미주 가는 길에 들르자 재석을 초대했으나 그 속이 다 들여다보여 재석은 초대를 거절한다.

  • 오니비시
1831년 초 시점에서의 아모국 '곰을 쏘는 자'(국왕).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인해 아모국이 일본의 번국이 된다는 것을 추장회의에서 공표한다.


3.8. 대남국[편집]


응우옌 왕조 2대 황제, 부왕의 뒤를 이어 대한에게는 안남국왕, 후송에게는 남월국왕으로 칭신하며 진랍, 남장을 침략하고 섬라와도 갈등을 빚고 있다. 또한 형 완복경의 일 등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 천주교를 탄압하고, 지방 호족들의 토지를 무리하게 회수하려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암군이다.

  • 완복경(阮福景)
완복교의 맏형. 원역사처럼 천주교인이 되어 종묘 참배를 거부하는 등 물의를 빚다가 요절하였다.


3.9. 섬라[편집]


섬라국왕, 미국과 수교를 한다.


3.10. 무굴국[편집]


원역사처럼 굴람 카디르의 반란을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진압한 후 영국의 꼭두각시 황제가 된다.


3.11. 벵골 칸국[편집]


  • 토를로시
벵골 칸국의 구르칸. 영국에게 정복당한 다른 인도 국가들과 달리 대한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한다. 그래서 외부의 적보단 말라리아 모기 퇴치를 더 신경쓰고 있다. 대한 벵골 상관의 중개로 후송에 수출할 아편 농사가 번창하는 것도 만족해하고 있다.


3.12. 준가르 칸국[편집]


  • 체링 바투르
준가르 본가의 칸. 부왕 타마치가 러시아 복속을 택한 것을 불만스러워하면서도 현실에 체념하고 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로 망명한 후금 삼패륵 찰니와 동맹을 맺고 후금을 칠 생각을 하고 있다.


4. 대유주[편집]



4.1. 러시아[편집]


표트르 3세의 후계자.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려 모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섭정을 맡았으나 15세가 되자 모후의 무능함에 질려 쿠데타를 일으켜 별궁에 유폐시키고 친정을 한다.
원 역사에서 프로이센을 침공한 나폴레옹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왔다가 니콜라이 1세의 황후가 된 것처럼 여기서도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가 된다.
  • 체사레비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장남이자 러시아 태자.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차남.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알렉산드르 2세와 첫 부인인 러시아 귀족 사이의 장녀.

원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로 여기서는 언니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가 본인은 러시아로 시집을 갔다. 남편의 이른 사망으로 섭정을 맡게 되지만 원 역사처럼 정치에 무지한 건 동일해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깽판치는 걸 오랫동안 방치해버렸다. 결국 아들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강제 은퇴당하여 별궁에서 조용히 살다가 1833년 3월 78세의 나이로 자연사한다. 원 역사에서 혁명세력에 의해 악녀로 매도되어 단두대에 처형당한 걸 생각하면 수명이 40여년이나 길어진 뒤바뀐 역사의 수혜자.

주 대한 러시아 대사.


4.2. 서반아[편집]


  • 호세 페르난도 2세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의 장남. 부왕 페르난도 6세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온 가족이 함께 아비뇽으로 끌려가 유폐되고, 부왕이 35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지에서 죽는 모습을 13세의 어린 나이에 지켜보게 된다. 16세에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한 후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스페인 본국도 쑥대밭이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모두 독립해버려 어쩔수 없이 나폴레옹의 신불랑국과 평화조약을 맺는다. 나라의 사정이 안 좋아져서인지 대한이 마리아나 제도를 50만냥에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사신의 입으로 언급된다.


4.3. 외수터국[편집]


외수터국 황제. 사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싫어하지만 외손자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무척 사랑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 손자가 신불랑국으로 못 떠나게 사실상 감금당한채 살다 결국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고 절규한다. 충격이 컸던 탓인지 이듬해인 1835년 원 역사와 동일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그를 규탄하고 저주하는 편지를 유럽 전 왕실에 뿌린 직후라 그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프란츠 2세의 장남. 원역사처럼 정신지체 환자이다.

원역사처럼 능수능란한 재상으로, 노년이 되어서도 정신지체 환자인 페르디난트 1세 대신 제국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다.

프란츠 2세의 딸,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친모.

신불랑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 신불랑국 황태자....이긴 한데 외할아버지 프란츠 2세가 신불랑국으로 못 떠나게 막고 있어서 명목상으로만 황태자일 뿐 신불랑국 황태자는 사실상 공석이다. 원 역사처럼 부자 간 사랑이 지극해서인지 쇤브룬 궁전 담을 넘어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다고 하며, 신불랑국에서도 구출하기 위해 스파이들을 보냈으나 전부 발각당했고, 나풀레옹 1세가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도 너무 오만무례하게 쓰는 바람에 빡친 프란츠 2세가 더더욱 병을 핑계로 거부하거나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감금 생활에 지쳐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자기 외숙모 조피 프리데리케근친상간을 하는 관계가 되었고[66] 이것이 들킨 후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향년 22세. 21세에 병으로 죽은 원역사보다 1년쯤 더 오래 살았지만 결국 요절하게 된다. 독자들도 차라리 자살로 위장하고 도망간 거였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일만큼 안타까워 했다. 공식적으로는 총기 손질 중 오발 사고사로 발표되었다.

  • 나이페르크 백작
파르마 여공작의 정부. 사생아 3명을 두고 있다.


4.4. 프로이센[편집]


프로이센의 5대 국왕. 독일 연방의 소국들과 관세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어권의 맹주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자유주의자들 탄압이 시급하지 대한과의 수교 그게 뭐가 급하냐며 필요성을 못느끼는 등 나이가 들어가면서 매우 고집스럽고 반동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 로툼 백작
프로이센의 재상. 대한, 건주 양국, 일본과 상주 대사관을 설치하여 프로이센이 독일어권의 대표 국가임을 동양에 알리자고 한다.

나폴레옹이 신불랑으로 초빙하여 대한에서 건너온 유정 기술자들과 함께 텍사스 유전을 탐사해 1836년 드디어 유전 개발에 성공한다.

4.5. 불랑국[편집]


4부 초기 시점의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아들이며, 부모가 혁명군에게 잡혔을 때 나폴레옹이 자비를 베풀어 영국 망명을 허락했다.[67]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프랑스를 떠난 후 프랑스로 돌아와 국왕으로 즉위한다.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가혹한 반동 통치를 하는 동시에 술트에게 5만 병력을 맡겨 루이지애나로 탈출한 나폴레옹을 토벌하란 명령을 내리지만, 정작 술트가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나폴레옹에게 투항해버려 기껏 모은 군대만 갖다바친 꼴이 되었다. 그 후에는 나폴레옹을 신대륙에 가둬둔 셈이니 이걸로 되었다고 정신승리를 했다고 한다.[68] 부친을 죽게 만든 나폴레옹에 대한 원한이 커서 퇴위 후 주기로 한 연금도 안 주었는데, 대한에선 아무리 선친의 원수라지만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왕으로서 한 약속을 안 지켰다고 좋지 않게 보는 듯.

루이 18세의 아들로 런던 망명 중 태어났고, 나폴레옹을 본 적이 없다보니 그의 무서움을 모르고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상륙 거점을 제압하기 위해서 멕시코 침공을 서둘렀고, 상륙한 1만 병력은 아버지 대와 같이 나폴레옹에게 바로 투항하는 운명을 걷는다.나폴레옹 : 병력이 복사가 된다고!!! 북태평양의 지배자인 대한에게도 미국, 영국, 신불랑은 상주 대사를 파견하여 우의를 다지려 하는데 루이 19세는 대한 영종이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국서를 보내도 무시하고 상주 대사도 오래동안 보내지 않다가 광덕제 즉위 후에야 보낸 대사도 광덕제 면전에서 영국, 신불랑 대사를 모욕하는 언사를 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무능한 태도를 보인다. 프랑스 본국에 남아있는 보나파르트파의 봉기를 경계해 모든 군대를 본국에 남겨놓느라 원 역사와 같은 알제리 원정을 하지 않았지만, 대신 이 때문에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는 등 원역사와 다른 경로를 밟게 된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였는지 외교를 더 신경쓰고 대한 태황들을 본받아 워커홀릭이 되어 권위를 세우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과 원역사보다 늦었지만 알제리 원정을 계획하고 있다. 원정 전문 부대로 프랑스 외인부대 창설은 덤. 또한 앞으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대한처럼 전 국민이 왕에 대한 충성심을 어릴때부터 주입받아야 한다면서 전국민 의무교육 제도도 창설한다.

  • 앙굴렘 공작 샤를 필리프
루이 19세의 숙부, 루이 19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회사 총재 직을 맡아 분식회계, 횡령, 방만한 경영 등 온갖 전횡을 저지른다.

원역사처럼 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가 프랑스 대혁명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다 혁명정부에게 죽은 후 망명했다가 왕정 복고 후 돌아와 팔레 루아얄을 되찾는다. 앞으로 혁명이 또 일어날 경우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샤를루이 보나파르트를 프랑스로 불러들여 후원한다.

아칸소 대공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신불랑으로 왔지만 그의 결점들을 꿰뚫어본 나폴레옹 1세에게 냉대만 받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3세에게 후원을 받지만 다시 혁명이 일어나면 오를레앙 공작의 뒤통수도 치고 프랑스의 제위를 차지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오를레앙 공작에게 아이티 원정을 권유한다.

불랑국 외무장관. 원 역사처럼 신기에 가까운 편 바꿔타기 능력으로 루이 19세 치세까지 외무장관을 지내며, 루이 19세의 전국민 의무교육 제도 실시도 책임을 맡아 실행한다.

  • 아르망 폴린
불랑국에서 보낸 대한 상주 대사. 본래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외교적 감각이 없어 광덕제가 벌인 잔치 자리에서 영국, 신불랑 대사를 모욕하고 미국 대사인 데이비 크로켓에게는 친한 척을 하다가 크로켓에게 일침을 당한다. 그 후 광덕제와 재석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도 투자하겠다고 제안한 것을 루이 19세에게 전달했다가 오히려 국가기밀 누설 오해를 받고 해임당한다.

  • 루아젤 남작
폴린의 후임 불랑국 공사.

원역사처럼 수에즈 운하 건설을 주장하여 마침 업적에 목말라 있던 루이 19세의 눈에 든다. 하지만 루이 19세가 수에즈 운하 회사를 왕립으로 사유화하고, 총책임자 앙굴렘 공작도 방만한 경영과 횡령을 일삼아 뒷수습 하느라 죽을 지경이 된다.


4.6. 잉글국[편집]


영국 국왕.

조지 4세의 동생.

원 역사처럼 적자가 없는 숙부 윌리엄 4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제왕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대한 황실보다 더 공부해야 할것 아니냐며 공부를 강요해서 너무 시달린 나머지 보위에 오르면 어머니를 궁에서 추방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고 대한에 반감까지 갖게 된다. 보위에 오른 후 어머니와 의절하고 억눌린 스트레스를 푸느라 식탐도 많아졌다. 대한을 개인적으로는 증오하면서도 군주로서 대한의 통치 방식에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 웰즐리 후작 리처드 웰즐리
초대 주한 영국 대사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긴 웰링턴 공작의 친형. 부임 후 광덕제(당시 태자)와의 첫 회견이 대사관에서 가깝고 유럽식 궁전인 경희궁이 아닌 멀리 있고 좌식 문화라 익숙치 않은 경복궁에서 해야 하는 것에 불평하며 태자가 영국의 조지 4세와 같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고 별 기대도 안 했지만 입식 문화와 티타임에 익숙한 영국인들 취향에 맞는 의자와 테이블과 홍차를 준비해놓고,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영어에 유창하며, 셰익스피어와 워털루 전투 등 영국 문화와 역사에도 해박한 태자의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대한 황실이 셰익스피어의 친필 원고 전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태자가 '그걸 읽으려고 영어를 공부했는데 2백년 전 옛 영어로 쓰여져서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아쉬움을 표하자 최신본을 선물하겠다고 제안하면서 내심 새 책을 받았으니 헌 책을 주지 않겠냐는 파렴치한 기대를 품어서 독자들을 감탄하게 했다. 5년간 대한에 머무르면서 겨울 추위에 대한 불평을 본국에 계속했는데, 이 편지를 받은 내각에서는 한양의 위도가 나폴리보다 낮은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댄다며 믿어주지 않았다 한다(...)

  • 애머스트 백작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
웰즐리 후작 후임 주한 영국 대사. 원평제 때 나폴레옹 전쟁 전후처리를 위해 대한에 이미 특사로 온 적이 있어 광덕제와 구면이다.

웰즐리 후작의 동생.

영국 총리대신. 1833년 노예해방령을 발표한데 이어 대한처럼 아동 노동 규제법도 추진할 생각이다.

그레이 백작 후임 총리대신, 원역사처럼 빅토리아 여왕의 신임을 받는다.

  • 고드리치 자작 프레데릭 존 로빈슨
전쟁 및 식민지 국무장관.

외무장관. 아시아 최강국인 대한과의 우호관계 유지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7세였던 1771년 그랜드 투어를 떠난 김에 세계일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5년간 세계여행을 하면서 대한, 후금, 일본도 관광하고 갔다. 귀국 후 쓴 세계일주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정치인이 되어 업적도 남기고 레스터 백작 작위도 받았다.

  • 애플턴
본래 제물포 상관에 주재하던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다가 주한 영국 대사관이 설치되자 지원하여 서기관으로 채용된다. 대한에 10년 이상 머물면서 결혼도 현지에서 할 정도로 오랜기간 체류했기에 대한의 문화와 역사에 해박하다.

비글호 함장. 고지식한 인물이라서 빅 존과 리틀 존이 정식 선원으로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식만 제공하고 진짜로 급료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에게 신분증은 만들어줬다.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방문한다. 이 세계에서는 대한 학자들이 갈라파고스 군도의 생물군에 대한 논문을 먼저 발표하여 영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사전 지식이 있는 상태였다. 대한령 해우도를 방문해 대해우 생태도 연구하고 싶다고 하와국을 통해 요청한다. 재석은 이를 허락해준 것은 물론 직접 만나서 다윈이 진화론을 더 빨리 정립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힌트를 준다. 빈털털이인 빅 존과 리틀 존에게 미국으로 갈 여비를 주기 위해 웃돈을 주고 자신의 짐꾼으로 잠시 고용한다. 원래 그들을 마음에 들어해서 아예 조수로 삼고 싶어했지만, 두 존은 혹시라도 대한에서 암살자가 올 경우 다윈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우려로 거절한다.

  • 에마 웨지우드
찰스 다윈의 사촌누나이자 아내.[69] 다윈이 짐꾼으로 데려온 빅 존과 리틀 존을 동방의 왕자들이라고 소개하는 농담을 해서 두 존들은 다윈에게 자신들의 정체가 들킨 줄 알고 기겁했다.

5. 대미주[편집]



5.1. 미주합중국[편집]


1823년 시점의 미주합중국 총통. 신불랑국 나폴레옹 황제와 공동으로 나폴레옹-먼로 공동 선언을 발표한다.

재석이 미주를 방문했을 때 합중국 총통. 원 역사와 비슷하게 헨리 클레이의 지원에 힘입어 앤드루 잭슨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당선되었다.

원 역사대로 존 퀸시 애덤스에게 표를 몰아주고 국무장관이 되었다가 누벨 프랑스 주재 대사[70]로 부임해서 샤를성에서 재석과 안면을 튼다. 합중국에 방문해달라는 제의를 하는데 재석은 그의 대선에 이용할 꿍꿍이라고 짐작하며, 이를 빌미로 태자비에게 모략을 당할 수 있고, 합중국까지 다녀오는 사이 조부의 건강이 나빠지면 태자가 본국에서 무슨 난장판을 저지를지 모르니 좋게 거절한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누벨 프랑스에서 세운 외교적 성과를 내세워 민주공화당 후보로 차기 대선에 도전, 원 역사와 달리 앤드루 잭슨을 꺾고 총통에 당선된다. 노예제 찬성론자인 정적 잭슨의 기반을 깎고 대륙횡단철도를 놓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처럼 노예주들에게 노예보유세를 물릴 계획을 갖고 있다. 마틴 밴 뷰런을 상대로 승리하여 연임에 성공한다.

원 역사와 비슷하게 미영전쟁에서 활약해 두각을 나타내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애덤스에게 패배해 낙선한 뒤 절치부심해 차기 대선에 도전한다. 원 역사의 삶이 삶이고 작중에서도 인디언들을 몰아내 땅을 차지하고 더 나아가 누벨프랑스를 공격해 나폴레옹을 미주에서 쫓아내고 그 영토까지 합중국이 차지해야 한다는 무력을 통한 확장을 공개석상에서 주장하고 있어[71] 총통에 당선된다면 미주의 큰 위험요소가 될 것으로 독자들은 보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누벨 프랑스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큰 성과를 낸 헨리 클레이와의 경쟁에서 밀려 또 낙선하고 만다. 이후 고향인 테네시로 돌아가서, 남부의 노예주들을 결집하여 권토중래를 꾀하면서 대륙 중앙을 통과하는 철도를 놓고 누벨프랑스에 점진적으로 미국인들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자기네들 앞마당인 테네시와 조지아에서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땅을 빼앗으려는 시도부터 연방대법원의 제지로 막히자, 대한과 누벨프랑스가 버티고 있는 서쪽으로의 확장은 어렵다는 걸 실감하고 이번에는 미주 본토 밖으로 눈을 돌려 연방대법원이나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영향에 들지 않는 스페인령 쿠바를 노리고 식민지 해방이란 명분을 내세워 빼앗아 노예주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72]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클레이에게 패배한다.

헨리 클레이 이후 누벨프랑스 주재 대사가 되었고, 실제 인물처럼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이라 누벨프랑스에서도 노예제가 유지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대 주한미국대사로 임명된 연방 하원의원. 원역사처럼 검소한 삶을 지내고 인품과 성향도 모범적인 선비와 비슷해 대한에서 평판이 좋다. 6년간 대사로 근무하고 귀국하였다.

  • 에드먼드 로버츠
데이비드 크로켓 후임 주한미국대사.

1803년 토머스 제퍼슨 총통의 명을 받아 대한령 미주와의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 1804년 지선성에 도착하여 대한측 대표 김조순과 한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축출된 후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며 유럽에 남지도 신불랑국으로 따라가지도 않고 미주합중국으로 가버렸다.


5.2. 신불랑국[73][편집]


4년간의 프랑스 내전을 거치면서 두각을 나타내 마지막 국왕군 부대의 항복을 받아 직접 황제가 된다. 원 역사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 격파,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 등으로 유럽을 발 밑에 두었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제위를 잃었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로 프랑스가 더 번영한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지 않았기 때문에 홍경래의 도움을 받아 루이지애나로 도주한 후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워 원 역사에 없던 새로운 나라 신불랑국의 황제가 되어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새로 건국한 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1823년에는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 정신을 더럽혔다며[74] 멕시코를 침공하여 2년만에 수도 멕시코시티와 유카탄 반도까지 정복하고 멕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다. 원 역사에서는 1821년에 사망했지만 유배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 몰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서인지 수명이 연장되었다.
'전쟁의 신'이라고 할만한 군사적 천재성은 기술 발전이 빨라진 작중에서도 똑같아서 철도를 이용한 병력의 전략적 이동, 증기자동차를 이용한 야포 견인 등의 군사혁신으로 유럽을 제패했고,[75] 누벨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원정보다 더 긴 거리인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켰으며, 아파치 부족의 영역을 정복해서 전사추장으로 추앙받고 전사들을 공급 받는다. 명망도 똑같아서 부르봉 왕가가 파견한 진압군은 가는 족족 투항해서 훌륭한 병력 공급원이 될 뿐이었고, 재기에 성공하자 유럽에서 망명자들, 추종자들, 옛 부하들이 몰려들면서 빠르게 기반을 굳히는데 성공했다.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는 나폴레옹의 이름만 들어도 화를 내고, 황제가 아니라 번왕 취급을 하는 등 찬탈자라고 비난하지만[76], 대부분의 신료나 백성들에게는 프랑스 혁명이 수만명의 국민이 학살당하는 등 원 역사보다 더 참혹해지자 국민을 지키기 위해 거병하고 싸우는 족족 이겼기 때문에 불패자(佛覇者), 유주무쌍 등의 간지나는 칭호로 불리며 좋은 평가를 받는 듯.[77]
멕시코 원정 후 안보환경이 더 불안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지 대한의 협상 요청에 기꺼이 응하고 성대한 의전을 베풀며 사절단 단장인 재석과 드디어 회동하는데, 코르시카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재석은 그의 인사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통역이 대동해야 할 정도. 한때 유럽의 패자답게 오만한 면모를 숨기지 않고 투 머치 토커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사치에 무관심하고, 과거의 영광에 얽메이지 않고 신불랑국에 부족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과 협상을 통해 이를 보충하려고 하며, 수도 뉴올리언스를 미주의 교통 중심지로 만들 수 있는 대륙횡단철도 계획을 제시하는 등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오스트리아에 두고 온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재석은 손주 대하듯 하며 그의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어리기 때문에 피로하게 만드려고 여흥을 베푸며 협상을 지연시키는 노회한 모습도 보인다.
외전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괴팍해지긴 했지만 대륙철도 부설에 힘을 쏟으며 여전히 정력적으로 통치하고 있으며, 아들을 그리워하며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의 군주들에게 인정을 내세워서 호소하고 구출 작전을 추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하며, 동생 루이가 제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하자 격노하며 쫓아낸다. 결국 나폴레옹 2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엔 아예 존재를 숨기려고 하냐고 하다가 현실을 인정한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죽였다고 주장하며 나라 전역에서 위령미사를 올리게 했고,[78] 오스트리아를 포함 유럽 전 왕실에 분노와 저주가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 이후에는 나라의 힘이 부족해서 아들을 잃었다고 여겼는지 제국 경영에 더 몰두하며, 재석의 즉위 축하 편지에서 텍사스의 석유는 언제부터 캐낼 수 있냐고 독촉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양자. 의붓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신불랑국을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금 그분은 광대한 바다 저편에서 새로운 별을 띄우셨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빛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원 역사의 명언과 비슷한 말을 남기고 처자식을 처가 바이에른에 놓아둔 채로 나폴레옹에게 달려왔다. 이후 대한에서 사절단이 오자 접반사로 재석을 맞이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한 바이에른 국왕이 내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가 맘에 안 들어서인지 그가 점령한 멕시코 도시 이름을 따서 마타모로스 공작위를 새로 내린다. 황태자였던 나폴레옹 2세가 자살한 후 사실상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친자는 아니기에 재석은 북한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이라며 공석으로 남기고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을 자칭한 것처럼 황제가 아닌 칭호를 쓸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 슈니에 남작부인
수우족 라코타 분파 훙크파파 부족장인 훙크파파 백작의 딸. 나폴레옹이 수우족과의 혼인동맹을 위해 후궁으로 들였으며, 조상 중에 조선인이 있어 피부는 흰 편이라고 한다.[79] 이외에도 후궁들이 여럿 있으나 아무도 소생을 얻지는 못해서, 원역사에 없던 새로운 나폴레옹의 자식들이 태어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왔으며 아칸소 대공에 임명되었다. 명목상 후계자인 나폴레옹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억류되자 차기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인 샤를 루이를 밀어보지만 나폴레옹에게 호통만 듣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막내동생.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왔으며 미주리 대공에 임명되었다.

원역사처럼 나폴레옹의 원수 중 한 명. 처세에 능한 성격은 원 역사와 같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신불랑으로 떠나자 루이 18세에게 투항했고 루이 18세가 5만 정벌군을 맡겨 신불랑으로 보내지만,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옛 주군 나폴레옹에게 바로 투항한다. 그가 데려온 정예병 5만 덕분에 나폴레옹은 신불랑 전역을 확고하게 장악한다.

나폴레옹의 작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참모장. 신불랑국 건국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의 옛 노병들과 함께 신불랑국으로 건너간다. 신불랑국 국경에서 재석 일행을 맞이한다. 회담장에서는 나폴레옹의 사투리를 프랑스어로 통역한다.

나폴레옹의 멕시코 원정 후 점령지 안정화 작전의 총 책임을 맡아 점령지의 민심을 빠르게 안정시킨다. 그러나 한-신불 회담 직전에 병으로 인해 멕시코시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쉬셰 사후 후임으로 멕시코 안정화 업무를 맡게 된다. 1835년에 사망한다.

주르당 사후 후임으로 멕시코 신불랑군 원수를 맡게 되지만 폐병이 생겨서 피를 수시로 토해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 외에도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에두아르 모르티에, 에마뉘엘 그루시가 나폴레옹을 따라가 신불랑국 원수가 되었고, 조아킴 뮈라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살아있었다면 따라갔겠지만 원역사처럼 죽었다고 한다.

원역사처럼 폴란드의 독립투사로 살았지만,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세우자 은거했던 원역사와 달리 신불랑국으로 와 나폴레옹에게 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국인 폴란드를 잊지 않아 재석에게 대한 황실은 중종과 올렝카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하며 폴란드 재건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으나 재석은 황실에 올렝카의 자손은 공주 2명밖에 없고 그마저 모두 외국에 시집가 현재 황실에는 올렝카의 후손이 없다는 사실과 폴란드 재건 같은 중대사항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한다.

  • 카리브 후작 클로드 홍(홍경래)
신불랑국 개국공신이자 해군 총사령관. 남미주 출신 한인으로, 미주 출신도 벼슬에 많이 나가게 해달라며 일으킨 소규모의 항의성 폭동이 규모가 좀 커지면서 주모자로 수배되어 신불랑으로 도망친 뒤 사략선 선원이 되었다.[80] 이렇게 시작한 해적질이었지만 재능이 있어 사략선 선장까지 되었고, 우연히 불랑국에 들렀다가 때마침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나 신불랑으로 탈출해서 신불랑국을 건설하도록 돕는다. 이 일로 신불랑국의 최고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 공로로 신불랑국 해군 총사령관이 된다. 신불랑인이 된 후 본래 이름인 경래와 비슷한 클로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신불랑-맥고국 전쟁 때는 미국 사략선들을 포섭하여 카리브해에서 통상파괴전을 벌인 공로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한다. 연안경비정 8척 밖에 없는 해군을 재석에게 선보일 때 부끄러워하긴 하지만 기강이 잘 잡혀 있다는 묘사를 보면 지휘관으로서도 재능이 있는 듯. 신불랑국이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다르게 조선이 아닌 대한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대공이 아닌 태손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등 유독 대한 정세에 밝은 것은 고위직에 오른 클로드 홍의 영향이라고 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미국의 정권이 잭슨 파벌로 바뀌게 될 경우 수도 누벨오를레앙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진언하여 새 수도 누벨 아작시오로 천도하게 하는 등 나폴레옹의 충신으로 활약 중이다.

신불랑국 대법원장.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미주합중국 부총통을 지냈으나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에서 해밀턴을 죽여버리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나폴레옹 몰락 후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사회적인 비난을 받으며 지낸다. 그러던 중 안면이 있는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하자 다시 신불랑으로 망명했고, 프랑스 시절에는 홀대받았지만 국가 시스템을 새로 세워야 하는 신불랑에는 부통령 경력에 걸맞게 바로 대법원장의 자리에 오른다.

미국에서 신불랑으로 귀화해서 텍사스 준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원 역사처럼 텍사스 레인저를 만들어서 지역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운다.

  • 비뇽 남작
1831년 부임한 누벨 프랑스 공사.

5.3. 맥고국[편집]


원역사처럼 독재자의 길을 걷다가 혁명의 배신자를 징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침공해온 나폴레옹에게 완패하고 1825년 퇴위, 이탈리아로 망명한다.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정권인 멕시코 공화국의 신불랑 주재 대사.

자유주의적이면서도 중도를 지킬 줄 알아 나폴레옹이 멕시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내정했다.

멕시코 공화국의 친나폴레옹 군벌 중 하나로 등장했다. 원 역사처럼 군사적 능력은 뛰어나나 허황되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으로, 나폴레옹이 파나마 운하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재석에게 소개해줬지만 실상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로부터 중앙아메리카를 병합해서 세력을 넓히려는 꿍꿍이었다는 것을 알고 허탈해한다.[81] 미국-멕시코 전쟁이 없어질테니 엄청난 영토를 잃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멕시코 전쟁영웅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재석은 나폴레옹이 그를 적당히 반란 진압용으로만 쓰고 버리지 않을까 의심한다.


6. 대삼주[편집]



6.1. 그란 콜롬비아[편집]


원역사처럼 사망한 후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일단 해체되고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다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어 그의 꿈이 절반이나마 이뤄지게 되었다.

7. 대상주[편집]



7.1. 애집투[82][편집]


원역사처럼 현돌궐에서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받았으나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 군주가 된다.

7.2. 알제리[편집]


알제의 베이. 38년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알제리에 빚진 식량 값을 갚으라고 프랑스 사신과 싸우다가 사신의 뺨을 파리채로 때린 일을 명분삼아 프랑스 루이 19세가 전면 침공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분통이 터져 죽는다. 향년 72세.[83]
[1] 프랑스어로는 누벨 프랑스 제국, 원미주에 위치.[2] 埃集骰[3] 실제 역사상 영조와 휘와 묘호가 한자까지 동일하다.[4] 그 망나니 태자조차도 사석에서도 꼬박꼬박 폐하라고 칭한다. 다만 재석이 빙의한 태손 이진의 경우 워낙 끔찍한 사고를 겪은 걸 감안했는지 할바마마라 부르는 걸 용인했는데, 책봉을 받은 후 폐하라고 부르자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는다.[5] 그렇게 싫어해서 그런거겠지만 그가 전 유주를 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패망할 것이라고 본의 아닌 예언을 해버리게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나라를 세울 정도로 뛰어난 인재란 건 인정하고 있다.[6] 태자 이진(재석)+그보다 손위인 효왕과 화원공주+재석의 친동생 순친왕+이복동생들 25명. 막내는 유복자다. 그나마 적장남 이윤 같이 영아기에 사망한 아이들은 뺀 게 이 정도 숫자이며, 서른아홉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낳았을지 알 수 없다(...)[7] 미주 원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에 원한을 크게 품었다면 북미주가 위태로워질 뻔했다. 또한 유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원균의 죄를 가문에 연좌하지 않은 장조에 대한 모독에도 해당하므로, 부황 귀에 들어갔다면 결국 폭발해 폐태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8] 나폴레옹도 이 이야기를 듣자 뭐 그런 막장 아비가 있냐며 재석을 위로해줄 정도로 경악했다고 한다.[9] 이때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게 더 낫다고 하는 조야를 경천동지하게 할 만한 폭탄발언도 한다.[10] 아무리 태손의 능력이 뛰어나고 명군의 자질을 보여도 유교가 국시인 대한에서 자신을 내치면 태손의 입지가 불안해지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인 대한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더해 아버지의 애정으로 재석이 공부(자신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에서 적당히 손 놓길 바랬지만,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힘든 길을 걷겠다면 원하는 일을 실컷 시켜주겠다 속셈. 자신이 태황이 됐을 때 절대 대들 수 없고 일 잘하는 노예후계자가 생겼으니 좋아할 수 밖에 없고 공을 세우게 해서 입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 게다가 태황이 태손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하자 자신에 관심도 끄게 되었으니 더 싫어할리가 없다. 현실에 비유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처럼 자신은 제위에만 있고 재석에게 실질적인 일을 다 시키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실제 김조순의 사위였던 순조도 효명세자에게 전권을 넘기고 본인은 유유자적 쉬려 들기도 했다.[11] 확실한 것은 광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재석에게 평범한 아버지가 다 그렇듯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자비를 죽게 만든 음주운전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쩔"이란 태도를 보여서 처가 장문 김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적들을 만든 것과는 달리, 재석 앞에서는 성의있게 변명하며 쩔쩔매기까지 한다.[12] 그 전에 부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국정 현안을 파악하는 밑작업을 했다.[13] 그래도 12년 동안 부자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가 죽을 때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14] 여기에는 나라 기둥뿌리를 뽑아 말아먹을 정도로 놀아대서 국가재정을 파탄낸 후송 태녕제와 아예 나라를 망조로 이끈 서나라 함녕제의 사례가 있었고,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2대에 걸친 학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의 만력제와 태창제의 사례도 있다보니 이런 주변국들에 존재했던 최악의 암군들과 워낙 비교가 되어 이 정도 일탈에는 관대해진 감도 있어 보인다.[15] 원 역사의 최단기 재임자는 약 9개월 재위한 인종이었으나 작중에선 역사의 변동으로 재석이 첫번째로 빙의한 무종 때 낳은 맏아들 인종(칭제건원 후 인조 추존)이 48년을 재위해 최장기간 임금 노릇을 했다.[16] 상희도 2부에서 '(무종 때 첫번째 빙의 인생에서는)조선에 온 걸 하나의 긴 꿈처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으니.[17] 이게 진짜라면 작중의 몇몇 행동도 잘 설명된다. 원씨 가문을 욕한 건 빙의된지 얼마 안되어서 원사웅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리학적으로 원균 집안을 욕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원균 자손이란 것만 듣고 원균 후손이 호의호식하냐고 분개했을 수 있다. 금강산을 유독 좋아한 것도 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 자유롭게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 그랬을 것이다. 여성 교육에 반대한 것도 그가 원래 살던 시기가 원역사 2020년대였다면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을 실시간으로 겪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에 학을 떼여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18]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형은 죽었을 테고, 그럼 이운은 대신 태손에 책봉되었겠지만 공부에 관심 없는 성격 때문에 조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스트레스 받거나, 아예 계모 박씨의 야심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니 사실상 재석의 빙의에 따른 수혜자다.[19] 공부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낚시에 관한 구절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줄줄 꿰고 있다. 그러나 낚시 하면 동양권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태공망에 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오해받을 일을 피할 식견 정도는 가지고 있다.[20] 실제 박지원은 아들을 셋만 두었다. 즉 4남 박종선의 자손은 가상인물이다.[21] 이걸 보면 광덕제가 여색에 쓴 돈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심지어 그나마 아들이니 챙겼지, 딸을 낳으면 나 몰라라 한다고 하니 사생아는 더 많을 듯.[22] 조부인 원평제부터가 후계자가 아닌 황손들은 그냥 쩌리 취급했다. 그나마 화원군주만 첫 손주 버프로 좀 예쁨받았을 뿐 나머지는 차별 대우해 태손인 재석이 창경궁 전체를 마음껏 사용하며 지내는 동안 이정 몫으로 주어진 공간은 겨우 낙선당의 방 한 칸이었으며 아버지 광덕제는 재석에게만 관심을 좀 보였지 총애가 식은 김 선시 소생인 이정에게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고 대궐 밖에 자주 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23] 원평제가 정을 특별히 총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아들보다는 챙겨줘서, 분가할 때 재산은 넉넉히 주었다.[24] 원평제의 진짜 친동생 수복공주보다도 더 남매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다.[25] 그동안 몇차례 혼담이 들어와도 맏손녀를 어딜 감히 그런 집안에 시집보내냐고 걷어차버렸다고 한다.[26] 첫 언급 시에는 권세현이라고 나왔었다.[27]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데다 모친이 태황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는터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28] 나현이 직접 조모에게 같이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미주 출신인 김씨를 데려가 미주 백성들의 지지를 올릴 목적이었으며 각각 북인, 동인 계열 집안 출신인 최씨와 송씨를 데려가지 않으면 각 계열에서 불만을 품을 수 있고 또 태손이 현지에서 여색을 탐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9] 작가에 의하면 특정 연예인을 생각해두긴 했으나 상희와 올렝카가 실존하는 연예인들인 권나라, 마리나 본다코와 닮았다고 생각없이 말한 것이 당사자들에게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권나현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고 한다. 독자들은 김유정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30] 신혼 당시 재석의 키가 150cm 정도였는데 권씨의 키는 160cm도 넘어서 재석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한참 높은 권씨를 더 부담스러워한다. 어린 나이에도 이 시대 성인 여성들보다 큰 키이기에 재석은 권씨가 다 크면 상희나 올렝카만한 장신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31] 사실 아주 근거없는 건 아니고, 상희의 신분이 환생할 때마다 계속 상승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정실부인+재취였으니 이번엔 처음부터 정실이겠지?'였는데...[32] 그러나 천녀는 상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상희가 언급될 때마다 둘이 만나는 건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그걸 다 들어놓고도 재석 혼자 멋대로 기대해놓고 실망한 것이다.[33] 권씨의 입장에서는 귀엽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2살 어린 정수리도 내려다보이는 작고 귀엽게 생긴 꼬마이고,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원했던 상대가 아니어서 실망한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직 여자를 대하기 어색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34] 고향은 심양이다.[35] 3부 때 태황태후가 뽑은 후궁들도, 평범 이상이긴 했으나 절색까지는 아니었다.[36] 이쪽은 서자지만 장자라는 이유. 이미 성인이라 광덕제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다음 태황에 추대될 확률이 높기에, 동생이자 서자인 자기가 보위에 오르려면 얘도 없어지는 게 좋은 방해물이기 때문이다.[37]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예왕이 대대적으로 재평가받았다.[38] 이훈도 모든 잘못은 자기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재석에게 원한은 없었다.[39] 실존인물. 원역사에선 헌종 시기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반란을 모의했다가 적발되어 처형당했다.[40] 원역사에서의 한반도 최초의 폭탄 테러는 1875년 일어난 민승호 암살 사건이었다.[41] 정황상 폭탄을 만드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렇게 된 듯.[42] 핵심 가담자 30여명은 참수형,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소수의 사람들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단순 가담자 200여명은 기념함 겸 예식용으로 몇 척 남아있던 거북선과 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복무하는 벌을 받는다. 굳이 이런 처벌을 내린 데에는 광덕제의 서양 취향이 작용한 듯(...)[43] 재석이 몰래 읽는 '구대검협전'이란 무협지가 있는데, 제목이 비슷해서 그가 쓴게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조순이 임종 전에 재석의 문안을 받았을때 본인이 썼다고 인정한다.[44] 원평제 앞에서 학습을 점검하는 시간에선 배우지 않은 논어 구절을 물어서 재석을 낚고 진도를 더 빠르게 빼기도 한다. 이렇게 재석의 총명함을 이끌어내면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면 즐기는 듯(...).[45] 만약 광덕제가 낙마할 때 곁에 있었다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받을 수도 있었으니, 뒤로 밀려나 있던 게 박규원에게는 다행이었다.[46] 태자가 국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태자비는 관심을 안 가졌다가 박규수가 감사 인사를 올리러 와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태자비와 본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듯.[47] 재석은 외숙이 조롱당하면 결국 그 허물은 자기에게 돌아오는데다 비록 사기당해 산 것이지만 검 자체는 명검인 점을 고려해 태황에게는 장조의 아들 진안군이 사온 모조 장팔사모, 경조가 사온 모조 청룡언월도에 이어 쌍고검까지 갖춰서 삼국지 세트를 맞추기 위해 가품인 줄 알면서 샀다고 하자고 말을 맞춘다.[48] 사실 장덕순의 잘못은 아닌게 조정에서 기밀을 유지한다고 장덕순에게는 종성공이라고 알려주지 않고 소왕네 머슴이라고만 알려줬기 때문에 일반 유배죄인 수준으로 느슨하게 감시했기 때문이다.[49] 다만 스승을 닮아 출세보다 학문에 더 관심 많은 성격인지 재석은 속으로 장덕순은 벌이 아니라 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50] 그래서 김대건 안드레아가 1호 신부가 되었다.[51] 작중 세계의 광해군.[52] 4부 시대에서 나올 김대건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53] 사실 새로운 산업을 찾으려는 이유는 본국에서 주석을 생산하면 자신이 주지육림을 더이상 못 누리게 되기 때문이란 이유가 컸지만, 자기 생전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 생각을 정지할 수도 있었을테고 현실의 21세기의 자원 부국들 중에도 그런 생각으로 국가를 막장으로 밀어넣는 지도자들이 많음에도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것을 보면 군주의 자질이 없진 않았다고 봐야 할 듯.[54] 조정 중신들은 물론이고 하진교도 이게 조롱이라는 걸 알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고 좋다고 먹는다.[55] 이런 위험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재석에게 무인정사계유정난에 관한 설명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최대한 빠르게 궁을 장악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나 전후 처리에서나 가장 바람직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대한에 빚을 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집권하여 하와국에도 별다른 부담을 지우지 않았기에 현명한 판단이었다. 재석도 자신이 하진교의 입장이였으면 같은 방법을 택했을 거라고 인정했다.[56]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5년만에 만난 본국 사람들이 정말 못 알아보고 처음에 하진교인 줄 안 믿었다(...)[57] 실제로 작가가 이용갑을 이병갑이라고 오타를 내기도 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조병갑+이용태 설이 거의 정설이 되어있다.[58] 실제 역사 청나라에서 가경제 때인 1813년 자금성에 백련교 자객들이 침입하여 왕자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일의 오마쥬.[59] 처음에는 덕명의 주선으로 몰래 밀담을 했지만 그 후에는 덕명이 대놓고 그를 소개하고 공개적인 로비활동을 한다.[60] 대칸의 애첩을 굴마훈의 수하가 납치해서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고 강간한 후 대칸이 부른다고 럭더훈을 속여 그 방으로 오게 했는데, 머리가 둔한 럭더훈이 다른 궁인들을 부르지도 않고 혼자 대칸의 애첩을 풀어주었다가 자신이 강간범으로 몰리게 되자 무작정 도망부터 쳐서 대칸에게 범인으로 찍히게 되었다. 게다가 굴마훈은 럭더훈이 성서의 압살롬처럼 아버지의 왕위를 뺏기 위해 아버지의 애첩을 강간했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린다.[61] 대한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으니 당장은 불필요해진 요주, 항주, 명주 도통부를 먼저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강경한 구상을 내놓는다.[62] 덕성도 역시 예수교의 요소가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보면 생겨난 배경은 원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63] 원역사에서 나루히토의 모친은 다카쓰카사 요시코이다. 작 중 이에츠구의 누이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보아 원역사와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다.[64] 돈지랄 대결에서 졌기 때문(...)[65] 대한이 일본과의 합의를 어기고 아모국 내정에 간섭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부족장이 친일파니 일본에게는 오히려 이득이라 그냥 넘어갔다.[66] 원역사에서도 둘이 불륜 관계였고 막시밀리아노 1세가 이 둘 사이에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67] 이때 루이지애나로 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68] 다만 아주 틀린 건 아닌 게 누벨프랑스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군사를 상륙시킬 역량은 부족하므로 프랑스를 되찾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69] 찰스 다윈은 사촌간 혼인을 했는데,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당시는 물론 현대까지도 사촌간 혼인이 합법이다.[70] 일반적으로 특명전권대사는 본국에서 가까울수록 선호도가 높고 관계의 비중이 클수록 요직인데 바로 이웃나라에 관계도 밀접한 누벨 프랑스 주재대사라면 국무장관을 지낸 거물이 가는 어마어마한 요직이라도 이상하지 않다.[71] 그 나폴레옹이 있는 누벨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다고 내세운 논리가 "나폴레옹은 영국에게 패배했고 자신들은 그 영국과 싸워 이겼으니 질 리가 없다"는 지극이 단순한 근자감이었다.[72] 여기서 지지세력을 설득할 때 스페인은 유럽열강도 아닌 대한따위에게 패배해 필리핀을 뜯긴 나라니 별거 아니란 말을 하는데 작중 영국도 강대국으로 인정하는 대한을 우습게 아는 좁은 식견과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모습을 여실없이 보여준다.[73] 프랑스어로는 누벨 프랑스 제국, 원미주에 위치.[74] 물론 이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국가가 빠르게 팽창하는 데 필요한 재물을 확보하고 루이 19세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목적이 있었다.[75] 원 역사에서는 증기선이나 열기구 등의 신병기를 불신하며 채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철도나 증기 자동차가 이미 대한 등지에서 성능과 안정성이 입증된 기술이므로 대대적으로 채용한 것 으로 보인다.[76] 그래도 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며 그의 전술을 교육시키고 있다.[77] 작중 나폴레옹의 행보가 대한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과 비슷하기에 대한 입장에서는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78] 자살하면 교회법 상 미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79] 훙크파파 지파는 원 역사에서 웅크린 황소의 부족이었다.[80] 4부 초반 '추포를 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었다'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 대한에서 '공부하기 싫은 놈들이 벌인 난리'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원 역사같은 난리였거나 3부의 장길산 정도만 됐어도 홍경래가 죽거나 숙청당하지 않는 이상 신불랑과 협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홍경래도 재석을 만났을 때 정중한 예를 표했고, 엘리트의 자부심이 강한 김유근이나 못마땅해할 정도였다.[81] 나폴레옹은 그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공사의 어려움을 쉽게 짐작하고 대륙횡단철도가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82] 埃集骰[83] 파리채 사건은 원역사에서도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