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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문명황후 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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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고종 문성제 탁발준의 황후. 헌문제 탁발홍의 적모. 북연 출신인 진옹2주자사, 요서군공 풍랑의 딸. 시호로 '문명태황태후'를 받았으나, 풍태후, 문명태후, 혹은 부군의 시호인 '문성'을 따서 문성문명황후, 문성황후 등 다양하게 불린다.
헌문제와 효문제 시기에 2번의 섭정을 맡았고,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으로 그녀가 섭정 당시 조정을 휘어잡아 북위의 사실상 실권자로 평가받는다. 음란한 사생활과 측근들을 너무 감싸준 흠이 있긴 하나, 최근 학계에서 북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효문제 시기 전성기를 누릴 기반을 마련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편집]
아버지 풍랑은 북연의 황족으로 광평공에 봉해졌으나, 북연이 멸망할 때 형제인 장락공 풍숭(馮崇), 낙릉공 풍막(馮邈)과 함께 북위에 투항하였다. 풍랑은 북위에서 진옹2주자사, 서정대장군에 임명되어 나름 중용받는 듯 하다가 얼마 안 가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어린 풍씨를 돌봐줄만한 친척이 없어, 태무제 탁발도의 좌소의(左昭儀)인 풍씨의 고모가 그녀를 거두어 입궁시키고 친어머니처럼 돌봐주었다.
풍씨가 14세가 되었을 때, 문성제 탁발준이 그녀를 귀인으로 삼았고, 태안 2년(456년) 1월 29일[1] 에 귀인 풍씨를 황후로 높였다. 그리고 황후로 선택받지 못한 귀인 이씨 소생의 탁발홍을 태자로 삼으니, 이씨는 문성제에게 남은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는 서신을 남기고 북위의 자귀모사법에 의해 사사당했다. 풍씨는 죽은 이씨 대신에 아직 2세에 불과한 태자 탁발홍을 양육하였다.
화평 6년(465년) 5월 11일, 문성제가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붕어하니, 조야로 괴로워하였다. 3일 후, 탁발부의 풍습에 따라 문성제의 옷과 기물을 불태웠는데, 조정의 백관과 궁중의 후궁들도 모두 그 자리에 참석해 애도하던 중이었다. 이때 풍황후가 슬피 울부짖다가 기절하여 불 속으로 떨어지자, 좌우에서 급히 뛰어들어 그녀를 구출하였다. 풍씨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어났다. 헌문제 탁발홍이 문성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자, 풍황후는 태후로 높여졌다.
천안 원년(466년) 2월, 헌문제 재위 초기, 거기대장군, 태원왕 을혼(乙渾)이 황제가 어린 것을 기회삼아 조서를 조작하여 상서 양보년(楊保年), 평양공 가애인(賈愛仁), 남양공 장천도(張天度) 등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승상이 되어 조정을 농락하였다. 이에 시중 탁발비(拓跋丕)가 풍태후에게 을혼이 역모를 꾀한다 밀고하니, 풍태후는 농서왕 독발하(禿髮賀), 장수 우익(牛益)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을혼을 체포해 주살하였다. 이후 조정에 들어가 섭정을 선포하고, 중서령 고윤(高允), 중서시랑 고려(高閭), 안원장군 가수(賈壽)와 더불어 친히 정무를 살폈다. 풍태후는 고윤의 건의대로 각 군에 학교를 설치하고, 박사(博士), 조교(助敎), 생원(生員)을 두어 백성을 교화하는 등의 한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황흥 원년(467년) 8월, 헌문제의 부인 이씨가 황자 탁발굉을 출산하자, 풍태후는 스스로 탁발굉을 양육하겠다 선언하며 섭정을 중단하였고, 이때부터 헌문제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황흥 2년(468년) 6월, 풍태후의 오빠인 창려왕 풍희(馮熙)가 태부에 임명되어 헌문제를 보좌하였다.
문성제 사후, 과부가 된 풍태후는 남부상서 이부(李敷)의 동생 이혁(李奕)을 특별히 총애하여 궁중에 자주 불러 시중을 들게 하였다. 평소 풍태후와 이혁의 관계를 알고 불쾌해하던 헌문제는 마침 이부가 절친한 친구인 의조상서 이흔(李訢)의 뇌물을 수수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주었다는 고발을 듣자마자 이흔을 소환해 조사하였다. 신문한 결과 이흔의 죄는 과연 죽어 마땅하였는데, 사건을 조사하던 관리는 이흔에게 이부 형제와 태후의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고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은근히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흔의 사위인 배유(裵攸) 또한 옆에서 거들자, 이흔은 곧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진술하였고, 이를 바탐으로 범표(范檦)가 이부 형제의 죄 30여 가지를 열거하여 헌문제에게 보고하였다. 헌문제는 대로하여 즉시 이부 형제와 이부의 사촌 이현덕(李顯德) 등을 붙잡아 주살하고, 자백한 이흔은 감형하여 채찍질과 삭발, 노역장 유치로 대체하였다. 풍태후는 헌문제가 이혁 등을 주살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이로써 두 모자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헌문제가 이흔을 사면하고, 태창상서, 섭남부사로 삼아 국정에 참여케 하자, 풍태후는 분노하여 본격적으로 헌문제와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당시 18세이던 헌문제는 총명하고, 어른스러우며, 결단력이 있었으나, 풍태후의 압박에 못 이겨 황실의 어르신이자 인후하기로 유명한 숙부 경조왕 탁발자추(拓跋子推)에게 제위를 선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족들과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여 태자 탁발굉을 황제에 앉히고, 스스로 태상황으로 물러나 숭광궁(崇光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록 헌문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긴 하였으나, 정권은 쥐고 있어 5살인 효문제 탁발굉을 대신해 이전처럼 친정을 계속 하였다. 이때 헌문제는 대양만족(大陽蠻) 추장 환탄(桓誕)을 복속시키고, 대외 정벌을 지휘하여 유연과 토욕혼을 물리친 후, 하서(河西)와 회주(懷州)를 순행하는 등 황제로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단 명목상 안빈낙도를 칭하며 태상황으로 물러났기에, 풍태후의 정치적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승명 원년(476년) 6월, 풍태후의 헌문제를 향한 증오는 더욱 심해져 결국 짐독으로 헌문제를 암살하였다. 풍태후는 태황태후로 높여지고, 어린 효문제를 위해 다시 섭정하여 정무를 보았다. 풍태후의 총애받는 환관인 왕거(王踞), 장우(張祐), 기역(杞嶷) 등은 모두 관직과 작위가 더해졌고, 풍태후로부터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 않겠다는 철권(鐵券)을 하사받아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또, 이혁이 죽은 이후 새로 불륜 관계를 맺고 총애하여 자주 침실로 부르던 태복령 왕예(王叡), 비서령 이사충(李思沖)에게도 사사로이 상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풍태후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드는 이가 있으면 바로 죽였다.
풍태후는 측근들의 부정은 눈감아주면서 막상 업무에 관한 과실은 엄히 다스려, 아무리 총애하는 이라도 작은 실수를 하면 100대에 가까운 채찍질로 다스렸다. 하지만 징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총애하여 악감정을 남기지 않으니, 그녀의 측근들은 벌을 받더라도 불만을 품거나 배신을 꿈꾸는 일이 없었다. 풍태후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으로 조정을 다시 한번 휘어잡을 수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해도 감히 지적하는 자가 없었다.
태화 원년(477년) 11월, 회주의 백성 이기구(伊祁苟)가 공현(共縣) 북쪽에 위치한 중산(重山)에서 무리를 모아 이기방훈의 후예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니, 낙주자사 풍희가 이를 토벌해 진압하였다. 풍태후는 공현의 백성을 전부 역모죄로 학살할 것을 명했으나, 옹주자사 장백택(張白澤)이 간하여 그만두었다.
태화 2년(478년) 6월, 호랑이가 우리에서 탈출하고 궁궐로 들어가 효문제와 풍태후가 앉아있는 어좌 가까이에 이르렀다. 좌우의 호위병들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크게 놀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이부상서 왕예가 극을 들고 호랑이의 앞을 막아 서면서 황제와 태황태후를 보위하였다. 이 사건으로 풍씨는 왕예의 충성을 치하하고 더욱 신임하였다.
태화 2년(478년) 12월, 효문제의 외할아버지 남군왕 이혜(李惠)는 청주자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선정을 펼쳐 뭇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풍태후는 그런 이혜를 시기하여 효문제에게 이혜가 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일렀고, 이로 인해 이혜와 그 처자식은 모두 주살당했다. 북위의 백성들은 이혜의 죽음을 무척 애석해 하였다.
태화 4년(480년), 풍태후가 총신 왕예를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중산왕에 봉했다. 또, 중산왕 휘하에 중서시랑 정희(鄭羲), 낭중령 이하(李遐) 등 22명의 관속을 두게 하였는데, 이들 모두 북위에서 이름을 떨치던 선비들이었다.
태화 5년(481년) 2월, 사문(沙門)의 승려 법수(法秀)가 요술로 백성을 현혹해 북위의 도읍인 평성(平城)에서 반란을 꾸미다가 사공 구퇴(苟頹)가 이끄는 금군에게 붙잡혀 주살되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나라의 도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것을 주장했으나, 풍태후가 불허하고 왕예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수의 난에 연루된 자들을 사면하였다.
태화 5년(481년) 4월, 효문제와 함께 방산(方山)을 순행하던 풍태후는 그곳의 경치를 마음에 들어하며, 효문제에게 자신이 죽으면 여기서 장사 지내달라 청했다. 이후 방산에 미리 기영고석실(起永固石室)을 만들고, 산 위에 자신의 사당도 지었다.
태화 7년(483년) 5월, 효문제의 후궁인 귀인 임씨가 탁발순을 낳았다. 풍태후는 탁발순을 태자로 세우고자 귀인 임씨를 사사하고, 탁발순을 친히 양육하였다.
태화 7년(483년) 12월, 풍태후는 북위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혼(同姓婚)을 금지하였고, 2년 뒤인 태화 9년(485년)에는 조서를 내려 도참 사상을 금지하여 국내의 모든 예언서를 수거해 불태웠다. 또, 괴력난신을 엄히 금하여 무당부터 골목길에서 점치는 자들까지 통제하고, 《황고(皇誥)》 18편을 지어 태화전(太華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태화 10년(486년) 2월, 당시 북위는 각 마을의 통치를 그 지역의 호족에게 일임하여 통제력이 약했다. 마을을 다스리는 호족들은 일부로 호구 수를 누락시켜 실제보다 적게 보고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에 내비서령 이충(李沖)이 삼장제(三長制)의 실시를 건의하니, 중서령 정희를 비롯한 백관들은 지금의 제도를 시행한지 이미 오래되었다며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풍태후는 이충의 건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삼장제로 지방의 호적을 정리하였고, 이는 헌문제가 시행했던 조조제(租調制)와 시너지를 내면서 조세 수취 비용을 10배나 절감하여 나라에 큰 이득이 되었다. 그리고 삼장제는 훗날 효문제가 시행하는 균전제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태화 13년(489년) 6월, 여음왕 탁발천사(拓跋天賜), 남안왕 탁발정(拓跋楨)이 멋대로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다가 검거당했다. 본래대로라면 사형에 처해야 할 중죄였으나, 풍태후와 효문제는 그들이 경목제의 아들인 것을 감안하여 황신당(皇信堂)에서 그들의 죄를 묻고 삭탈관직과 금고종신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끝냈다.
효문제가 점차 성장함에따라 그 영특함이 돋보이자, 풍태후는 자신의 권세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 효문제를 빈 방에 3일 동안 가둔 뒤, 효문제를 폐위시키고 함양왕 탁발희(拓跋熙)을 황제로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태위 탁발비, 상서우복야 목태(穆泰), 상서 이충이 목숨을 걸고 간곡히 간하여 그만두었다.
태화 14년(490년) 9월 18일[2] , 태황태후 풍씨가 태화전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47세. 풍태후가 세상을 떠난 날, 어디선가 장끼들이 날아와 황궁의 태화전(太華殿)에 모였다. 효문제는 5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풍태후를 위해 애도하여 지나치게 몸이 야위었다. 풍태후는 사후 '문명태황태후(文明太皇太后)'로 추시되고 방산의 영고릉에 안장되었다.
3. 기타[편집]
- 현재 풍태후가 묻힌 영고릉은 산시성 다퉁시 신룽구(新荣区)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여느 고대의 무덤들이 그렇듯이 산시성에서 발굴에 착수했을 때는 이미 수 차례의 약탈과 도굴로 값비싼 유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털린 상태였고, 구리 비녀, 화살촉, 도자기 조각 등만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능묘와 석실도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어느정도 복원되어 관광명소가 되었다.
- 풍태후 사후 효문제가 보인 태도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효문제가 사실 풍태후의 친손자 혹은 친아들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다.
4. 미디어 믹스[편집]
- 측천무후나 여후 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사의 몇 없는 여걸이다보니 풍태후를 나름 비중있는 조연급으로 등장시키는 중국의 사극 드라마가 종종 나오는 편이다. 풍태후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로는 〈북위풍태후〉가 있으며, 대만 출신의 배우인 우첸롄(吴倩莲)이 풍태후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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