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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스 은행

덤프버전 :

Barings Bank
the Queen's Bank
베어링스 은행


업종
은행업
창립자
프란시스 베어링 남작
설립
1762년
해산
1995년 2월 26일
전신
존 & 프랜시스 베어링스사
후신
ING(기업)
소재지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런던
1. 개요
2. 역사
2.1. 초창기
2.2. 세계 대전 이후
2.3. 베어링스 은행의 몰락
2.3.1. 아르헨티나 투자 실패
2.3.2. 닉 리슨의 사기 거래와 파산



1. 개요[편집]


1762년부터 1995년까지 약 230년간 존속했던 영국의 은행으로, 전성기 시절에는 여왕 폐하의 은행[1]이라 불릴정도로 그 세가 강했다. 전성기 시절 로스차일드 가문과 양대산맥을 이루며 미국루이지애나 구입에 돈을 빌려줄 정도로 대영제국의 금융가를 상징했었으나 영국의 몰락과 함께 은행도 쇠퇴하였고 결국 닉 리슨의 사기 거래로 인해 파산하여 네덜란드의 거대 금융그룹, ING(기업)에 단 1파운드에 매각되어 없어졌다.

2. 역사[편집]



2.1. 초창기[편집]





2.2. 세계 대전 이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어린스 은행은 점차 쇠퇴해,

2.3. 베어링스 은행의 몰락[편집]



2.3.1. 아르헨티나 투자 실패[편집]



2.3.2. 닉 리슨의 사기 거래와 파산[편집]




닉 리슨은 1989년 베어링스 은행에 입행한 후, 1992년 은행이 싱가포르에 설립한 선물거래회사에 발령받았다. 오사카(OSE)와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모두 닛케이 225 선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리슨은 두 거래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한 지수차익거래로 이익을 얻었다.

지수차익거래만 하던 리슨은 방향성 투기거래, 즉 단순히 선물을 매수하거나 매도하는 전략을 시도하게 된다. 당연히 신이 아닌 이상 손실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비밀계좌로 분리되었다.

당시만 해도 싱가포르 거래소에서는 전산매매가 아닌 수신호를 이용한 공개호가 매매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직원들의 실수로 매수할 계약을 매도하는 등의 에러가 종종 일어났으며, 이런 에러에서 발생한 손실은 회사가 손실을 부담했다. 그래서 딜러들은 회사가 관리하는 에러계좌에 손실을 기록하였다. 리슨도 예외는 아니어서, 20계약을 매수해야 할 것을 직원이 실수로 매도해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시장이 불리하게 움직여 그는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냈다. 본사에 보고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라고 생각한 리슨은 이것을 다른 에러계좌에 숨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88888 계좌다.

그런데 88888 계좌를 이용하는데 맛을 들인 나머지, 리슨은 다른 손실도 모두 이 계좌에 기록해 손실을 은폐했다. 1992년 말에는 손실이 2백만 파운드로 불어났고, 1994년 말에는 5억 1200만 파운드에 달했다.[2] 그는 대차대조표와 장부를 교묘하게 조작해 본사에 손실이 보고되지 않도록 손을 썼으며, 본사에서는 그를 신뢰해 더 많은 돈의 관리를 맡겼다.[3]

계속되는 손실로 인해 수시로 증거금 추가납부 요구(마진콜)을 당했는데, 이 때부터 증거금을 충당하기 위해 닛케이225지수 옵션에 대해 스트래들[4] 매도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래들 매도는 시장의 변동성이 작아야 이익을 낼 수 있는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변동성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리슨이 손실을 2,000만파운드 넘게 입게 된다.

어쨌든 이 때만 해도 리슨은 월급 5만 파운드에 13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자랑하는 실력파 딜러였다. 당시 업적으로는, 1993년 당시 싱가포르 지사가 베어링스 은행의 전체 수익의 20%를 기록하였고, 1994년의 첫 7개월 동안만 해도 미화 7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주는 대활약을 보여 1993~4년 최고매니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1995년 1월 16일, 리슨은 닛케이 지수가 하룻밤 새 크게 변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스트래들 매도 포지션[5]을 취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17일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연히 닛케이 지수는 폭락했고, 리슨은 이 시점에서 5,000만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리슨은 니케이 지수가 다시 원상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물매수 포지션을 취함과 함께 20,000계약을 더 매도하고 특이하게도 일본 국채선물을 매도했지만, 한 번 떨어진 지수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고 국채선물 또한 급등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8억 2,700만 파운드(= 약 14억 달러 = 약 1.5조원)의 손실을 냈고, 이는 베어링스 은행 자기자본의 두 배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베어링스 은행 이외에도 영국 금융감독기관이었던 영란은행이 수습책을 마련하나 해당 자금이 쉽게 모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제금융 자금이 다 조달되기 전에 베어링스 은행은 파산을 선언했고, 이후 네덜란드ING 그룹으로 매각되고 만다. 매각금액은 단돈 1파운드.[6]

이 모든 상황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그는 겨우 만 28세였다.

1995년 2월 26일, 이 뉴스가 전세계를 강타하였고, 보도 3일 전부터 리슨이 실종된 상태였다. 그는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를 거쳐 도주했으나 이미 손실은 회사 측에서 파악한 상태였고, 결국 독일에서 체포되었다. 싱가포르로 송환된 그는 징역 6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암 치료를 위해 가석방되었다.



[1] the queen's bank[2] 위키백과에는 2억 800만, 리슨의 사이트에는 5억 12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원화 환산가는 12월 31일 당시 1파운드당 1230.59원이었으니 6,300억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예산의 대략 15%이었으니 엄청난 손실낸것이다.[3] 당시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는 리슨과 연관된 돈이 3,50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4] V자 모양으로 된 포지션. 대야 모양으로 생긴 포지션은 스트랭글.[5] 주가가 특정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경우 일정 금액의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될 경우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6] 이런 1달러 거래는 이외에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단순히 1달러에 법인을 합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인이 지고 있는 모든 부채도 합병 법인이 지고 간다. 그러니까 그 부채가 실질적인 인수 비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