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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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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1]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 이시애의 난(1467년)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 국방력 신장과 신무기 개발에 지속적으로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해 한국사 거의 최초로 전국적 인구조사[2]에 성공했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 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 북방 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년) 북정(北征)을 단행, 외교에 매우 유능한 신숙주와 특출한 군사 능력과 특유의 잔인성(?)을 가진 홍윤성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토벌케하고, 1467년(세조 13년)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3] 백성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 규형(窺衡),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직접 발명,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대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 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기, 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 기사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고개를 숙이며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반면에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군신을 믿지 못해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직접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 유장편 희유제장 서문 중(세조)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4]

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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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디 6조 직계제는 태종 때 실시했지만 세종 말년에 의정부 서사제로 변경되었다.[2] 양성지의 눌재집에 따르면 세조7년에 호70만 구400만인데 세조당시의 추정인구를 최대 800만으로 잡으면 절반 이상의 인구집계에 성공한 셈이다.[3]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4] 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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