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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년 11월 16일[1] (음력 태종 17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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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충녕대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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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1455년 8월 3일[A] (37세) (음력 단종 3년/세조 1년 윤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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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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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68년 10월 2일[B] (향년 50세) (음력 세조 1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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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수강궁 정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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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광릉(光陵)[2] 본래는 아들 예종이 능호를 태릉(泰陵)으로 정하길 원했으나, 신숙주가 태릉은 말년에 암군이었던 당 현종의 능호와 같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광릉(光陵)'으로 정해진 것. 결국 태릉은 나중에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호로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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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23대 영의정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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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1월 20일[3] ~ 1455년 8월 3일[A] (음력 단종 1년 10월 11일 ~ 단종 3년 윤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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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제7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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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8월 3일[A] ~ 1468년 10월 1일[C] (음력 세조 1년 윤6월 11일 ~ 세조 14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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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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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 10월 1일[C] ~ 10월 2일[B] (음력 예종 즉위년 9월 7일 ~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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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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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4남 1녀 (5남 2녀) - [ 펼치기 · 접기 ]
| 종교
| 유교 (성리학) → 불교
| 신장
| 약 175~180㎝[2] 세조가 직접 입고 다녔던 피 묻은 적삼의 등길이가 77㎝이고 화장의 길이가 93㎝ $(document).ready(function(){ $("#rfn-1").bind("contextmenu",function(e){ $("#Modalrfn-1").attr("style", "display: block;"); return false; }); $("#Modalrfn-1").on("click", function(){ $("#Modalrfn-1").attr("style", "display: none;"); }); $("#rfn-1").bind("touchend", function(){ $("#Modalrfn-1").attr("style", "display: block;"); }); $("#Modalrfn-1").bind("touchstart", function(){ $("#Modalrfn-1").attr("style", "display: none;"); }); }); [1] 10분 49초~11분 17초 참고였는데 피 묻은 적삼의 등길이와 화장의 길이를 감안했을 때 세조의 키는 175~180㎝로 추정된다. 실록에도 겨울에 홀로 팔을 걷고 근육을 드러냈다고 하여 다부지고 우람한 체구임을 입증하고 있다.
| 자
| 수지(粹之)[3] 자를 이름과 말미가 있게 짓는 예를 보면 알겠지만 세종대왕의 아들은 모두 구슬 옥 부수가 든 외자 이름을 썼는데 자의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옥(玉)의 속성을 뜻하는 글씨를 썼다. 당장 세조의 자만 해도 '순수(純粹)'나 '정수(精粹)'에 쓰는 粹(수)가 들어가서 옥이 티없이 맑고 깨끗하며 성분이 고름을 나타냈다. 또 세종대왕의 아들이 쓴 자는 한남군을 빼고 모두 끝이 之로 끝난다.
| 봉호
| 진평대군(晉平大君) → 함평대군(咸平大君) → 진양대군(晉陽大君) → 수양대군(首陽大君)
| 전호
| 영창전(永昌殿)
| 묘호
| 세조(世祖)[4] 본래 신종, 예종, 성종 셋이 삼망 중 후보였으나, 아들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표현해야 한다며 세조를 강하게 제안했고, 결국 이대로 정해졌다. [5] 공식까지는 아니지만 묘호를 붙일 때 대체로 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을 붙인다. 그리고 '~조'를 받을 만한 공은 사실상 왕조 개창, 중흥 정도는 되어야만 했던지라 고려 때만 하더라도 창업 군주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면 모조리 '~종'이었다. 그런데 조선 세조는 과분하다 싶을 정도로 중흥 군주 대우를 받았고, 태조 이성계 이후 조선 최초로 '~조'를 받았다. 사실 이후로도 그렇고 조선 왕조가 '~조' 인플레가 좀 심한 편.
| 존호
| 승천체도열문영무 (承天體道烈文英武)
| 시호
| 조선: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명: 혜장(惠莊)
|
|
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는 세조(世祖)
[4] 세조 사후 신하들이 올린 신종, 예종, 성종 등의 묘호를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신하들은 최종으로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제시했다. 하지만 예종은 세조로 밀어붙였으며 시호 또한 열문영무신성인효 대왕 8글자를 제시하였지만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대왕으로 20자로 지었다. 세조는 나라를 다시 만든 임금에게 주는 묘호로 한나라를 부흥시킨 후한 광무제를 생각하고 따온 것이다. 예종 자신이 “세종이 있어서 '세조'라는 묘호는 생각지 않았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한나라에는 세종이 앞에 있고, 세조가 뒤에 있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하여 관철된 것. 실제로는 '세조'라는 좋은 묘호를 받을만한 위인은 못 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안 좋은 묘호를 받은 왕은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해야할 부분이다. 사실 조선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묘호 인플레가 일어나는데 그 시작이 세조로 정통성이나 성과가 부족한 왕일수록 그 후손의 정통성도 부족하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묘호를 높이는 것. 묘호 작명법에는 나쁜 의미의 묘호들도 있긴 하지만 조선에서 사용된 일은 없다. 전임 왕의 묘호를 정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의 후계자로, 친아들이면 당연하고 아들이 아닌 방계 계승자여도 최대한 선대에게 좋은 묘호를 챙겨줘야 자기 권위도 더 서기 대문이다. 또 폐위된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경우 살아있을 때 각각 반정으로 이미 국왕 신분을 상실했기에 죽을 때 묘호를 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쿠데타 과정에서 폐위되기 직전에 자결이라도 했다면 나쁜 묘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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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의 친필 글씨(열성어필)
| 1436년(세종 18년), 진양대군(19세) 시절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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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대 전후에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행차해 쓴 영산전(靈山殿)의 편액(扁額). 좌측에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 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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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년(세조 10년)에 상원사를 중창하며 직접 친필로 써서 전한 상원사 어첩(御牒). 세조의 친필 한문, 한글 편지글 외에도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도 함께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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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명필로 유명했던 세조의 글씨는 조선 정부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활자화되었다. 왼쪽은 세종대왕이 10대 때의 세조가 쓴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만든 병진자로 찍어낸 자치통감강목, 오른쪽은 40대의 세조가 쓴 글씨를 정문으로 삼아 만든 정축자로 찍어낸 금강경 언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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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직접 쓴 글과 시[편집]
성균관 역재에서 읊은 시
제1장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면 고요하여 하는 것이 없고
처음이 없고 끝이 있으면 번거로운 법칙이 있구나
무로 평정하고 문으로 다스려 예로써 사양하기를 우선하니
백성이 변화하고 시절이 평화로워 근본이 반석 같네
제2장
잣나무 가지 곧고 길어 햇빛 덮어 가렸는데
유생들은 왕래하며 재마다 시름하는구나
구하지 않으려 해도 구하기를 근심하니
근심도 없고 구하는 바도 없어야 참으로 부합하네
제3장
구함이 없으면 반드시 세상을 구제함이 있을 것이고
뜻이 높고 마음을 낮게 하면 공적이 넓어질 것이네
오늘날 세상 다스리는 말을 대략 지시하니
잘 지키고 항상 지녀서 너희들은 잊지 말도록 하라
제4장
큰 성인의 신령이 큰 복을 내리시니
하찮은 내가 하늘의 복록을 받았다
게으르지 않고 허황됨이 없이 항상 조심하면
우리 임금과 신하가 오래도록 복을 누리리라
제5장
국운이 천년 동안 전해져 현명한 이 많으니
친히 여러 신하와 구결을 나누어 정하였다
북소리 종소리 반궁 안에 퍼지니
자자손손 이 시대를 이어 펼펴 가리라
열성어제[5]
강맹경과 신숙주에게 내려준 시
우리 선조가 북쪽에서 일어나
신묘한 무예로 조선을 세우셨다.
여러 임금께서 이어받아 힘쓰시어
나에게 전하신 지 여러 해가 되었네
중간에 공활한 파도를 만났으니
나는 그때 백성들 배에 올라탔다
밤은 지나가 해는 골짜기에 떠오르고
구름지자 달빛 하늘에서 깨끗하네
위세는 북쪽과 남쪽을 능가했으나
덕망은 현군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네
신임하는 신하들은 처음을 생각하여
끝까지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버리지 말라는 건 어떤 일을 말하는가
항상 뜻을 이루기 전 생각해야 한다네
서로 수양함은 그때마다 힘써야 하니
국운이 이에 끝없이 이어지리라
열성어제[6]
- 고조부: (추존)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 고조모: (추존)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
- 증조부: (추존)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 이성계/이단(李成桂/李旦)
- 증조모: (추존)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 조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 조모: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 아버지: 세종(世宗) 이도(李裪)
-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큰누나: 정소공주(貞昭公主)
- 형: 문종(文宗) 이향(李珦)
- 작은누나: 정의공주(貞懿公主)
- 매형: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 외조카: 안여달(安如獺)
- 외조카: 안온천(安溫泉)
- 외조카: 안상계(安桑鷄)
- 외조카: 안빈세(安貧世)
- 외조카: 부인 안씨(夫人 安氏)
- 외조카: 부인 안씨(夫人 安氏)
- 첫째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 첫째제수: 부부인 정씨(府夫人 鄭氏)
- 조카: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 조카: 덕양군(德陽君) 이우량(李友諒)
- 둘째동생: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 둘째제수: 군부인 남씨(郡夫人 南氏)
- 둘째제수: 제안부부인 최씨(齊安府夫人 崔氏)
- 조카: 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
- 조카: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 조카: 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
- 조카: 환성군(歡城君) 이징(李澄)
- 조카: 중모현주(中牟縣主)
- 조카: 청하현주(淸河縣主)
- 둘째제수: 부부인 안씨(府夫人 安氏)
- 조카: 영양군(英陽君) 이함(李涵)
- 조카: 단계부정(丹溪副正) 이인(李潾)
- 조카: 윤산군(輪山君) 이탁(李濯)
- 조카: 옥천군(玉泉君) 이옥(李沃)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셋째동생: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
- 넷째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 넷째제수: 완산부부인 최씨(完山府夫人 崔氏)
- 넷째서제수: 소실(小室)
- 다섯째동생: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
- 다섯째제수: 강녕부부인 홍씨(江寧府夫人 洪氏)
- 양조카(봉사손):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7]
제안대군은 원래 예종의 아들이라서 원래 세조와는 할아버지-손자가 되지만, 평원대군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제안대군을 양자인 봉사손(奉祀孫)으로 출계시켜 대를 잇게 되었다. 이로서 할아버지 세조와는 한 항렬을 뛰어넘어 법적으로는 삼촌-조카 사이가 되는 것이다.
- 막내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
- 막내제수: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宋氏)
- 막내제수: 춘성부부인 정씨(春城府夫人 鄭氏)
- 막내제수: 연성부부인 김씨(延城府夫人 金氏)
- 조카: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
- 조카: 이모진(李毛珍)
- 조카: 부인 이씨(夫人 李氏)
- 외증조부: 문하시중 영삼사사 문하부좌정승 청성백(門下侍中 領三司事 門下府左政丞 靑城伯) 심덕부(沈德符)
- 외증조모: 변한국대부인 송씨(卞韓國大夫人 宋氏)
- 외조부: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領議政 靑川府院君 安孝公) 심온(沈溫)
- 외조모: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夫人 安氏)
- 큰외삼촌: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심준(沈濬)
- 작은외삼촌: 영의정 청송부원군(領議政 靑松府院君) 심회(沈澮)
- 셋째삼촌: 영중추원사 정이공(領中樞院事 靖夷公) 심결(沈決)
- 첫째이모: 부인 심씨(夫人 沈氏)
- 둘째이모: 부인 심씨(夫人 沈氏)
- 둘째이모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栽)
- 셋째이모: 부인 심씨(夫人 沈氏)
- 셋째이모부: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使) 유자해(柳子偕)
- 넷째이모: 부인 심씨(夫人 沈氏)
- 넷째이모부: 전주부윤(全州府尹) 이숭지(李崇之)
- 막내이모: 부인 심씨(夫人 沈氏)
- 막내이모부: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
- 장인: 증 영의정 파평부원군 정정공(贈 領議政 坡平府院君 貞靖公) 윤번(尹璠)
- 장모: 흥녕부대부인 이씨(興寧府夫人 李氏)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남: 윤사분(尹士昐)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남: 윤사윤(尹士昀)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형: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남: 윤사흔(尹士昕)
- 처남댁: 부인 김씨(夫人 金氏)
- 처조카: 윤숙겸(尹叔謙)
- 처조카: 윤계겸(尹繼謙)
- 처조카: 부인 윤씨(夫人 尹氏)
- 처조카: 윤유의(尹由義)
- 처조카: 윤유례(尹由禮)
- 처조카: 윤유지(尹由智)
-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장남: (추존)덕종(德宗) 이숭/이장(李崇/李暲)
- 딸: 의숙공주(懿淑公主)
- 딸: 의령공주 혹은 요절한 공주[9]
야사 《금계필담》에서는 세조의 장녀를 의령공주로, 그 이름을 이세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존여부 자체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실록의 1446년(세종 28년) 기록에 "수양대군은 윤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고 있다" 라고 한 부분이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면 1446년(세종 28년), 세조의 슬하에는 의경세자와 이름 미상의 딸, 의숙공주만이 있었고, 예종은 출생 전이었다.
- 차남: 예종(睿宗) 이황(李晄)
- 며느리: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10]
- 며느리: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12]
- 손녀: 현숙공주(顯肅公主)
- 손자: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11]
당시 예종의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아버지 예종이 사망할 당시 제안대군은 4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도 당시 대왕대비였던 할머니 정희왕후의 지명으로 사촌형인 성종에게 뺏기고, 5촌 당숙이던 평원대군의 양자이자 봉사손으로 출계를 하였다.
- 후궁: 근빈 박씨(謹嬪 朴氏)
- 서장남: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
- 며느리: 임천군부인 김씨(林川郡夫人 金氏)
- 며느리: 봉산군부인 윤씨(鳳山郡夫人 尹氏)
- 손자: 순정수(順政守)
- 손자: 덕성수(德城守)
- 손자: 풍창수(豊昌守)
- 며느리: 안성군부인 양씨(安城君夫人 楊氏)
- 손자: 영천도정(寧川都正) 이감(李橄)
- 손자: 동산도정(東山都正) 이심(李深)
- 며느리: 창녕군부인 성씨(昌寧郡夫人 成氏)
- 손자: 숭선군(嵩善君)
- 손자: 기성도정(箕城都正)
- 손자: 청부군(靑鳧君)
- 서차남: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
- 후궁: 숙원 신씨[13]
신숙주의 서녀이며, 손자 며느리 폐비 윤씨의 6촌 언니이자 증손자 며느리 폐비 신씨의 7촌 시재종 이모이기도 하다.
- 후궁: 폐 소용 박씨[16]
본명 박덕중(朴德中), 출생년도 미상이다. 정3품 소용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죄를 짓고 내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추문으로 인하여 1465년(세조 11년) 9월 5일, 교수형에 처해져 죽었다.
[17]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1465년, 명 성화(成化) 원년) 9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
- 서삼남: 왕자(王子) 이아지(李阿只)[14]
2경(更)에 아지(阿只) 가 졸(卒)하니, 예조(禮曹)에서 상장(喪葬)의 의식(儀式)을 의논하여서 아뢰었다. 아지(阿只)는 곧 후궁(後宮) 박소용(朴昭容)이 낳은 아들의 이름인데, 2경(更)에 졸(卒)하니, 나이가 5세였다.
[15] 《세조실록》, 세조 9년(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11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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