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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만주국 및 대한민국의 군인.
1916년 9월 20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1939년
만주국 신경법정대학(新京法政大學)
[1] 1934년 만주국 사법부 법학교로서 신경에 설립, 1939년에 신경법정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46년 국립장춘대학에 합병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폐교되었다.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8년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이어 신경의 육군군수학교를 제2기로 졸업 후,
만주군에서 군수 및 경리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5년 8월 17일 간노 히로시(菅野弘)
[2] 2.26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만주로 밀려온 일본인 교관으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중대장을 맡았었다.
의 도움으로
박승환,
최창륜,
방원철 등 조선인 장교 7명이 함께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후 잠시
경찰공무원으로 있었으나,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한 뒤 조선경비대총사령부 군수조달과장과
미군정청 통위부 감찰총감을 거쳐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역임했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에서 배심심판관으로 참여했다.
1960년 제3군단장 재임 중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면서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다시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대한종합식품회사
[3] 월남 파병된 한국군의 전투식량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짐.
사장을 지냈고, 1981년 2월 28일 사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