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인관계

덤프버전 :

파일:영국 국기.svg 영인관계 관련 틀 파일:인도 국기.svg
[ 펼치기 · 접기 ]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영국
United Kingdom
यूनाइटेड किंगडम
인도
भारत
India
1. 개요
2. 단순 비교
3. 역사적 관계
3.1. 인도 제국 성립 이전
3.2. 영국령 인도 제국
3.2.1. 쿨리 인구 유출
3.2.2. 영국의 기독교 선교와 인도의 종교 개혁
3.2.3. 힌디어/우르두어의 분화 발전
3.2.4. 인도의 독립 운동
3.3. 독립 이후
4. 문화 교류
5. 교통 교류
6. 여담
7. 관련 기사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영국인도의 외교에 관한 문서이다. 영국은 19세기에 영국령 인도 제국을 통해 인도를 직접 지배하였었으며,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할/독립했다. 영인관계는 매우 복잡미묘하다. 사이가 좋다고 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연방에 속해 있어서 교류가 많은 편이다. 정부 차원에서의 관계는 가까운 편이나 민간 관계는 케바케 사바사다.[1]

영국은 현대 인도를 만들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다방면에서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반대로 인도 요리가 영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등 인도도 영국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인도는 본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식민지일 것이다.

2. 단순 비교[편집]


항목
영국
인도
면적
243,610km²
3,287,263 km²
인구
68,286,000명[2]
1,417,173,173명
수도
런던
뉴델리
언어
영어(영국식)[3]
힌디어,영어(인도식)
명목 GDP
$2조 6,382억 (6위)
3조 5,347억 $
1인당 GDP
$46,344
$2,121
무디스 국가신용등급
Aa3
Baa2
국방비
$615억
$-
정치형태
의원내각제(입헌군주)
의원내각제(공화제)
국가원수
찰스 3세 영국 국왕
드라우파디 무르무 인도 대통령
정부수반
리시 수낙 영국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3. 역사적 관계[편집]



3.1. 인도 제국 성립 이전[편집]


영국은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세워 무굴 제국 구자라트 주의 항구 수라트 시를 중심으로 교역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에게 선물을 보낸 사례가 양국 정상들이 교류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1661년 영국은 찰스 2세포르투갈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뭄바이지참금으로 넘겨받았는데, 이후 뭄바이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영국은 아우랑제브 사후 마라타 동맹의 공격과 시크 왕국의 수립으로 약화된 무굴 제국을 꼭두각시로 삼는다. 18세기 초반 무굴 제국의 주요 세입원 중 하나인 구자라트의 항구도시 수라트 그리고 구자라트의 산업중심지 아흐메다바드가 내륙 교역로들이 붕괴되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그 대신 영국의 식민지였던 뭄바이가 주요 항구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주요 세입원을 상실한 대신 영국의 식민지 뭄바이는 더욱 부유해졌다.

이후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 지역의 프랑스 세력을 거의 축출하고 프랑스가 식민 지배하는 영역은 일부 해안 도시에 국한시켰다. 영국은 이후 1799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기반을 다졌으며, 인도 아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급부상하던 마라타 동맹, 시크 왕국을 각각 1818년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 1849년 영국-시크 전쟁에서 차례로 격파한 후 인도 전역을 식민지배하게 되었다.

3.2. 영국령 인도 제국[편집]


이후 동인도회사는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폐지되고 영국은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미얀마로 추방시키면서 1858년 인도 제국을 세웠다.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은 인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부탄, 몰디브, 미얀마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였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인도산 면직물을 저렴한 가격에 수출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 과정에서 인도산 면은 산업혁명 시대 이후 인도에서 직접 가공되지 않고 영국으로 수출되었으며, 다시 영국산 면직물이 인도에 수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의 주 산업 중 하나인 면방직 공업은 붕괴하였다. 영국의 성공적인 산업혁명은 인도가 식민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반대급부로 영국의 산업혁명의 결과 인도인들은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영국의 지배하에서 인도는 1876~79년에 엘니뇨로 인한 대기근과 이에 따른 질병으로 2천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정황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비슷하게 일부러 기근을 조장한 정황도 보이는데 가뭄으로 기근이 발생한 지역에서 일부러 곡물을 수출시켜 기아를 더 심화시킨 정황도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근이 가장 극심할수록 오히려 영국으로 수출되는 곡물의 양이 증가하고 기근이 완화될 수록 영국으로 수출되는 곡물의 양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인도제국의 대 영국 밀 수출량
연도
수출량(톤)
1875
3,912
1876
9,614
1877
17,894
1878
5,334

이를 계기로 인도의 힌두교 단체와 이슬람 단체 내에서는 반영, 반기독교 운동이 심화되었다.

3.2.1. 쿨리 인구 유출[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의 [[쿨리#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노예 무역을 불법화하였고 이후 식민지 개발에 인도 제국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인도양의 피지스리랑카 카리브 해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동아프리카의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그리고 남아공,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미얀마 등등 세계 곳곳에 영국 식민지 시절 이동한 인도인 이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인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인도 전역의 상권을 장악한 자이나교 신도들 역시 영국 식민지 각지로 진출하였는데, 단순하게 말해서 오늘날 아프리카의 보석 시장은 인도 출신 자이나교도와 홍콩인들이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파키스탄계 그리고 구자라트인들은 주로 동아프리카로 이주하였으며, 타밀족들은 주로 말레이시아와 스리랑카로 이주하였고, 우타르프라데시비하르 출신들은 상당수가 카리브 해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미얀마의 경우는 방글라데시계 농민들과 마니푸르 출신 브라흐민들이 이주하였는데, 2차대전 전후로 마니푸르 출신 브라흐민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다시 인도로 귀환한 반면 로힝야라고도 불리는 방글라데시계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가지 못하고 미얀마에 남았고 후일 난민이 되어 인도와 방글라데시 각지로 망명하게 되었다.

3.2.2. 영국의 기독교 선교와 인도의 종교 개혁[편집]


영국의 경제 침탈과 맞물려 서구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선교하자 인도의 힌두교도와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뭄바이의 부유한 힌두교 상인들을 중심으로 힌두교를 베다 중심의 일신교 사상으로 재해석하고 힌디어 부흥 운동을 펼치는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 운동이 일어났다.[4] 아리아 사마지 운동의 목표는 1차적으로는 기독교 선교 저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리아 사마지 운동가들은 관공서에서 아랍 문자를 사용하는 대신[5] 힌디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여담으로 인도의 반서방 감정은 단순한 반서방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독립 이후에는 힌두교를 기독교와 이슬람으로부터 보호한다 즉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부터 인도 전통 종교를 수호한다는 민족주의로도 연결되었다.

무슬림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사이드 아흐마드 칸이나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로 대표되는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으로 이어졌다.

3.2.3. 힌디어/우르두어의 분화 발전[편집]


무굴 제국이 최종적으로 폐지되자 영국은 서서히 인도의 기득권을 차지하던 무슬림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인구 수가 더 많았던 힌두교도들의 편의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마하라슈트라 일대의 힌두교도들을 중심으로[6] 우르두어를 인도의 토착 문자인 데바나가리로 표기하고 페르시아어 어휘들을 다시 제거하고 산스크리트어 어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힌디어이다.

영국 정부는 관청에서 페르시아 문자 대신 무슬림들이 읽지 못하는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였다. 힌두교 신문, 잡지 발행부수가 급증하는 힌디어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사이드 아흐마드 칸을 비롯한 무슬림 지식인들은 인도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고립된 소수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고 우르두어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아흐마드 칸은 우르두어가 힌디어에 뒤쳐지지 않도록 서구 과학 기술 서적을 우르두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으며, 인도 각지에 대학에서 우르두어 강의도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사이드 아흐마드 칸의 우르두어 현대화 사업은 영국 유학파였던 무함마드 이크발이 이어받았다. 오늘날 파키스탄 외에도 북인도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우르두어는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완성되었다.

3.2.4. 인도의 독립 운동[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의 [[인도 국민 회의#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차대전2차대전 당시 영국은 자치권 확대, 독립등 약속을 내걸고 인도군을 동원하였다.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들과 네팔의 구르카들이 영국군으로 참전하여 여러 전선에서 엄청난 희생과 더불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국내 기준으로는 미얀마 전선에서 구르카들과 시크교도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영국군은 임팔 작전에 나선 일본군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 영국은 1차 대전 당시 인도군의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자치권을 확대해달라는 요구를 무시하였다.여기에 분개한 찬드라 보세 같은 자유 인도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일본군과 손을 잡기도 하였다. 상술한 임팔 작전 당시 찬드라 보세의 인도 국민군도 일본군 측으로 투입되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등등 인도 독립 운동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과 지지를 받았고, 결국 자와할랄 네루의 노력에 힘입어 인도는 1947년부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216186-0696884D000005DC-200_468x552.jpg

3.3. 독립 이후[편집]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폐지되고 인도는 영국 왕을 모시는 인도 자치령으로 독립한다. 당시 인도는 별다른 사전 준비 없이 파키스탄 자치령과 갑작스럽게 분할되었고 이 과정에서 펀자브 지방에서 수백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난민이 되었으며, 졸속으로 진행된 분할 과정은 후에 카슈미르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50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면서 최종적으로 독립하고 영국과 공식수교하였다. 독립 초창기 인도는 전 식민 지배국이었던 영국에 대한 반감으로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중국 견제 문제도 있고 해서 점차 영국과 과거사 문제에서 마음을 열고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이다.

오늘날 영국 내에는 다수의 인도계 영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인도계 영국인 상당수는 과거 영국 식민지(특히 동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재이민한 경우가 많다. 인도가 다민족 국가인 영향에다가 영국 식민지 시절 관료들이 영어를 사용했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영어는 인도에서 주요 공용어중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다. 북인도를 중심으로 힌디어를 국어로 사용하자는 운동도 간간히 벌어지지만 남인도 드라비다어족 계열 국민들의 반발로 영어가 공식적인 국어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인도 국민중 모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소수이고 대개는 다른 지방 사람들과 소통할 때 공용어로 사용하는 편이다. 또한 서로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인사하거나 안부를 물을 때는 종교적인 이유로 서로 영어로 인사한다.[7]

상술한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도계 쿨리 강제이민 노동자 영향으로 영국외에도 영연방 회원국들에서도 인도 내에서 쓰이는 여러 언어들 이를테면 타밀어, 펀자브어, 신드어[8], 구자라트어, 힌디어, 우르두어 등등이 사용되고 있다.

영중관계가 악화되면서 인도와 영국간의 무역 및 여타 경제교류가 대폭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영국은 실파 셰티와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인도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2019년 5월 10일에 인도의 암바니가 영국의 장난감백화점인 햄리스를 인수했다.

영국 정부가 간디를 기념하는 기념주화 제작을 추진한다고 한다.

영국에서 인도, 한국, 호주를 G7에 가입시키는 확장안을 내놓았다.

40여년전에 도난당한 힌두신상이 인도로 반환됐다.

보리스 존슨 총리와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향후 10년간 전방위적 협력 강화를 약속했다.#

2022년 9월 9일,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하자 인도는 9월 11일을 묵념의 날로 지정해 여왕을 추모하기로 했다.#

2022년 10월 25일 리시 수낙이 인도계 최초로 영국 총리가 되었고 이에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2022년 11월 15일,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시 수낙 총리는 모디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2023년 3월.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이 런던의 인도대사관에 난입해 인도국기를 내린 일이 발생, 인도 정부가 고위 외교관을 초치하며 영국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4. 문화 교류[편집]


18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근무하던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라는 영국인 문헌학자 겸 판사가 있었다. 윌리엄은 인도인들의 고전어가 유럽인들이 고전어로 받들어 모시는 라틴어, 그리스어와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학회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유럽 고전어를 비교하여 발표하였다. 여기서 비교언어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되었다. 연구 결과 산스크리트어는 라틴어, 그리스어와 같은 어족임이 밝혀졌으며,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세계 최대 어족의 실체가 샅샅이 밝혀져 언어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인도 요리는 영국의 식생활 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수도권인 잉글랜드의 경우, 커리가 대표 음식이 될 정도. 글래스고파키스탄계 영국인 시의원이 치킨 티카 마살라영국 요리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 인도 양국 사이에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영국(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치킨 티카 마살라를 만들어서 판 요리사는 방글라데시계이다.

근대 당시 영국을 포함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신론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우파니샤드는 고대 브라만교에서 불교, 자이나교가 갈라져 나오는 과도기에 편찬된 경전들인데 당시 브라만교는 아직 후대 힌두교처럼 완전히 다신교화하기 이전 범신론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었다.[9]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이 인도 문화에 심취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심지어 그는 힌두교로 개종하여 사후 화장한 유해가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한편 비틀즈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했던 전설적인 영국 록 밴드 레드 제플린정규 6집에도 카슈미르라는 곡이 실리기도 하는 등 인도 문화가 요리 이외에도 영국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91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91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5. 교통 교류[편집]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 영국항공이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을 통해 자주 왕래하고 있다. 영국인 관광객들이 인도 노선을 통해 인도로 자주 오고 있다.

영국령 인도 제국 시절에 영국은 인도에 철도를 놓았다. 하지만 영국의 지배 시절에 놓여진 철도가 100년 이상을 거치면서 사고 증가가 높아지고 있다.#


6. 여담[편집]


초창기 인도인들은 영국 문화를 배우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나 구자라트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하던 파르시[10]들이 제일 먼저 영어를 배우고 영국인들과 협력하면서 급속히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파르시는 인도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된 집단이다보니 20세기 이미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져서 오늘날 출산율이 0.8대라고 대한민국 수준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영국과 인도는 자국의 소를 많이 수출한 나라들인데, 각각 현지 기후에 맞게, 헤리퍼드와 브라만계열이라는 소를 수출하였다. 따라서 두 지역의 수많은 소 품종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품종이 되었다고 한다.[11]


7. 관련 기사[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영국을 찬양하는 인도인이 있는가하면 영국을 침략자, 원수 취급하는 인도인도 있다.[2] 2021년[3] 영국에도 스코트어, 웨일스어 등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지만 공용어는 영어이다.[4] 스리랑카에서는 불교 승려가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기독교 선교사와 공개 토론을 벌여 압승을 거두면서 불교 부흥으로 이어졌다.[5] 영국령 인도 제국은 명목상 무굴 제국을 계승한 제국이었고 무굴 제국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에서 우르두어와 아랍 나스탈리크체 문자를 사용했다.[6] 마하라슈트라 지방은 힌두 민족주의 성향인 마라타 동맹이 나와 무굴 제국에 대항했던 역사를 비롯해서 무굴 제국 및 그 문화에 대한 반감이 강한 지역이었다. 또한 뭄바이 일대를 중심으로 서구 문물의 유입도 빨랐다.[7] 무슬림이 나마스테나 던여와드 같은 힌디어 인사말, 감사인사 표현을 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권장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무슬림들하고 힌두교도들은 서로 인사하거나 감사표현할 때만큼은 Hi나 Thank you 같은 영어를 섞어쓰는게 더 편하다고 한다.[8] 주로 걸프 아랍권에서 많이 사용하는데 카라치나 수라트에서 걸프 아랍 국가로 건너간 순니파 무슬림 상인 집단 메몬족의 영향이다.[9] 여담으로 고대 인도 철학이나 불교는 영국보다는 독일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헤르만 헤세 등등 참조[10] 중세 초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피난해온 조로아스터교도 무역상들의 후손이다.[11] 실제로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헤리퍼드가 가장많이 사육되고 브라질서는 제부가 가장 많이 사육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