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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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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도(禮刀)[편집]
행사 때 양옆에 나란히 선 군인들이 서로 받들어 칼을 하여 입장객을 환영하는 것이다. 주로 결혼식 때 많이 볼 수 있다. 원래 군인들이 결혼할 때 하는 것으로 예도단 역시 군인들이 주로 하나 학생군사교육단, 부사관과 학생들이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요즘에는 결혼식장에서 다 알바생들 모집해서 한다. 결혼식 날 신랑의 위신을 세워주는 역할로 특히 군사경찰, 해병대, 특전사 예도단이 들어오면 아주 멋있다.
국군의 예식도는 육군·해병대·공군의 것은 같지만 해군(해병대 제외)의 것만 조금 다른데, 더 길고 곧은 형태이다.
따로 옷은 정해져 있지 않고 각군 군복, 정복이나 학과 제복등을 착용한 상태에서 요대, 흰장갑, 어깨끈, 칼에 추가로 베레나 모자 등을 착용하면 된다. 서로 요대 높이 맞추면 처음 해도 대충 폼은 난다.
보통 행사 때는 받들어 칼만 하나 결혼식때는 예도단이 신랑신부 퇴장 시 앞을 칼로 가로막고 힘든 미션이나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걸 다 통과 못하면 퇴장시키지 않는다. 미션은 보통 신랑에게 집중적으로 주어지나, 간혹 신부에게도 미션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신부에게 주는 미션의 경우는 대체로 목청 테스트 정도의 가벼운 미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1]
예도도 어디까지나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너무 짓궂거나 창피한 미션을 줄 경우[2] 신랑/신부는 물론 참석한 하객들도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심한 미션들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열이 너무 길면 식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지루해지므로 보통은 5열 내외로 편성하며, 미션없이 그냥 통과시키는 열이 있을 수 있다.
2. 예도(銳刀)[편집]
2.1. 개요[편집]
무예도보통지 2권에 수록된 무예. 중국 명나라 모원의가 천계 원년(1621)에 출판한 군사종합서적 무비지(武備志)에서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는 이름으로 24세[3] 가 수록된 것이 기록상 가장 최초이다. 모원의는 원래 검은 실전에서 쓸 수 있었고 당태종에게는 1000명의 검사가 있었는데[4] 그러한 검술이 모두 실전되었지만 조선에서 되찾았다고 하면서 이를 무비지에 수록했다. 무비지에 수록된 원본 삽화는 양손으로 쓰는 긴 양날검을 사용했으며 무예도보통지에선 일반적인 환도로 삽화를 그렸는데, 외날검으로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다.
예도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영조 10년(1734) 9월 29일 승정원일기의 기사에서 등장한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훈련도감에서 말하기를 일찍이 왜검의 법은 통신사를 보낼 때 따로 장교를 보내어 이국에서 배웠는데 예도는 우리나라의 검술(本國劍藝)인데 전수자가 극히 드물어 관무재(왕이 친람하는 무술 훈련)의 과목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나 근년 이래 교사를 선발하며 군중에 계고하여 배우는 자가 조금 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기사를 따르면 훈련도감에 예도가 나타나 도입된 것은 1734년이거나 빨라도 그 1년 전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영조 10년(1734) 10월 8일 승정원일기의 기사에서 좀더 자세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무관 고만흥(高萬興)의 아버지인 고후점(高厚點)[5] 에게서 비롯된 검술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어디에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검술이 기이하여 훈련도감에서 80여명이 행하고 있다고 나온다. 이후로도 간간히 언급되었고 영조 35년(1759)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武藝新譜)에 수록된다.
상반된 출처를 가진 두 검술이 결합한 것은 정조 14년(1790) 무예도보통지 출판 당시였는데, 무비지를 참조하자 세법의 이름이 같은 것을 깨닫고 이를 수록하려 했지만 현재 하는 예도와 조선세법의 내용이 많이 달라서[6] 원전으로써 무비지 24세에 예도에서 하는 4세를 추가[7] 해서 총 28세를 수록했고, 훈련도감에서 행하던 예도 훈련은 총도-총보의 형태로 수록했다.
2.1.1. 여담[편집]
초창기에는 본국검이라는 단어는 무비지의 조선세법과 혼동해서 쓰인 듯 하다. 본국검과 제독검은 어영청사례에서 인조6년(1628년) 관무재 시험 과목으로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현종 14년(1673) 4월 1일자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현종이 우리나라의 기예(本國技藝)를 시연하라고 하면서 먼저 본국검을 시연하라고 했다가, 어디서 나오냐고 무신 유혁연(柳赫然)에게 묻자 중국의 무비지에서 보았고 조선의 칼(朝鮮國刀)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대답하는 내용이 있다. 본국검은 단어와 초식을 보면 척계광의 기효신서, 한교의 무예제보에 수록된 장도와, 조선세법이 섞여 있으며 이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세법이 공식적으로 조선의 무예서에 수록된 건 무예도보통지가 처음이지만, 바로 위 문단에서 현종 때도 무비지에서 본 조선의 칼(조선세법)이라면서 조선세법을 시연했다는 기록이 상술되어 있고, 예도, 본국검 등 조선세법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검술들이 있음을 고려하면, 무예도보통지 이전에도 무비지를 보고 조선세법을 연구하거나 익히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원의가 쓴 무비지에서는 긴 쌍수 장검을 사용했지만, 무예도보통지에서는 환도로 하고 있다. 규격은 날길이 3척3촌에 손잡이 1촌, 무게는 1근 8냥이다. 이 길이에 대해 과거에는 영조척으로 적용하여 날길이만 1m에 손잡이는 30cm의 큰 칼로 복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 무게 대비 지나치게 크기가 컸고, 유물이나 그림에서도 그정도 비율의 환도가 거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주척으로 환산할 경우 날길이 66~69cm에 자루길이 20~21cm 정도로 환산되며 이 정도의 규격은 그림이나 실제 환도 유물들 중에서도 자추 볼 수 있는 만큼 주척 기준의 규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8]
조선세법이 성립되었을 시기는 대략 고려 중후기에서 조선 초 사이로 추정되는데, 사실 이때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군대에선 딱히 양날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그냥 여러 경우를 상정해 양날, 외날을 겸할 수 있게 검술을 만들었거나, 한국에서 조선세법을 만들 때 참고한 중국 검술이 양날검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에서도 군대에선 소멸하긴 했지만, 민간에선 소수로나마 쌍수 양날검을 사용한 검술이 있었고 말이다. 여담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숙종 대에 왜검술을 익혀온 김체건 역시 일본도 검술을 기반으로 만든 '교전'의 검보를 양날검으로 작성했고, 교전은 원래 양날검으로 훈련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역시 이런 경우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9]
조선세법의 기술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딱히 다른 국가들의 일반적인 검술들에 비해 뛰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무난한 양손 검술이다. 다만 다른 검술들과 다르게 여러 기술 중 요격세, 즉 허리 치기를 으뜸으로 삼으며 강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조선세법 나름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세법이 유독 허리 치기를 중시한 이유를 당시 한반도에서 주로 사용하던 도검의 규격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한반도에선 전통적으로 활과 함께 운용하기 좋게 비교적 길지 않고 가벼운 칼이 선호되었다. 따라서 양손으로 쓸 수 있는 검 역시 그렇게 규격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한 방에 머리를 치는 등 위력과 길이를 활용하는 일반적인 양손검 식의 싸움이 쉽지 않았고 아예 깊게 들어가 허리를 쳐서 상대를 1차적으로 제압하는 전술이 중시됐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를 아래의 '중국 검술과의 관계' 부분과 연계한다면 조선세법이 허리 치기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 검술을 익힌 무예가가 당시 한반도의 검술적 사상, 환경을 반영하여 검술을 개량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한 것인지, 언해본의 문장을 보면 현대 군대의 각개전투, 도수격투, 총검술이 담긴 전술학 교재 내지는 야전교범과 별 다를 바가 없다.(이 동작은 이러한 것이다. 먼저 A를 취하고 B 카운터가 들어오면 B'를 취하며 C로 마무리해라. 자세한 건 그림을 봐라.) 무예도보통지 역시 군사교범이었기에 당연한 수순이다.
2.1.2. 중국 검술과의 관계[편집]
예전에는 모원의가 조선세법을 조선에서 얻었다고 강조했고, 예도는 영조때의 군관 고후점을 통해 전수되면서 훈련도감에서 수련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본국검과 함께 부정할 수 없는 민족 전통의 검술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면서 조선세법의 단어는 물론, 세법의 이름과 초식까지 중국 이화창, 소림곤법천종 등 중국 쪽과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들과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화창과 소림곤법천종에서 발초심사는 무기를 낮게 두었다가 들어올리면서 옆으로 밀어내는 동작인데, 조선세법 점검세에서도 칼을 아래로 내린 그림에서 발초심사세를 거쳐 어거세로 전환하는 동작은 중국의 발초심사와 똑같다. 또 백사롱풍세는 봉두세에서 나타나는데, 이화창과 곤법천종에서 백사롱풍은 좌우로 섬잠화창하거나 아래로 내린 무기를 들어서 상대 무기를 옆으로 눌러 내리는 동작이고, 역시 봉두세가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기법임을 볼 때 조선세법의 백사롱풍세도 동작이 완전히 같다. 직부송서세는 중국 명나라 무술에서 주먹이나 무기를 찔러서 앞으로 뻗은 것을 말하는데, 조선세법에서도 똑같은 용례로 쓰인다.
조천세는 무기를 하늘로 들어올린 자세, 찬(鑽)은 찌르듯이 밀어 치는 것, 요(撩)나 략(掠)은 올려베기를 뜻하는 등 단어 몇개 수준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이 중국 명나라 무술과 똑같다. 그래서 단순히 단어만 영향받았다 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수준이고, 몽골어와 모골어처럼 근연종 수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모원의가 이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중국의 검술을 상서, 등운에 비유하며 조선에서 되찾았다는 시각을 예전에는 그냥 중화사상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격세 같은 자세의 단어가 일반적인 중국어 한자 문장의 형식과 안맞고[10] 우수우각, 좌수우각 등의 주로 쓰이는 손발을 표현하는 단어는 기존의 중국무술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서술법이며, 상살(上殺), 중살(中殺), 하살(下殺)의 살(殺) 표현은 이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세법이 단순한 중국검술이 아니라 조선식으로 변화한 검술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현재로선 중국 검술을 배웠던 한반도 국가의 사람이 그 검술을 바탕으로 어레인지를 더한 검술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즉 중국 검술을 기반으로, 혹은 중국 검술을 참고하여 한국식으로 개량한 검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이를 증명하는 확실한 사료가 없는 상황이라 어디까지나 가설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기원에 대해선 누가 만들었는지는 물론 성립 연대도 알 수 없으나, 사용된 자세명 등을 고려하면 일단 고려 후기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굳이 따지면 조선세법은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에 군영 등 공식 기관에서 만든 군영 검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하게 삽화가 그려져 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검보가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단순히 고려나 조선 민간의 어느 누군가가 혼자 삽화도 그리고, 무예를 익히고, 한문으로 작성했다는 것보단, 공식 기관 등에서 문무관이 협동해 검보를 만들었다는 게 설득력이 있다.[11] 이럴 경우 한반도에서 중국 무예서나 중국 무예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도 납득이 간다.[12] 또 조선세법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조선에 왔다가 검보를 찾았을 확률이 높은데, 이 역시 군과 관련된 출처에서 검보를 찾았다는 게 더 그럴 듯하기도 하다. 물론 이 역시 가설일 뿐이며, 사료가 없으니 아마 앞으로도 확실히 밝혀지긴 어려울 듯 하다.
다만 무비지의 24세가 어디의 것인가와는 별개로 고후점으로부터 전한 예도는 거기에서 증보된 4세를 포함하여 검무의 형태[13] 로 수련하는 것으로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 예도는 확실히 한국 검술이라고 할 수 있다.
2.2. 검결가[편집]
검결가는 검술의 움직임과 검리를 기억술을 이용해 기억할 수 있도록 시로 정리한 것이나, 예도, 조선세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출전에서 나온 것으로 모원의는 단간잔편 즉 짧고 간단하게 남은 여러 문서들에서 찾았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검결가에 딸린 해설을 보면 右足進步 右手來去二劍, 左足進步 左手一刺一晃(오른발 내딛으며 오른손에 검이 두번 오고가며 왼발 내딛으며 왼손으로 한번 찌르고 한번 흔든다) 등 칼을 왼손에 쥐었다 오른손에 쥐었다 하는 것을 암시한다. 정체불명의 한손검술의 검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전혀 다른 검결가를 쌍수검법인 조선세법에 수록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라진 검술을 다시 찾았다고 언급한 모원의의 언급을 보면 자신이 수집한 검술 관련 텍스트를 모두 수록하려고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3. 초습[편집]
초습은 예도-조선세법의 기본기를 정리한 것이나, 여기에 수록된 기술들이 24세+4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아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굳이 있다면 역린자, 탄복자, 어거격 정도이다.
뜻이 바로 와닿는 격법(擊法), 자법과는 달리 격법(格法), 세법은 어떤 개념인지 이해하려면 한중일을 아우르는 텍스트를 뒤져보고 그 맥락을 이해해야 해서 복잡하다.
대한검도회 조선세법에서는 세법을 베기 동작으로 해석을 하지만 이 때문에 베기 범주에 들어가는(치는 베기) 격법(擊法)과 일반인은 구분하기 힘들다.
다소 자유롭게 여타 무술과 대조해 정리하자면
안법-눈으로 동작을 읽는 무술 선구안
격법-칼끝에 기세 실어서 치기(검도의 그것처럼)
자법-찌르기
격(格)법-공방일체 자세 만들기(거정격은 내려베기로, 어거격은 그대로 탄복자로 찔러버리는 것으로 쉽게 이어짐)
세법-격처럼 멈추지 않고 칼끝이 통과하는 종류의 베기(나이프로 그어버리듯이 상대를 '씻어'버림)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역시 여타 무술의 사례들 및 검보의 흐름을 보고 대충 분류한 것이지, 조선시대 사람이 살아서 해설해주지 않는 한 명쾌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찬)격법이 검도식 기세 살린 치기와 비슷하고 어거격이 서양의 플루크 비슷한 것 아닌가 추측했는데 조선 사람이 살아돌아와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아래의 언해본을 보면 알겠지만 몇몇 키워드(직부송서, 조천세 등)는 본국검에서도 쓰이는 말이다.
2.4. 예도 28세[편집]
한글 번역은 언해본을 가능한한 그대로 옯김. 계속 반복되는 '법을 보라'는 그림을 보라는 의미이다.
2.4.1. 예도에서 증보된 4세[편집]
2.5. 예도총도[편집]
[언해본] 태아도타세 - 견적출검세 - 봉두세 - 우회 - 향우방적 - 좌우방신 - 일자 - 백사롱풍세 - 좌회 - 향좌방적 - 좌우방신 - 일자 - 백사롱풍세 - 우회 - 내략 - 전일격 - 좌협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은망세 3회 - 태아도타세 - 여선참사세 - 전일격 - 역린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요략세 - 흔격세 - 좌방신 - 우방신 - 금강보운세 - 우익세 - 병풍세 - 표두세 - 전시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은망세 3회 - 양각적천세 - 전일격 - 후일격 - 역린세 - 좌우방신 - 후일자 - 탄복세 - 요략세 - 표두세 - 일자 - 좌익세 - 찬격세 - 전시세 - 일자 - 역린세 - 좌우방신 - 전일격 - 일자 - 수두세
2.6. 복원 현황[편집]
한국에서는 일찍이 임동규가 세운 경당에서 해석을 시작했고, 경당에서 현 무예24기 보존회가 파생되는 등 한국의 무예도보통지 관련 단체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임동규가 무술인이 아니었던 관계로 해석에서는 이견과 충돌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동검도에서도 나름 복원하여 검법수련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검도회에서도 본국검과 조선세법을 복원하긴 했으나 동작 하나 할때마다 불편해보일 정도로 일일이 발도와 납도를 할 정도로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발도술 형태에 집착을 하고[14] 24세 전체를 복원하지도 않았으며 그림이나 동작 설명과도 전혀 맞지 않아 기존 복원 단체에게 비판받았고 검도인들도 검리에 맞지도 않는 걸 굳이 왜 하냐며 딱히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무예도보통지의 동작을 복원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평소에 사용하는 동작을 가지고 무예도보통지의 동작 이름을 적당히 끼워맞춘것에 불과한 수준이다.
중국인들도 상당히 주목하는 무술이기도 하며, 예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비지 조선세법에 주목한다. 현재의 중국 쌍수검술은 달마검을 기반으로 영화배우이자 무술인이었던 중국인 우승혜씨가 영화 장강대협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엄연히 창작이며, 과거 전국시대-한나라 시대에 걸쳐 유행했고 명나라 때까지 근근히 살아남은 쌍수검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명나라 장군 유대유가 민간무술가 이량흠에게 형초장검이라는 쌍수장검을 배웠다고 하나 그의 저서 검경은 봉술로 전환시킨 내용이 수록되어 중국쌍수검술을 직접적으로 다룬 사료는 무비지의 조선세법 뿐이기 때문에 옛 중국 쌍수검술을 연구하려는 무술인들이 가끔 다룬다.
하지만 대봉에서 검경 연구와 마찬가지로, 지금 사용하는 중국무술용어와 명나라 시대의 용어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각 고유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고, 대부분 자신이 하는 검술의 동작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현대 중국무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동작을 보여주는 한계가 있다.
[1] 아무래도 신부는 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그런 신부에게 팔굽혀펴기를 하라든가 큰 몸동작을 요구하는 미션은 불가하기 때문이다.[2] 팔굽혀펴기를 통한 남편의 체력 테스트, 신부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목청껏 외치는 성량 테스트나 신부를 향한 신랑의 가벼운 애교 정도가 가장 무난하고 일반적인 미션이다. 하지만 간혹 보기 민망한 춤을 추라는 미션, 듣기 거북한 말을 외치게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심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지나치게 심한 미션은 자칫 행복한 결혼식의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하는 것이 좋다.[3] 거정세, 점검세, 좌익세, 표두세, 탄복세, 과우세, 요략세, 어거세, 전기세, 간수세, 은망세, 찬격세, 요격세, 전시세, 우익세, 게격세, 좌협세, 과좌세, 흔격세, 역린세, 염시세, 우협세, 봉두세, 횡충세[4] 사실은 송태종 1000명의 검사의 일화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5] 승정원일기에서는 高後漸이라고 록되어 있다.[6] 예도(銳刀)는 이미 모씨(茅氏)의 세법(勢法)으로 도보를 만들었는데 지금 연습하는 도보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금보(今譜)로 따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또 별도로 모(茅, 모원의)의 설해(說解)를 만들어서 이미 익힌 자로 하여금 배운 것을 폐하지 않게 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근본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무예도보통지 범례[7] 태아도타세, 여선참사세, 양각적천세, 금강보운세[8] 이전에는 양손 검술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두 손 사이에 어느정도의 간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20cm 전후의 칼자루는 너무 짧아 주척 역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운용 면에서 양 손의 사이에 어느정도 공간이 있는 게 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두 손을 밀착해서 칼을 다룬 사례는 역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두 손을 밀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20cm보다 약간 더 짧아도 과거에는 칼을 잡을 때 고전적인 해머그립인 경우가 많았기에 양손 운용이 가능했다. 거기에 옛 사람들의 체격이 지금보다 평균 10cm 이상 작았던 것을 고려해보면 20cm의 칼자루는 양 손으로 검을 다루기 충분한 크기라고 봐야 한다.[9] 자세히 설명하자면 교전은 왜검술을 익힌 김체건이 이를 기반으로 만든 검술 대련 체계인데, 원래는 양날검으로 검보의 삽화가 작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들이 양날검으로 훈련하다가 자주 다쳤고, 이후에는 교전보의 그림을 외날검으로 고친 후 가죽 씌운 목검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고려하면 훈련용으로는 양날검이 나름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긴 있다.[10] 중국 문법으로 따지면 요격세는 허리로 친다가 되며 허리를 친다는 격요세가 맞다. 물론 중국에서도 강조 등을 이유로 가끔 어순을 바꾸는 경우도 있긴 있다. 다만 세명은 그렇다쳐도 자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요격세자, 즉요격야"라고 어순이 바뀌어 있는 것은 확실히 어색하게 느껴진다.[11] 후대의 무예도보통지 제작에도 무관들과 함께 문관인 이덕무, 박제가가 함께 참여했다.[12] 당장 명나라에 역수출된 조선세법이 다시 조선군에서 수련된 것도, 조선세법이 기록된 명나라 군사서인 무비지가 조선에 수입되어 이를 보고 익힌 것이니 말이다.[13] 칼을 던지고 받는 것은 박제가의 정유각집 중 검무기에서도 묘사될 만큼 조선 검무 특유의 동작이었다.[14] 정작 무예도보통지에는 어떤 검술이든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검을 빼놓고 시작할 정도로 발도와 납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