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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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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
Gösta Mittag-Leffler


본명
망누스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
Magnus Gösta Mittag-Leffler
출생
1846년 3월 16일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927년 7월 7일 (향년 81세)
스웨덴 스톡홀름[1]
국적
[[스웨덴|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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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수학자
학력
웁살라 대학교 (1872년 박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스웨덴의 수학자. 복소해석학을 주로 연구했다. 미타그레플레르 정리가 유명하고, 그 밖에 이름을 딴 여러 가지 개념이 있다.


2. 생애[편집]


스톡홀름에서 아버지 욘 올로프 레플레르와 어머니 구스타바 빌헬미나 미타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에 어머니의 성인 "미타그"를 붙인 건 부모의 뜻이 아니고 20살에 스스로 결정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찍 죽은 그리움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 동생 안네 샤를로테 레플레르는 작가로 활동했다.

웁살라대를 나와 1872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독일로 유학을 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에게 배우기도 했다. 헬싱키대에서 1877년부터 교수 생활을 시작해 1911년 은퇴했다. 은퇴 후엔 사업을 펼쳤으나 1922년에 정리하고 말았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아, 수학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가 정교수 자리를 얻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흔히 알프레드 노벨과 갈등해서 미타그레플레르가 상 받는 게 눈꼴사나웠던 노벨이 노벨상에서 수학상을 뺐다고 알려진 루머의 주인공이다. 미타그레플레르가 1883년부터 스웨덴 한림원에 가입했기 때문에 설득력 있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한마디로 근거는 없다. 사실 미타그레플레르는 노벨위원회에도 참여했던 경력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자취는 1903년 물리학상 시상 당시 마리 퀴리의 수상을 지지했던 것.

이름을 딴 빙하 "미타그레플레르브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