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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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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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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fff 일본 제국 제24·34·44대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 内田康哉 | Uchida Kōsa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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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5년 9월 29일 |
히고국 야츠시로군 류호쿠정 (現 구마모토현 야츠시로군 히카와정) | |
사망 | 1936년 3월 12일 (향년 70세)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24대 외무대신 |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 |
제34대 외무대신 | |
1918년 9월 29일 ~ 1923년 9월 2일 | |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1차)[1] 하라 다카시 총리가 암살당하여 후임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가 취임할 때까지 외무대신으로서 1차 권한대행을 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으로 다카하시 총리도 사이토 마코토 총리와 함께 2.26 사건에 휘말려 전임 하라 총리와 똑같이 암살당했다. |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2차)[2] 가토 도모사부로 총리가 대장암으로 급사하여 후임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취임할 때까지 외무대신으로서 2차 권한대행을 했다. 야마모토 내각이 조각되자 사임했고, 후임 외무대신직은 야마모토 총리가 겸임했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한 번 더 맡았다. | |
1923년 8월 25일 ~ 1923년 9월 2일 | |
제44대 외무대신 | |
1932년 7월 6일 ~ 1933년 9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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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외교관, 정치인이다. 작위는 백작. 외무대신과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지냈다.
2. 생애[편집]
구마모토번 출신으로 번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도시샤영학교(현 도시샤대학)에 들어가 2학년 때까지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자퇴하고 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외무성에 입성해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에서 계속 외무대신으로 근무하였다.
1921년 암살된 하라 총리와 1923년 병사한 가토 총리가 유고하자 우치다는 내각 서열에 따라 수상 임시대리를 맡았다. 또한 두 번째 대리 시절인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해군대장인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차기 수상에 오르기까지의 공백기 동안 재해 수습을 지휘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강화와 시베리아 출병 등의 전후 처리도 맡기도 하였고, 1930년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에는 남만주 철도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이때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초기에는 사건불확대를 원하였으나, 당시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대면한 후 적극적인 확대파로 전향하였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발탁되면서 만주국을 승인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1932년 중의원에서 "나라를 초토화하더라도 만주국의 권익을 양보할 수 없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36년 3월 12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