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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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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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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책후
신규 책봉

초대
원술


칭제



중 초대 황제
袁術 | 원술

파일:Yuan_Shu_Qing_portrait (1).jpg
출생
155년
후한 예주 여남군 여양현
사망
199년 6월 (향년 44세)
중나라 양주 수춘
재위
중의 황제
197년 ~ 199년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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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袁)

술(術)

공로(公路)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연호
불명
부모
부친 원봉


1. 개요
3. 평가
3.1. 전통적 평가
3.2. 현대의 평가
3.2.1. 호걸로서의 명성
3.2.2. 처참한 군재
3.2.3. 인간성
3.2.4. 원씨 본가와의 관계
3.2.5. 원소와의 악연
3.2.6. 사상
3.3. 칭제
4. 가족 관계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군벌로, 예주 여남군 여양현 사람.

사공 원봉의 삼남으로 4대에 걸쳐 삼공의 직위에 오른 원가의 적자 후예다.《삼국지연의》에서는 원소와 사촌 관계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소가 아들이 없는 원성의 대를 잇기 위해 입적된 원봉의 얼자(孼子)라는 기록이 있어 호적상으로는 사촌 관계, 생물학적으로는 이복형제다.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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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편집]



3.1. 전통적 평가[편집]


漢末刀兵起四方(한말도병기사방)

한나라 말기 군벌이 사방으로 일어나더니

無端袁術太猖狂(무단원술태창광)

원술이 감히 미쳐 날뛰었네

不思累世為公相(불사누세위공상)

대대로 공경 벼슬 누린 것은 생각않고

便欲孤身做帝王(변욕고신주제왕)

갑자기 홀로 제왕이 되려 하였네

強暴枉誇傳國璽(강포왕과전국새)

난폭하고 부질없이 전국옥새를 자랑하다가

驕奢妄說應天祥(교사망설응천상)

교만하고 사치하여 망령된 말을 하니 응당 천벌을 받았구나

渴思蜜水無由得(갈사밀수무유득)

목이 말라 꿀물을 찾지만 얻지 못하고

獨臥空床嘔血亡(독와공상구혈망)

텅빈 침대에 외로이 누워 피 토하고 죽었도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원술의 최후에 대해 평한 시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란하였으니 그가 망한 것은 자업자득일 뿐이다

진수, 정사 삼국지


사치스럽고 음란하다는 말만으로는 원술의 거대한 악행을 간단히 평할 수 없다.

배송지, 정사 삼국지 주석


당대에도 후대에도 최악의 평가를 받았던 인물. 천하를 휘어잡을 수 있는 탁월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삼국지 최고의 금수저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능력, 인성, 운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고 혈통말곤 내세울 게 없는 혈통 원툴 주제에 과욕을 부리다가 몰락을 자초하여 가짜황제 역적원술, 꿀물, 꿀물 황제 등 웃기는 별명들과 함께 웃음거리로 남은 인물.


3.2. 현대의 평가[편집]


원술에 대한 전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항상 최악이었고 모자라는 능력으로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부리다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딱히 재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동탁은 종종 파격적 재해석이라는 명목 아래 사실은 개혁자였다는 어그로성 논평이나 각색이 유행을 탔던 것에 반해 원술은 그런 것도 없고 오히려 소인배적 면모가 극대화되며 희화화된다.

그러나 번역된 역사적 기록들이 인터넷 상 관련 커뮤니티에 퍼지고 원술에 대한 분석적 담론들이 나타나는 팬덤문화 발전의 과정에서 원술은 일정 부분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해 젊은시절부터 복합적 평가를 받아왔을지언정 한때는 대단히 인기있던 유력 정치주자였고, 가벌의식에 찌든 소인배라는 관념과 달리 나름대로 소탈하고 대범한 측면이 있었고, 나름의 분명한 현실인식을 통해 때때로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극도의 군사주의적 사고를 통한 유연하고 자유로운 전략적 시야가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군벌 지도자이기도 했다. 동탁을 피해 맨몸으로 달아났지만 녹림의 호걸들과 손견이라는 강력한 무장을 포섭하며 드넓은 남양군을 장악하며 형주와 예주를 뜻대로 움직였고, 헌제의 정통성 문제와 유우 추대라는 일종의 분리독립 이슈로 표류하던 반동탁 연합에서 친헌제와 반동탁 그리고 헌제 구출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며 낙양을 수복해버리는 강렬한 면모를 보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원소와의 대결에서도 공손찬-장연-어부라-도겸을 동원해서 원소와 친원소 군벌들에게 대항하는 대포위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야전사령관으로서 원술 자신의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다는 점은 손견이 죽은 뒤로 원술의 발목을 크게 잡아서, 원술은 북양주를 장악한 것 외에는 판도를 결정지을 군사적 승부처에서 사실상 전패를 거듭하며 중대한 전투에 번번이 패배하는 종이 호랑이 같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부족한 군재를 메꾸기 위해 테러와 협잡을 동원한 암수에 의존하며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는 모습은 그의 정치적 신뢰도를 적잖이 훼손하였다. 실제로 그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여포가 일방적으로 혼약을 깨고 조조에게 붙어버린 사건은 물론 여포의 줏대없음과 어리석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런 원술의 행보에 시달려 왔던 여포가 원술에 대한 감정적 원한과 불신을 가지게 되면서 촉발된 것이다. 여포만큼이나 원술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손책의 이탈 역시 원술이 여러차례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감정적 피해의식을 심어준 것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원술이 자신의 전략구상을 강력히 추진하며 중국 정세를 뒤흔들던 바탕에는 유협적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변방인, 태평교도, 흑산적, 흉노 등을 위시해 당대의 교양있는 식자층의 관념질서 상에서 야만 그 자체로 인식되던 흉포한 무력집단들을 정치판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의 폭력성을 부추김으로서 내전기의 지옥도를 형상화한 가혹한 학정이 깔려있었다. 이들의 지지를 바탕삼아 공권력을 상대로 점령지를 넓혀가며 합의를 요식행위로 여기는 명분없는 세력 확장만을 거듭하고, 원초적인 폭력과 공포를 전면에 동원한 지배와 수탈을 일삼으며 기세등등하게 참칭까지 벌였던 원술의 행보는, 한나라 최대의 유서깊은 명문가라는 배경을 가진 정치가로 보기에는 너무나 천박했으며 어떤 점에서는 유목제국의 선우나 농민반란군 지도자에 더 가까운 측면이 있었고, 원술에 대한 기록을 남긴 기록자들과 기록 속의 주체들은 원술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일관되게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술의 전기에서 그가 이미 반동탁연합 시절부터 무군지심을 품은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나, 193년 이후의 행적이 끊어진 채 도참에 심취해 황제를 참칭하는 모습으로 곧바로 넘어가는 점에서 보이듯 사서에서 나타나는 원술은 처음부터 참칭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고, 기록의 교차검증을 통해 나타나는 원술의 칭제 시점 상황은 그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원술이 역적의 상징으로 불리한 증언들 위주로 기억되고 그 증언들이 부정적 시선 아래 편집되면서 실제 원술과는 괴리가 있는 굴절된 인물상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어느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사실 원술은 여러모로 그 형인 원소와는 다르면서도 같은, 후한말이 낳은 원소와는 다른 종류의 괴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괴물이라는것은 아우구스투스 같은 정치 괴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후한말이라는 시대가 낳은, 시대를 파괴하는 뒤틀린 존재로써의 괴수이다. 이는 원소나 원술이나 다를게 없다. 후한이 지방과 변경을 소홀히 한 댓가로 낳은 양주 촌놈 동탁과, 후한이 비틀린 채로 방치한 예교를 통해 성장한 사세삼공의 명사 원가가 낳은 경사의 도련님들인 원소와 원술이 후한의 숨통을 끊었으니, 후한은 그야말로 앞뒤로 자신이 낳은 극과 극의 괴물들간 환장의 콤비네이션으로 망한 셈이다.

원소의 경우 애초에 한실에 대한 충성이 그리 있지도 않았으면서 후한말의 경직되고 위선적인 예교 윤리 그 자체가 되어 청류의 흐름을 조종하며, 그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제어해 멋대로 이득을 보려다가 제대로 이득을 보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뒷배가 된 후한체제만 부수는 꼴이 되었고, 나아가선 본인도 그 흐름에 손발이 묶여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케이스라면, 원술은 나름대로 한실의 충신이었으나 애초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기존 후한이 추구하던 것과는 좀 다른 가치를 권력 추구의 도구로 사용했고, 나중에는 이를 바탕으로 중가를 세워 한실이라는 반상을 깨려 시도하는 인생사가 포인트다. 원술은 아예 원소와 정반대의 방향성으로 기존 사족들과 다른 계층인 하층 임협, 호걸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들의 힘으로 후한을 장악하고 후한을 손에 넣으려 했으나 결국 중앙 파워게임에서 나가리 각이 보이니, 아예 본인만의 장기를 이용해 새 그릇을 만들며 나가리 직전인 한 왕조와는 다른 새 판도를 열심히 짜려고 발악했다가 대역적으로 전락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시도는 분명 나쁘지 않았으나, 큰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정작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발목을 잡은 케이스라고 할 것인데, 그래도 하다못해 손견이 일찍 죽지 않거나 손책이 좀 더 성장해서 원술 곁에 계속 있었으면 후한말 대권 게임플레이어로써의 행보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여간 답답하고 고루하며 위선적인 후한 말의 분위기와는 뭔가 다른 색다른 맛이 파면 팔수록 나오기 때문에 후한 말의 흐름에 역행하는 파천황적인 게임플레이어로 재평가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본인이야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어쩌다 보니 중앙 파워게임에서 밀려서 남중국 중심의 게임플레이어로써 재기했을 때 남중국만의 구심점을 모아 그들만의 천하가 가능하다는 식의 판짜기를 보여준 것이, 휘하에 있던 손책과 주유에게 지대한 영감이나 성격적 요소, 세력의 잔재, 반면교사를 남겨 준 덕에 강남 남중국인의 정신적 시초인 손오정권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줬다는 측면에서는 무시 못할 인물이라고 하겠다.[1]

인생이 그야말로 후한말 개그 역사상 최고, GOAT라고 할만큼 좌충우돌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발악하는 와중에 민중과 사인 모두에게 각종 민폐와 웃기는 짓들, 웃기지도 않은 짓들을 자행했으나, 이렇게 그가 세운 정권이 손오 정권의 성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오늘날 남중국인들에게 무시못할 지방사적 토대가 되었으니 나름대로 이것도 업적이라면 업적이랄지 인생사 알 수 없는 일이다.

3.2.1. 호걸로서의 명성[편집]


원술은 공손찬이나 여포, 손견처럼 전장에서 무쌍을 찍어 보이며 개인적인 무용담을 과시한 기록도 보이지 않고, 동탁처럼 한 눈에 봐도 티가 날 정도로 기본적인 신체스펙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으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하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언제나 폭력배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존재감이 있었고 당대의 호걸로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그는 내전기 이전의 실전 참여 경력은 확인되지 않으나 신병의 훈련을 감독하는 절충교위와 오환족 돌격기병을 지휘하는 장수교위를 지내며 영제 치하에서 나름 상당한 공이 들어갔던 한제국 중앙군의 실전적 요직들을 맡은 경험이 있었고, 이 경력들 또한 원술이 호걸로서 고평가되던 것에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원술을 대단히 후대했던 동탁이나 이후 원술을 중심으로 모여들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손견, 공손찬, 도겸, 장연, 여포 등의 인사들과 원술의 정치적 노선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황건, 백파, 흑산, 흉노의 무리들은 하나같이 낮은 출신배경과 깡패처럼 거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여포의 편지에 따르면 훗날 황제를 자칭했을 무렵에도 원술은 언제나 이러한 부류의 칼잡이들을 측근에 두며 가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술의 유협적 배경은 평역이나 창작물 상에서는 대체로 무시되거나 혹은 단지 소싯적에 일진 짓을 하다 가문 빨로 출세했으며 그저 성질이 더러울 뿐인 무능력자로 묘사하는 장치로 쓰여 왔던 경우가 많아 진지하게 주목되는 경우는 손에 꼽는 편이다.[2]

다만 대표적인 명문가 자제임에도 유협으로서의 명성이 높았고, 주변에 유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것은 원술의 인맥이 매우 다양했고, 나름대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2.2. 처참한 군재[편집]


그러나 원술 자신이 출세 경로와 다르게 정작 군벌의 가장 기본적인 필수요소인 군재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원술의 치명적인 결점이었는데, 계교 이전까지 군인이라기보다는 사족들의 지지를 받던 거물급 유생이나 유세가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 왔던 원소가 당대 대군벌인 공손찬을 상대로 연승을 거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유력 패권주자로 꼽혔으나 군재가 형편없었던 유표가 원술과 비견될 수 있겠는데 그나마 유표는 중요한 군사적 고비마다 적당한 행운이 따랐고, 그 행운을 살려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체급을 키우고 세력을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었으나, 원술은 모험적 전략을 고수하면서 판돈만 키우고 정작 판도를 결정지을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기에 빠른 몰락을 피하지 못했다.

일단 원술의 개인적인 성격 자체는 유협에 매우 친화적이었으며, 모험적 전략을 고수해서 그런지 유표와 달리 매우 적극적인 친정 기록이 돋보이는데 원술이 친정에서 거둔 승리도 나름 적지는 않다. 그는 자신을 거부했던 양주자사 진우와 단양태수 주흔, 원소 편에 서서 양주자사가 된 원유를 격파하며 쫓아내고 북양주를 점거했으며 서주에서는 유비를 격파했고, 진국을 쳐서 유총을 격파하고 죽였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볼 경우 실질적인 군재는 형편없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유비의 경우 전황에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국지적 승패만 반복하다 여포를 끌어들이는 책략에 의존했서 겨우 승리했으며,[3] 그렇게 유비를 이기고도 결국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고, 유총의 경우 역시 자객을 동원한 승리였던 데다 곧바로 이어진 조조의 개입에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고 달아나는 등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유총은 무려 후한의 제후왕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난세를 만나 거지꼴로 굶어죽던 다른 고위 황족들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지역적, 군사적 기반을 갖추는 데 성공하고 어느 순간부터 본래 원술이 예주에서 가지던 입지를 대체하며 세를 급격히 불린 끝에 197년 시점에서는 10만의 무리를 이끌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하는 등 예주의 지역 군벌 수준을 뛰어넘어 조조, 유표, 원소, 원술, 공손찬 등과 비슷한 급의 메인 플레이어로 도약할 잠재성이 충분했던 초 거물급 황족이었기에 유총의 사망은 결과적으로 원술 자신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조조의 아주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만 줄여준 격이었다.[4]

역사 기록에 남은 원술의 군사적 승리 중 그나마 지도자로서의 군사적 성과를 과시하고 그 성과를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끈 깔끔한 승리라면 사실상 북양주 점령이 유일한데 이조차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군재를 보여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술은 이 군사적 성과로 인해 양주와 사예 일부를 아우르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은 정말 좋지 않았다. 동탁과 싸우던 손견을 불러와야 했으며, 기록과 정황을 살펴봤을때 정규군이 아닌 난민에 가까운 무리를 이끌던 주씨 형제에게 성을 뺏기고 고전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오랜 앙숙이었던 단양태수 주흔을 쫓아내는 과정은 깔끔하지 못해서 선봉으로 세운 오경이 주흔에게 패배하자 백성들에게 보복학살을 벌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주흔이 자진해 군사를 해산하는 결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일화들은 승리를 거두고도 원술의 극단적인 잔혹성과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을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사족들의 일관된 혐오를 받고 외정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번번이 대군을 끌고 군사원정에 나서며 관할지역의 통제력만큼은 분명하게 확보하는 듯 보이는 원술의 행보는 공포정치를 통해 현지 호족들을 철저히 굴복시켰다는 해설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볼 경우 원술은 적어도 직계세력들을 동원해 비협조적인 지방 관리나 호족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두르는 능력만큼은 나름대로 뛰어났다고 볼 수 있고, 나름대로 전략적인 통찰력이나 식견 자체는 상당한 편이었던 원술의 개인적 특징들과 맞물려 나름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정치 깡패로서의 원술을 과잉해석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후한 당대의 사족들은 근본적으로 지역호족들이 대부분이라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호걸들과 관계를 맺었었다. 청류파의 극소수 몇몇 정치인들을 제외할 경우,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후한 시기 대부분의 사족들은 정치 깡패처럼 굴었고 자신의 관할지역에서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원술이 젊은 시절 낙양에서 유명한 유협 우두머리로 명성이 있었으며, 유협 출신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다닌 것도 사실이지만 조조나 유비, 공손찬 같은 군웅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어쨌든 원술은 출발점 자체가 다른 군웅에 비해 독보적이었고 초반에 많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부족한 군재로 인해 결국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3.2.3. 인간성[편집]


그러면서도 의외로 개인적 인품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원소와 대조적으로 인간적인 부분이 많은 등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인물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삼국지연의장비수호전이규와 결을 같이 하는 고전적인 중국식 안티히어로의 면모가 있었다. 후술되는 육적회귤 고사도 그렇고, 서소와 관련한 일화도 그렇고, 후궁 풍씨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칭제 이후 몰락의 기점이 된 진국에서의 패배 당시에도 다 팽개치고 도망가는 판에 죽자고 뒤를 지켜주는 장수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원술은 난폭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자기 사람으로 인식되는 범주의 안에서만큼은 의외로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을 발휘했고, 출신과 사회적 평판을 가리지 않은 채 누구와도 거리낌없이 어울렸던 그의 행보는 사족사회 안에서 늘상 혐오에 가까운 평가를 받으며 천박하게 여겨졌지만 원술은 언제나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유교적 소양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도참에 심취해 있었다는 점에서 보이듯 신비주의에 무척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아는 게 많고 박식한 편이었으며 그의 거침없는 행보나 직접 쓴 것으로 남아있는 서신들을 보면 기본적인 말솜씨도 상당히 뛰어났을 것이다. 일관된 원칙없이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 동기로 움직이며 주변인을 제외한 다수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는 인간적 매력이 상당했다.

손견과의 관계는 왕예를 살해하여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손견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되었고, 손견은 죽는 순간까지 원술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결과적으로 원술은 참칭 역적의 오명과 함께 몰락했지만 생전의 손견은 원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그다지 없었고 오히려 당시 손견의 시점에서는 원술을 음모에 휘말린 자신의 애국적 진정성을 알아보고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몸바쳐 도와준 진정한 귀공자 윗사람이자 협객이며 애국지사로서 간주했다고 봐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으며, 손견은 왕예의 살해를 기점으로 말 그대로 뒤가 없는 행보를 보였기에 원술에 대한 이런 인식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손책과의 관계도 잘 보면 원술이 자꾸 손책을 이용해 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조가 조인을 휘하에서 쓰려고 태수로 임명하는 대신 의랑으로 임명해 곁에 두고 아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원술 또한 손책을 직속으로 두고 싶어서 독립을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 원술이 손책을 아들과 같이 대하며 손책이 원술의 군영에서 법령을 어긴 것을 사죄하자 오히려 손책을 두둔하는 등 노골적으로 손책을 편애해서 군중에서 더욱 손책을 두려워하고 꺼렸다는 기록도 남아있기 때문. 심지어 자치통감에 따르면 원술은 칭제 당시 부하들의 숱한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손책의 절연장을 받아들자 크게 상심하며 몸져 누웠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러한 원술의 면모는 손책을 이용만 하는 갑질상사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들이고 나름대로 일관되게 손책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5]

잘생긴 외모에 매력이 넘치고 우스갯소리를 잘 하던 손책 자신의 인품과 원술의 전폭적인 총애로 손책은 장훈과 교유를 비롯해 원술군의 주요 무장들에게도 진심으로 경애의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보통 손책의 매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나, 화의를 위해 파견된 사신에게 냅다 창을 던져 현장에서 살해하거나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던 고대와 우길을 개인 감정문제로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등 현대적 관점에선 명백한 정신병자로 보일 법한 손책의 병적인 다혈질적 성향이 원술의 유협적 특성과 맞물려 조명되면서 손책같이 병든 인성의 소유자를 원술과 그 부하들이 진심으로 경애했다는 것은 애초에 손책의 그런 성격적 특성이 원술이 추구하던 원술 진영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주장도 나타났다. 광증과 매력적인 면모가 공존하던 손책의 성격적 특성은 원술의 취향이 반영된 원술군 물이 잔뜩 들어간 결과이며 그렇게 육성된 손책의 모습이야말로 원술이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인 무인상에 가까웠다는 것.

문제는 손책은 이런 원술의 총애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구실을 얻자마자 원술을 배신하고 독립해 버린다.[6] 난세의 패배자에게 불리한 서술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화봉요원에서는 원술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꿀물도 못 먹고 죽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꿀물 찾을 때 주방에 보리가 30곡이었다는 사서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사실상 거지떼나 유랑도적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원술의 잔당들을 탐낸 손책과 유훈이 대립하는 기록들에서 드러나듯 원술의 일족들을 비롯한 원술의 직계세력들은 수만 명에 달할 정도로 여전히 많기는 했는데, 패기 넘치게 황제를 자칭하고 저 지경까지 몰려버린 상황도 기막히지만 반대로 저 지경까지 몰리고도 여전히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상황 역시 기막힌 일이긴 했다. 어떤 의미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귀족적이었던 인물.

원술의 잔당들은 최종적으론 손책의 세력에 흡수되지만, 손책이 원술의 아들 원요를 낭중으로 삼고 원씨의 여식들이 손권과 혼맥으로 묶여진 것은 어쩌면 ‘아버지’를 향한 손책 나름대로의 예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3.2.4. 원씨 본가와의 관계[편집]


원소와 원술은 젊은시절부터 원씨 본가의 바깥에서 나름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점이 있었지만 유교적 도덕성이 인물평의 기준이 되는 사족사회의 여론으로 볼때 열사 원소가 실천하는 지성이자 사세삼공 원씨의 명예를 되살려낸 촉망받는 소장파였다면, 협객을 자처하는 노중한귀 원술은 폭력과 공포를 숭배하는 우민들의 무지성적 지지를 받을 뿐인 원씨의 수치스러운 치부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고 해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지 못한 과한 해석이다.

애초에 원술 측 진영 중에는 원씨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보이고 어느 정도 활약을 보이는 반면, 원소 측 진영에는 원소의 직계자손 외에는 원씨 가문 출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7] 평소 원씨 문중과 원소가 대립했고 원술은 원씨의 본적에 있는 여남을 기반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원씨 문중에서는 대체로 원술을 지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물론 멸문을 당하기 이전 원씨 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협객으로서의 원술의 행보가 그다지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애초에 원씨 일족 자체가 청류파가 전혀 아니었던데다가 당시 귀족들의 도덕적 해이나 신분제에 대한 인식을 본다면 원술의 정치깡패 같은 행보도 그다지 큰 결점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청류파의 강성 사족들의 지지를 통해 원씨 문중과 대립하던 원소와 달리 원술은 딱히 본가와 대립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애초에 원술이야말로 원씨 문중의 적통 중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낙양에서 형 원기와 숙부 원외를 비롯한 주요 일족이 몰살당한 이후 원가의 적통은 원술밖에 없었고 본인이 원씨 문중 자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실제로 원술은 스스로 원씨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며 원소가 원씨 일족의 몰살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고, 원소 생모의 출신성분을 헐뜯고 원소는 원씨가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원소의 비밀스러운 출생에 대한 논란이 될만한 발언들을 늘어놓는다. 물론 원술 본인의 행적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원씨 멸문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기에 이는 그저 남 탓이라고만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문에 대한 원술 나름대로의 강한 귀속의식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3.2.5. 원소와의 악연[편집]


많지 않은 젊은시절의 기록부터 꾸준하게 언급되는 악연으로, 원술은 원소 뿐만이 아니라 원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전부 증오하며 업신여겼다.

만약 원소가 얼자가 아닌 친형이라면 그냥 따랐을 수도 있고, 이복동생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은 나름 챙기던 원술답게 항렬로 찍어누르면서 아랫사람으로 대했을 수도 있었지만 원소의 항렬이 더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골치아픈 것은 두 사람의 생년은 불명이지만 원소의 행적을 역추적했을 때 원소의 생년은 153~157년 사이에서 유년기부터 조조와 친구였다는 기록을 감안해 조조와 동년인 155년에 가까운 방향으로 범위가 좁혀지는데, 원술 또한 진규와 어린시절부터의 친분이 언급되고 170년대 초반생인 진규의 장남 진등의 나이를 고려할 때 진규가 원술보다 몇 살 연상일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원술과 원소와 나이 차이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나이 자체는 같으나 생일의 차이로 항렬이 갈린 수준이었을 수도 있고,[8] 이렇게 볼 경우 원술로서는 더욱 피가 거꾸로 솟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6년상과 낙양 불출사 등으로 사족사회의 유교근본주의적 여론에 영합하며 청류파의 아이돌로 떠오른 원소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원술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인데 원소의 첫 삼년상의 대상이 원술의 어머니였다는 일사전의 기록이나 원소가 명성을 얻고 정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던 과정을 감안하면 원술은 원소에 대해 적지 않은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원씨 가문이 청류파가 아니었기에[9] 원씨 가문의 적통이던 원술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할 이유도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청류파를 중심으로 한 식자층들에게 원소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만큼 원술 자신과 원씨 가문이 폄하됐을 수 있다.

어쨌든 원술은 원소가 여론의 추앙을 받고 자신은 비난을 받는 악역을 떠맡던 현실에 곧잘 분개하며 역정을 냈으나 말년에는 원소에게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는데, 원술 자신이 상징했던 '한나라 최고위층 사족'과 원소가 상징했던 '청류파에서 가장 떠오르는 정치인' 사이의 차이를 감안하면 원술이 원소 아래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년의 행보는 그만큼 원술이 모든 면에서 몰락했음을 보여줄 뿐.

3.2.6. 사상[편집]


원술의 행보를 원소나 유표 등과 대조해서 해석함에 있어서 원술이 원칙이 없고 야만적이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문명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고대인들은 다 그랬다고 보는 것도 잘 해석해야 한다. 원술의 행적 중에 싸움에 졌다고 백성들을 학살해 주흔을 충격받게 해서 자진하야시킨 것은[10] 고대인 관점에서 봐도 원술이 심각한 놈이거나 최소한 이 순간만은 심각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라 원술의 행적은 그냥 굳이 현대인의 관점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반사회적인 부분, 반골적인 부분, 원칙이 없는 부분이 많았다. 당장 원술과 여포의 반목만 봐도 원술 본인이 왔다갔다 하면서 여포에게 감정적인 골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으니 말이다. 원칙을 잘 구사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다 그랬는데 참칭자인 원술만 역사의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는 해석이 분명히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겠지만 그러면 과연 원술이 그런 나쁜 평가가 다 남들 하는 건데 누명을 쓴 거고 완벽히 자유로운가? 주흔이 원술과 맞선 동기는 애초부터 원술이 잔인하고 포악한 놈이라는 것을 알아서 맞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우에도 나쁜놈 원술을 만들기 위한 곡필이었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마일제 억류 후 스트레스성 사망이나 유총 암살 건 같은 것을 봐도 후한시대 호족, 군웅들은 다 그런 놈들이었다거나 참칭자에 대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비열한 수나 암수, 잔혹한 흉행 같은 행적이 분명히 다른 많은 군웅들과 공유하는 것도 맞지만 모두와 공유하는 행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유한다 해도 이런 원칙 없는 기행을 그 누구보다 제일 많이 한 것이 원술이다.[11]

또한 현대 호사가들은 이 당시의 학문과 신비주의, 도가 등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상에 기반해서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나친 도참설이나 신비주의 등이 정설로는 물정 모르는 소리 취급받는 것은 똑같았다.[12] 애초에 고대부터 중국의 주된 학문경향은 서로가 얽혀 들어가는 정치학과 윤리학이다. 도가 역시 유가보다는 좀 희한하고 판타지 같은 소리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도가의 주요 주제 역시 윤리, 정치적인 주제였지 그 어떤 신비주의 같은 게 아니었다.[13] 그런 도가의 신비주의 도참설 등을 이용해서 끼워맞추기를 하는 어떤 정치적 주체가 있다고 할 때 당장 자기들이 하는 짓거리가 끼워맞추기고 자기들이 끼워맞추기로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14][15]

원술이 유교적 원칙에 어긋나는 행보를 많이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특별히 옹호할 이유도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아시아 지배계층들에게 유교가 확고한 승자가 된 것은 정치, 윤리, 교육에 있어서 유교가 최고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확실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유교 역시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변화도 많았고 다른 사상들을 받아들인 것은 많았지만 최소한 원술의 시절에는 이미 유가와 법가의 조합이라는 정치 유교의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다 이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원술을 옹호할 이유가 없다.

분명 이 시대 사람들이 현대에 비춰볼 때 신비주의적인 사고를 많이 했던 것은 사실이고 특히 민간층에 널리 퍼져 있던 것도 사실이나 제대로 된 정치가들일수록 사고와 평가의 기준은 신비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프로파간다용 명분 만들기로 이용할 뿐이었다. 단지 옛날에는 아직 과학이 많이 발달하지 못해서 학문과 종교의 구별이 미진해서 현대에 비춰보자면 이상한 말이 많지만, 그래도 정설은 정설이고 헛소리는 헛소리다. 그나마 변방의 중산층 출신인 공손찬 같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중앙 명문가의 귀공자인 원술이 헛소리에 혹하고 다닌 것은 별로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고 기껏해야 본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멍청했다는 얘기밖에 더 되지 않는다. 가장 극명한 대조가 유교적 가치의 진가를 알고 제대로 이용한 원소가 있다.

또다른 좋은 반례가 동시대의 유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로 따지자면 본인부터가 대학자였고 특히 주역의 전문가인 유표가 당대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넉넉히 꼽힐 것이다. 그러나 유표의 정치행보는 주역의 뜬구름 잡는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소나 유표나 군재가 없는 군벌이자 한실에 반기를 든 것은 같지만 가식적이고 계산적인 유표가 주변 사람 잘 챙기고 감성적이며 신비주의나 밀던 원술보다 훨씬 더 좋은 통치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원술의 행적은 정상적인 정치적인 윤리적인 계산법으로 따지자면[16] 터무니없이 변화무쌍했다. 즉 원칙이 없다는 얘기인데[17] 이렇게 인간적이고 감성적이며 내 편을 잘 챙겨준다는게 말이 좋지, 이런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은 그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망조가 들게 되어 있다.[18]

원술의 이런 생각과 행보가 현대인이 사상적으로 봤을 때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동아시아 역사의 큰 줄기에서 보자면 결국 서양 사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반항심이건 경멸심이건 무슨 이유건 간에 유교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아봤자 재미없고 허황될 뿐이라는 수많은 반례 중 하나를 당대의 공손찬과 더불어 쌓아줬던 것에 불과하다. 결국 유교라는 것이 중국 기준으로 뭐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가장 잘 표명해준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조조, 원소, 유표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군웅들처럼 도참과 신비주의 천응감응설을 자기한테 유용하게 이용하는 것은 이롭지만 그걸 넘어서 공손찬, 원술처럼 유교적 가치관을 거스르고 날뛰어봤자 별로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19]

3.3. 칭제[편집]


당대부터 현대까지 원술의 칭제는 원술을 패망으로 이끈 결정타로 취급되고 궁지에 몰린 원술이 대놓고 칭제를 하며 막나가다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어간 것 같지만 원술이 마냥 멍청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니고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일단 원술은 기존에는 제 나름대로 충신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마일제 능욕 사건 등으로 책을 잡혀 충신 코스프레는 더이상 붙잡을 길이 없어진지 오래고 본인의 연이은 삽질로 조조와의 맞대결에도 참패한 건 물론 지지세력을 제대로 지원하지도 못했고 조조와의 힘싸움과 조정 장악 거기다 서주 정벌 여포 암살까지 모조리 실패한 상황이었고 조조가 헌제를 끼고 조정까지 장악한 시점에서 원술은 더이상 충신 코스프레를 유지할 수 없게 됨은 물론 이제 역적으로 지명되어 토벌될 일만 남게 됐다는 것.

따라서 원술 나름의 입장에 따라 호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원술의 칭제는 이미 붙잡을 길이 없어진 충신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는 한편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후한 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해 후한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조정에 거역하는 기존의 논리적 모순을 바로잡고, 도참사상을 통해 지배의 당위성을 세우고 명문 원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부귀영화를 보증해 손책, 여포 등의 지지세력을 최대한 결집시키는 방책으로 볼 수 있는데, 엄청난 모험수이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생각이라고 보긴 어렵다.

당시 칭제 직전 시점에서 강남을 장악한 손책은 원술이 거리낌없이 아들처럼 대하던 관계였고, 조조와 크게 척을 지고 있던 여포 역시 원술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원전쟁의 승리자인 원소, 조조, 유표끼리의 서열다툼은 벌써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원래는 원술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에 가장 옹호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헌제가 정통성에 약점이 뚜렷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단지 조조가 근거지에 모셔둔 채 정부 재건을 선언했을 뿐이었으므로, 원술 자신의 주요 지지세력들과 동맹자들이 폭넓게 공유했던 반골적 정서와 원술이 좋아하던 신비주의를 통해 적당한 비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야합일지라도 이념을 이용한 것이므로 상당한 결속력을 가질 수도 있었으며, 이미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가던 태평교도들을 원술은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던 바 있었다.

조조가 단결된 원술 진영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고전한다면 원소와 유표는 조조의 건안 정부에서 이탈하거나 스스로 조조의 역할을 대체하려 했을 것이기에 원술의 운신폭은 더 넓어지는 건 물론 조조가 그들까지 견제하는틈에 힘을 기를수도 있었을 것이며 잘하면 이전에 손견을 이용해 영토 확장에 써먹었듯 손책과 여포를 이용해 세력을 불릴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원술의 칭제 전략은 얼핏 보면 무모했으나 본인이 남은 지지자들을 얼마나 잘 규합하는지 그리고 손책과 여포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중국의 패권은 몰라도 잘하면 훗날의 오나라가 그랬듯 장강을 중심으로 한 할거 정권까지는 노려볼만 했다는 것. 즉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작정 막나갔다기 보다는 본인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결정적인 승부수를 띄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해볼만한 도박이긴 했다지만 원술은 큰 실수를 범했는데 정작 본인의 지지세력을 신경쓰는데 상당히 소홀했고 때문에 원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지세력이나 마찬가지 였던 손책은 원술의 칭제가 본격화되자 사실상의 절연장을 보내며 이탈했고 여포 또한 원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결국 원술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20]


4. 가족 관계[편집]




5. 여담[편집]


  • 훈훈한 일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어린 육적이 부모에게 주려고 을 품에 숨겨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귤을 더 퍼주었다는 육적회귤의 고사가 있다. 다만 원술의 이미지가 워낙 시궁창이라서 그런지 이 고사는 주로 육적의 효심을 강조하는 쪽이 많고 원술의 훈훈함은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후 육강은 원술과의 관계가 틀어져 부임지 여강을 손책에게 공격받아 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육적은 친척 육손 등과 함께 고향 오군으로 피신하여 훗날 오의 신하가 된다.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오에 왔을 때 설전배틀에서 무참히 깨지는 역할로 재등장했다.

  • 헌제의 명을 받아 유우에게 가던 그의 아들 유화를, 중간에서 붙잡아 억류한 적이 있다. 헌데 이게 오히려 유화에게 득이 되어서, 유우가 일가친척과 같이 공손찬에게 살해당할 때 그 혼자 살아남았다.

  • 낙양가람기와 태평광기에는 실린 북위 종친의 돈지랄 썰에 원술이 언급된다. 장무무장왕(章武武莊王) 원융(元融)[21]은 북위에서 재력으로는 재종형제 고양왕(高陽王) 원옹(元雍)[22]빼고 지 미만이라며 돈지랄부심을 부렸으나, 다른 재종형제 하간왕(河間王) 원침(元琛)[23]의 잔치에 갔다가 지보다 더 한 돈지랄열폭해서 부자(負玆)[24]하여 드러누웠다. 그래서 3종조부[25] 강양무렬왕(江陽武烈王) 원계(元繼)[26]가 장무무장왕의 문안을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대는 회남의 원술 같이 되어 세상에 유비가 있는 것도 모를려고 하시오?"라고 하였고[27], 장무무장왕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원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다.

  • 먼 훗날 원술의 종씨[28] 원술과 비슷한 행각을 벌이다 비슷하게 몰락했다.

  • 죽기 직전 꿀물을 찾았다는 점 때문에 삼국지 매체들에서 원술을 다룰 때 꿀물 관련된 댓글 개그들이 자주 나온다. 또 원술군의 식량이 떨어졌을때 부들을 먹기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부들을 씹는 사람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이것이 중가제의 핫도그라고 키득거리는 삼국지 팬들도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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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계보)[편집]


후한서(後漢書)

[ 본기(本紀) ]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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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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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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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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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황후기(皇后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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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풍석,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환언,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사마포,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이섭,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위서(魏書)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08b><width=50%> 1권 「무제기(武帝紀)」 ||||<width=50%> 2권 「문제기(文帝紀)」 ||
||||<rowbgcolor=#fff,#191919> 조조 ,조등 왕준, |||| 조비 ||
|||| 3권 「명제기(明帝紀)」 ||||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
||||<rowbgcolor=#fff,#191919> 조예 ,학소 진랑 맹타, |||| 조방 ,장특, · 조모 · 조환 ||
||<-4><width=1000>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열전(列傳) ]
#181818,#e5e5e5 
||<-3><tablewidth=100%><tablebgcolor=#00008b> {{{-1 {{{#ffffff 5권}}}}}} {{{-2 {{{#ffffff 「후비전(后妃傳)」}}}}}} ||
||<-3><rowbgcolor=#fff,#191919><width=1000> [[무선황후|{{{#black,#e5e5e5 무선황후}}}]] · [[문소황후|{{{#black,#e5e5e5 문소황후}}}]] · [[문덕황후 곽씨|{{{#black,#e5e5e5 문덕황후}}}]] · [[명도황후|{{{#black,#e5e5e5 명도황후}}}]] · [[명원황후|{{{#black,#e5e5e5 명원황후}}}]] ||
||<width=33%> {{{-1 {{{#ffffff 6권}}}}}} {{{-2 {{{#ffffff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width=33%> {{{-1 {{{#ffffff 7권}}}}}} {{{-2 {{{#ffffff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width=33%> {{{-1 {{{#ffffff 8권}}}}}} {{{-2 {{{#ffffff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
||<rowbgcolor=#fff,#191919> [[동탁|{{{#black,#e5e5e5 동탁}}}]] ,,,[[이각|{{{#black,#e5e5e5 이각}}}]] [[곽사|{{{#black,#e5e5e5 곽사}}}]] [[마등|{{{#black,#e5e5e5 마등}}}]] [[한수(삼국지)|{{{#black,#e5e5e5 한수}}}]],,,[br] [[원소(삼국지)|{{{#black,#e5e5e5 원소}}}]] ,,,[[저수#s-2|{{{#black,#e5e5e5 저수}}}]] [[전풍|{{{#black,#e5e5e5 전풍}}}]] [[원담|{{{#black,#e5e5e5 원담}}}]] [[원희|{{{#black,#e5e5e5 원희}}}]] [[원상|{{{#black,#e5e5e5 원상}}}]],,, · [[원술|{{{#black,#e5e5e5 원술}}}]][br] [[유표|{{{#black,#e5e5e5 유표}}}]] ,,,[[유종(삼국지)|{{{#black,#e5e5e5 유종}}}]] [[부손|{{{#black,#e5e5e5 부손}}}]] [[괴월|{{{#black,#e5e5e5 괴월}}}]] [[한숭|{{{#black,#e5e5e5 한숭}}}]] [[채모|{{{#black,#e5e5e5 채모}}}]],,, || [[여포|{{{#black,#e5e5e5 여포}}}]] ,,,[[장막(삼국지)|{{{#black,#e5e5e5 장막}}}]] [[진궁|{{{#black,#e5e5e5 진궁}}}]] [[진등|{{{#black,#e5e5e5 진등}}}]],,, · [[장홍(삼국지)#s-1|{{{#black,#e5e5e5 장홍}}}]] || [[공손찬|{{{#black,#e5e5e5 공손찬}}}]] ,,,[[유우(삼국지)|{{{#black,#e5e5e5 유우}}}]],,, · [[도겸(삼국지)|{{{#black,#e5e5e5 도겸}}}]] · [[장양|{{{#black,#e5e5e5 장양}}}]][br] [[공손도|{{{#black,#e5e5e5 공손도}}}]] ,,,[[공손연|{{{#black,#e5e5e5 공손연}}}]],,,[br] [[장연|{{{#black,#e5e5e5 장연}}}]] · [[장수(삼국지)|{{{#black,#e5e5e5 장수}}}]] · [[장로(삼국지)|{{{#black,#e5e5e5 장로}}}]] ||
||<-2> {{{-1 {{{#ffffff 9권}}}}}} {{{-2 {{{#ffffff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 {{{-1 {{{#ffffff 10권}}}}}} {{{-2 {{{#ffffff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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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fffff 21권}}}}}} {{{-2 {{{#ffffff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 {{{-1 {{{#ffffff 22권}}}}}} {{{-2 {{{#ffffff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 {{{-1 {{{#ffffff 23권}}}}}} {{{-2 {{{#ffffff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
||<rowbgcolor=#fff,#191919> [[왕찬|{{{#black,#e5e5e5 왕찬}}}]] ,,,[[진림|{{{#black,#e5e5e5 진림}}}]] [[완우|{{{#black,#e5e5e5 완우}}}]] [[유정(건안칠자)|{{{#black,#e5e5e5 유정}}}]],,, · [[위기(조위)|{{{#black,#e5e5e5 위기}}}]] · [[유이(삼국지)|{{{#black,#e5e5e5 유이}}}]] · [[유소(조위)|{{{#black,#e5e5e5 유소}}}]] · [[부하(삼국지)|{{{#black,#e5e5e5 부하}}}]] || [[환계|{{{#black,#e5e5e5 환계}}}]] · [[진군|{{{#black,#e5e5e5 진군}}}]] ,,,[[진태|{{{#black,#e5e5e5 진태}}}]],,, · [[진교#s-2|{{{#black,#e5e5e5 진교}}}]] · [[서선|{{{#black,#e5e5e5 서선}}}]] · [[위진|{{{#black,#e5e5e5 위진}}}]] · [[노육|{{{#black,#e5e5e5 노육}}}]] || [[화흡|{{{#black,#e5e5e5 화흡}}}]] · [[상림#s-2|{{{#black,#e5e5e5 상림}}}]] ,,,[[시묘|{{{#black,#e5e5e5 시묘}}}]],,, · [[양준|{{{#black,#e5e5e5 양준}}}]] ·[[두습|{{{#black,#e5e5e5 두습}}}]] · [[조엄|{{{#black,#e5e5e5 조엄}}}]] · [[배잠|{{{#black,#e5e5e5 배잠}}}]] ,,,[[배수(삼국지)|{{{#black,#e5e5e5 배수}}}]],,, ||
|| {{{-1 {{{#ffffff 24권}}}}}} {{{-2 {{{#ffffff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 {{{-1 {{{#ffffff 25권}}}}}} {{{-2 {{{#ffffff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 {{{-1 {{{#ffffff 26권}}}}}} {{{-2 {{{#ffffff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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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fffff 27권}}}}}} {{{-2 {{{#ffffff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 {{{-1 {{{#ffffff 28권}}}}}} {{{-2 {{{#ffffff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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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원술 휘하의 임협적, 유협적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변방인, 야만 그 자체로 인식되던 흉포한 무력집단들의 성징을 그대로 이어받은 무인정권의 성격이 강한 것이 손오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손오에서는 호족들도 붓보다는 칼을 잡기 좋아한다는 소리가 나왔겠는가. 이런 분위기는 교토대학 김문경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척적이고 활기차면서도 젊은 정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손오 특유의 강렬한 역동성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2] 그나마 부론손의 《패(覇) 로드(Lord)》나 마사토끼의 《삼국지 가후전》에서 원술의 유협적 특성이 비중있게 조명되었다.[3] 사실 그 과정을 자세히 보면 유비와 원술이 국지적 승패를 반복하며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고, 유비의 근거지인 서주가 조표의 모반으로 인해 (그전에 원술이 끌어들인) 여포에게 뺏기고, 근거지를 잃은 유비군이 패배한 것이다. 나름대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고 의기양양하게 원정에 나서며 주요 대권주자로 손꼽히고 있던 원술이 반토막난 서주를 접수한 유비를 자력으로 온전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고전 끝에 책략을 동원해 승리했다는 의미라 빛이 바랜다.[4] 이런 측면 때문인지 원술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인 화봉요원 같은 작품에서는 유총 살해의 진짜 배후가 사실 조조 측이었으며 이들이 원술의 악명을 이용해 역사의 진실을 은폐했고 적어도 이 사건에서 원술은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음모론적 각색이 들어가기도 했다.[5] 손책 개인에 대한 애정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손책을 비롯한 부하들과 장강 남부 지역의 상실, 이반, 숙적화라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했다.[6] 물론 충분히 등 돌릴 만한 명분(=원술의 칭제)이었고, 원술이 여러차레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독립적 지위를 주지 않고 직속으로 붙잡아 두던 것은 손책의 시점에서는 원술이 충성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이용만 한다는 피해의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또한 원술이 칭제하려 했을 때 직접 서신까지 보내 만류하는 등 부하로서의 역할은 다하고 독립했다. 손책의 속마음이야 어쨌거나 큰 명분상 원술을 따르는 것은 한나라에 대한 배신이자 역적질이기 때문.[7] 다만 원유처럼 원소와 동맹을 맺고 원술과 싸우다 패사한 군벌도 존재한다.[8] 비슷한 사례가 두어달 차이로 항렬이 갈려버린 예시가 건륭제애신각라 홍주. 다만 이 경우는 건륭제가 아버지 옹정제나 할아버지 강희제가 공인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홍주는 형에게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고 망나니 행세나 하며 목숨을 보전해야 했다.[9] 영제에 의해 청류파가 조정에서 모두 쫒겨났던 시기, 원씨 가문은 삼공을 역임하는 등 조정의 중심이었다. 즉, 십상시라는 환관 세력과 결탁한 대표적인 탁류파가 원씨였던 것이다.[10] 애초에 맞서 일어난 것이니 아예 강단이 없는 문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11] 조조도 기행을 많이 하긴 했지만 기행을 하는 한편 나름대로 원칙이 확고했으며 또한 조씨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다고는 하나 원칙에 따르지 않는 자기중심주의적 기행은 조조, 조비, 조예 3대가 다 공유하는 문제점이었고 결국 조위가 빨리 무너지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12] 손권이 장소랑 도사 등에 관해서 환담하고 있을 때 우번이 지나가면서 죽은 놈들이냐고 꼽을 주자 손권이 화를 냈는데 요는 이 시절도 정설은 똑같았다는 것이다.[13] 도가의 발전상이나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진지한 도가와 혹세무민하는 도사와의 차이는 있다. 도사들이 신비주의에 탐닉했다고 해서 도가의 기원이 그런 것은 아니다.[14] 즉 원술이 하던 거랑 똑같이 프로파간다성 끼워맞추기, 아부하기 등으로 이용하는 것이거나 조예가 이슬 마시고 하던 것처럼 장수 따위의 기복을 욕구하는 종교적 차원이었다. 한무제가 이슬 마시는 걸 비웃던 것처럼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안 믿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은 중국의 베스트셀러 정치철학서로, 여기서도 저자가 이런 신비주의를 이용한 끼워맞추기 프로파간다를 과거인물들을 이용해 수없이 창작해서 써놨다.[15] 유학자들 사이에 점술이 유행하던 것으로 따지자면 조선 후기까지도 잡생각을 많이 하는 유학자들은 점술에 골몰하고 정도령 같은 것을 생각하며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집안 묘자리 찾기로 소송하고 그러고 살았다. 홍콩이나 한국이나 아직까지도 풍수지리가 어쩌고 하는 인물이 많은 것을 보면 현대도 과거보다는 영향력이 적어진 것이지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또 현대로 비춰보자면 달착륙설이나 지구 평면설이 횡행하기도 하고 손바닥에 王자 쓰고 대선토론에 나온 인물이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이 실제로 믿건 안 믿건 무당을 찾아가고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봤다느니 하는 인물도 있고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은 신앙적인 이유로 남의 나라인 미국 대통령과 정당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유튜브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이렇게 끼워맞추면 현대인들도 원술에 만만치 않게 동질적인 인물들인가?[16] 정치와 윤리는 분리하기 어려우며 고위 정치가의 차원으로 갈수록 더욱 그렇다.[17] 유교란 게 뭐가 착하고 뭐가 나쁜 것인지, 뭐가 예의 바른 것이고 지도자에 걸맞은지 올바른 다스림인지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이게 아무리 현대에 와서 시대적 한계나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가운데 비판을 많이 받는다 해도 당대에 주요 조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식자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전통적이기까지 한 가치라면 유교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반항하는 건 불이익만 있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런 원칙이 없다는 얘기에 대해서 원술은 신비주의적인 원칙을 따랐다고 한다면 더더욱 유표와의 대조가 될 뿐이다. 또한 이렇게 원술이 원칙이 없는 게 아니라 신비주의적 원칙을 따랐다고 한다면, 원술의 중나라 건국은 도대체 원술의 도박적인 정치적 한 수인가, 아니면 도참설이란 원칙에 따른 일관된 원술의 한 수인가? 결국 까고 말해서 중나라 건국조차 그냥 제대로 된 원칙 없이 모든 가능성이 좋게만 돌아갈 것이라는 몽상적인 도박이었을 뿐이다.[18] 유비 역시 관우에 대한 감정 때문에 무리한 출진을 감행했던 이릉 대전으로 촉의 국력과 국운을 거하게 소진시킨 전적이 있다.[19] 군주의 가치관이나 성향에 따라 그것과 비슷한 인물들이 꼬이고 상이한 인물은 하야하게 된다. 군주가 (자기 기준에서) 현명하거나 건의를 받아주면 머물고 아니면 떠나라는 이 성향은 중국의 고대시대부터 지식인 계층에게 전해지는 격언과도 같다. 인재등용이란 측면에서도 유교적 가치관을 철저히 따르는 게 맞다. 극단적인 사례인 공손찬의 경우 점쟁이 상인처럼 정치와는 맞지 않는 인물들이 꼬이게 되고 인재들이 줄줄이 하야하니까.[20] 일단 둘 다 원술과 절연한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원술이 역적이라서지만 실상은 비록 여포가 잘못한거라고는 해도 본인이 쫒아낸 것은 물론 나중에는 진궁 등을 사주하여 반란까지 유도하여 화나게 만든 여포는 말할 것도 없고, 손책 역시 협천자를 하고 싶어했다거나 허도를 급습할 계획을 꾸몄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의 동생 손권이 기어이 황제에 오른걸 보면 손씨 일가에게 애초에 딴 마음이 있었음은 명확하다. 여포 역시 충신이라 원술과 절연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고 사실상 원술의 행태에 질린데다 원술보다 조조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여포가 조조에게 붙은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술 입장에서는 칭제가 걸어볼 만한 무리수였다지만 원술이 이미 제어할 수 없게 된 손책의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확률이 낮은 원술의 무리수에 동참할 필요가 도의나 의리를 제외하면 전혀 없는 것이며 원술의 칭제는 황제에 대한 충이라는 이유로 손책이 아주 쉽게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준 상황이다.[21] 481년에 태어나 526년에 훙서. 경목황제의 증손자, 남안혜왕(南安惠王) 정(楨)의 손자, 장무공왕(章武恭王) 빈(彬)의 아들[22]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의 아우[23] 문성제의 손자, 제군순왕(齊郡順王) 간(簡)의 아들[24] 본래 제후의 앓음을 뜻하나 나중에 종친의 앓음으로도 쓰였다.[25] 할아버지의 3종형제[26] 도무제현손, 양평왕(陽平王) 희(熙)의 증손, 남평강왕(南平康王) 혼(渾)의 손자, 남평안왕(南平安王) 소(霄)의 아들[27] 즉, '네가 원술도 아니고 세상에 너보다 뛰어나고 잘난 사람들 많은데 왜 고작 그거 가지고 드러눕느냐'고 면박을 주는 것이다.[28] 다만 시조 원지형(袁持衡)이 원술과 같은 여남 원씨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