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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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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대한 내용은 이범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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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외교관.
2. 생애[편집]
192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이재순과 황인성 사이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42년 평양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1944년 호세이대학 예과를 수료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보성전문학교 경제과 2학년에 편입학하여 1947년에 졸업했다. 1961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1963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박정희 정부 때 외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영어 실력도 좋았지만 당시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비동맹권외교의 추축이었던 인도와의 외교 관계 구축에 상당한 성과를 내는 등 실력 좋은 외교관으로 호평을 받았다. 인도 주재대사로 재직하며 당시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와 절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1980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하였다. 국토통일원 장관 재임 시기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출범시켰으며,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장관직과 겸직하였다. 1982년 1월 남덕우 내각이 퇴진하고 유창순 내각이 출범할 때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그 해 6월부터 이듬해인 1983년 10월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외무장관 취임 1년 뒤인 1983년 6월 29일에는 국방대에서의 연설을 통해 "소련 및 중공과의 관계 정상화가 한국 외교의 중요 과제"라고 말했으며, 이를 '북방정책'이라고 명명했다.(당시 보도 내용) 비록 외무장관 재임 기간은 16개월 뿐이었지만, 훗날 노태우 정부에서 본격 실행하게 될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정책을 앞서 제시한 것이었다. 1983년 전두환-이순자 내외의 서남아시아-대양주 6개국 순방을 앞두고 인도보다 버마를 먼저 가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묵살되었다. 결국 이범석은 전두환을 수행하여 버마로 갔다가 전두환 도착 직전 예행연습으로 흘러나온 진혼곡 때문에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3]
3. 기타[편집]
- 같은 평안남도 출신이자 전임 외무장관이었던 노신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외무장관 취임 후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과 이런저런 교류를 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4]
- 그의 사위 조태용 역시도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국회의원[5] 과 주미대사를 거쳐 국가안보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 키가 183cm 정도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190cm 이상의 장신이었던 셈이다.
[1] 서산 이씨 28세손 ◯석(錫) 항렬.[2] 전국에 1,000여명밖에 안 되는 희성이다.[3] 그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최병효 당시 외무부 서남아국 서기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범석은 과로로 인해 지병인 치주염이 도져 수술을 받은 뒤 10월 8일 실밥을 풀 예정이어서 6개국 순방 중 버마 일정은 빼 달라고 요청했으나, 전두환이 "그깟 치통 때문에 순방에 불참하는 게 말이 되냐?"고 갈구자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실밥을 풀고 버마행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4] 일례로 앞서 언급한 전두환의 버마 방문에 반대하는 이범석을 공개적으로 두둔한 인물이 바로 노신영 안기부장이었는데, 비록 이범석이 버마에 수행차 갔다가 테러로 사망했다지만 화해라도 했으니 다행인 셈이다. 만약 화해하지 못한 채로 이범석이 사망했더라면 노신영 입장에서는 매우 감정이 복잡해졌을 듯하다.[5] 국민의힘 제21대 국회의원(비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