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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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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왕은 성인(聖人)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斯道)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1]

.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唱)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儒子)이고 현철(賢哲)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정조 묘지문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서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이 "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2]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3]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 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 고금체만 쓰라!"고 했다.[4]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청선군주, 그리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1773년(영조 49년) 봄,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이며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비단 이 두 군주와 후궁만이 아니라, 현재 전하는 소설책들을 보면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거나 말거나 궁중 여인들은 소설을 즐겨 필사하고 읽었던 것 같다.

한편 이덕무와 이상황 등의 경우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문책받아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이덕무의 경우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가리켜 '더럽고 더럽도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글을 남겼다. 다만 애초에 그가 소설 읽기에 빠졌다가 들켜서 정조에게 문책받은 것이니, 본심이었을지 정조 눈치를 본 결과인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이상황의 경우 정조 생전에는 반성하고 소설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조 사후 늙을 무렵에 그의 집을 찾아간 선비가 서가에 청나라 소설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음을 보았다고 한다.


1. 서체반정[편집]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통제 정책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시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는다.


2.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편집]


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서형수에게 명하여 사고전서 도입 문제와 더불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주자학의 근본이 되던 이 책들은 판본들이 다양했는데 정조는 원본이자 정본을 가져올 것을 직접 명한 것이었다.

서형수는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청나라의 대학자 기윤을 찾아가 사고전서 도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자의 저작물 정본에 대해 문의했고, 기윤은 이후 사신편에 들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정본을 보내주었다. 서형수는 이 약속을 받은 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외의 주자의 저작물을 찾기도 한 후 귀국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가 이후 사망하면서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5] 이런 정조의 노력은 그가 사실상 성리학 유일론자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3. 사망과 무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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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독살설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함께 해야 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한 것이 큰데 조선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권 기간에도 여러번의 독살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정조 암살론이 단순한 억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6]을 언급해 정순왕후를[7]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살론의 여러 근거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와 학자들은 계속하여 암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설[8]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9][10]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주장이 더욱 맹렬한 것.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에 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11]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다가 왕을 과로사로 몰고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여기서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과 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는데 재위 기간 24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인 점 등을 고려하면 49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12]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또한 정조가 유별나게 조선 왕 가운데 급격하게 사망하거나 일찍 죽은 것이 아니다. 정조는 무려 24년을 재위했다. 조선 왕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정조보다 짧게 살았고, 정조보다 짧게 재위했다. 나름대로 꽤 장기간 집권한 이미지가 있는 태종은 18년 재위하였으며, 북벌을 주창하며 의욕차게 일했던 효종은 11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듯한 세도정치를 겪었던 헌종도 15년을 간신히 넘겼으며, 굉장히 오래 재위했을 것 같은 세조는 14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사망했다. 게다가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영조의 발자취 덕분에 즉위한 직후부터 사실상의 실권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조선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장기간 실권을 휘둘렀던 왕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망이 급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 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다. 이 말인 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역대 조선 왕들이 앓던 고질적인 지병인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종기에 고름으로 굉장히 고생했다.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열악한 의료 기술 탓에 종기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인삼을 넣은 탕약만 마시다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13]

《정조실록》 54권, 1800년(정조 24년) 6월 25일 병자 1번째 기사.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여기서 '사도'는 유교의 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최고 수준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2]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민생을 현혹하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3] "그 책에 '천주가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
[
上帝
]
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人倫)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
[
玉皇
]
, 하나는 조물주
[
造化翁
]
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4]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문장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로 모두 육경(六經)과 사자(四子)에 오랫동안 노력을 쌓은 속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길을 달리한 때가 있었지만 요컨대 모두 경학(經學) 문장의 선비들이었다."[5]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참조[6] 당시 정순왕후가 기거하던 대비전인 창덕궁 수정전(壽靜殿)을 말한다.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이 아니다.[7] 정조가 정순왕후를 부른 이유는 불확실하다. 정황상 정순왕후에게 뒷일(후사)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8] 다만 심환지가 비밀 어찰을 어명대로 태우지 않고 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정조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살론을 100% 반증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9]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에서는 '수정전'을 정순왕후에게 피살당해 죽어가는 정조의 단말마로 해석했다.[10] 드라마 <이산>에서는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다가 쓰러졌다가 겨우 소생하고 이후 정무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간이 흘러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11] 식사는 꼬박꼬박 챙겼고 반찬을 줄이는 감선 및 고기를 끊는 철선도 계획적으로 했던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식사를 소홀히 한 편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침에 약해서 아침을 잘 안 먹었다고 하지만 《한중록》 자체가 원체 혜경궁 홍씨의 입장이 강하고 《정조실록》이나 《일득록》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정조는 필통에다가 술을 담아 마실 정도의 주당에다가 담배 예찬론을 선보인 골초였다. 물론 이렇게 살다간 현대에서도 훅가는데 조선 시대라고 해서 훅가지 않을 리 없다.[12] 훗날 영국국왕조지 6세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과로, 스트레스와 잦은 흡연으로 인해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1952년 조지 6세 사망 당시 영국의 기대 수명은 69.5세로, 그 당시 영국 기준으로도 일찍 사망한 것이었다. #[13] 그릇으로 거의 몇 잔을 쏟았다. 다행히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나 그리 앓은 얼마 뒤 신하들과의 면담 도중 쓰러지고 말았는데, 약을 넘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끝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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