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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피우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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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 중부 키로보흐라드 주의 주도로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233,820명이다. 원래는 키로보흐라드(Кіровоград)[2] 였지만, 201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의 탈러정책이 시행되면서 2016년 7월 14일을 기하여 크로피우니츠키로 바뀌었다.[3]
주민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며, 두 언어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지역이다.[4]
2. 상징물[편집]
3. 민족[편집]
1897년 조사에서는 유대인과 러시아인이 각각 37.8%와 34.6%로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1939년 조사에서부터 우크라이나인이 72%로 과반을 넘기기 시작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2001년에 우크라이나인 85.8%, 러시아인 12%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대다수이며 유대인 비율은 점차 감소하여 단 0.1%만을 차지하였다.
4. 역사[편집]
중세 이전에는 기록이 부족하여 잘 알수 없지만 16세기부터 자포로제 코자크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754년 러시아 제국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새로 얻은 드네프르 강 중하류 지역을 크림 칸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지역에 성 옐리자베타 요새(Крепость Святой Елисаветы)를 세우면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성 옐리사베타 요새는 일대의 중심지가 되어 이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끝난 1784년에 시로 승격해 옐리자베트그라드(Елисаветград)라고 하였다. 요새가 폐쇄된 이후 1800년대부터 오데사와 하리코프를 잇는 철도의 중간점에 있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나 종전 후 우크라이나 SSR 아래의 도시로 복귀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지노비예스크(Зино́вьевск 1924 - 1934), 키로보(Ки́рово, 1934 - 1939), 키로보흐라드(Кіровоград/Кировогра́д, 1939 - 2016) 등으로 불렸으나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의 탈공산화 정책으로 인해 키로보흐라드 주 출신 극작가 마르코 크로피우니츠키(Марко Лукич Кропивницький, 1840~1910)의 이름을 딴[5] 크로피우니츠키로 시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5. 경제[편집]
갈탄, 우라늄, 고품질 모래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어 광산업이 발전하였으며 원자력 부품제조업 역시 발달하였다.
1인당 GRDP는 2016년 기준으로 1700달러 수준이나 우크라이나의 경제사정이 괜찮아진 이후에는 3000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6. 관광[편집]
7. 기타[편집]
지역 스포츠팀으로 축구 구단인 FC 지르카 키로보흐라드, 야구팀 Biotechkom-KNTU가 있다.
야구팀 Biotechkom-KNTU은 골키퍼 출신인 유리 콜라코브스키가 지역 기술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해서 야구단을 이끌어 갔는데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22회나 우승하고 유러피언 컵에도 진출하는 등 사실상의 우크라이나 국가대표의 역할을 하고있다.
공업도시 이미지와는 달리 음악학교 4곳, 미술학교 3곳이 있으며 2017년부터 국가예술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세계대회에서도 우승한 경력이 있는 댄스팀들을 배출해냈다.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 당국에 의한 대규모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불가리아의 도브리치, 카자흐스탄의 파블로다르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8. 출신인물[편집]
- 안드리 루솔 - 전 축구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