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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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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 토마스 베켓은 제40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캔터베리대교구의 교구장이었다.
2. 생애[편집]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켓(Gilbert Becket, 1090–1143?)과 캉[2] 의 마틸다(Caen of Matilda, 1090–1141)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켓은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턴 프리오리(Merton Priory) 수도회[3]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베크의 티볼드(Theobald of Bec, 1090–1161)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켓이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4] 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티볼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켓은 헨리 2세에 의하여 잉글랜드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티볼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켓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4년 영국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클래런던 조례를 통과시켰다. 성직자를 교회법정뿐만 아니라, 세속법정에도 세울수 있게 한 법안이다.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베켓은 처음에는 마지못해 법안을 수용했다가, 대주교로서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되어 1166년 클래런던 조례를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켓은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켓은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켓이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켓은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5] 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켓은 상스(Sens)[6]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켓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베켓은 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 이게 헨리 2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 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당대 기록에 따르면 헨리 2세가 베켓에게 화가 난 나머지, 부하들 앞에서 "내가 이 궁정에서 (너희들을) 그렇게 먹여주고 승진시켜줬건만, 저 비천한 성직자에게 멸시를 당하는 주군을 보면서도 구출할 생각도 안하는 비참한 밥벌레와 배신자밖에 없구나!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라고 고함을 쳤는데, 이를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측근의 기사 네 사람[7] 이 대성당 안에 매복했다가 베켓이 나타나자 난자해서 죽였다고 되어 있다.[8]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켓은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켓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연을 끊고 막 나가기 시작한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해버렸다. 그러면서 항변을 할 게 있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이미 저승 간 양반이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백골이 진토된지라 재판정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안장된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그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리고 '영국 왕권을 교황권에 종속시키려 했던 가톨릭 광신자'라는 악평도 늘어나, 2006년 영국 BBC에서 선정한 최악의 영국인 여론조사에서 2위[9] 로 뽑히는 등 최근에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적으로는 이 역시도 현대적인 정교분리 개념을 중세에 억지로 적용한 시대착오적인 평가라 영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지양하고 당시의 맥락에서 복합적인 평가를 시도한다.
따지고보면 베켓이 왕권에 맞서서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한 것 자체가 오히려 더 정교분리의 의미에 더 비슷하다. 교회가 왕으로 대표되는 행정부에 종속되는 것이야말로 정교분리와 한참 멀어진 현상이기 때문이다. 2021년에는 이러한 평가를 적용하여 중립적인 입장에서 베켓에 대한 특별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BBC 여론조사는 어차피 인기투표에 가까운 것이라 학술적이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여전히 영국 성공회에서는 중요한 위인으로 기념하고, 영국 가톨릭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3. 매체[편집]
-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 장 아누이는 베켓과 헨리 2세의 관계를 중심으로 희곡 "Becket ou l'honneur de Dieu(베케트 혹은 신의 명예)"를 썼다.
- 장 아누이의 희곡은 여러 번 공연화 되었다.
- 1960년 첫 브로드웨이 공연은 피터 글렌빌이 연출하고 로런스 올리비에가 베켓 역을, 앤서니 퀸이 헨리 2세 역을 맡았다. 토니상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분야를 거머쥐었다. 순회 공연에선 영화 촬영 때문에 하차한 퀸 대신 올리비에가 헨리 2세 역을 맡고 아서 케네디가 베켓 역을 맡았다.
- 1961년 런던 공연은 피터 홀이 연출했다. 헨리 2세 역은 원래 피터 오툴이 연기하기로 돼있었으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찍기 위해 계약을 파기해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넘겨받았다.
- 장 아누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베켓>(1964)은 브로드웨이 초연을 연출했던 피터 그렌빌이 감독했으며 리처드 버튼이 베켓을, 런던 공연에서 헨리 2세를 하기로 했다가 취소했던 피터 오툴이 헨리 2세를, 존 길구드가 루이 7세를 연기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2개 분야 후보로 올랐고, 최우수 대본상을 받았다.
[1] 혹은 1120년 초[2] 프랑스 서북부 바스노르망디 칼바도스에 있는 도시[3] 머튼 프리오리 수도회와 수도원 건물은 런던에 있는 머튼구에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수도원 철폐령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슈퍼마켓이 그 터를 차지하고 있다.[4] 현재의 부르고뉴 욘주의 주도[5] 현재의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콩테에 있는 작은 도시[6]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콩테 욘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7] 이들의 이름은 레지나르 핏쩌어즈(Reginald Fitzurse), 휴 드 모르빌(Hugh de Moreville), 윌리엄 드 트레이시(William de Tracy), 리차드 르 브르통(Richard le Breton)이다.[8] 이때 죽은 베켓의 시체에서 이가 쏟아져 나왔다고 하는데, 이게 대중적으로 중세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게 살았는지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로 거론되지만, 이는 사실 베켓이 성직자가 된 뒤에 고행의 일부로서 행했던 것으로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목욕을 즐겨했다. 흔히 설화에서 도 높은 스님을 화장했더니 사리가 많이 나왔더라 하는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9] 1위는 잭 더 리퍼였다. 나머지는 이쪽 참조.[10] 퇴마사들이 영국에 갔을 때 찾은 성물인데 아주 강력해서 이 성물을 이용해 오오라를 날리는 것도 가능할 정도다.[11] 마지막에 헨리왕의 불평을 확대해석해서 살인을 계획하고 쳐들어온 햄리 일당을 필립 수도원장이 저지하고 서둘러 도망가자고 하는데 주교성당을 떠나는 걸 거부할뿐만 아니라 일단 일과를 지키자고 이동하는것도 느릿느릿 걸어가니 초반에 묘사로 호의를 가진 독자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 그래도 최후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숭고하게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