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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1세(파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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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페르디난도 1세는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다.
2. 생애[편집]
1751년 파르마에서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와 프랑스 공주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1765년 14세에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했다.
이미 어릴 때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획한 동맹의 역전의 일환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와의 결혼이 계획되었으며, 1769년 그녀와 결혼했다.[1] 파르마 공국의 실질적인 통치는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가 주도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예수회가 억압되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치세 말년에 들어 프랑스 혁명으로 외가인 프랑스에 프랑스 제1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소국이었던 파르마 공국의 입지도 불안해졌고, 결국 나폴레옹 전쟁으로 1801년 아란후에스 조약에 따라 파르마 공국은 프랑스 제1공화국에 양도되어 합병되었다. 그에게는 보상이랍시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빼앗아 세운 괴뢰국인 에트루리아 왕국이 주어졌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의 원주인 페르디난도 3세는 세속화된 잘츠부르크 대주교공령을 받아 잘츠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1802년 폰테비보(Fontevivo)에서 사망했는데 일각에서는 프랑스에 의한 독살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들 루도비코는 파르마 공국을 되찾지 못한 채 1803년 간질으로 사망했고, 그의 후손들은 손자인 카를로 2세 대에나 되어서야 파르마 공국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