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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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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양시칠리아 왕국의 2대 국왕.
2. 생애[편집]
1777년 나폴리에서 당시에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었던 페르디난도 1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후계자였던 형 카를로가 프란체스코가 1세 되던 해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차남이던 프란체스코가 칼라브리아 공작[1] 이 되었다.
이후 평범하게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왕세자 시절에는 자연과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어 식물학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인문학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797년에 외삼촌 레오폴트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 여대공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지만, 마리아 클레멘티나는 결혼 4년 만인 1801년에 결핵으로 추정되는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802년에 큰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4녀 마리아 이사벨과 재혼해 6남 6녀를 두었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나폴리 왕국이 점령당해 왕가가 시칠리아로 피신하였을 때 페르디난도 1세와 시칠리아 귀족 간의 갈등과 영국의 개입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1812년부터 1814년까지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양시칠리아 왕국이 출범한 후에도 1820년까지 시칠리아에 남아 시칠리아를 통제하였다.
1825년 부왕 페르디난도 1세가 승하하자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에는 대체로 국사를 측근들에게 위임하였으며, 1820년의 자유주의적 군사 반란을 주도하였던 카르보나리 세력을 탄압하는 등 반동주의적 성격의 통치를 펼쳤으나,[2] 국가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조세 제도를 개편하고 칼라브리아 지역의 도로망이 정비되는 등의 치적도 있었다.
183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왕위는 차남 페르디난도 2세가 계승했다.[3]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두 차례의 결혼에서 무려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네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아 이사벨 사이에서는 6남 6녀를 두었는데, 부왕 페르디난도 1세보다는 자녀의 수가 적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만 세면 오히려 아버지보다 훨씬 많다.
7명의 자녀만이 성인으로 성장한 아버지와 달리 대부분의 자녀들이 성인으로 성장하였고, 그 딸들과 여타 후손들이 많은 왕가와 혼사를 맺었다.
[1] 나폴리 왕국의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작위[2] 나폴레옹 전쟁기 섭정을 맡았을 당시에는 의회 허용 등 자유주의적 정책을 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3]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생의 장남인 페르디난도는 영아기에 요절했다. 페르디난도 2세는 마리아 이사벨 소생.[4] 요제프 1세의 장녀이다.[5] 페르디난트 3세의 외손자이다.[6]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딸이다.[7] 샹보르 백작 앙리, 파르마 공작부인 루이즈.[8]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이다.[9]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등.[10] 이사벨 2세, 루이사 페르난다.[11]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막내딸이다.[12] 프란체스코 2세.[13] 레오폴트 2세의 3남 카를 대공의 장녀다.[14]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형 프란체스코 2세의 후계자),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안눈치아타(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어머니),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피아 등.[15] 귀천상혼[16] 레오폴트 2세의 손자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자이다.[17] 페르디난도 4세 등.[18] 주앙 6세의 외손자이다.[19] 카를리스타 왕위요구자, 페르난도 7세의 동생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장남.[20] 명목상 제위 계승권자 이자베우 등.[21] 마리아 2세의 여동생이자 페드루 2세의 누나이다.[22]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5녀다.[23] 카세르타 백작부인 마리아 안토니에타(페르디난도 2세의 4남이자 왕가의 후계자인 알폰소의 부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