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必UP되다
덤프버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color: #808080"
[ 음반 목록 ] - }}}
[ 참여 음반 ] - }}}
[ 관련 문서 ]
1. 개요[편집]
2005년 8월 31일에 발매한 코요태의 정규 8집 앨범이다.
2. 수록곡[편집]
2.1. Like This[편집]
2.2. 비는... 하늘의 눈물[편집]
2.3. 1,2,3,4. (원,투,쓰리,포.)[편집]
2.4. 믿어볼까? (Feat. 천명훈)[편집]
2.5. 사랑병[편집]
2.6. 상상[편집]
2.7. 콩깍지[편집]
2.8. 버려[편집]
2.9. 아파도[편집]
2.10. 허리케인[편집]
2.11. Tonight[편집]
2.12. 모르겠어[편집]
2.13. 기억하니..[편집]
2.14. Boy Is Mine[편집]
2.15. 경고[편집]
2.16. Special Angel[편집]
2.17. 이별이 그리워질 때[편집]
3. 영상[편집]
3.1. 뮤직비디오[편집]
3.2. 음악 방송[편집]
3.3. 관련 영상[편집]
4. 성적[편집]
4.1. 판매량[편집]
정규 8집 앨범의 판매량은 한국음반산업협회 기준으로 총 73,176장이다.
4.2. 시상식[편집]
5. 여담[편집]
5.1. 결과[편집]
기존 코요태 스타일과 너무 이질적이었던 것이 흥행에 있어 장애물이라는 평이 중론. 차라리 아파도같은 발라드곡들로 활동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정도다. 뽕끼+단조멜로디에 1234보다 평이 훨씬 좋았던 Like this가 타이틀이었다면 7집의 하락을 딛고 반등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원래 하우스와 테크노를 주축으로 했던 코요태는 5집까지 뽕끼 가득한 멜로디와 신지의 한이 섞인 목소리가 어우러져 '슬픈 댄스곡'으로 인기를 얻었다. 전형적인 90년대식 댄스곡을 하던 팀이 6집에서는 디스코, 7집에서는 시즌송, 8집에서는 미국식으로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했는데,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사실 코요태의 4집에 이르면서 이미 하우스&테크노 장르는 한물간 음악 취급받았지만, 코요태는 꿋꿋하게 슬픈 뽕끼댄스를 타이틀로 밀었고 월드컵 열풍에 맞물려 이전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다. 프로듀서를 비롯한 코요태 멤버들도 수긍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앨범인 5집에서는 많은 인기를 얻었어도 예전만 못하다는 기류가 감지되었고, 내외적으로 코요태 노래는 맨날 똑같다, 얘네 노래는 너무 비슷해서 구분이 안 된다라는 혹평을 듣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지금 스타일로만 쭉 밀면 더 이상의 인기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에 6집부터 계속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복고풍의 디스코였던 6집은 기존 하우스 장르와 크게 느낌이 다르지는 않았다. 뽕끼 + 단조의 슬픈 멜로디에 빠른 비트의 리듬은 그대로 유지시켰고 거기에 펑키를 첨가한 정도의 조그마한 변화였다. 거기에 다소 촌스럽게 들릴 수 있었던 멜로디였지만 대놓고 80년대의 '복고' 코드를 도입하며 촌스러움을 복고로 승화시켜 오히려 역으로 트렌디한 느낌까지 심어줄 수 있었다. 추가로 활동곡이 항상 두글자 제목이었던 징크스를 탈피하고 사상 처음으로 두글자가 아닌 노래제목을 타이틀로 정해서 확실한 인식 변화를 엿보이게 했다.
이처럼 기존 이미지와 통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던 '적절한 변화'였기에 이미 사양세이던 장르를 쉽게 벗어나 다시 한 번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물론 타이틀에서만 변화를 줬을 뿐 앨범 전체적으론 기존 뽕끼 댄스가 주류였고, 후속곡 '불꽃'도 기존 코요태 스타일이었다. 변화 자체의 폭이 매우 작았기 때문에, '디스코왕'의 변신을 변신이라기 보다는 작은 일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거기에 덧붙여 앨범의 색깔은 이전 앨범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트렌디한 느낌에서 더 멀어진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기존 스타일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굉장히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6집에서 대히트를 치고 여름을 겨냥한 'Together'라는 밝은 곡까지 냈음에도 불구하고, '코요태 노래는 다 똑같다'라는 평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 번째 변화였던 7집부터 불안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정규앨범 타이틀곡을 시즌송으로 채택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앨범이 되었는데, 기대만큼 인기를 얻지 못하면서 처음으로 타격이 왔다. 스페셜 앨범이었으면 조금 덜했을지 모르나 트랙 리스트만 보더라도 상당수의 돈이 들어간 앨범이었으니 아마 내부적으로 위기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타이틀곡 활동을 마무리한 이후엔 다시금 기존 스타일의 곡으로 돌아왔으나 후속곡들의 퀄리티가 이전보다 크게 떨어졌고[5] , 이미 한물간 장르였던 하우스였기에 대중들은 또다시 '또 똑같은 노래 들고 왔냐'는 반응을 보이며 냉정히 외면했다. 결국 흐지부지 7집 활동을 접고 8집을 준비하면서는 더이상 원래 장르를 내세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팬들과 대중들은 전형적인 코요태 스타일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온 결과물은 '슬픈 댄스곡'을 밀던 코요태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던 Crunk&B였다. 대중 친화적인 전략으로 인기를 얻던 코요태가 갑자기 트렌디한 장르로 나왔으니 대중들은 물론 팬들조차도 어이없어 했다. 심지어 어떤 사이트에서는 8집 공개 며칠전 누군가가 '애니모션' 스타일로 나온다고 스포일러를 했는데 한 코요태 팬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설도 좀 그럴듯하게 쓰라고 공개적으로 저격하면서 싸움이 났을 정도(!!!)였다.
그나마 제대로 된 미국 팝 장르의 곡이었다면 모를까, 원투쓰리포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짬뽕밥이나 다름없었다. 어설픈 Crunk 비트와 리듬에 덧붙여진 멜로디는 기존 뽕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효리의 10minute이나 보아의 My Name처럼 멜로디부터 비트까지 모든 곡의 작법을 미국식으로 맞추어 분위기를 180도 뒤집었다면 신선하다는 반응을 어느 정도 이끌 수 있었겠으나, 뽕끼가 느껴지는 멜로디에 어설픈 미국식 비트가 덧붙여진 느낌이니 반응이 차가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6] . 즉, 코요태라는 가수와도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지만 곡 안에서도 각각의 파트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기에 곡 자체의 이질감이 더했던 것이다. 이처럼 팬들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장르 변화를 했는데, 퀄리티조차 낮았기에 모든 것이 물과 기름처럼 어색했기에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이다. 7집에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코요태는 여전히 매우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했던 인기그룹이었는데 정작 후속작에서 기대 이하의 결과물이 나옴에 따라 주춤을 본격적인 하락세로 만들었다.
멤버들 역시 이 당시의 키워드로 본격적인 위기, 정체성의 상실를 꼽았다. 이 때를 회상할 때마다 세 멤버 모두 한 목소리로 '기존 스타일대로 나오면 맨날 똑같다 지겹다고 하더니, 장르를 바꿔서 나오면 이게 뭐냐 안 어울린다라고 하시니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음악적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다라고 말했다. 기존 장르에 대중들이 피로감을 심하게 느낄 때쯤 자신들의 분명한 음악적 색깔을 버리고 시도한 변화가 오히려 역효과를 맞으며 대중들이 코요태에 갖는 신뢰감마저 대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에 멤버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인기가 떨어지는 문제를 떠나서 아예 음악적인 방향성을 잃어버렸기에 '우리가 가수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뿌리부터 흔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멤버들과 팬들 모두 데뷔 이래 가장 큰 슬럼프를 맞았던 시기, 한마디로 표현하면 최악의 흑역사라고 평하고 있다.[7]
더불어 코요태 역사상 최초로 리패키지 음반을 발매했지만, 이것까지 포함했음에도 판매량은 겨우 73,176장에 그쳤다. 당시 음반시장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불과 1년 5개월 전의 6집이 30만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코요태 치고는 매우 저조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이미 음원시장이 커지기는 했지만 수익 분배구조가 지금보다 훨씬 불공평하던 시대여서 음원으로는 사실상 그 어떤 수익도 보기 힘들었다.[8] 2018년 현재라면 이 당시 인기로 괜찮은 음원수익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결국 시기적으로 음반시장 불황이 코요태의 인기를 주춤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멤버들 개인활동의 성과는 굉장히 좋아서 2005년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5년 연속 수상, MBC 가요대제전 본상 3년 연속 수상[9] , 골든디스크 시상식 본상 5년 연속 수상, 엠넷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혼성 그룹 부문 총 4회 수상 및 3년 연속 수상 등 여러 연말 가요시상식들에서는 본상들을 차지했다. 다만 SBS 가요대전 본상은 4년 연속 수상에 실패했고, 서울가요대상은 이 해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5.2. 논란[편집]
게다가 이런 음악적인 혹평에 사생활 문제까지 터지면서 코요태는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앨범을 발표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코요태의 꽃 신지가 속옷만 입고 상반신을 노출한 채로 어느 한 남성 연예인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유포된 것이다. 처음 공개될 당시에 신지 본인은 어느 행사에서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찾아와서 '너 이거 끝나면 단단히 마음의 준비해라. 기자가 대기실에 쫙 깔려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사진 유포라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도 '그래봤자 술먹고 어디서 진상부린 사진이겠지'하며 시큰둥하게 넘기려고 했다가 뒤늦게 확인을 하자 충격과 공포를 느끼며 울고불고 경악했다고 한다.[10]
이 스캔들은 연예인으로서도, 여자로서도 매우 치명적이고 수치스러운 수준이었다. 부랴부랴 소속사는 사실 확인에 들어가 합성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가슴이 노출되지 않은 원본 사진을 공개했지만, 많은 네티즌들은 오히려 처음 공개된 사진이 원본이고 소속사가 공개한 사진이 합성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신지는 계속된 스캔들에 큰 타격을 입고 방송을 거의 중단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계속된 악플 세례에 세 명의 악플러들을 법정으로 넘긴 사건도 있었다. 지금이야 악플러에게 강경 대체하는게 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문희준 사태를 비롯해서 악플로 인해 세상을 뜬 연예인(최진실, 유니 등등)까지 있을 정도로 연예인에게 별 것도 아닌 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을 뱉어도 그냥 그대로 당하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매우 이례적인 강경 대처였고, 결국 법원이 신지의 손을 들어주면서 최종 승으로 끝났지만 이미 대중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실추가 된 이후였다. 이로 인해 8집 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내리막길을 걷던 코요태에게 완전히 결정타를 먹일 정도로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5.3. 개인활동의 급증[편집]
코요태라는 그룹의 하락세가 본격화된터라, 이 때부터 멤버들의 개인 활동 비중이 그룹 활동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TV만 돌리면 나오던 김종민의 예능활동이 이 시기에 정점을 맞이해서 리얼로망스 연애편지, 여걸 식스에 같이 출연한 적이 많았던 천명훈, 신정환과 함께 가수 출신 개그맨 이미지가 굳어졌으며[11] , 신지는 전성기에 비해 방송 활동이 줄었다. 이미 대중들에게 이미지 소모가 가장 많은 멤버였고 본인이 MC를 맡은 음악프로그램에서 희대의 대형사고를 현장에서 직접 본데다가 위에서 언급된 치명적인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활동을 쉬고 재충전에 들어갔다.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TV 동물농장 등 진행자로써의 모습,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연기 외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빽가는 아예 연예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진작가에 몰입하게 된다. 공백기로 인해 스케줄이 한가해진 덕분인지 빽가는 1년이 지난 2006년부터 이미 스타 사진가로 명성이 높아 사진작가로서만으로 대부분의 수입원이 나올 정도였다.
이후 코요태는 2006년 9집이 나올때 까지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고, 9.5집을 끝으로 3인조 활동은 김종민의 군 대체복무와 빽가의 뇌종양 투병 등으로 인해 2011년 Good good time이 나오기 전까지 불완전체로 활동했다. 신지는 김종민의 소집해제 직전에는 빽가와, 빽가가 뇌종양으로 투병할 때는 김종민과 활동을 이어나갔다.
[1] 6집 Moon Light의 경우처럼 '꽁깍지'로 표기되어 발매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며 다행히 리패키지 발매 때는 수정되었다.[2] 신지의 솔로곡이다.[3] 타샤니의 곡을 리메이크 하였다.[4] 미수록곡이다. 앨범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음원사이트에서만 공개 되었다.[5] 이탈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코요태 스타일의 곡으로서 1~6집 모든 앨범에서 이미 여러번 들어가있던 노래들의 분위기와 흡사했고, 느리게 걷기는 대놓고 이전 활동곡의 멜로디를 일부 차용했다.[6] 작곡가 주영훈부터가 하우스&테크노 장르에 특화된 인물이라 그에게 있어서도 낯선 장르의 도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물간 작곡가라는 인상만 더 강해졌다.[7] 엠넷 마이크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8] 당장 시상식에서도 음원 대상들인 MKMF 올해의 노래상, 골든디스크 디지털음원대상이 생겨난게 이 다음해인 2006년일 정도였다.[9] 2005년부터 MBC의 연말 가요제의 명칭은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MBC 가요대제전'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10대 가수상의 명칭도 바뀌었다.[10] 이미 당해 3월에도 코요태의 전담 작곡가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신지의 어깨에 손 올리고 볼에 뽀뽀하는 듯한 모션을 취한 사진이 유포되어 한바탕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작곡가의 과한 행동에 대중들이 질타를 많이 했다.[11] 동시에 이 시기 이들과 많이 엮이던 이정, 브라이언 등도 이전의 진지한 모습보다는 웃긴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켜버렸다. 이전에도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긴 했지만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런 모습들이 대중들에게 각인되면서 이 둘의 개그스런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도 이정은 해병대 전역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가요 대결 프로그램에서 진지한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약간 개그스런 이미지는 희석되었지만 브라이언은 아직도 많은 대중들이 개그스런 이미지로 많이 기억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