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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넘어왔습니다.
군산상일고등학교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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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한 구단이자 호남 야구의 산파 역할을 해낸 강호[4] .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보여준 기적적인 대역전승으로 인해 일약 역전의 명수라는 별칭이 있다.
1968년 훗날 프로야구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이용일이 사업 기반이 있던 군산 지역에 야구붐을 일으키고 싶어서 만든 팀이 군산상고였다. 단순히 고교팀만 덜렁 만든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팜 시스템 형태로 제대로 구축한 팀이었다. 당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선수에서 막 은퇴한 최관수[5] 감독을 영입하면서 1971년에는 신생팀으로 무려 대통령배 4강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가운데가 최관수 감독. 맨 오른쪽은 김봉연이고 김봉연 옆은 김준환이다.
하지만 그 무렵 선수들이 대형사고를 치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준환, 김봉연 등이 추석날 군산시내에서 막걸리를 먹던 중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다가 적발된 것이었다. 자칫 선수들의 퇴단과 야구부의 존폐가 위험해 질 수 있던 상황에서 최관수 감독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선수들의 퇴단을 말리면서 선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 크니, 나를 때리라."는 말을 한다.[6] 그리고 실제로 못 때리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손수 이렇게 때리라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선수들은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최 감독의 엉덩이에 방망이질을 했고[7] 그렇게 탈선으로 인한 문제는 수습되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 일 이후 군산상고는 확실히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고교야구가 지속되는 한 계속 회자되는 명승부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일어났다. 부산고와 결승에서 만난 군산상고는 9회말 시작 전까지 1:4로 뒤지면서 끌려갔다. 그러나 9회말 공격에서 연속 안타와 상대(3루수 김문희)의 주루 방해를 묶어 극적으로 4점을 내면서 기적적인 대역전승을 이뤄내며 창단 첫 우승에 성공했다. 이 역전승 이후로 군산상고의 별명은 역전의 명수가 되었다. 기적과도 같았던 이 역전 드라마는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77년에 개봉한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가 군산상고의 대역전 스토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뒤 최관수 감독의 지도 아래 1976년에는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강호로 부상했지만 1979년 최관수 감독이 파킨스씨 병으로 은퇴[8] 하면서 군산상고의 태동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지휘봉은 백기성 감독이 잡게 된다.[9]
다행히 군산상고는 지역 출신의 우완 에이스 조계현이 등장하면서 활력을 찾았다. 1981년 고교 1학년의 신분으로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대통령배 우승, 이듬해인 1982년에는 청룡기와 봉황대기 2관왕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팀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우승은 강속구를 가진 조계현의 팔을 희생시키면서 얻은 대가였고, 조계현은 팔색조로 불리는 기교파로 프로 무대를 풍미할지언정, 고교 무대에서 보여줬던 속구의 위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계현이 졸업한 후, 이 번에는 이광우가 등장하면서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광우, 정명원, 최해식이 뛰던 1984년의 군산상고는 청룡기 우승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들이 졸업한 후에는 이 번에는 왼손 에이스 조규제가 등장했다. 조규제를 필두로 한 군산상고의 선수들은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며, 1986년 고교야구를 군산상고의 해로 만들었다.
1986년에는 대통령배에서 경남고를 상대로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다시금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군산상고는 1980년대 6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명문으로 이름을 높일 수 있었다.
영광이 많았던 1980년대가 지나간 후에는 전반적으로 군산상고 야구부는 침체기에 빠졌다. 1993년 청룡기 준우승은 있었지만, 4강에 들지 못하고 초반에 짐을 싸야 했던 시절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간간히 걸출한 인재들이 등장하면서 성세를 높은 것은 위안거리였다. 1996년 언더핸드 정대현을 앞세운 군산상고는 김수경의 인천고를 누르고 봉황대기 통산 2번째 우승에 성공하면서 위용을 빛냈고, 1999년에는 초고교급 왼손 투수 이승호를 앞세워 채태인의 부산상고를 누르고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9년 이승호의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던 해는 지역 연고를 하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시즌이었고, 쌍방울이 사라지면서 지역 야구단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KIA의 지원도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10] 결국 이는 지역 인재들의 꾸준한 유출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채병용[11] , 오지환[12] , 김혁민[13] , 국해성[14] , 윤여운[15] , 임석진[16] , 배제성[17] , 고승민[18] , 김민준[19] [20] 이런 사례가 계속 증가하면서 군산상고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지역 유망주의 수도권 유출은 전라북도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 소재 학교들도 공통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인데 전북이 유독 심한 듯하다.[21][22]
2000년대 군산상고가 과거의 위상과 비슷한 성과를 낸 것은 단 한 번. 2005년 모교 출신인 김성한 감독의 지휘 아래 차우찬, 황선일, 원종현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대통령배 4강에 입성했을 때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초반 탈락이 일상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유출이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군산상고에게 어느 정도 서막이 보인 것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한 후, 2013년에는 마침내 조현명의 호투 속에 봉황대기 우승과 전국체전 우승에 성공하면서 제법 길었던 무관의 시대를 끝냈다. 다만, 인재 유출이라는 고민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고 구단이 지역과 큰 연관이 없는 NC 다이노스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16년 봉황대기에서 막강한 타선을 앞세워 인천고를 20:7, 개성고를 7:0, 4강에서 덕수고를 8:4로 꺽고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휘문고에게 끝내기를 맞고 패배했다. 이날 경기에서 휘문고의 타자주자를 벤치 멤버가 태클(...)거는 바람에 휘문고의 끝내기 안타가 무효처리가 되며 일말의 희망이 피워지나 했으나 다음 타자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맞고 패배하게 되었다.
문제의 끝내기 안타 취소장면.
하지만 2016년 제 97회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결승전에서 투수 김영중[23] 의 호투 속에 충북 세광고를 7:5로 물리치고 우승, 봉황대기에서 준우승에 그친 한을 풀었다. 2013년 이후, 4년만의 우승.
2021년 청룡기에서 1회전에서 신흥고, 2회전에서 밀성고에 승리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대회가 순연되었다가 재개된 뒤에는 16강전에서 성남고, 8강전에서 대구상원고, 준결승에서 마산용마고를 각각 꺾고 결승에 올라 충암고와 대결하게 됐다. 청룡기 결승에 오른 것은 1993년 이후 28년 만이며 1984년 이후 37년 만에 이 대회 우승에 도전했으나 3:7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했다.
2022년 8월 22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일반계 전환을 확정했고 9월 7일 군산상일고등학교로 교명을 정함에 따라 2023년부터 새로운 교명으로 출발하게 됐다.
2022년 7월 고교야구 주말리그에서 몰수게임패기사를 당했고 이에 따라 석수철 감독이 6개월간 직무정지 처분을 받아 김태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징계조치를 마치고 2023년 6월 석수철 감독이 감독직에 복귀했다. 2023년 8월 대통령배에서 광주제일고에 5-2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에서 율곡고에 9-1(8회 콜드게임), 8강전에서 휘문고에 11-1(6회 콜드게임) 등 2게임 연속 콜드게임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선 경기고를 상대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연장혈전 끝에 6-5로 승리, 1986년 이후로 37년만에 대통령배 결승에 진출했다.
2023년 8월 14일 인천고와의 결승전에서 9회말 10-10 1사 만루에서 박찬우의 좌전 끝내기안타로 11-10 승리를 거뒀고 37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양팀의 에이스(군산상일고 정민성, 인천고 김택연)이 준결승전에서 많은 투구로 인해 투구수 제한 규정에 의해 결승전에 나올 수 없어 양팀은 투수를 총 가동하는 물량전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들이 마운드에 오르며 양팀 도합 25안타, 32 4사구를 기록했으며 1시에 시작된 경기는 무려 4시간 10분이 지나서야 종료됐다. 선수 보호를 위해 도입된 투구수 제한 규정이 오히려 경기의 질적 저하를 낳은 안 좋은 사례가 된 경기였다.관련기사
이름 뒤에 ★표시가 된 사람은 군산상고 출신 감독들이다.
||1. 개요[편집]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한 구단이자 호남 야구의 산파 역할을 해낸 강호[4] .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보여준 기적적인 대역전승으로 인해 일약 역전의 명수라는 별칭이 있다.
2. 연혁[편집]
2.1. '역전의 명수'의 탄생[편집]
1968년 훗날 프로야구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이용일이 사업 기반이 있던 군산 지역에 야구붐을 일으키고 싶어서 만든 팀이 군산상고였다. 단순히 고교팀만 덜렁 만든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팜 시스템 형태로 제대로 구축한 팀이었다. 당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선수에서 막 은퇴한 최관수[5] 감독을 영입하면서 1971년에는 신생팀으로 무려 대통령배 4강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가운데가 최관수 감독. 맨 오른쪽은 김봉연이고 김봉연 옆은 김준환이다.
하지만 그 무렵 선수들이 대형사고를 치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준환, 김봉연 등이 추석날 군산시내에서 막걸리를 먹던 중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다가 적발된 것이었다. 자칫 선수들의 퇴단과 야구부의 존폐가 위험해 질 수 있던 상황에서 최관수 감독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선수들의 퇴단을 말리면서 선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 크니, 나를 때리라."는 말을 한다.[6] 그리고 실제로 못 때리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손수 이렇게 때리라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선수들은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최 감독의 엉덩이에 방망이질을 했고[7] 그렇게 탈선으로 인한 문제는 수습되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 일 이후 군산상고는 확실히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고교야구가 지속되는 한 계속 회자되는 명승부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일어났다. 부산고와 결승에서 만난 군산상고는 9회말 시작 전까지 1:4로 뒤지면서 끌려갔다. 그러나 9회말 공격에서 연속 안타와 상대(3루수 김문희)의 주루 방해를 묶어 극적으로 4점을 내면서 기적적인 대역전승을 이뤄내며 창단 첫 우승에 성공했다. 이 역전승 이후로 군산상고의 별명은 역전의 명수가 되었다. 기적과도 같았던 이 역전 드라마는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77년에 개봉한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가 군산상고의 대역전 스토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뒤 최관수 감독의 지도 아래 1976년에는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강호로 부상했지만 1979년 최관수 감독이 파킨스씨 병으로 은퇴[8] 하면서 군산상고의 태동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지휘봉은 백기성 감독이 잡게 된다.[9]
2.2. 화려한 1980년대[편집]
다행히 군산상고는 지역 출신의 우완 에이스 조계현이 등장하면서 활력을 찾았다. 1981년 고교 1학년의 신분으로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대통령배 우승, 이듬해인 1982년에는 청룡기와 봉황대기 2관왕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팀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우승은 강속구를 가진 조계현의 팔을 희생시키면서 얻은 대가였고, 조계현은 팔색조로 불리는 기교파로 프로 무대를 풍미할지언정, 고교 무대에서 보여줬던 속구의 위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계현이 졸업한 후, 이 번에는 이광우가 등장하면서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광우, 정명원, 최해식이 뛰던 1984년의 군산상고는 청룡기 우승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들이 졸업한 후에는 이 번에는 왼손 에이스 조규제가 등장했다. 조규제를 필두로 한 군산상고의 선수들은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며, 1986년 고교야구를 군산상고의 해로 만들었다.
1986년에는 대통령배에서 경남고를 상대로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다시금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군산상고는 1980년대 6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명문으로 이름을 높일 수 있었다.
2.3. 저력을 보여준 1990년대[편집]
영광이 많았던 1980년대가 지나간 후에는 전반적으로 군산상고 야구부는 침체기에 빠졌다. 1993년 청룡기 준우승은 있었지만, 4강에 들지 못하고 초반에 짐을 싸야 했던 시절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간간히 걸출한 인재들이 등장하면서 성세를 높은 것은 위안거리였다. 1996년 언더핸드 정대현을 앞세운 군산상고는 김수경의 인천고를 누르고 봉황대기 통산 2번째 우승에 성공하면서 위용을 빛냈고, 1999년에는 초고교급 왼손 투수 이승호를 앞세워 채태인의 부산상고를 누르고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9년 이승호의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던 해는 지역 연고를 하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시즌이었고, 쌍방울이 사라지면서 지역 야구단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KIA의 지원도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10] 결국 이는 지역 인재들의 꾸준한 유출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채병용[11] , 오지환[12] , 김혁민[13] , 국해성[14] , 윤여운[15] , 임석진[16] , 배제성[17] , 고승민[18] , 김민준[19] [20] 이런 사례가 계속 증가하면서 군산상고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지역 유망주의 수도권 유출은 전라북도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 소재 학교들도 공통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인데 전북이 유독 심한 듯하다.[21][22]
2.4. 암흑 시대, 그리고 서광은 비출 것인가[편집]
2000년대 군산상고가 과거의 위상과 비슷한 성과를 낸 것은 단 한 번. 2005년 모교 출신인 김성한 감독의 지휘 아래 차우찬, 황선일, 원종현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대통령배 4강에 입성했을 때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초반 탈락이 일상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유출이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군산상고에게 어느 정도 서막이 보인 것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한 후, 2013년에는 마침내 조현명의 호투 속에 봉황대기 우승과 전국체전 우승에 성공하면서 제법 길었던 무관의 시대를 끝냈다. 다만, 인재 유출이라는 고민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고 구단이 지역과 큰 연관이 없는 NC 다이노스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16년 봉황대기에서 막강한 타선을 앞세워 인천고를 20:7, 개성고를 7:0, 4강에서 덕수고를 8:4로 꺽고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휘문고에게 끝내기를 맞고 패배했다. 이날 경기에서 휘문고의 타자주자를 벤치 멤버가 태클(...)거는 바람에 휘문고의 끝내기 안타가 무효처리가 되며 일말의 희망이 피워지나 했으나 다음 타자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맞고 패배하게 되었다.
문제의 끝내기 안타 취소장면.
하지만 2016년 제 97회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결승전에서 투수 김영중[23] 의 호투 속에 충북 세광고를 7:5로 물리치고 우승, 봉황대기에서 준우승에 그친 한을 풀었다. 2013년 이후, 4년만의 우승.
2021년 청룡기에서 1회전에서 신흥고, 2회전에서 밀성고에 승리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대회가 순연되었다가 재개된 뒤에는 16강전에서 성남고, 8강전에서 대구상원고, 준결승에서 마산용마고를 각각 꺾고 결승에 올라 충암고와 대결하게 됐다. 청룡기 결승에 오른 것은 1993년 이후 28년 만이며 1984년 이후 37년 만에 이 대회 우승에 도전했으나 3:7로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했다.
2022년 8월 22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일반계 전환을 확정했고 9월 7일 군산상일고등학교로 교명을 정함에 따라 2023년부터 새로운 교명으로 출발하게 됐다.
2022년 7월 고교야구 주말리그에서 몰수게임패기사를 당했고 이에 따라 석수철 감독이 6개월간 직무정지 처분을 받아 김태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징계조치를 마치고 2023년 6월 석수철 감독이 감독직에 복귀했다. 2023년 8월 대통령배에서 광주제일고에 5-2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에서 율곡고에 9-1(8회 콜드게임), 8강전에서 휘문고에 11-1(6회 콜드게임) 등 2게임 연속 콜드게임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선 경기고를 상대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연장혈전 끝에 6-5로 승리, 1986년 이후로 37년만에 대통령배 결승에 진출했다.
2023년 8월 14일 인천고와의 결승전에서 9회말 10-10 1사 만루에서 박찬우의 좌전 끝내기안타로 11-10 승리를 거뒀고 37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양팀의 에이스(군산상일고 정민성, 인천고 김택연)이 준결승전에서 많은 투구로 인해 투구수 제한 규정에 의해 결승전에 나올 수 없어 양팀은 투수를 총 가동하는 물량전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들이 마운드에 오르며 양팀 도합 25안타, 32 4사구를 기록했으며 1시에 시작된 경기는 무려 4시간 10분이 지나서야 종료됐다. 선수 보호를 위해 도입된 투구수 제한 규정이 오히려 경기의 질적 저하를 낳은 안 좋은 사례가 된 경기였다.관련기사
3. 출신 선수[24][편집]
4. 역대 감독[편집]
이름 뒤에 ★표시가 된 사람은 군산상고 출신 감독들이다.
5. 여담[편집]
- 고등학교 졸업기수는 아래와 같다.
- 27회 : 나창기[32]
- 28회 : 김봉연, 김준환
- 29회 : 김일권, 양기탁
- 30회 : 김우근, 조종규
- 32회 : 김종윤, 김용남
- 33회 : 김성한
- 37회 : 이건열, 김평호
- 38회 : 오석환, 백인호
- 39회 : 조계현
- 40회 : 정명원, 이광우
- 41회 : 최해식
- 42회 : 조규제
- 47회 : 석수철
- 48회 : 오상민, 장성진
- 49회 : 신경현
- 52회 : 정대현
- 54회 : 이진영
- 55회 : 이승호
- 57회 : 문규현
- 58회 : 김연훈, 이창욱
- 59회 : 채형직
- 61회 : 원종현, 차우찬, 황선일
- 63회 : 전우엽, 최형록, 최현욱
- 수비 시작 전 모두 먼저 몸을 숙이고 두 팔을 각 무릎에 댄 다음 기지개 하듯이 화이팅을 외치는 전통이 있다. 투수와 포수는 야수들 방향으로 몸을 틀어 화이팅한다.
-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군산상고 야구부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다. 민우혁은 군산상고 졸업 후 탐라대에 진학했지만, 탐라대를 1년만에 중퇴하고 LG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방출당하고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 1970년대 대학야구와 실업야구가 인기가 많았을 때 대학을 희망했던 선수들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성균관대, 경희대, 건국대, 동국대, 중앙대, 원광대로 많이 진학했고, 실업야구팀들인 상업은행 야구단, 한국화장품 야구단, 포항제철 야구단, 농협 야구단, 한일은행 야구단,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으로 고교 졸업 후 직행하거나 대학 졸업 후 입단하였다.
- 2012년 12월 28일 학교 야구장에 인조잔디와 야간조명시설을 설치하여 재개장하였다.'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인조잔디구장 개장
- 2018년 제99회 전국체육대회 2차 전북지역 예선전에서 승부조작 의혹을 샀다.군산상고 '고의 져주기' 논란…야구부 감독에 '경고 처분'
5.1. 연고권 관련[편집]
-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1989년까지는 호남 유일의 연고구단이었던 해태 타이거즈가 연고권을 행사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해태 선수단 내 중심을 이뤘다.
- 1990년 전라북도를 연고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호남 연고가 둘로 쪼개지며 자연스럽게 쌍방울의 연고 학교가 되었고, 1999년을 끝으로 쌍방울이 해체된 뒤에는 다시 KIA 타이거즈로 연고권이 넘어갔다.
- 그러다 2013년 5월 KBO가 신인 1차지명 제도를 부활하면서 지역별 대상학교를 재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전주고와 군산상고는 전북과는 인연이 없는 NC 다이노스로 연고권이 넘어갔다.
- 당시 10구단 창설이 확정되었고, 지역 1차 신인지명이 부활하면서 각 구단 간의 형평성 유지를 위해 구단별 연고 지역 기준으로 5개교씩을 나누되 먼저 도시 연고로 5개교씩 배정하고, 미충족 시에는 광역 연고에서 우선으로 배정하고 그래도 미충족 시에는 전체구단 배정 후 남은 고교를 대상으로 추첨을 통하여 배정하였다.
- 이러한 사정으로 KIA는 광주제일고, 동성고, 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5개교를 배정받은 후 추가로 인상고를 배정받았고, 당시 연고지역에 고교가 적었던 NC는 마산고, 용마고, 김해고, 울산공고 4개교에 추첨/선정으로 군산상고와 전주고를 추가배정 받았고, 2013년 10월에는 NC는 경남·울산·전주·군산을 기반으로, KIA의 연고지역은 전주·군산을 제외한 전북 지역과 전남으로 1차지명 연고지역 중고등학교 분배도 조정되었다.
- 2013년의 이러한 결정 이후 2014년부터 KIA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개장과 맞물리며 근근히 이어오던 월명 야구장에서의 KIA 제2구장 경기도 사라졌는데, 당연히 전북지역 내 KIA 팬들은 군산상고의 지명 연고팀 이전은 역사를 무시하는 일이라며 KBO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 2013년 NC로 연고권이 넘어갈 당시에는 1차지명 부활과 함께 프로야구단이 없는 전라북도 3개 고등학교 야구부 구성원은 미아신세가 되고, 역차별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2022년 1차지명이 폐지되고 전국지명이 부활할 때까지 NC는 전북지역 고교에 대한 꾸준한 지원을 이어갔고# 2020년대 들어 NC 연고권 고등학교들이 전국대회에서 연이어 호성적을 거두면서 투자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군산상일고 역시 긴 침묵을 깨고 2021년 청룡기 준우승, 2023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지역야구의 부활을 알렸다.
- 이것과 별개로 1차지명 제도가 시행될 당시에도 전북지역 고교선수 1차지명에 대한 유권해석과 관련해선 말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2022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NC의 1차지명 후보군으로 오르내렸던 전주고 투수 김찬민의 사례[33] 가 있는데, 결국 NC는 김찬민에 대한 1차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