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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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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유송 초기의 명장으로 공을 많이 세웠으나 자신을 시기한 대신들의 모함으로 죄를 받아 처형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출신으로, 단소의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 형제들이 모두 당숙인 단빙지 밑에서 자랐다. 단도제는 상중에 예의를 중시했고 형제남매들과의 우애로 칭송을 받았다.
2.2. 유유의 거병[편집]
404년,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자 거병할 때 단도제는 단소, 단지와 함께 유유의 거병에 참가했으며, 건무장군 참군사, 정서장군 참군사를 역임했다. 또한 노산(魯山)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해 평정하고 환진(桓振)을 사로잡아 보국장군(輔國參軍), 남양군(南陽郡) 태수로 제수되었으며, 오흥현오등후에 봉해졌다.
2.3. 전공을 세우다[편집]
410년, 노순의 봉기를 시작으로 도적들이 각지에서 봉기한다. 이때 곽기생(郭寄生)이 작당현(作唐縣)에서 무리를 모아 봉기하려고 하자, 단도제는 양무장군(揚武將軍), 천문군(天門郡) 태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곽기생을 토벌했다. 그 뒤로 단도제는 유도규(劉道規)를 따라 환겸(桓謙), 순림(荀林) 등을 토벌하고 가는 곳마다 적을 격파했다. 서도복이 침공할 때도 단도제는 유도규의 휘하에서 활약하여 다대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단도제는 안원호군(安遠護軍), 무릉군(武陵郡) 내사로 승진했다가, 다시 태위부 참군이 되었고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임명되었으며, 영삭장군(寧朔將軍), 태위부 참군사로 전임되었다.
단도제는 여러 차례 세운 공에 따라 작당현남(作唐縣男)에 봉해지고 식읍 400호를 받았다. 단도제는 태위부 주부, 자의참군을 역임하다가 예장공세자 유의부가 정로장군이 되어 경구(京口)에 진수할 때 유의부의 사마, 임회군(臨淮郡) 태수가 되었다. 유의부가 서중랑장으로 전임되자 단도제는 다시 사마가 되었고 양국(梁國) 내사를 겸하였다가 다시 정서장군 사마가 되었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더해졌다. 415년에는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참가했다.
416년, 유유가 후진을 정벌할 때 단도제는 선봉이 되어 회수, 비수에서 출병했고 자신이 향하는 곳마다 동진군에 항복했다. 또한 허창으로 진군하여 후진의 영삭장군, 영천군(潁川郡) 태수인 요탄(姚坦)과 양업(楊業)을 사로잡았고, 성고(成臯)에서는 후진의 연주 자사 위화(韋華)가 항복했다. 낙양에서는 후진의 평남장군(平南將軍) 진류공(陳留公) 요광(姚洸)이 항복했다. 단도제는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때 단도제의 수하 장수들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 시신으로 경관을 쌓자고 건의했지만, 단도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도제는 포로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단도제의 처사에 감격한 후진의 많은 사람들이 단도제에게 귀순했다. 이후 동관으로 진군하여 요소(姚紹)를 물리쳤다. 후진이 멸망한 뒤 단도제는 정로장군, 낭야군(琅邪郡) 내사가 되었다. 유의부가 강릉에 진수할 때 단도제는 서중랑장 사마, 지절(持節),남만교위(南蠻校尉)가 되었고 다시 정로장군이 더해졌다. 뒤에 송국 시중으로 옮기고 세자중서자를 겸하였으며, 연주(兗州) 대중정(大中正)이 되었다.바로 지금 죄인을 벌주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한다.
2.4. 유송의 명장[편집]
420년,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이다. 단도제는 이때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전임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으며, 석두(石頭)에 진수했다. 또한 영수현공(永修縣公)으로 전봉되고 식읍 2000호를 받았으며, 단양윤으로 옮기고 호군장군은 그대로 받았다. 무제의 병이 위독해질 때 단도제는 반검(班劍) 20명을 받았고 무제가 승하할 때 유의부를 잘 보좌하라는 고명을 받았다. 422년, 유유가 사망하고 유의부가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소제다. 단도제는 소제가 즉위한 뒤에 감남서연강북회남제군군사(監南徐兗江北淮南諸郡軍事), 진북장군(鎭北將軍), 남연주 자사로 전출되었다.
423년, 북위군이 동양성(東陽城)에서 청주(靑州) 자사 축기(竺夔)를 포위하여 축기가 조정에 급보를 전하자, 단도제는 사지절(使持節), 감정토제군사(監征討諸軍事)가 더해졌고 왕의와 함께 동양으로 출병하였으나 단도제가 도착하기 직전에 군영과 공성용 무기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단도제는 성 안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곡물창고를 열어 오랫동안 쌓아둔 곡식을 내어 쌀을 만들고 북위군을 추격하려고 했으나 이미 북위군이 멀리 철수했기에 더는 추격하지 못하고 철군하여 광릉에 진수했다.
2.5. 소제 폐위와 사회 토벌[편집]
서선지가 장차 여릉왕 유의진을 폐서인할 계획을 먼저 단도제에게 알릴 때 단도제는 서선지에 동의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불가하다고 말했으나 서선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선지가 유의부를 폐위할 때 핑계를 대고 단도제를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단도제가 건강에 도착할 때 서선지는 유의부를 폐위할 계획을 알렸다. 유의부의 폐위를 얼마 앞두고 단도제는 영군부로 입성하여 머물렀는데, 사회는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단도제는 잠에 빠졌기에 사회는 단도제에게 탄복하였다. 유의륭이 도착하기 직전 단도제는 조당을 수비했고, 유의륭이 즉위한 뒤 정북장군(征北將軍)으로 진호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한 무릉군공(武陵郡公)에 봉해지고 식읍 4000호를 받았으나 단도제는 작위를 사양했으며, 독청주서주회양하비낭야동완5군제군사(督靑州徐州淮陽下邳琅邪東莞五郡諸軍事)가 더해졌다.
426년, 조정에서 사회를 토벌할 때 단도제는 도언지의 후속부대로 종군했고 도언지가 은기(隱圻)로 물러날 때 단도제가 도착했다. 당시 단도제는 왕홍과 친하게 지냈는데, 사회를 토벌할 때 단도제를 파견하기로 하자 왕화는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는 도언지와 단도제를 파견할 때 단도제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단도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단도제는 다른 사람을 따르기만 했지 그 당시에는 주모자도 아니었소. 임용하고 위로한다면 아무 염려할 일도 없을 것이오.
사회는 단도제가 서선지와 함께 처형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단도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요하여 사회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그대로 붕괴되었다. 사회가 토벌된 뒤, 단도제는 도독강주형주강하예주서양신채진희4군제군사(都督江州荊州江夏豫州西陽新蔡晉熙四郡諸軍事),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강주 자사로 옮기고 지절과 산기상시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소신이 옛날 사회와 함께 북벌에 종군하며 관중에 입성할 10가지 계책 중 사회는 9가지 계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재능과 지모는 명석하여 마땅히 사회와 대적하기는 어려우나, 고군으로 승리를 거둔 적이 없고 군사적 재능은 아마 사회의 뛰어난 점이 아닐 것입니다. 소신은 사회의 지모를 다 알고 있고, 사회는 소신의 용맹함을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왕명을 받들어 토벌에 나선다면 틀림없이 싸우지 않고 사로잡을 것입니다.
2.6. 유송의 북벌[편집]
430년, 문제가 도언지를 북위 정벌에 파견할 때 도언지는 하남(河南)을 평정했으나 뒤에 다시 상실했고 금용(金墉)과 호뢰(虎牢)도 북위군에 함락당하며 활대(滑臺)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단도제는 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가 되어 출병했으며,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에서 북위의 안평공(安平公) 숙손건(叔孫建)과 조우하자 영삭장군(寧朔將軍) 왕의, 효기장군(驍騎將軍) 단굉(段宏)을 이끌고 숙손건을 물리쳤다. 또한 고량정(高梁亭)에서 북위의 영남장군(寧南將軍), 제주(濟州) 자사 수창공(壽昌公) 실협고결(悉頰庫結)과 전투를 벌이면서 단굉과 심건지(沈虔之) 등을 파견하여 기병을 통해 실협고결을 물리쳤다. 단도제는 제수(濟水)에서 20여 일 동안 전투를 벌이고 수십 차례의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활대가 함락되자 역성(歷城)에서 철군했다. 단도제는 사공으로 진위되었고 지절, 산기상시, 도독, 자사는 그대로 받으며 심양(尋陽)에 진수했다.
2.7. 최후[편집]
단도제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명성과 위엄이 두터웠고 단도제의 수하 장수들은 백전연마의 장수들이었으며 아들들 또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조정에서는 단도제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아예 "사마의가 아닌지 어찌 알겠냐?"[1] 는 의문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가 여러 차례 병으로 누우며 위독해지자, 팽성왕(彭城王) 유의강은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의강의 말을 덥석 믿어버린 문제는 435년 북위가 변경을 침범한 상황에서 단도제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436년 조정에서 다시 단도제를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단도제는 이미 배에 탄 상황이었다. 이때 문제가 병에 걸리면서 다시 단도제를 불러들였고 단도제는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단도제는 자신이 체포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폐하께서 승하하신다면 단도제를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단도제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들만 해도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 단식(檀植), 사도(司徒) 종사중랑(從事中郞) 단찬(檀粲), 태자사인(太子舍人) 단습(檀隰), 정북부(征北府) 주부 단승백(檀承伯), 비서랑(祕書郞) 단준(檀遵), 사공부(司空府) 참군 설동(薛彤), 단이(檀夷), 단옹(檀邕), 단연(檀演), 사공부 참군 고진지(高進之)였다. 설동과 고진지는 모두 단도제의 심복으로 용력이 있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장비와 관우에 비견하였다.어찌하여 당신들이 쌓은 만리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려는 것입니까!
3. 사후[편집]
단도제가 처형된 뒤 문제는 대사면을 단행했다. 한편 단도제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북위에도 전해졌다. 단도제가 살아있을 때 북위 사람들은 단도제의 그림을 그려 귀신을 쫓기도 했는데, 단도제가 처형된 이후 북위에서는 "단도제가 죽었으니 남쪽은 두렵지 않다!"라는 말이 나왔다. 한편 유송에서는 다시 북벌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문제는 자신의 측근인 은경인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450년, 문제가 북위에 대한 북벌을 시작할 때 심경지는 단도제와 도언지에 대해 언급하며 북벌에 대해 반대했으나, 문제는 "단도제는 악인을 길러 스스로 생계를 도모했다"고 언급하며 심경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 하지만 의욕있게 추진한 북벌이 실패하자 문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단도제를 처형한 것을 후회하였다.문제: 누가 단도제의 뒤를 이을 수 있겠소?
은경인: 단도제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기에 위엄과 명성이 높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문제: 그렇지 않소. 한나라의 이광이 살아있을 때 흉노는 감히 남쪽을 침범하지 못했는데, 뒤를 이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소?
『남사』, 「단도제전(檀道濟傳)」
후대 당나라에서는 782년 안진경의 건의에 따라 고금의 명장 64명을 추봉하고 사당을 세웠는데, 이 64명의 명단에 단도제가 포함되었다. 송대에는 당나라의 관례에 따라 72명을 추봉하며 이때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십칠사백장전(十七史百將傳)』에서는 단도제의 이름이 올라갔다.단도제가 살아있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는가!
『남사』, 「단도제전(檀道濟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