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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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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무제(孝武帝). 휘는 유준(劉駿). 자는 휴룡(休龍). 아명은 도민(道民). 송문제 유의륭의 3남으로 아버지가 큰형 유소(劉劭), 둘째형 유준(劉濬)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들을 주살하고 즉위했다. 세조라는 묘호답게 과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황권강화를 위해 유씨 황족들을 대부분 주살하였다. 후대에 나타날 두 명의 폐제보다는 낫겠지만 말이다.
초기 3년간 효건(孝建)을, 후기 8년간 대명(大明)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의 앞에 큰형 유소가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453년 계사년 음력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사용했는데 문제는 유소의 치세가 흑역사가 됐기 때문.
2. 생애[편집]
원가 7년(430년) 8월에 유의륭과 노혜남(路惠男)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과는 동명이인이다. 원래 무릉왕, 옹주 자사로 있으면서 양양을 수비했고, 안북장군과 서주 자사로 임명되어 팽성을 수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양 전투에서 패전해서 진군장군으로 좌천되었다가 북중랑장으로 복귀했으며 강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유준은 총명하여 독서를 할 때 한 번에 7줄을 함께 읽었고, 문재가 매우 훌륭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이처럼 유준은 문무에 모두 재능이 있는 엄친아였다. 그러나 아버지 유의륭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팽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원가 30년(453년) 2월, 큰형인 태자 유소(劉劭)가 유의륭을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그의 인생이 급변한다. 유소는 보병 교위 심경지(沈慶之)를 시켜 유준을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오히려 심경지는 태자가 없으면 장남이 황위를 계승한다는 법칙에 따라서[1] 유준과 함께 유소를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이복 동생이자 유의륭의 6남 경릉왕 유탄, 무제 유유의 6남으로 유준의 숙부인 형주 자사 남군왕 유의선(劉義宣), 옹주 자사 장질(臧質), 사주 자사 노상 등과 함께 유소 토벌에 나섰다.
4월, 결국 유준은 신정에서 유소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며, 5월에는 건강을 점령하고 유소와 형 시흥왕 유준을 죽이며 그들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다. 또 그들의 가솔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그 상처에 독주를 부어 모두 멸족시켰다. 유소의 자는 휴원(休遠)으로 부인으로는 은씨(은옥영)와 왕씨(왕앵무)가 있었다. 은씨는 남편 유소가 잠시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남편이 일찍 사망하였다. 은씨, 왕씨, 그리고 유소의 네 아들 유위지, 유적지, 유빈지, 신원미상의 아들, 딸 하나까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시흥왕 유준의 자는 휴명(休明)으로 그의 부인, 그의 세 아들 유장문, 유장인, 유장도 역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유준이 살륙을 저지를 때, 유소의 부인, 즉 유준의 형수 은옥영(殷玉英)이 대리옥승(大理獄丞) 강각(江恪)과 문답함이 걸작이다.
殷玉英: "汝家骨肉相殘害 何以枉殺天下無罪人?"
江恪: "受拜皇后 非罪而何?"
은옥영: "싸움은 니들끼리 했으면서 왜 애꿎은 나를 왕살[2]
하는 거냐?"강각: "(역적의) 황후 자리를 받았는데 그것이 죄가 아니고 뭔가?"
대리옥승은 기소 및 형사재판을 모두 맡는 아문(衙門)으로 옥승(獄丞)은 감옥을 관리하는 벼슬인데 당나라 기준으로 산계가 장사랑(將仕郞)으로 문관 종9품에 속한다. 유송은 당나라보다 앞서 존속했기 때문에 품계 역시 차이가 있겠지만 감옥과 죄수들을 가까이 관리하는 점에서 이때도 말직에 가까웠을 것이다. 즉 한때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 최말단 관리에게 모욕을 당한 셈으로 당시 이들을 향한 효무제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또 아비를 죽인 인간 말종이라는 뜻에서 유소, 유준 형제의 집을 허물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들의 일당과 무당 엄도육 일당을 멸족하고 시신을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효무제 유준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는지, 아님 막장 황제들의 왕조라서 그런지 황제가 된 후에는 아주 엉망이었다. 유의선과 장질은 유소와 시흥왕 유준의 토벌 공로가 크다고 자랑하며 매우 교만하고 횡포했는데, 일을 대부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했다. 사실 장질의 공을 잘 아는 효무제 유준은 장질이 해달라는 것을 들어주었고, 유의선은 10년 동안 형주에 있으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정예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효무제 유준은 유의선의 딸들, 즉 자기들의 사촌 동생들을 숙의로 삼고, 은씨와 사씨로 고친 다음 계속 끼고 살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설했다가 죽은 자가 많았다.
효건 원년(454년) 2월, 이에 분노한 유의선은 장질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호응하는 자가 매우 적었고, 계획이 허접해서 금방 격파당했다. 6월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동시에 멸족되었다. 이때부터 효무제는 종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온 정력과 역량을 집중했다. 그후 황족들간에 살육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효무제는 형주, 양주, 강주를 분할하여 동양주와 영주를 설치하고, 인구를 분산시켜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부상서를 두 사람으로 이원화시킨 후 따로 대신을 임명하지 않고 중서, 통사, 사인이 정사를 토의하게 했다. 그의 악랄한 황족 사냥은 문제 유의륭의 6남인 남서주 자사 경릉왕 유탄을 제거하면서 절정을 달렸다 유탄의 자는 휴문으로 유의륭과 은씨(은수화) 사이에서 태어난 유의륭의 6남이었다. 유의륭이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그 직전에 유의륭이 아들에게 죽었다. 그런 만큼 유탄은 서생들을 가까이하고 인망을 쌓았다. 유탄은 성격이 관대하고 예절이 밝았으며 유소, 시흥왕 유준, 유의선, 장질 등 유준의 적들을 쳐부수는 데 공을 세워 인심을 얻었다. 또 유탄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유준은 그를 꺼렸다.
대명 3년(459년) 4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군대를 보내 기습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관광당하고 패배했으며 이에 빡친 효무제는 유탄을 치기 전에 건강에 있던 유탄의 일당 1,000여 명을 주살하여 내부 호응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처결했다. 결국 광릉을 쳐서 함락시키고 유탄과 그의 일족을 모두 멸하고 동시에 광릉 주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켰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무제는 성욕이 심했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는 효무제가 자기 어머니에게 들러 밤새도록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사촌 동생과 성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소문이기 때문에 진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송 왕조에 미친 인간이 워낙 많은 데다, 이 양반의 행적이 워낙 막장인지라, 소문이 진짜라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을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유유가 만든 농기구 박물관을 탐방했을 때는 거기에 있던 유유의 초상화를 삿대질하며 저런 못생기고 미천한 영감이 황제였다고 부끄럽다며 욕을 하며 패드립을 쳤다. 송서의 무제본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孝武 大明 中 壞上所居陰室 於其處起玉燭殿 與羣臣觀之. 牀頭有土鄣 壁上挂葛燈籠 麻繩拂. 侍中 袁顗 盛稱 上儉素之德 孝武不答 獨曰 "田舍公得此 以爲過矣."
효무제가 대명 중에 상이 머물렀던 곳인 음침한 방을 헐고 그곳에 옥촉전을 세워서 뭇 신하와 함께 구경하였다. 침대의 머리맡은 흙벽으로 삼아 벽에는 칡으로 만든 등롱과 삼끈으로 만든 먼지떨이가 걸렸다. 시중 원의가 상의 검소한 덕을 성대하게 칭찬했으나 효무제는 이를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저런 천한 늙은이가[4]
이걸 얻다니 지나치다."
애초에 효무제는 원가 7년, 즉 문제 유의륭이 즉위한 지 7년 후, 무제 유유가 죽은 지 10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고인이 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제 유유 이후로 송나라가 망할 때까지 문제 유의륭 외에는 정상인 황제가 없었으므로 유유의 박물관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효무제는 인재 선발에서 자기의 비위를 맞춰주고, 아부를 떠는 간신들을 중용하고 총애했다. 시중 안사백은 효무제와 도박을 해서 일부러 한 번에 100만 냥을 잃고 환심을 얻어 심복이 되었다. 또 효무제는 은귀비가 죽자 진군태수 유덕원에게 우리 부인이 죽었는데 님이 곡하는 실력을 보고 상벌을 내릴 거임이라고 말하자 유덕원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비통하게 울면서 눈물을 짜냈다. 이에 효무제는 기뻐하며 유덕원을 예주자사에 임명했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마침 그 날이 유덕원이 사별한 부인의 제삿날이었다고 한다.
효무제는 반대로 자신에게 간언을 마구 날리는 충신에게는 잔혹하게 대했다. 단양윤 안준은 여러 차례 사치와 음란 행위에 대해 간언을 올렸는데, 결국 유탄과 한패라는 죄를 씌워 다리를 자르고 죽였다. 또 노릉내사 주랑도 날카로운 직언을 하자 미워하여 어머니의 장례를 성의있게 하지 않았다면서 불효자라는 이유로 죽였다. 효무제는 대규모로 궁전을 짓고, 나무에 비단을 입혔으며 애첩과 총애하는 간신들에게 자주 상을 내려 국고가 비었다. 은귀비의 장례식에는 수십리의 산굴을 파서 거대한 묘를 만들었는데 그 부역에 죽은 백성들이 많았다.
또한 효무제는 재물을 탐내어서, 자사 또는 2,000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게 재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여 강제로 바치게 했고, 바치지 않으면 파직하거나 죄를 씌워 죽였다. 바친 자들도 반드시 그와 도박을 해야 했는데 돈을 뺏고, 결국 모든 재산까지 날려먹게 한 후에야 판을 그만뒀다. 거기다 종일 술만 먹고 취해서 대신들을 대취하게 하고, 서로 희롱하게 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았다. 시중 심회문이 술을 마시지 않고 농담을 하지 않자 건방지다는 이유로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였다. 그 외에 대신들을 모욕했는데 황문시랑 종령수는 몸이 비대하여 절을 올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일부러 그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여 그가 사례의 절을 올리게 만들어 힘들게 절을 하며 끙끙대는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또 심심하면 자신의 노비에게 곤장으로 대신들을 치게 했는데 상서령 이하의 관원은 곤장을 피할 수 없었다.
효무제는 키가 크고 작은 것, 몸이 비대하고 여윈 것에 따라 대신들에게 별명을 달아주었는데 평상시에는 대신들의 관직이나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라 별명으로 불렀다.
대명 8년(464년) 윤5월, 효무제는 음란한 생활을 하다가, 총애하던 은귀비가 죽자 술만 퍼먹다가 그대로 병을 얻어서, 결국은 재위 12년 만에 35세의 나이로 건강 옥촉전에서 사망했다. 7월에 경녕릉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자업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재위기간 내내 막장 짓만 하다가 폐위되고 결국 11번째 동생인 유욱이 뒤를 이었다.
3. 평가[편집]
다만 위 항목에는 만행만 나와 있는데, 양심 있는 늙은 신하 채흥종을 비롯한 유의륭 때부터의 원로 대신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유준도 이들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건강의 요직에 그럼에도 묵묵히 제자리 지키며 제할일 하는 관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참소가 들어가면 어쩌다가 한 번은 간파해서 그들을 지켜주는 의외의 행동도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하고 수없이 많은 애꿎은 신하들이 죽었어도 유송이 나름 제대로 돌아갔던 건 유준에게 최소한도의 양심과 선을 지키는 지성만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북위를 공격하기 위해 문신들과 회의한 것 자체는 크게 나무랄 게 못된다. 문신이라고 해서 군사에 아주 문외한이란 법은 없기 때문. 유명한 병법가인 손자나 오자 같은 이들도 무신보다는 문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물론 유능한 심경지가 반대론을 펼쳤고, 유준에게 아부하던 무리들을 백면서생이라고 깠는데 결국 패하긴 패했지만 북위라고 늘상 유송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만 한 건 아니고, 되도 않는 약탈을 저지르다가 매복에 걸려 참패한 사례도 꽤 된다. 당시 적국이었던 북위는 북방 유목제국이었던 유연과의 전쟁도 전쟁이지만, 그 전에 다름아닌 유송과 벌였던 전쟁에서의 소모, 그리고 관중에서의 잦은 반란 탓에 다소 휴지기를 가져야 했던지라 국경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또한 상술했듯 비록 이상성욕이 후대인이 보기에도 심했지만, 과감하고 민첩해 술에 만취해 있다가도 신하들이 들어오면 가짐을 바르게 하고 취한 척하지 않는 등 본인이 최소한의 처신은 할 줄 알았고, 국가가 돌아가는 바에 아주 무관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그 당대에는 체면을 보전할 수 있었다.
4. 둘러보기(계보)[편집]
[1] 역적인 장남과 차남을 제외하면 유준이 장남이었다.[2] 枉殺.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해친다는 뜻이다.[3] 두 흉악범의 열전. 원흉소와 시흥왕 준은 아예 따로 열전까지 만들어 까였다.[4] 원문은 전사공(田舍公)으로 이는 전사옹(田舍翁)의 동의어다. 전사옹은 시골뜨기 늙은이지만 견문이 좁고 고집스러운 시골 늙은이로 뜻이 파생되었는데 즉 황실의 창시자이자 자기 할아버지를 아는게 없는 꼰대라 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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