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덕천시

덤프버전 :

||




상위평안남도
하위22동 10리



대의원
[ 펼치기 · 접기 ]
파일:wpk.jpg 최장일 (제113호 덕천선거구)
파일:wpk.jpg 임철웅 (제114호 공원선거구)
파일:wpk.jpg 리영철 (제115호 제남선거구)
파일:wpk.jpg 문명학 (제116호 청송선거구)
파일:wpk.jpg 유림호 (제117호 상덕선거구)
파일:사민당 당기.png 김영대 (제118호 장상선거구)
시당파일:wpk.jpg 김정철[1]
(덕천시당 책임비서)
인민위파일:wpk.jpg 문순빈[2]
(덕천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면적691.5㎢
시간대UTC+9
인구237,133명 (2008년)
인구밀도343명/km² (2008년)
관청
소재지



덕천시 인민위원회
(위치 미상)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교통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6. 지리
7. 유적
7.1. 승리산동굴 유적



1. 개요[편집]


평안남도에 위치한 도시.

2. 상세[편집]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237,133명이라 적지 않지만 일단 평안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시이다. 물론 모두 20만명 정도 선이라 서로 비슷하다. 광복 당시에는 덕천군이었고 6개 면 59개 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면적은 1,039km²였다.

도시 최대 산업은 탄광업으로 한반도 최대 규모의 탄전지대인 평남북부탄전 한가운데 있어 무연탄 채굴이 활발하다. 슬레이트와 석회석 역시 많이 난다.

또한, 북한 최대의 자동차 공장인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가 이 곳에 위치해있어 북한의 자동차 생산량 절반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인근에 '덕천공업대학'이라는 공장학교를 건립하여, 승리자동차공장을 비롯하여 덕천시와 주변의 공장, 기업소들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관리일꾼들을 대상으로 기술과 관리업무를 교육시키고 있다. 또한, 덕천견직공장이 있어 예로부터 이름난 '덕천향라(견직물의 일종)'를 생산하고 있으며, 대동강변에는 '대동강 발전소'라는 이름의 댐식 수력발전소가 건립되어있다.

3. 역사[편집]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통일신라발해의 변경지대로 방치되었다가 고려 태조 대에 북진정책으로 수복하였다. 947년(정종 2년)에 덕성진(德城鎭)을 설치하였고, 그 후 이 일대를 요원군(遼原郡) 또는 장덕진(長德鎭)이라 부르다가 1001년(목종 4년) 덕주(德州)로 개칭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 덕주를 '덕천(德川)'으로 고쳐 평안도 덕천군이 되었다. 덕천군으로 고친 직후 맹산현(孟山縣)과 통폐합해 잠시 덕맹현(德孟縣)으로 격하되었으나 1415년에 덕천군으로 원복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평안남도 덕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내면(郡內面)과 무릉면(武陵面)을 병합해 군무면(郡武面)을 신설하였다. 1917년 태극내면(太極內面)과 태극외면(太極外面)을 합쳐 태극면(太極面)으로 하고 군무면을 덕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35년 덕안면(德安面)이 폐지되어 덕천면과 일하면으로 분할편입되었고 태극면이 영원군으로 이관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6.25 전쟁 당시 김일성평양을 버리고 임시수도 강계시로 도망칠 때 이 곳에 잠시 머물렀으며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당시 남부 잠도면과 잠상면이 북창군으로 분리되면서 떨어져나갔다. 이후 1987년 시로 승격되었다.

지난 2017년 4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에 실패해 이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

4. 교통[편집]


교통면에서는 평덕선이 지난다. 덕천역(평덕선)이 시의 중심에 있다.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편집]


||


파일:덕천군기.png

파일:덕천군.jpg

성양면과 풍덕면은 북한에서 영원군과의 사이에 인공호수인 금성호(金城湖)를 건설해서 수몰된 곳이 많다.
잠도면 전지역과 잠상면 상당 지역은 북한에서 북창군득장지구로 편입시켰다.








6. 지리[편집]


근처에 금성호라는 제법 큰 호수가 있다. 덕천시 자체도 금성호에서 분리되는 지류에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7. 유적[편집]



7.1. 승리산동굴 유적[편집]


한반도 선사 유적
[ 펼치기 · 접기 ]

구석기시대상원 검은모루동굴유적, 덕천 승리산동굴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1], 두루봉동굴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유적,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청동기시대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 대구 진천동 입석, 사월동지석묘군, 속초 조양동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초기 철기시대광주 신창동 유적
※ 문서가 있는 경우만 서술.
[ 각주 펼치기 · 접기 ]
[각주]

[1] 사적 지정, 학설을 뒤집은 유적


승리산(勝利山)[4]동굴에서는 네안데르탈인[5]의 뼈와 중기 구석기시대 인류의 뼈가 출토됐다. 특히 여기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덕천 승리산인으로 명명됐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유물인 석제칼, 옥구슬, 민무늬 토기의 일종인 미송리식 토기도 발견되어서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승리산은 덕천 시가지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1] 2022년[2] 2022년[3] 1914년 군내면(郡內面)과 무릉면(武陵面)을 병합하여 신설되었다.[4] 덕천면 서쪽에 위치한 해발 404m의 산. 원래 이름은 신산(申山)으로 김일성이 자칭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기념한답시고 멋대로 이름을 바꾸었다.[5] 대체로 자국의 역사를 더 끌어 올리기 위한 북한 당국의 억지로 본다. 네안데르탈인은 중앙아시아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예가 없으며, 한반도는 구석기 시대의 고인류 화석이 남아있기 힘든 환경이다. 네안데르탈인으로 추정하는 근거인 화석의 특성 또한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며 구체적이지 못하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