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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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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부여군의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지역정당이 몰락한 현재는 농촌 지역 치곤 꽤 좌우 구도가 팽팽한 편이지만, 옛날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동네가 고향인 JP를 위시한 충남지역정당 텃밭 중 상텃밭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린 적도 있으며, JP가 이 곳에서 81%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JP의 지역 영향력은 강한 편이었는데, JP가 이회창 지지 선언을 거부하자 이회창 후보가 32%대의 저조한 득표율에 머무르면서 노무현 후보가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으며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JP가 17대 총선에서 국회 입성에 실패해 은퇴한 이후[1] 지금은 그 영향력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지역정당 계보를 이어받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에서 출마한 군인 출신 이진삼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진삼처럼 군인 출신인 새누리당 김근태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얼마 못 가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된다. 그리고 2013년에 실시된 재보선에 전직 충청남도지사이자 재선 의원 출신 이완구가 출마해 화제가 되었고, 80%에 가까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고 3선 고지에 오르면서 9년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2016년 20대 총선 선거구 조정 당시에는 적정 인구(14만)에 도달하지 못하여 이웃 선거구인 공주시와 새로히 통합되었다. 그리고 20대 총선에선 이완구는 재판 문제와 건강 문제로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대신 공주 출신의 JP 키즈인 정진석이 당선되면서 4선 고지에 올랐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는 문재인이 부여읍과 세도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홍준표에게 패했지만, 부여읍의 인구와 관외투표에서의 몰표로 인해 겨우 0.63%, 269표 차이로 아깝게 패했다. 이전엔 2:1, 5:3 차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가 여기서도 심하게 분 셈.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부여군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출신 군수가 탄생했다. 20대 총선에서 정진석에 의해 낙선했지만 나름 유의미한 득표를 얻었던 박수현이 부여에 손수 내려가서 물심양면으로 박정현을 돕는 동시에 부여 노인들을 상대로 맞춤형 유세를 펼친 것이 큰 효과를 봤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현직 군수였던 이용우와 충남도의원이었던 강용일 예비후보가 군수 후보 경선 때 고소드립까지 남발해가며 심각할 정도의 네거티브를 주고받은 탓에 군민들은 이들의 경선 싸움을 한심하고 실망스럽게 여기면서 보수정당에게 등을 돌렸고, 현직 이용우가 경선에서 이기긴 했지만 결국 경선 당시 강용일 충남도의원과 주고 받았던 네거티브 싸움은 본선 때의 낙선 요인으로 작용했다.
1. 선거구 개요[편집]
1.1. 군의회[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여군의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지역 특징[편집]
지역정당이 몰락한 현재는 농촌 지역 치곤 꽤 좌우 구도가 팽팽한 편이지만, 옛날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동네가 고향인 JP를 위시한 충남지역정당 텃밭 중 상텃밭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린 적도 있으며, JP가 이 곳에서 81%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JP의 지역 영향력은 강한 편이었는데, JP가 이회창 지지 선언을 거부하자 이회창 후보가 32%대의 저조한 득표율에 머무르면서 노무현 후보가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으며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JP가 17대 총선에서 국회 입성에 실패해 은퇴한 이후[1] 지금은 그 영향력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지역정당 계보를 이어받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에서 출마한 군인 출신 이진삼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진삼처럼 군인 출신인 새누리당 김근태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얼마 못 가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된다. 그리고 2013년에 실시된 재보선에 전직 충청남도지사이자 재선 의원 출신 이완구가 출마해 화제가 되었고, 80%에 가까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고 3선 고지에 오르면서 9년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2016년 20대 총선 선거구 조정 당시에는 적정 인구(14만)에 도달하지 못하여 이웃 선거구인 공주시와 새로히 통합되었다. 그리고 20대 총선에선 이완구는 재판 문제와 건강 문제로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대신 공주 출신의 JP 키즈인 정진석이 당선되면서 4선 고지에 올랐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는 문재인이 부여읍과 세도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홍준표에게 패했지만, 부여읍의 인구와 관외투표에서의 몰표로 인해 겨우 0.63%, 269표 차이로 아깝게 패했다. 이전엔 2:1, 5:3 차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가 여기서도 심하게 분 셈.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부여군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출신 군수가 탄생했다. 20대 총선에서 정진석에 의해 낙선했지만 나름 유의미한 득표를 얻었던 박수현이 부여에 손수 내려가서 물심양면으로 박정현을 돕는 동시에 부여 노인들을 상대로 맞춤형 유세를 펼친 것이 큰 효과를 봤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현직 군수였던 이용우와 충남도의원이었던 강용일 예비후보가 군수 후보 경선 때 고소드립까지 남발해가며 심각할 정도의 네거티브를 주고받은 탓에 군민들은 이들의 경선 싸움을 한심하고 실망스럽게 여기면서 보수정당에게 등을 돌렸고, 현직 이용우가 경선에서 이기긴 했지만 결국 경선 당시 강용일 충남도의원과 주고 받았던 네거티브 싸움은 본선 때의 낙선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역대 선거 결과[편집]
3.1. 지방선거[편집]
3.1.1.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1.1. 충남도지사[편집]
3.1.1.2. 부여군수[편집]
3.1.2.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2.1. 충남도지사[편집]
3.1.2.2. 부여군수[편집]
3.1.3.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3.1. 충남도지사[편집]
3.1.3.2. 부여군수[편집]
3.1.4.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4.1. 충남도지사[편집]
3.1.4.2. 부여군수[편집]
3.1.5.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5.1. 충남도지사[편집]
3.1.5.2. 부여군수[편집]
3.1.6.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6.1. 충남도지사[편집]
3.1.6.2. 부여군수[편집]
3.1.7.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7.1. 충남도지사[편집]
3.1.7.2. 부여군수[편집]
3.1.8.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3.1.8.1. 충남도지사[편집]
3.1.8.2. 부여군수[편집]
3.2. 대선[편집]
3.2.1. 제13대 대통령 선거[편집]
3.2.2. 제14대 대통령 선거[편집]
3.2.3. 제15대 대통령 선거[편집]
3.2.4. 제16대 대통령 선거[편집]
3.2.5. 제17대 대통령 선거[편집]
3.2.6. 제18대 대통령 선거[편집]
3.2.7. 제19대 대통령 선거[편집]
3.2.8. 제20대 대통령 선거[편집]
3.3. 총선[편집]
3.3.1. 부여군[편집]
3.3.2. 부여군·청양군[편집]
3.3.3. 공주시·부여군·청양군[편집]
[1] 이때 JP는 지역구 선거구가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비례대표 1번으로 나왔음에도 정당 득표율 3%도 못 받은 채 낙선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충격받은 JP는 그대로 정계를 은퇴한다. 여담으로, 만일 이 때 JP가 당선되었다면 9선으로 동률이었던 YS를 제치고 한국 국회 역사상 최다선이자 그 어느 정치인들도 달성한 적 없는 최초의 10선 의원이 될 수 있었다.[2] 13.2.28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A] A B 김종필 전 총재의 고향[B] 부여읍[C] 규암면,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부여] [3] 단 14표 차이였다.[4] 불과 21표 차이였으며 3위 안철수 후보와도 31표밖에 차이가 안 났다.[5] 불과 28표 차이였으며 3위 문재인 후보와도 44표밖에 차이나지 않았다.[6] 불과 25표 차이였다.[7] 불과 71표 차이였다.[8] 불과 64표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