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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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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지역정당의 대명사.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나온 두 번째 제2야당(원내 3당)[5] 이자 한국 정치사에 흔하지 않은 최장기 연립여당이었다.[6] 약칭은 자민련(自民聯: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사실상 충청 지역주의[7] 에 기반한 정당이었다. 이후 2012년까지 이어지는 충청권 보수정당의 대표주자이자[8] 헌정 사상 존재했던 제3지대 정당 중에서 가장 성공했던 당 중 하나로[9] 꼽힌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11]
자민련의 '련'은 기저[12] 에서 연합의 제1음절과 같은 聯을 쓴다. 한국어 음소배열론 규칙에 따라 어두 초성 ㄹ은 금지되는데[13] 이에 따라 연합, 연대 등에서 표면형으로 ㄹ이 탈락된 [연]이 도출된다. 그러나 어두환경이 아닌 경우 기저형의 두음이 탈락할 이유가 없으므로 '한총련', '자민련' 등에서는 탈락하지 않은 형태로 실현된다.[14] 다만, 한국어의 음운규칙 중 자음조화로 인해 발음 후보형은 [자민년] 혹은 [자밀련]으로 경합하나, 실제발음형은 [자민년]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15]
2. 강령 및 기본정책[편집]
우리는 근대화로 이룩된 광복 50년의 국가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의회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민족 재도약의 웅대한 역정을 펼쳐야 할 신세기 앞에 다가서 있다. 여기, 우리 자유민주연합은 이 시대의 소명을 수행할 가장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모두가 훈훈하고 보람있게 사는 선진문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대통합의 위업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을 밝힌다.
1.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추진하여 권력의 독선과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능을 확립하여 주권재민의 참된 책임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기본정책 10가지
책임정치의 실현
경제정의의 실현
중소기업의 육성
국제화, 개방화를 대비한 농림수산업의 진흥
교육 개혁과 문화의 창달
창조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진흥의 지원
국토개발의 질적 전환과 균형 있는 지방사회 발전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환경복지와 환경창조의 사회 실현
외교주권의 확보와 민주평화통일
3. 역사[편집]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3월 10일까지 11년 8일 동안 존속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약 14년 2개월 21일[16] 존속하여 장수 기록을 깼지만, 2004년 3월 23일에 한나라당이 상징을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상징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17] 굳이 '당'이라고 하지 않고 '연합'이라고 한 까닭은 민주자유당에서 분당돼서 나왔는데 자유민주당이라고 하면 구분이 잘 안 될 것이고 일본 자민당의 한국 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이될 가능성이 있어서 자유민주연합이 당명으로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18]
3.1. 창당과 1회 지선의 돌풍[편집]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정계[19] +민주계[20] +공화계[21] 크게 3계파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계가 높은 정권 지지율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당권 장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계의 젊은 의원들은 1994년 말 당시 민자당 대표위원이던 김종필을 '개혁 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라고 몰아세우며 강력하게 퇴진을 주장했다. 믿었던 YS마저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김종필 대표위원은 1995년 1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정계 일부가 가담했다.
자민련은 당시 김종필 총재의 '당 대표 쫓아내는 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과[22] '북한 쌀 보내기 결사 반대',[23] , '문민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 등을 무기로 강원도와 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어냈다. 당시 선거 직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5공, 노태우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PK 정권이라 불리던 YS 집권기 소외감을 느끼던 TK[24] 지역을 공략했다.
1995년에 열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대전과 충남의 광역단체장 선거를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고 기초단체장을 석권하여[25] 휩쓸면서 신민주공화당에 이은 충남권의 맹주가 부활했음을 증명해냈다. 다만, 이때도 신민주공화당 시절과 비슷하게 충북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대전과 충남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선 각각 63%, 67%의 득표율로 민주자유당과 민주당을 가볍게 제쳤지만 충북에서는 겨우 36% 득표에 그쳐 고작 10%대 격차로 승리하였고 기초단체장 선거는 아예 11곳 중 청주와 청원 단 2곳밖에 승리하지 못하였다.[26][27]
충청권 이외 지역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강원과 대구에서 1명씩 당선자를 낸 것 이외에는 성과가 없었지만, 강원도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최각규 후보가 무려 65%를 득표해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면서 민주자유당을 관광보냈다. 이외에도 당선자를 내진 못했지만 경기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선전했고 대구에서 민주자유당을 제치고 무소속 후보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해 열릴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녹색 바람을 예고했다.
3.2. 15대 총선과 전성기[편집]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가히 자민련의 전성기였다. 충청권 가운데 대전에선 7석을 모두 싹쓸이했고, 충남에선 13석 중 12석을 석권했으며, 충북에서도 8석 중 5석을 획득하면서 전체 충청권 의석 중 28석 중 24석을 쓸어담았다. 지난 1회 지선에서는 대전과 충남에서만 확실한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엔 충북 지역까지 크게 선전하면서 더 이상 충남권에 한정되지 않은 충청권의 맹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8] 이것만으로도 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명을 채우기 때문에, 충분한 돌풍이다. 하지만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대선전은 충청권의 석권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당시 반신한국 비민주 정서가 팽배했던 TK 지역에 자민련은 원조보수론을 내걸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문민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구광역시에서 녹색 바람이 불었고 13석 중 8석을 휩쓸어 1당 자리를 차지했다.[29] 다만, 경상북도는 자민련의 바람이 그렇게 거세지 않았고 신한국당이 11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하면서 자민련은 경상북도에서 2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그외 지역에서는 경기와 강원에서 의석을 배출해냈다. 경기도에서는 신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지지세가 있던 지역들을 잘 지켜내면서 5석을 얻어 선전했고 강원에서는 1회 지선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했지만 2석을 확보해냈다.
결과적으로 충청권에서 24석[30] , 비충청권에서 17석[31] , 전국구 9석으로 총 50명의 당선자를 내게 되었고 DJ의 새정치국민회의 다음가는 제2야당의 지위를 굳히며 리즈 시절을 찍게 된다. 다만 전국구에서 자민련의 막장 공천이 드러났다. 보통이면 젊은 의원이나 정치신인에게 주는 전국구 의원 상위 순번을 정상구, 정상천 등 줄줄이, 민정·공화계의 노장들로 채워버리는 짓[32] 을 했다.[33] 반면 신한국당·국민회의는 비교적 젊은 정치 신인들에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34]
자민련 소속 인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민정공화계이거나 관료,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15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재 김종필을 주축으로 한 공화계[35] , 민정계[36] , 관료 출신[37] , 유명인사[38] , 지역 유지 출신[39] 등을 위주로 이루어졌고 극히 일부의 이원범 같은 민주계 인사가 가담한 경우가 있었다.
황학수 정도가 신진 인사였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상만과 김고성은 훗날 김용환을 따라 희망의한국신당으로 2000년에 이탈하면서 무소속으로 이탈한다. 보면 알겠지만 과거 운동권에서 종사했던 인물이나 젊은 인물들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젊은 사람이 44세의 정우택[40] 이었으니 장기적으로 생존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3.3. DJP연합과 2회 지선의 약진[편집]
15대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다음 해인 1997년 치뤄질 15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DJ와 JP는 각각 단독 집권이 어렵다는 공통 인식을 갖게 되었고[41] , 김종필과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하고, 집권 시에 내각을 공동으로 구성한다는 일명 DJP연합에 합의해 15대 대선에서 DJ를 지원했다.[42] 이후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련은 공동 여당이 되었다.[43] 반대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은 이인제가 경선 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 버렸다. 마치 10여 년 전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아웅다웅하던 통에 표가 분산되고 그 결과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정권 교체 후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의 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44]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명실상부한 공동여당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한동[45] , 김학원[46] , 이완구[47] , 노승우, 백남치, 이상현, 오세응,[48] 이택석, 김종호[49] 등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옮겨온 것도 이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의 연장선상에서 국민회의와 전 지역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였고[50] 이런 연합공천의 위력으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6공화국 출범 이후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51]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대전광역시, 충청북도에서 각각 73%, 74%를 득표해 한나라당을 가볍게 눌렀고 충청남도에서는 심대평 후보가 84%를 득표해 재선에 성공하면서 영남과 호남에 결코 밀리지 않을 수준의 정당 지지도를 보여주었다. 수도권에서는 후보 단일화로 인한 효과가 가장 컸고 자민련은 인천광역시에서도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했다.[52]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과 야당이 국토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새가 되었다. 합산 지지율 시·도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군수·구청장 선거 45%. 부산에서도 보궐선거에서 김동주 후보가 당선되었다.[53]
이 시기에는 대선과 지방선거의 연이은 승리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간의 합당이 거론[54] 될 정도로 두 당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자민련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공세를 펼치고, 서로서로 의원 빼가기를 하는 등 날선 각을 세웠다.
3.4. 균열과 16대 총선 참패[편집]
그러나 DJP연합이 2년차에 접어들던 1999년 말에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55] 두 당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재벌개혁 등 여러 분야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7월 내각제 개헌 추진 포기를 합의하자 자민련 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공동정권 철수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56] 이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합당은 물 건너 갔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양당 연합공천이 무산되었다.[57][58][59]
그러나 자민련이 연합공천을 거부하고 호기롭게 16대 총선에 나선 결과는 대참패였다.
일단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조리 망했다.[60][61] 16대 총선에서 비충청권 지역구에서 승리한 자민련 후보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의 이한동 총재 단 한 명뿐이었다.[62] 김대중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충청권 지역, 특히 영남 지역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고 연립정권의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63] 자민련이 15대 총선 이후 국민회의와 연대하면서,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여론이 컸던 것이다.[64] 이들은 DJP연합이 시작된 이후부터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한나라당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65]
그러면 충청권은 석권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충청권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 이인제를 앞세워 충청권 공략에 나선다.[66]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분열을 틈타 공천을 시도해 선방. 반면 자민련은 대전 3석, 충남 6석, 충북 2석에 그치며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67] 자신들의 텃밭인 충청권에서조차 절반도 안 되는 11석을 얻는 데 그쳤다.[69]
결국 전국구(비례대표) 5석을 포함하여 총 17석을 획득하면서 15대 총선의 50석에 비하면 1/3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20석도 얻지 못하여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70] 을 겪게 된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도 피해를 안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합공천 무산으로 자민련에 돌아갈 의석들이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격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실패로 날린 의석 수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무려 27석[71] 이나 날려먹었다. 만약 민주당과 자민련이 2회 지선과 동일하게[72] 연합공천을 하고 비례대표 배분율을 2:1로 했다 가정하면 자민련은 충청권 24석 중 23석[73] , 강원 6석, 인천 9석, 경북 2석, 비례 8석으로 총합 48석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외에는 한나라당 107석, 새천년민주당 111석, 민주국민당 2석, 무소속 5석이 된다. 이 때 연합공천 무산으로 인한 여야의 의석 수 변화를 보면 여당 163석 → 136석[74] , 야당 110석 → 137석[75] 으로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무산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합공천 실패로 인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안정적 과반 확보 실패로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 실패와 더불어 충청권 이외 지역에서 사실상 기반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76]
3.5. 연정 파탄과 3회 지선 대패[편집]
그러나 처참한 총선 결과로 인해 자민련과 민주당은 둘 다 본인들 코가 석 자라서 반목이 불가능해졌기에 연정은 사실상 지속되었고, 2000년 12월 말,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 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꿔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77] 이때 송석찬 의원이 한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78] 결국 자민련은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고,[79] 이에 다시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80] 하지만 연정 후에도 민주당 115석+자민련 20석=135석으로 의석 수 절반(137석)에서 2석 모자랐던 민주당은 민주국민당(2석)[81] 과 무소속 정몽준 의원[82] 에게도 손을 벌려야 했고,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강원 춘천)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며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사실 보면 알겠지만, 국민의 정부 중기 쯤부턴 사실상 내각책임제처럼 운영된 감이 있다.
이렇게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합은 2001년 9월 3일,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83] 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84]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결국 붕괴되고 만다[85] .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송석찬, 배기선, 장재식, 송영진)은 민주당으로 원대복귀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농림부 한갑수, 건설교통부 김용채, 해양수산부 정우택)들도 사퇴하였다.[86] 그러나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는 오히려 내각 잔류를 결정했고, 결국 자민련은 극단적으로 현직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87]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말기 들어서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당의 존립 여부조차 위태해지게 된다.
이런 자민련의 좋지 않은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이전까지 비충청권 지역 중 어느 정도 선방하던 강원도와 인천광역시에서 한나라당에 싹쓸이 패배를 당했으며 텃밭이었던 충청북도[88] 와 대전광역시마저 한나라당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나마 대전에선 어느 정도 비볐지만[89] 충북에서는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대패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충청남도만 간신히 사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는 자민련이 이후부터 대전 - 충남 지역에 완전히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90]
3.6. 제16대 대통령 선거[편집]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한나라당과의 연대론과 독자출마설 등 여러 전망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단일화를 성사시키면서, 보수 진영에서도 JP와 이회창 전 총재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국무총리 시절 인준안 거부, 자민련 의원 빼가기, 2000년 총선에서의 해프닝 등 한나라당에도 크게 반기를 들고 있던 김종필은 끝내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16대 대선 정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링크 참조. 이회창 전 총재와 서청원 대표가 선거 막판까지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JP는 끝까지 거부하고 대선 나흘 전인 12월 15일 "급진세력도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한나라당도 자격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JP와 한나라당의 연대 실패로 이완구, 함석재, 이재선, 이양희 의원이 자민련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으로 합류했다.[91]
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JP가 노무현을 음지에서 도왔다는 평도 나왔다. 이에 대한 김종필의 견해는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으며,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도 그의 성취이고 국민이 노무현을 선택하면 그건 그것대로 국운"이었다.
3.7. 탄핵의 역풍과 17대 총선[편집]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총재이자 당의 구심점이던 JP는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당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92] 이때 JP를 제외하면 민정계 출신의 비례대표 김종호 의원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93][94] 내각제 합의 등이 뒤에서 오간 거 아니냔 관측들도 있었는데,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 이상 동의로 개헌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탄핵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고,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각제의 ㄴ자도 안 꺼내면서[95] 자민련이 가장 피를 봤다. 이후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10선에 도전하던[96] 당 총재 김종필이 무려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상황에서 득표율 2.82%를 얻어 딱 0.18%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1석도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 한 석이 모자라면서 실패하여 더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17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에 50% 이상의 여성을 홀수번에 꼭 배정하도록, 사실상 1번에는 여성을 앉히도록 하는 정당법이 개정되었는데[97] , 김종필은 본인을 1번으로 공천하고[98] 법까지 어겨가면서 뒷번호도 당장 당선이 급한 남성 정치인들로 채워 버린다. 대표적으로 비례대표 2번이 경남기업 회장인 성완종이었다. 어쨌든 이런 결과에 충격을 받은 김종필은 얼마 뒤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탈당했다.
결국 자민련은 충청권 지역정당임에도 불구하고 4석의 충청권 지역구 당선자로 막을 내렸다.[99] 그렇게 한때의 공동여당이자 제2야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함께 몰락한다. 이 선거로 인해 양당은 원내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3.8. 분당과 소멸[편집]
김종필의 정계 은퇴 및 탈당으로 자민련은 당 내 구심점이 사라졌고, 이인제 - 조부영 임시 지도부를 거쳐 김학원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에 올랐다.(총재직 폐지) 이후 한나라당 들러리 정도로 존속하다가, 부총재이자 충남도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중부권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진다. 자민련은 결국 중부권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 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중부권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인 김학원 대표가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100] 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자민련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이회창과 심대평을 중심으로 2000년대 후반 충청 지역을 잠시 석권했던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선 선진통일당도 2012년 새누리당과 흡수합당되면서 충청지역 기반정당은 사실상 사라졌고, 구성원 전원이 현재는 민주당계 정당, 보수정당 계열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101]
그러다가 2020년에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 심대평의 국민중심당, 이회창의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에서 당원 생활을 했던 박석우라는 골수 충청지역 기반 정당 출신 인물이 충청지역 기반정당 소속이었던 일부 사람들을 끌어모아 독자적으로 충청의미래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미약하게나마[102] 충청지역 기반정당이 부활하였다. 박석우 대표는 자유선진당에서 상임고문을 맡은 적이 있다.
4. 역대 지도부[편집]
5. 자민이[편집]
자세한 내용은 자민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105]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 자민련 이후 참여정부 시기엔 원내교섭단체를 이룬 제2야당은 없었으나[106]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야당이 난립하고 특히 그 중 자유선진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107] 이후 2016년엔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가뿐히 넘기며 제2야당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만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구심점과 기타 호남기반 정치인들이 뭉친 정당으로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과는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보수 정당의 맥은 선진통일당에서 끊겼다는 것이 중론이다.[108][109] 이후부터 충청 지역은 반기문, 안희정, 양승조 등 그냥 충청 지역 정치인을 당을 가리지 않고 밀어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체적으로 경합지역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수도권에서 젊은 층들이 충청권으로 많이 이주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비교적 강해진 편이다.
- 자민련이 등장한 이후,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는 정당을 가리켜 앞에 지역명을 붙인 'XX 자민련'이라는 조롱성 표현도 생겨났다. 1995년에 창당된 정당 이름으로 쓰인 고유 명사에서 현재에는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고 전국 정당이 되지 못하는 정당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셈. 예를 들어 충청을 기반으로 했던 자유선진당이 그러한 멸칭으로 불리었었고, 국민의당(이후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민생당)과 자유한국당(이후 미래통합당)이 각각 호남 자민련, TK 자민련으로 불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민주당계 정당 또한 수도권과 충청권, 낙동강 벨트에서 대참패하여 밀릴때마다 호남 자민련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2006년의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 이명박 정부 초기 및 18대 총선의 대통합민주신당 등. 바른정당이 바른정당 탈당사태 이후 합당전까지 지방선거에서 원희룡을 제외하곤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없게 되자 눈물의 제주 자민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110][111] 단, 자민련의 마지막이 비참해서 그렇지 초기 충청도는 물론 대구광역시, 경기도 북부, 강원도 일부를 아울렀던 초기 기세와 더불어 아직까지 그 어느 원내 3당 중에 자민련처럼 공동정권의 한 축에 활동한 당은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역기반에 안주했다는 이유로 'XX 자민련' 이런 식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가벼운 감이 없지 않다.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수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으나 그 김종필이 낙선하는 바람에 비례대표는 전멸했으며, 지역구 역시 단 4곳(보령시·서천군 류근찬,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이인제, 부여군·청양군 김학원, 당진군 김낙성)만 당선되었고 TK의 자민련계 무소속 당선자를 합쳐 5석으로 처참한 꼴을 당했다.[112] 2021년의 정의당보다도 의석수가 적은 것이다. 단, 구조적으로는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큰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정의당은 지역구는 경기도 고양시 갑의 심상정만 당선되었고 나머지 5석은 전원 비례대표였으며 이 점은 애초에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진출한 이후 소위 진보정당들이 전국 단위 정당 지지율은 어느 정도 나왔지만 지역 기반은 거의 확보하지 못해 대부분의 의석을 비례대표에 의존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반면 자민련의 경우 지역구에서는 당선자를 여럿 배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정당 지지율(정당득표)가 안 나와서 비례대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므로 상황 자체는 정 반대이다. 다만 17대 총선의 경우 자민련의 이름값때문에, 21대 총선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해당 정당이 좀 더 많은 의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처참히 무너졌다는 점 정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차라리 이 현상들을 연관하여 의미를 찾는다면 자민련의 처참한 몰락과 민주노동당의 첫 원내진출(+단숨에 원내 3당 부상)이 같은 17대 국회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17대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1인 2표제의 영향력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특히 자민련의 경우 당의 몰락을 초래한 김종필의 낙선사태가 달라진 선거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연구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역구(특히 자민련의 본진인 충청 지역의 선거구)에서라면 여전히 승산이 작지 않았던 거물인 김종필이 비례대표 명부로 들어간것 자체가 실수라는 것.
- 하지만, 반론도 있는데, 이미 김종필은 자신의 지역구인 충남 부여군과, 서천군을 이전 16대 대선에서 김학원, 류근찬[113] 의원에게 물려줬으며, 오히려 자기 지역구를 들어가면 노욕으로 후배에게 물려준다는 것을 뺏는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비집고 들어갈 빈집 지역구가 있냐? 하면 아무리 충청의 맹주 김종필이라도 명분 없이 들어갈만한 곳이 없었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새정치연합이 공식 약칭이었으나, 비공식 약칭으로 새정연, 새정련, 새민련, 아니면 그냥 다 무시하고 민주당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어감이 가장 이상한 새민련이 끝이 안 좋았던 자민련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멸칭이었다. 당연히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새민련은 금기시되는 표현이었다.
- 의외로 대경권 출신 비보수계열 정치인들이 자민련 소속으로 많이 뛰었다. 특히 이 경향은 DJP연합 이후에 더 짙어졌는데, 이유는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자민련 입당과 함께 포항시를 비롯한 대경권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입당했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대경권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민주당의 지지세가 매우 약했기 때문에 그나마 연립 여당이면서 대경권에서 이름이 좀 먹히는 자민련으로 많이 활동했다.
- 민주자유당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에 성공한 자민련과 달리 자민련에서 분당한 정당들은 모두 실패했다. 하나로국민연합, 희망의한국신당은 거진 폭망 수준으로 떨어졌고[114] , 국민중심당은 골수 자민련 지지 지역을 제외하고 기반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국민중심당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에 흡수 합당된다.[115]
7. 역대 선거결과[편집]
7.1. 대통령 선거[편집]
7.2. 국회의원 선거[편집]
7.3. 지방선거[편집]
7.4. 재보궐선거[편집]
8. 당가[편집]
자유민주연합의 깃발을 들고
경륜과 젊음이 여기 뭉쳤다
우리들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모두가 하나되어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 아
자유민주연합의 깃발을 들고
패기와 슬기가 여기 뭉쳤다
우리 길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미래를 희망으로 이길의 주역으로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