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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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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62861> 의장1 ||
||<width=20%>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width=20%>
제2대

미즈노
렌타로 ||<width=20%>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width=20%>
제4대

시모오카
주지 ||<width=20%>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고다마
히데오 ||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5><bgcolor=#062861>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5>
[ 1910 ]

고문
고영희권중현민상호박제순송병준
이근상이근택이완용이재곤이지용
이하영임선준장석주조중응조희연
조민희한창수
찬의
강경희권봉수김만수김사묵김영한
남규희민상호박경양박승봉박제빈
박중양염중모유맹유정수윤치오
이건춘이겸제이재정이준상정인흥
조영희조희문한창수홍승목홍종억
부찬의
고원식구희서권태환김교성김낙헌
김명규김명수김준용김필희김한규
김한목나수연민건식민원식박제환
박희양서상훈서회보성하국송지헌
송헌빈신우선신태유어윤적엄태영
오재풍오제영윤치오이도익이만규
이봉로이원용이항직정동식정병조
정진홍조병건조재영조제환조원성
최상돈한동이허진홍우철홍운표
홍재하

[ 1920 ]

고문
고희경권중현민병석민영기박영효
송병준이하영윤덕영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김영한김한목남규희민상호
민영찬민형식박승봉박이양박기양
박상준박승봉박의병박제빈박중양
백인기상호서상훈신석린신응희
어윤적엄준원염중모유맹유성준
유정수유혁로이건춘이겸제정진홍
조민희조진태조영희조희문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고원훈권태환김갑순김교성
김기태김명규김명준김상설김상섭
김연상김영무김정태김준용김창한
김필희김현수나수연노창안박경석
민건식민영은박기동박기순박봉주
박이양박제환박종렬박흥규박희양
방인혁서병조선우순송종헌송지헌
신석우신태유신창휴심준택심환진
안병길양재홍오재풍오태환원덕상
유기호유빈겸유익환유흥세윤치소
이강원이근우이기승이도익이동우
이만규이병렬이병학이택규이택현
이항직이흥재이희덕장대익장도
장상철장응상장직상장인원전석영
정동식정란교정병조정순현정재학
정태균정호봉조병건천장욱최석하
피성호한영원한상봉한창동허명훈
홍성연현은
참의
구연수김윤정김춘희김한목김희작
남규희민병석박기순원응상윤갑병
윤정현장헌식정건유현기봉

[ 1930 ]

고문
민병석윤덕영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서규김영진
김윤정남궁영민상호박두영박상준
박영철박용구박중양서상훈신석린
어담엄준원염중모유정수유진순
유혁로윤갑병이겸제이범익이진호
장헌식정교원조경하조성근조희문
주영환최린한규복한상룡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강번고일청김경진김기수
김기홍김도현김두찬김병규김사연
김상설김상형김상회김신석김영택
김정석김정호김종흡김진수김창수
김한규김한목김한승남백우노영환
문종구민병덕박기석박종렬박보양
박봉진박철희박희옥방의석방태영
서병조서병주석명선선우순성원경
손재하손조봉송지헌신희련안종철
오세호오태환원덕상유승흠유태설
이경식이교식이근수이근우이기찬
이기승이동우이명구이방협이승우
이병렬이선호이은우이종섭이충건
이진호이택규이희덕이희적인창환
장대익장석원장직상장헌근정관조
정란교정대현정석모정석용정해붕
조병상주영환지희열최남선최양호
최연국최윤최윤주최준집최지환
최창조하준석한영원현준호현헌
홍치업황종국
참의
강필성김병원김성규김제하박상준
어윤적유만겸유성준진희규홍정철

[ 1940 ]

고문
김윤정박중양윤치호이범익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사연김연수
김영배김영진김우영김윤정김태석
김화준박두영박상준서상훈신석린
안종철원덕상유만겸유진순이겸제
이경식이계한이병길이원보장직상
장헌식정교원정란교정연기진학문
최린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권중식김경진김동준김병욱
김부원김사연김신석김원근김재환
김태집노준영민재기박지근박창하
박필병방의석서병조손창식송문화
신현구양재창원병희위정학이경식
이기찬이승우이신용이영찬이익화
이종덕임창수장용관장윤식장준영
장직상전덕룡조병상조상옥차남진
최윤최승렬최정묵최준집한익교
한정석현준호황종국
참의
김하섭문명기이승구

||
||<-5>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




선우순
鮮于筍
파일:선우순.jpg
본명선우금순(鮮于金筍)
출생1891년 3월 24일
평안도 평양부 융덕면 육로동
(現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사망1933년 8월 8일 (향년 42세)
본관태원 선우씨
학력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법률과 / 졸업)
도시샤대학 (신학과 / 졸업)
직업언론인, 종교인, 공작원, 중추원 참의, 관료
경력평양신문 주필
기성교회 전도사
대동동지회 회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가족관계동생 선우갑[1]

1. 개요
2. 생애
2.1. 친일 행적
3. 여담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의 언론인,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편집]


1891년 3월 평안도 평양부 융덕면 육로동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서북학회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에 <국가의 개요>라는 글을 발표한 기록이 있는데 박은식, 이동휘 등과 함께 민족계몽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31년에 나온 <조선신사록> 기록에 의하면 그는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하였다가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1910년 일본인이 창간한 평양신문의 주필 겸 편집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 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고 1914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 나와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한 선우순은 1915년 12월에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었고, 조선총독부 보호 아래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2.1. 친일 행적[편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조합교회 측에서는 대시국특별운동(對時局特別運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이때 선우순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열린 강연회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서선(西鮮) 방면 책임자로서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만들어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고, 중추원의 지방유력자 모임에서 ‘조선독립불능론’을 강연하는 활동까지 행하였다. 조선총독부에 민심의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총독부의 수습책을 건의하는 밀정으로서의 활동도 병행했다.

1920년에는 좀 더 선전적인 활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나일봉, 김흥건 등과 같은 평안도 지방의 친일파들과 함께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평양에 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경성)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내선융화’와 ‘공존공영’을 위한 사상 선전 활동에 앞장섰다. 여기서 선우순은 '내선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알려지는데 전국을 순회하면서 "내선인은 마치 잉글랜드아일랜드 혹은 웨일스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는 방법은 조선을 독립시켜 소위 3천리 강산과 2천만 인구로써 나가기보다는 일본과 하나가 되어 넓은 면적과 7천만 인구로 나가는 방법이 확실히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며 대동동지회의 기관지 《대동신보》와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여 이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활용했다. 1921년 8월 9일 선우순과 대동동지회는 평양공회당에서 청중 70명을 강제 동원하여 이들을 상대로 '태평양회의에 대하여'라는 의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였고 이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9일까지 평안남도 21개소에서 친일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알려진다. 이로 인해 민원식과 더불어 당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기도 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던 자가 바로 선우순이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인 면회 횟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는 1919년부터 1926년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어 22일에 1회꼴로 사실상 1위였다. 이렇게 일제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1921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 자의 악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2월 15일에 독립신문을 통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이라는 뜻의 '칠가살(七可殺)'[2]을 공표하였는데 이때 선우순, 선우갑 형제가 예시로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독립단 안주 지단장 홍이도 등 몇 사람의 가출옥을 미끼로 금품을 사휘하고 사기죄로 피소되었다. 총독부는 담당검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하면서까지 불기소 처분을 했다.

그 뒤로도 일선융화·공존공영 및 독립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살다가 1933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3. 여담[편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밀정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 중추원, 친일단체 부문에도 등재되었다. 동생이자 같은 민족반역자였던 선우갑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 되었다.



[1] 형과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2] 1번째는 일본인, 2번째는 매국적, 3번째는 고등경찰·형사·밀고자, 4번째는 친일부호, 5번째는 적의 관리, 6번째는 불량배, 7번째는 배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