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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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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 대수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 대수를 이어서 가산한다.
이탈리아 왕국 총리 · 파시스트 정권


관련 직위: 이탈리아 대통령




이탈리아 공화국 제38대 총리
알도 로메오 루이지 모로
Aldo Romeo Luigi Moro
파일:알도모로.jpg
출생1916년 9월 23일
이탈리아 왕국 마글리
사망1978년 5월 9일 (향년 61세)
이탈리아 로마
재임기간제38대 총리1기
1963년 12월 5일 ~ 1968년 6월 25일
제38대 총리2기
1974년 11월 23일 ~ 1976년 7월 30일
서명파일:알도모로서명.png
학력바리 대학교 (법학 / 학사)
직업정치인, 교수
약력기독교민주당 대표
기독교민주당 사무총장
외무장관
교육장관
법무장관
이탈리아 제38대 총리
소속 정당
기독교민주당
가족배우자 엘레오노라 치아바렐리
자식 4명
종교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성향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38대 총리를 지낸 정치인. 총리 퇴임 이후 극좌 테러단체인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 암살되었다.


2. 생애[편집]


1916년 아풀리아 지역의 마글리에서 태어났다. 1934년에 바리로 이주하여 바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의 회장이 되어 1942년에 징집될 때까지 재임하는 한편, 바리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전후에는 기독교민주당에 합류하여 당내 좌파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 법무장관(1955~1957), 교육장관(1957~1959), 당 사무총장(1959~1964) 등을 거쳐 1963년 12월 5일 조반니 레오니의 후임으로 총리가 되어 당내 우파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1968년까지 집권하였으나, 1968년 총선에서 연정 파트너였던 사회당-민주사회당 연합의 패배와 연정 탈퇴를 계기로 사임하였다. 첫 총리로서 모로는 사회당, 공화당, 민주사회당 등과 중도좌파 연정을 구성하고 긴급 주택 공급, 최저임금 인상, 연금제도 및 사회보장 개혁 등의 사회개혁을 실행했다.

1기 퇴임 이후에는 잠시 당내야당으로 물러났다가 외무장관(1969~1972, 1973~1974)을 맡았다.

1974년 10월 마리아노 루모르 총리가 사임하자 모로는 후임 총리로 임명되어 2년간 재임하였으나 사회당이 정부 지지를 포기하면서 1976년 7월 사임하였다. 모로는 총리 2기를 전후하여 유럽공산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역사적인 타협을 주도하며 모든 진보적 세력의 총단결을 추구하고 유고슬라비아와의 트리에스테 영토 분쟁을 종식시키는 업적을 세웠으나, 이러한 정치적 노선은 국내외의 반대자들을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8년 3월 16일, 극좌 테러조직인 붉은 여단에 의해 로마의 거리를 지나가던 중 습격을 받아 납치되었고[1], 교황 바오로 6세 등의 석방 호소에도 불구하고 1978년 5월 9일 암살되었다.[2] 이 사건은 마르코 벨로키오굿모닝, 나잇에서 다뤄진다.

2012년, 가톨릭 교회는 모로에 대한 시복 절차를 개시하였다.


3. 성향[편집]


  • 정치적으로 중도좌파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였으며, 현대 이탈리아 중도좌파의 아버지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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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모로 전 총리는 이탈리아 경찰카라비니에리의 합동 경호를 받고 있었는데, 문제는 경호원의 수가 총 5명에 화력은 베레타 92가 전부였던 것. 11명의 테러범이 자동화기로 공격해오자 경호원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이 결과 카라비니에리는 초소형 자동화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기관권총베레타 93R을 채용하였다.[2] 계속되던 테러로 여론이 악화되어가던 붉은 여단은 충격을 받은 바오로 6세 교황이 선종하는 등 이 사건의 후폭풍과 뒤이은 도지어 장군 납치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고 쇠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