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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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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조선 말기[편집]
1877년(고종 14년), 고종의 5남[5] 으로 태어났으며 귀인 장씨(貴人 張氏) 소생이다. 어머니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궐 밖으로 쫓겨나 궁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이후인 1900년(광무 4년)에서야 종4품 숙원(淑媛), 1906년(광무 10년)에야 종1품 귀인(貴人)으로 추증받았다. 1891년(고종 28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군되었으며, 1893년(고종 30년) 김제남(金悌男)[6] 의 10대손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정실 아내로 맞았다.
1894년(고종 31년), 조선국 보빙대사(報聘大使: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1895년(고종 32년)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방문을 각각 추진했지만 유럽 방문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혼란 속에 1896년(고종 33년), 중도 취소되었다.
2.2. 미국 유학[편집]
1899년(광무 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당시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란사(金蘭史)를[7] 알게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8월에 친왕 작위를 받고, 의친왕(義親王)으로 승격했다.[8]
1901년(광무 5년) 3월에 미국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수학했으며, 이 때 로어노크 칼리지 학생으로 있던 우사 김규식 등과 인연을 맺었다. 같은해 6월에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고, 버팔로에서 열린 남‧북미 박람회에도 함께 참석으며, 이후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기거하던 도산 안창호와는 김규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고,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들의 복지를 위해 자금(금일봉)을 보태기도 했다.
한편 의친왕이 미국에서 열심히 유학하던 기간에, 대한제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다름아닌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황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1902년(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一心會 事件)이 그것으로,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9]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고 의친왕 추대를 획책한 사건이다. 이후 전모가 밝혀져 유길준, 장인근 등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는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순종이 즉위한 후, 의친왕이 아닌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받은 것에도 이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본다.
1905년(광무 9년) 3월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도쿄로 갔으나, 고종의 명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학자금 명목으로 5만 원을 받았다. 이후 의친왕은 다시 1905년(광무 9년) 8월 28일에 도쿄로 갔는데, 그 소식을 접한 엄 귀비가 이근상(李根湘)을 도쿄로 보내 은 300만 원을 주면서 돌아오지 말라고 종용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의친왕은 계모의 종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더 이상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귀국했다.
2.3. 귀국 이후[편집]
늑약으로 불리게 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있던 1905년(광무 9년)에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제국군 육군 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후 제2대 대한적십자사 명예총재 등을 지냈다. 정식으로 금책을 주는 절차는 의친왕이 귀국한 후인 1906년(광무 10년) 양력 7월 24일에 거행되었다.[10]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아버지 고종이 일본군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복형 순종이 즉위했으며, 1907년(융희 원년) 9월 의친왕보다 20살 연하인 이복동생 영친왕이 정식으로 대한제국 황태자(大韓帝國 皇太子)로 정식 책봉되었다.[11] 황자로서 다음 황위 계승 순위로는 순종 그다음이었으나, 자신의 아들 영친왕 이은을 밀던 순헌황귀비와 영선군 이준용 파와 의친왕 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결국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1907년(광무 11년) 1월 15일, 의친왕이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정미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는데 실제로 이들 중에는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대체적인 기록은 참가자 중 하나였던 목형신(睦衡信)에 의해 남아 있으나 228명 전원의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1909년(융희 3년) 10월, 의친왕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과 북상의 사선 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다만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거창군에서 편찬한 《거창군지》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관련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오히려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에 기록된 정태균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정태균은 당시에 거창군의 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수비대를 위해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태균은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해 기념 표창까지 받은 친일적인 인물로서 독립운동을 할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 pp.396 ~ 397에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
2.4. 일제강점기 치하에서의 행적[편집]
1911년 봄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면밀히 모색했다. 1911년 8월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했고, 1912년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는데,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1915년 의친왕은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12] 이 고종 황제를 북경(北京)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 위반 사건[13] 에도 연루되었다.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 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임병찬 등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의친왕의 궁가이자 처소인 사동궁(寺洞宮)에는 일본제국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이왕직 사무관이 파견나왔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합했다.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우치다 고사이 당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공(公)은 즐겨 시정 잡배와 왕래했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했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14] 과 연통했다.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 도독부(軍務都督部)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의친왕은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다. 나중에 1939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2.4.1.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시도[편집]
1919년 11월 9일 나창헌 등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같이 거사를 계획한 단체의 이름을 따서 대동단 사건이라고도 한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정식으로 창설한다. 이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 임시정부에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구체적으로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황족의 입을 통해서 한국인이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전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특권과 예우를 버리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1. 일본은 몇 명의 간신과 부동하여 나의 부황(父皇)과 모후(母后)를 시해하였으니, 이 원통한 사정을 열국에 호소할 것이다.
2. 3월 1일 이래로 전 국민이 빈손으로 독립을 절규하여 외치는데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하니, 우리 국민들은 백절불굴의 기세로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의 열혈이 더욱더욱 들끓어 국민의 정신이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아니할 것을 선포할 것이다.
3.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10년 전후에 제반조약으로 우리의 국토를 합병한 것은 간사한 도적을 이용하여 협박하고, 강제 체결한 것으로 결코 나의 부황(父皇)이 긍종(肯從)하심이 아님을 내가 확실히 하는 바이다. 그러니 이를 세계에 공포할 것이다.
4.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一民)이라.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皇族)이 되는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 임시정부가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에 노력하여 동포들의 고심의 만분의 일이라로 도움이 되고자 하노니,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복수를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 《독립신문》에 발표된 의친왕의 성명.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의친왕의 피체》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에 의친왕의 성명이 실렸다. 내용은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였다.
이전부터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한다든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동년 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시도해 성공하는 일이 발생했다. 김가진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었기에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내(한반도) 주요인사들에 대한 감시/감독이 더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에 고무되어 대동단이라는 비밀결사의 전협[15] , 최익환 등은 아예 더 고위급 인사, 그러니까 황족의 망명을 도모해보자 결심했고, 사동궁(의친왕의 사저)에 자주 들락거리는 인물을 통해 의친왕과의 접선에 성공, 의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남루한 농부 차림에 수염까지 붙이는 등 변장한 뒤 거처를 탈출했다.
그 날 밤 10시 쯤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일본인 리와가 어둠속에서 의친왕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급히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를 미행했으나, 이동문 부근에서 이들을 놓쳤다.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이에 궁내 사무관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거듭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막무가내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고, 결국 의친왕의 탈출은 발각되고 만다.
이에 일본은 필사적으로 의친왕의 행방을 계속 추적했다. 의친왕 일행은 11월 10일 새벽, 청운동과 세검정을 넘어 서울을 빠져나왔고, 고종 황제가 남긴 150만원의 채권을 전달받는데 성공하는 등 일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결국 의친왕은 11일 만주 안동[16] 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관에게 적발되어 붙잡히게 되고,[17] 목표 접선처인 이륭양행[18] 을 불과 2km를 코앞에 두고, 상해임시정부행 탈출은 결국 아깝께 실패하게 된다.
2.4.2. 이후[편집]
이후 일본은 그에게서 한반도 내에서의 여행의 자유[19] 를 빼앗아 사실상 강제 연금(구금) 당했다. 이 시기에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신분상 불문율에 붙혀져 사법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20] 그런데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대동단 총재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 이후, 총독부 관사에 연금된 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친일로 전향)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일본 측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의친왕은 자의로 탈출한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던 의친왕이 일금 3만원을 빌려준다는 꾐에 넘어가 궁을 몰래 나섰다가 납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의 사정과 이후 일본이 의친왕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조선 땅에 거처하면서 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21] 그가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이 수사 기록을 은폐,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의친왕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했다고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측의 수사 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임시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여하간 의친왕의 상하이 탈출 기도사건 이후 일본 측의 감시는 한 층 삼엄해졌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의친왕의 처치를 여하히 할가하고 기간 일본 국내성과 총독부가 노심초사 한 결과 일본으로 천궁케하기로 결정하고 의친왕에 대한 대우문제는 현재 총독부에서 연구중이다.
적의 엄호중에 기거. 조선총독부 내 녹천정(綠泉亭) 으로 환궁한 의친왕은 왕비의 거처하던 밀실의 내당에 유폐되고 왕비는 (사랑)채에 이사하다.
의친왕의 거실 네 방향(四周) 7개 방에는 적 경사가 밤낮(晝夜) 순찰(守直)하고 궁외에 재하던 인원은 전부(全數) 궁내 에 집거(集居)게 하여 일절내외(一切內外)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의친왕의 별실 수인당 김홍인은 궁내를 돌아다니다 적 사무관의 공갈에 기겁하야 落胎, 病席에 눕다.
사건 이후 총독부는 의친왕을 일본으로 강제 천거할 것을 고려하기도했다. 이후 의친왕은 이전 통감부 관저로 쓰던 총독부 부속 녹천정(綠泉亭)에으로 강제 이궁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황족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실제로 사람들의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이름을 올린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원서에 따르면 서상일 등 항일운동가들과 민족종교였던 천도교 등 민족세력 뿐만 아니라 박영효와 같은 친일파들, 마찬가지로 친일괴뢰였던 시천교 등까지 13도와 260여개 군과 각 사회 단체의 대표자 372명이 뜻을 모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이미 택도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서명과 필체를 확인하여 위작이라고 결론내리고 연명부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에 대한 처벌없이 조사를 마무리지었으나, 여하여튼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 건의서와 연명부는 이승만에 의해 워싱턴 회의에 제출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직접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 무역 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직접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그가 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당한 거라는 주장과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의친왕 스스로가 물러난 거라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큐슈 지역에 옮겨가서 살게 되었으나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자료에 의하면 이 때 일본어로 쓴 각서가 있는데 "친왕은 은퇴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장남인 이건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한다"는 등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장남 이건과 사이가 나빴다는 증언이 있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이건은 매우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술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아라!"며 버럭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놓고 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 대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만큼, 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와 달리 일제에 순종했던 이건이 미덥지 않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이건은 대한제국 황족 중에서 친일 인물이었다.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 만이 있다”라고 언급 하거나 1945년 8월 12일, 황족 회의에서 천황 히로히토를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족한 것이 있었다”라 칭송했으며, 동생 이우가 어떻게든 일본인을 거부하고 조선인 박찬주[22] 와 결혼한 것과 달리 자신은 일본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23] 와 순순히 결혼했다. 또, 후에는 일본으로 귀화까지 하면서 다이쇼 덴노가 묻힌 모모야마(桃山)를 성씨로 정하며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어 귀화했다”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자신을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여겨 아버지인 의친왕과 사이가 나빴던 인물이다.
1930년대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때는 알 수 없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씨가 없는 일본 황실의 예에 따라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는 처음부터 창씨개명이 강요는커녕 아예 말이 한번도 나온 적도 없기 때문.
2.5. 광복 후 말년[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딱히 정치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회원로 정도로 말년을 누렸으나 황족 재산이 국유화되고 황실 인사를 철저히 배척하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당한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고종의 자녀들(황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전쟁 상황을 겪었다.[24] 개전 후 불과 3일만에 서울이 북한 공산군에게 함락당했는데,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했다.[25] 이후 1.4 후퇴 무렵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을 하려니 상당한 고생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식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양실조 및 각종 질병에 내내 시달렸다.
거기에 노환이 겹쳐, 1955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26][27] 과거의 인기가 무색하게 신문들은 짤막하게 "사동궁주(사동궁의 주인) 이강이 졸(卒)했다"는 기사만 한 귀퉁이에 내걸었다고 한다.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서삼릉 묘역에 묻혔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 김씨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시신을 이장해 합장묘로 조성했다.[28]
3. 여담[편집]
- 1905년(광무 9년)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귀국 도중 의친왕은 도쿄에서 손병희를 우연히 만났다. 손병희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가 마침 의친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는데, 이때 시종관이 영어로 무언가 의친왕에게 아뢰자 손병희가 "내 나라 임금을 모시는 놈이 어디 감히 외국말로 아뢰느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의친왕이 "그대가 옳다."며 직접 다독였고 이러한 손병희의 의개에 감복해 통교했다.
- 의친왕은 1905년 워싱턴에 밀사로 찾아온 이승만을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 버지니아 주 살렘에 있는 로노크 대학에서 공부하다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의친왕을 만나보니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다'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고 하였다.[29]
- 술을 잘 먹고 여자를 좋아하며 권총[30] 을 잘 쏴서 젊을 때는 파티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샹들리에의 등불을 쏘며 쇼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확실히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탕아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탈출극 이전에나 이후에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면에서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아버지 고종보다는 비교적 친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기질을 쏙 빼 닮았던 것 같다.[31]
- 사실 대한제국의 황실 인사 중에는 의외의 자동차 애호가로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당시 탔다고 알려진 차는 미국의 오버랜드였다.[32]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게 바로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으며 그의 행적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 이전에는 자전거 광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속의 윤덕한[33] 에 의하면 방탕한 생활 덕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여러 차례 잔소리와 꾸지람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건 탈출 사건으로부터 10년이나 이전이다. 확실히 당시에는 미국에서 사랑에 빠져 "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황적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윗사람들 뒷목 잡게 하는 행동을 했었다. 그래서 윤덕한은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려고 한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사실 윤덕한 뿐만 아니라 고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의친왕의 행적도 같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34] 같은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자 순종은 통감부로 가서 그를 조문한 뒤 의친왕을 도쿄로 보내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참가토록 했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거절했다고도 한다.
- 5녀인 이해경 여사가 1997년에 수기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펴낸 바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의 사동궁(의친왕의 본가) 생활 및 황실 상황에 대해 회고하고, 저자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 동양학 사서로 일하면서 발견한 의친왕 관련 각종 기록(항일운동 관련 기록)도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는 절판되었다. 이해경 여사가 2017년 출간한 《마지막 황실의 추억》[35] 에서는 저자 일신상의 이야기가 많이 실리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위의 수기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 1930년생인 저자가 얼마 안 남은 삶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위의 수기도 희귀본이 되는 등 의친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은 탓에 다시 책을 펴냈다고 한다. 개인의 수기라고는 해도 의친왕이 항일운동에 관여한 자료 부분은 출처까지 밝혀가며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상당히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개인의 회고록 외에) 의친왕 관련 연구로는 신복룡 前 건국대 석좌교수의 저서 <대동단 실기>가 있다. 상기한 1919년 11월의 상해임정 망명시도 사건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여담의 여담으로 신복룡 교수는 의친왕 망명을 주도한 대동단 단원 최익환의 사위이기도 하다.
4. 자녀와 후손[편집]
위장이었든 진짜 모습이었든 탕아답게 그는 여러 처첩을 두고 자식도 많이 낳았다. 현재 인정된 자녀는 총 12남 9녀. 다만 본처인 김덕수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바람에, 의친왕의 후손들은 전부 서자 출신이다. 고종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았으며,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의친왕이 많은 자손을 둔 것은, 그의 존재가 대한제국 황실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고종 황제의 후손들 전부 의친왕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의친왕의 이복형인 순종황제는 후손이 아예 없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슬하의 두 아들 역시 큰아들 이진은 갓난아기 때 죽고, 장성한 작은아들인 회은황세손 이구 역시 후손 없이 일본에서 2005년에 사망했다. 이복여동생인 덕혜옹주의 외동딸 소 마사에(종 덕혜)도 후손 없이 의문사했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영선군의 후손들, 고종황제의 후손들은 모두 의친왕계이다.
의친왕의 자녀들 중 일제강점기에 일제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은 이건과 이우 둘뿐이다. 나머지 자녀들은 실질적으로 의친왕의 자녀들로 인정되었지만, 일제에게서 인정받지 못해 법적으로는 호적도 없는 사생아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이씨로 만들기 위해 다른 종친들에게 양자, 양딸로 각각 입적시켰다.# 그 중 아들들은 남계 자손이 끊긴 황족의 대를 잇는 명목으로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입적했지만[36] , 대를 잇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던 딸들은 가장 가까운 촌수의 종형제인 이기용에게 일괄 입적했다.
다음은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의친왕의 자녀가 아닌 황손들이다.
2023년 9월 기준, 의친왕의 아들은 총 3명이 살아있다. 그 중 10남 이석만이 유일하게 한국[46] 에서 사는데, 이 때문인지 '마지막 황손'으로 잘못 알려졌다. 11남 이환[47] , 12남 이정[48] 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구의 사후, 회은황세손의 양자가 되어 황실의 후계자(황사손)가 된 사람이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아들인 이원(1962)이며 이갑은 2014년 12월 13일 미국 뉴욕 롱 아일랜드 자택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리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2남 이우의 아들인 이청 또한 생존해있다. 이우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와 관련된 KBS1 8.15 광복절 다큐에서 등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의친왕의 딸은 총 5명이 살아있는데 그 중 그나마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다섯째 딸 이해경(황실명 이공)이 있다. 그리고 8녀 이해련(황실명 이현)의 딸은 탤런트 박승아로 KBS 2TV 청소년 드라마 〈스타트〉 등에 출연했다.
5. 기타 사항[편집]
5.1. 학위[편집]
5.2. 상훈[편집]
5.3. 종교[편집]
5.4. 경력[편집]
- 1894년 - 조선국 보빙사절단 보빙대사
- 1895년 - 6개국[50] 임시 특파대사
- 1905년 - 대한제국 육군 부장
- 1906년~1907년 - 제2대 대한제국 적십자사 명예총재
- 1907년 - 대한제국 보빙사절단 보빙대사
- 1915년 - 신한혁명당 최고 위원
- 1919년 - 대동단 명예 위원
- 1930년~1931년 - 한국독립당 최고 위원 겸 전임고문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59년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김수천이 연기했다.
- 1972년 영화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김동원이 연기했다.
-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51] 에서는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다.
- 1990년 KBS 3.1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문창길이 연기했다.
- 2001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김종호(유년기), 이풍운(소년기), 강성민이 연기했다.
- 최인호의 불교 구도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이 의친왕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라는 설정. 의친왕이 탈출 실패 후 실의에 빠져서 주색잡기에 골몰할 때 하룻밤 인연으로 관계를 맺은 17세 기생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전한 삶을 살다가 우연찮게 출생의 비밀을 알고 방황하고 구도를 통해서 극복해나가는 이야기.
- 입헌군주제인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만화 《궁》은 순종의 뒤를 영친왕이 아닌 의친왕이 황위를 이었다는 설정이다. 국민들이 일본인 왕비를 정서상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설정했다고 한다.[52]
- 대체 역사소설에서는 호탕한 성격, 독립운동을 한 행적, 자유분방하고 리버럴한 행적, 그리고 다른 황족에 비해 나은 외모 덕분에 인기가 있다. 순종을 대신해서 황제가 되기도 한다.
-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에서는 주인공 역할로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 대체 역사소설 《대한독립기》에서는 주인공이 일본에 납치된 덕혜옹주와 함께 수감 중인 의친왕을 구하고 의친왕과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게 최강의 복수들을 펼치는 설정이다.
- 패러독스 사의 전략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비동맹주의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비동맹주의의 지지도를 올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비동맹주의 국가가 일본을 전쟁에서 이기고 독립시켜 주거나 일본이 황도파 지원을 통해 막부로 돌아간 후 괴뢰국으로 해방하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을 보기는 힘들다. 한국의 모든 지도자 초상화가 아시아 기본 지도자 초상화로 되어 있어 얼굴은 볼 수 없다. 즉 이승만, 김일성, 의친왕, 영친왕의 얼굴이 린춘핑(林春平, Lin Chunping)이라는 중국의 사기꾼을 모티브로 한 기본 초상화로 나온다. 모드의 힘을 빌려 플레이해서 비동맹주의 혹은 권위민주주의 루트를 타면 대부분 등장한다.
- Hearts of Iron IV의 대체역사 모드 THE LAST EMPIRE에서는 일본보다 빠른 근대화에 성공한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만주와 연해주, 대만, 태평양 섬들,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일본의 규슈, 홋카이도를 차지한 채로 현실 일본 제국 포지션인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어 있다. 이 모드에서는 시비련 출병, 한청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여한 왕족 출신 장교로 등장하며 현실 일본의 대정익찬회 포지션인 신한청년당의 리더로 등장한다. 경제 공황, 사회 분열으로 혼란한 정국 속에서 황도파가 쿠데타를 일으킬 시 진압에 성공하면 제국의 지도자가 된다. 현실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와 도조 히데키를 합친 포지션의 인물로 대한제국 육군을 대변하고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꾀하며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외몽골 출병을 마무리하며 한중전쟁을 일으킨다. 나아가서 미국의 금수조치와 군의 폭주에 휩쓸려 남방작전, 태평양 전쟁 등 현실 일제가 시행한 무모한 팽창정책을 주도한다. 대한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면 히틀러처럼 자살한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역사가 바뀌어 황제 이형이 명성황후가 아닌 청나라 공친왕의 딸과 결혼했고,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홍역을 앓아 병약해진 탓에 꿈이었던 제독도 못 되고 유아세례를 받게 된 후 천주교를 믿으며 괴력난신에 의존하고 스스로 자해까지 하는 부정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하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멜리타와 외교의 일환으로 결혼하지만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자식들이 생기면서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
- 대체역사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인 완화군이 황제가 되면서 종묘나 집안일, 정원 가꾸기에 전념하는 이척[53] 과 달리 머리도 좋고 나라를 위해 중책을 맡고 싶어하지만 완화군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견제하는 바람에 중책을 맡지 못한다. 결국 원래 역사보다 더한 한량이 되어 이름 모를 미국 여배우랑 결혼해서 조선을 떠나려고 하나 완화군에게 자신이 없다면 대한제국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54] 이라면서 말린 덕에 조선에 남게 되고 이후 외교쪽 인사로서 에밀리 브라운이나 윈스턴 처칠을 만나거나 한국 내 자유주의자들과 교류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게 된다. 여담으로 미국 여배우와 사귈 때 형인 완화군에게 반대당하지만 정작 형은 폴란드 여의사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랑 로맨스를 즐기자 이걸 두고두고 농담 삼아 놀리기도 한다.
- 대체역사소설 《위대한제국으로 착각당했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선 1904년의 대한제국이 1854년으로 트립된 와중 유일하게 1904년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인물이며[55] 이를 기반으로 도금 제국인 상태의 대한제국이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7. 참고 문서[편집]
- 3.1운동
- 6.10 만세운동
- 6.25 전쟁(한국 전쟁)
- 계동궁
- 경술국치(한일 합방)
- 고종
- 고종실록
- 귀인 장씨
- 김구
- 김규식
- 김란사
- 김홍집
- 나창헌
- 남연군
- 대동단결선언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적십자사 명예 총재
- 대한제국
- 대한제국 황실 수장
- 대한제국/황사
- 대한제국/황실
- 덕수궁(경운궁)
- 덕수궁 중화전
- 덕혜옹주
- 독립신문
- 독립운동가
-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
- 명성황후
- 박영효
- 봉황각
- 북한산성
- 사동궁
- 서광범
- 서상일
- 손병희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 순종
- 순종실록
- 순헌황귀비 엄씨
- 아관파천
- 안국동 별궁(안동별궁)
- 안창호
- 영선군 이준용
- 영친왕
-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완림군 이재원
- 왕공족/이왕가
-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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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친왕비(김수덕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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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 흥원(흥선대원군묘)
- 흥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