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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클레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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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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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5대 총리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
Georges Benjamin Clemenceau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s_Clemenceau_1.jpg
출생1841년 9월 28일
프랑스 왕국 무이롱앙파레
(現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방데 무이롱앙파레)
사망1929년 11월 24일(향년 88세)
프랑스 파리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재임기간제35대 총리
1906년 10월 25일 ~ 1909년 7월 21일 1기
1917년 11월 16일 ~ 1920년 1월 20일 2기
정당
무소속

가족배우자 마리 엘리자베트 플뤼메[1][이혼]
아들 미셸 클레망소[2]
직업정치인, 언론인, 의사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편집]


프랑스의 정치인, 언론인, 의사. 프랑스 제3공화국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2. 상세[편집]


열렬한 공화주의자이자 의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해, 졸업 및 면허 취득 이후 일찍 정치활동에 투신했다. 동시에 미국남북전쟁을 경험하고, 이와 같은 현대전이 대세가 될 것임과 산업혁명이 보일 총력전을 인식했다. 초기에는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1870년, 몽마르트(Montmartre)로 유명한 파리 18구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언론인 시절 때는 일간지 '로로르(L'Aurore; 새벽)' 지의 사주이자 주필을 겸했다.

정치 초창기엔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등 공산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보불전쟁 이후로는 군비 증강과 독일에 대한 외교적 고립정책을 강하게 주장하는 등 애국주의적인 성향 또한 강하게 드러내면서 장 조레스 등의 사회주의자들과 멀어졌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자신이 주필로 있던 신문 '로로르'를 통해 군부와 우익을 비판하고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등 기본적으로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에도 반대하는 중도파 입장에 가까웠다. 급진당에 가입했던 전력에서도 알 수 있듯 리버럴에 가까웠다는 평도 있는데, 후술된 전쟁 시기 행적을 보면 이것도 좀 애매하긴 하다. 대체적으론 중도좌파~중도우파까지 왔다갔다하며 민족주의 성향이 결합된 대외 강경파 스탠스였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지, 쥘 페리(Jules Ferry)가 이른바 '문명화의 사명, 계몽의 의무'로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골자의 연설을 한 것에 대해 '그것은 의무 이행이 아닌 부정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이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공개서한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본래 이 공개서한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소극적 제목이었는데, 주필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보다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밀 졸라, 장 조레스, 아나톨 프랑스 등의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싸웠던 것으로도 유명하다.[3]

1906년 ~ 1909년의 1차 집권 뒤 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정계은퇴 상태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17년 11월, 프랑스의 전쟁수행 능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에서 76세의 나이로 총리로 컴백. 서부전선페르디낭 포슈필리프 페탱, 조제프 조프르 등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강력한 전쟁수행 의지를 보이면서 전시 내각을 이끌었다. 쉽게 말해서 20여년 뒤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비슷한 역할을 한 셈. 그가 내각수반으로서 1차 대전을 진두지휘한 기간은 1917년 11월 16일~1918년 11월 11일까지 1년이 채 안되었지만, 해당 기간이 종전, 승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시기여서 지금도 1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승리에서 주역으로 인정받는다.

결국 미국의 참전과 함께 서부전선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낸 독일이 내부 붕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은 협상국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클레망소는 베르사유 조약의 협상국 리더 중 하나로 가장 강경파적인 입장에서 독일에 대한 천문학적 배상과 군사력 억제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4] 허나, 당시 경제학자 케인스는 연합국 지도자들이 너무 지나친 액수의 배상금을 들이밀었다고 이게 이후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1448-004-9BCD8C64.jpg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협상국 정상들과 함께.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올랑도 이탈리아 총리, 클레망소,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며 이 넷은 파리 강화 회의의 조약들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정상들로서 빅4라 불린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1920년에 완전히 은퇴하여 미국과 영국령 인도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내다가 1929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소장파 시기엔 꽤나 정적이었던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도 이땐 많이 슬퍼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제1차세계대전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구한 전시총리가 되었지만, 사실 비판거리도 없진 않은 인물이다. 총리가 되자 당시 정부와 최고사령부의 소극적인 전쟁수행 방식을 비판했고,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으며, 1918년 5월 파리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을 이용하여 모조리 이들을 체포하여 군에 입대시켜 버린 점, 그리고 반대파들을 억압했던 일 등이 비판거리로 지적된다. 이는 냉정히 말하면 자유주의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지만, 방어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전시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행하는 강력한 내부통제 행위는 언제나 논쟁거리이긴 하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갖다붙여도 되기 때문이다.


3. 기타[편집]


파일:external/static.lexpress.fr/1_431.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41e5aaaf4beb5362de8a8c4a426924e.jpg

전선을 시찰하는 클레망소

직접 병사들이 있는 참호를 돌아다니면서, 사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로 유명했다.[5] 그러나 적군에게 겁을 집어먹는 병사나 탈영병, 패배주의에 물든 병사들에게는 가차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퇴각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는 무조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게 바로 이 양반이다.

파일:external/tigerscorner.free.fr/image742.jpg

그의 별명인 '호랑이'에 빗대어 그려진 삽화

프랑스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끝까지 난 전쟁, 전쟁, 또 전쟁 뿐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는데, 클레망소가 얼마나 대독일 강경책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허나 이 과정에서 화평파격이던 조제프 카요와 루이 말비(Louis Malvy) 등이 망명 또는 투옥되는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이들은 각각 1921년과 24년 석방 또는 완전 복권되었고 그 외 공식적으로 극형을 당한 정적은 없다고 한다.

정치 은퇴 후 한 기자가 "이제까지 만난 정치인 가운데 최악은 누구였습니까?" 라는 질문에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했는데, 기자가 정말이냐고 되묻자 "이 작자야 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한 순간 더 최악의 인물이 나타나더군요" 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 몇년만 더 살았으면 진짜 최악의 인물이 집권하는걸 볼 뻔 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은연중 군국주의를 조장한거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말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으로 오늘날까지도 제법 인용되고 있다.[6]

'젊어서 진보, 늙어서 보수' 식의 말을 한 원조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7] 잘못 알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가짜명언 팩트체크. 인용된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해당 발언은 누군가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파편적으로 전승되어 온 속담이나 문장에 화자가 자신과 상반되는 이념을 넣어 비난한 것에 불과해보인다. 왕정 시절엔 공화주의자들이, 이후에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가 비슷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도 파나마 스캔들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와 리슐리외급 전함 3번함의 이름이 클레망소가 될 예정이었으나 건조가 중단되었다. 이후 클레망소라는 이름은 클레망소급 항공모함으로 이어진다.

[1] Mary Elizabeth Plummer, 1849년 3월 18일 ~ 1922년 9월 13일[이혼] [2] Michel Clemenceau, 1873년 11월 24일 ~ 1964년 3월 4일[3] 드레퓌스 사건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의 시발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양심가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사건 당시 군에 의해 튀니지로 좌천되었는데, 이후 클레망소 집권 당시 명예 회복 절차를 거친 후 국방장관까지 역임한다.[4] 이때 온건적인 입장을 고수한게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었다.[5] 이는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썼던 방법인데, 그 원조는 클레망소인 것.[6] 샤를 드골도 1958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정치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고 클레망소의 원래 발언을 절묘하게 뒤집어놓은 발언으로 자신의 정계복귀를 합리화하기도 했다.[7] 칼 포퍼의 말로 알려진 경위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