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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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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제23회 올림픽 경기대회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XXIII Olympiad Los Angeles 1984
파일: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로고.svg
파일:external/cdn.colorlib.com/1984-Los-Angelos-Summer-Olympic-Games.jpg
대회기간1984년 7월 28일 ~ 8월 12일
개최국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로스앤젤레스
슬로건Play a Part in History
(역사의 한 장면)
마스코트샘 (Sam)
주제가Reach Out
참가국140개국
참가선수6,829명[1]
경기종목21개 종목, 221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선수 선서에드윈 모지스
심판 선서샤론 헤버
성화 점화라퍼 존슨
개·폐회식장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시엄

1. 개요
2. 특징
3. 경기 종목
4. 메달
5. 대한민국 선수단
6. 한국측 중계진



1. 개요[편집]


올림픽 주제가

같은 기간 히트하여 LA 올림픽의 상징곡처럼 여겨지는 밴 헤일런Jump브루스 스프링스틴Born in the U.S.A.

"Celebrating the Twenty-third Olympiad of the modern era, I declare open the Olympic Games of Los Angeles."

나는 제23회 근대 올림픽을 기념하면서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개회 선언문.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하계올림픽.


2. 특징[편집]


파일: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유치 엠블럼.svg
1978년 제23회 하계 올림픽 유치전 당시 엠블럼

하계올림픽 대회 유치를 희망한 도시가 로스앤젤레스와 이란 제국테헤란 둘 뿐이었다. 그마저 테헤란이 정치적 불안과 소요로 중도 사퇴하면서 1978년 5월 18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80차 IOC 총회에서 단독 후보로서 유치에 성공하였다.

직전 대회에 이은 두 번째 반쪽짜리 올림픽이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모스크바 올림픽 파행에 대한 소련공산권 국가들의 보복.[2] 다른 하나는 돈잔치. 참가국 수는 당시까지는 역대 올림픽 최다. 불참국도 적었다. 문제는 불참국들이 주로 소련과 동독같은 스포츠 강국이라 올림픽 열기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점이다.[3] 공산권은 이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과 일정이 겹치도록 프렌드쉽 게임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를 대신 열어서 올림픽의 흥행에 타격을 주었다.

이 문제는 다음 올림픽인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고, 궁극적으로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완전 해소된다.[4]

개회식 장소이자 주경기장은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주경기장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열렸다. 52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흑자를 본 올림픽이다. 8년 전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최악의 적자를 보면서 막을 내린 것과 달리,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중계권료의 폭등과 다양한 마케팅으로 흑자(250만 불)를 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이는 올림픽의 지나친 상업화의 시초라는 점에서 오늘날 비판받기도 한다. 특히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피터 위버로스는 지나친 상업화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관계자, 언론, 팬들로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올림픽이 끝난 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추대된다. 그런데 MLB 커미셔너로서도 역시 똑같은 짓을 했다.
그러나 위버로스의 올림픽 상업화 노선은 냉전 시대의 올림픽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도 많다. 올림픽을 개최할 때만 하더라도 이전 대회였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올림픽이 4대륙 올림픽으로 전락 + 제2의 뮌헨 참사를 막기 위한 보안 경비 투자의 증가로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며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없는 살림 쥐어짜면서까지 올림픽을 유치시킬 필요가 있냐는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전 때 많은 국가들이 올림픽 유치를 망설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올림픽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가고, 국가의 위력을 과시하는 쪽으로 변화해가면서 나타난 올림픽의 상업화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대만1972 뮌헨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복귀했다. 단,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쓸 수 없었고, 중화 타이베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등장했다. 그리고 중국이 처음 하계 올림픽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LA 올림픽이다.[5] 참고로 대만은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1979년 다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침공 보이콧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도 역시 보이콧에 끼었다. 미국보다 소련이 더 미워

대한민국은 다음 대회 개최지로서 스포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전 대회까지 금메달 단 한 개를 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 대회를 통해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전체 10위, 메달수 스웨덴과 공동 10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고, 또 이후의 선전을 예고하였다. 주로 양궁, 복싱, 레슬링, 유도에서 거둔 수확이었고, 구기종목 사상 첫 은메달[6](여자 농구 및 여자 핸드볼)이 나온 대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이후, 정부는 선수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이렇게 성대하게 치른 이유는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도 있겠지만, 그전에 3S 정책하고도 연관이 없지 않다. 당시 이 환영식은 1984년 8월 25일에 여의도광장에서 열렸으며 '영웅 돌아오다'란 제목으로 KBS 1TV와 MBC TV를 통해 동시 생중계되었다.영상 시대가 시대인 만큼 선수들이 전두환 대통령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이 금메달 83개를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는데, 사실 홈그라운드의 이점 + 소련 및 동유럽 불참으로 인한 미국 쪽 심판의 편파 판정이 겹친 결과였다. 한국도 복싱에서 많은 피해를 본 편이었다. 플라이급의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김광선이 편파판정으로 1회전 탈락한 사례도 있었으니까. 김광선은 다음 대회인 서울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했다. 다음 대회인 서울올림픽에서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가 우세한 경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박시헌에게 패배해 은메달을 딴 것도 올림픽 당시 미국측의 편파 판정에 따른 반작용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육상 여자 3,000m 경주

이 대회에서 화제가 되었던 경기들 중에는 남아공 출신의 영국 선수 졸라 버드(Zola Budd),[7] 미국의 메리 데커가 대결한 육상 여자 3,000m 경주가 있었다. 그런데 경기 도중에 그만 둘이 충돌해 메리는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였고, 졸라도 페이스가 떨어져 7위에 머물렀다. 이에 미국 언론이 "버드가 일부러 데커의 발을 걸었다"며 주장하고, 영국 언론은 "메리가 부주의했던 것"이라며 맞섰다. 결국 당대 세계 정상급이었던 두 선수는 이후에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채 은퇴하였고, 올림픽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운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졸라 버드는 현재 미국으로 이민 가 어느 고등학교에서 코치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육상 여자 마라톤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오랫동안 도입되지 않았던 여자 마라톤 부분이 1981년 IOC에서 정식 종목으로 승인하면 본 올림픽에서 첫 시행됐다. 금메달은 지난해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하기도 했던 미국의 조엔 베노이트가 2시간 24분 24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8] 사실, 종목 역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한 베노이트보다 더 화제가 된 인물이 있었는데, 스위스 국가대표였던 가브리엘라 안데르센-쉬스로, 1945년생이던 그녀는 당시 39세의 나이로 올림픽에 출전, 마지막 400m를 거의 걷다시피 하면서까지 결승선을 통과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나중에 인터뷰에서 꼭 완주해서 IOC가 여자 마라톤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게 옳은 결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파일:external/www.theimport.co.uk/olympic-mascots-sam.jpg
파일:external/images.visitbeijing.com.cn/Img214727908.jpg
날개가 너무 작다.

대회 마스코트인 (Sam). 흰머리수리엉클 샘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 대회 소련과 함께 국가 상징 돋네 호돌이

다음 개최지가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에 폐막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되었으며[9]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올림픽 깃발을 LA 시장으로부터 받아 염보현 서울시장에게 넘겨주었다. 직후 시작된 폐막식 초반에 서울 올림픽 로고 및 호돌이가 등장하기도. 그런데 잘보면 호돌이의 등장이 참 모양 빠진다. 나오자마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이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있던 상모는 떨어져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올림픽기 이양 후, 차기 개최지 대한민국의 무대로 부채춤을 선보였다. 4년 뒤, 부채춤은 서울올림픽 폐막식 때에 다시 한 번 등장하여 바르셀로나의 플라멩고 무용단과 함께 부채와 치마폭을 펄럭이며 문화를 뛰어넘는 조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자 육상에서는 마라톤이 처음으로 채택된 대회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 마라톤의 영웅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이 성화봉송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성화를 넘겨 받은 이가 미국 아시아계 최초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인 새미 리 옹이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현: 아티스틱 스위밍)이 이 올림픽을 통해 처음으로 하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야구가 다저 스타디움에서 시범적으로 치러졌다.[10]

폐회식때는 독특한 광경이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폐회식 중 경기장 중앙에 '''UFO가 착륙해 거기서 외계인이 걸어나오는 연출을 했다. 외계인 역을 맡은 사람은 키가 244cm였던 학생으로 UFO에서 걸어나와 "올림픽이 좋아서 먼 길을 날아왔어요!"라고 외치는 역을 말았다.

이 대회에서 호남권 출신 첫 금메달리스트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의 금메달은 전라도[11]경상도 출신[12]이 모두 가져가고 충청도, 강원도, 수도권 출신은 최고 성적이 은메달이며, 제주도 출신은 메달을 못 땄다.[14]

올림픽 후원사 중 하나인 맥도날드는 이 당시 프로모션 행사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맥도날드는 '미국이 승리하면 여러분도 승리합니다'라는 캐치프라이즈를 퍼뜨렸다. 맥도날드 상품을 구매 시 카드를 주는데, 이 카드에는 올림픽 종목이 있었고 해당 종목에서 미국이 메달을 획득할 경우 경품으로 빅맥(금메달), 감자튀김(은메달), 콜라(동메달)를 무료로 주는 형태였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면서 당연히 비용도 크게 상승한 것. 이로 인해 맥도날드는 상당히 큰 손실을 보아야 했다.[15]


3. 경기 종목[편집]




4. 메달[편집]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순위국가메달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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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hash-start=w-797278151b69e1900714fe671f072154[[파일: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루마니아2016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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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a-hash-start=w-e773dbc579a0ef997675d836974d747c[[파일:중국 국기.svg 중국158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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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a-hash-start=w-4fd461cb569f30c031f9f94580af80c1[[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1018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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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민국 선수단[편집]





6. 한국측 중계진[편집]



[1] 남자: 5,263명 / 여자: 1,566명[2] 중국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고 참가했다. 중국은 당시 소련과 갈등을 빚는 대신 미국과 밀월을 맺는 관계였고,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독재자의 탈 소련 정책에 의해,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세력의 맹주라는 점에서 소련의 입김을 덜 받는 나라였던지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 그 덕에 이 대회의 금메달 순위에서 루마니아는 2위, 중국은 4위, 유고슬라비아는 9위를 각각 차지했다. 참고로 대한민국도 이러한 상황에 큰 이익을 봤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금메달 수가 많아졌다. 루마니아의 경우 아무리 타국의 불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도 이런 순위는 전무후무하다. 사실 불참 이유는 다들 보복이라는 거 뻔히 알지만 이들 불참 국가의 공식적 명분은 '선수단 안전보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부 아시아 국가들도 소련에 동조, 불참하였는데 이들의 보이콧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2년 뒤의 대한민국이 개최한 아시안 게임까지 이어졌다.[3] 비유하자면 월드컵에서 남미 혹은 유럽 국가들 중 한쪽이 대거 빠지거나,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중국, 일본 가운데 최소 하나가 참가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4] 서울 올림픽은 냉전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나 대한민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북한과, 북한에 동조했던 쿠바, 에티오피아(당시 국명은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등이 불참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IOC에서 제명되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시 불참했다.[5] 동계는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대회가 처음. 역시 미국이 개최국였다. 대만은 이 때 선수단이 미국까지 갔으나 이런 호칭 문제에 불복하고 불참했다.[6]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여자배구 동메달이다.[7] 올림픽 직전에 열린 5,000m 결승에서 메리 데커의 기록을 깨고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해 화제가 된 선수로, 당시 남아공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서 국제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기에 할아버지의 모국인 영국으로 귀화해야 했다.[8] 2위와 1분 26초나 차이나는 아주 압도적인 기록이었으며, 15km 이후론 줄곧 선두였다.[9] 그리스, 미국 국가 다음으로 마지막에 연주되었다. 그리스는 올림픽의 창시국가이자 초기 개최국 자격으로, 미국은 당시 개최국 자격으로, 대한민국은 차기 개최국 자격으로.[10] 비록 올림픽 시범종목이었지만 생각보다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참가했다. 이 때 참가했던 대표적인 야구선수들은 대한민국의 선동열, 류중일, 강기웅, 박노준, 이순철, 미국의 배리 라킨, 마크 맥과이어, 윌 클락, 바비 위트, B.J. 서호프, 대만의 '오리엔탈 특급' 궈타이위엔(곽태원), 일본의 와다 유타카, 히로사와 가츠미, 도미니카공화국의 라몬 마르티네스 등이 있다.[11] 유인탁 (전북 김제), 서향순 (광주), 신준섭 (전북 남원), 김원기 (전남 함평).[12] 안병근 (대구), 하형주 (경남 진주).[13] 서울·경기는 여자 핸드볼에서 각각 2명, 인천은 양궁 윤영숙[14] 충청도와 수도권 출신[13]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강원도 출신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제주도 출신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가져갔다.[15] 이걸 심슨 가족에서 크러스티가 했다가 큰 손해를 보는 것으로 패러디했다.[A] A B 첫 정식 종목 채택[시범] A B 시범 경기 종목[16] 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17] 개막식에서 한국 대표팀 기수를 맡았다.[18] 출처: <1985 KBS 연지>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