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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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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의 사망 의혹을 다룬 영화에 대한 내용은 김광석(다큐멘터리) 문서
1. 개요[편집]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 김광석, 1995년 9월 『월간 샘터』인터뷰 中
막 이별했을 때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10]
나이가 들어가며 허무함을 느낄 때는 '서른 즈음에'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흔히 알려져 있는 별명은 '가객(歌客)'. 진정성 있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많은 명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로, 대한민국에 포크송 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가수이며,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해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편집]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봉덕동] 에서 김광석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수영씨는 대구사범대학 출신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 되는 교원노조를 결성하는 데 동참하여 대구지부장과 교원노조 회지의 집필자로 활동하는 등 교원노조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교단에서 추방당했고, 집안사람이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일하다가[15] 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업사는 장사가 잘 되어가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것이라 믿고 김광석이 5살이 되던 해 장충단공원 인근인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고[16] ,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72년에 옆 동네인 창신동으로 옮겨간다.[17]
경희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특별활동으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18]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혔고,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성가대와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이후 김광석을 눈여겨본 교사가 음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가족들도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오히려 "안기부, 보안사 다니는(= 자주 불려가는) 사람들은 가끔 사람 구실을 못 해서 문제다"라며 정부의 공포정치를 합리화하는 모습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득권 세력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부린 횡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고교 때 진실이라고 배웠던 것들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하나 둘 깨달으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데모 대열에 합류해 구호도 외쳐봤지만 운동권은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의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친구에게 '젊은 예수'라는 노래책[19] 을 받게 되고, 그 노래책에 있는 노래들을 살피다 그가 생각하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또다른 현실을 다룬 노래를 찾게 된다.[20] 그 노래를 보고 다른 노래들도 찾아보며 본인 왈 '라디오에서 나오던 사랑 노래들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대학연합 노래패 서클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해 첫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해인 1982년 9월, 그는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에 있는 '코스모스 코러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신촌과 이대 앞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에 섰다.
라이브 카페의 아르바이트와 대학 노래패 활동을 이어가던 1983년 2학기, 기어코 명지대학교로부터 학사경고를 받게 됐고, 가족들의 반대는 더욱 심해져 갔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사주며 그의 음악 활동을 가장 많이 지원해준 형 김광복은 그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질책하기도 했을 정도였다.[21] 학사경고로 대학 생활에 위기가 닥치자 군 입대를 결심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여름, 대학 노래패 '연합메아리'에 초기 멤버로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민기와 함께 그의 동요 뮤지컬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작품[22] 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탈락했고, 김민기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이라는 노래패와 음반의 기획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음반은 훗날 노찾사 1집이 된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6개월 단기 사병으로 군 복무를 했고, 1986년에는 제대를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무교동과 대학교는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라이브 무대를 주무대로 삼던 선배들은 방송으로, 친구들은 군 복무 중이거나 각자의 길을 찾아서 떠난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부모님은 가수라는 직업을 '딴따라'라고 여기며[23] 좀 더 평범한 직업을 가지길 바랬다. 그러나 형 김광복은 달랐다. 동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김광석이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마련하라는 의미로 고려대학교 앞에 '고리'라는 카페를 차려주었다.[24] 그렇게 그는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학과 함께 노래패 '새벽'의 활동을 재개한 김광석은 1987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공연에서 '녹두꽃'[25] 과 '이 산하에'를 불러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집회 현장에서, 그리고 선거 유세[26] 에서 단골 가수로 불러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가수로서의 활동은 노찾사의 두 번째 공연으로 마무리했다.
한편, 김광석과 신촌 등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그때까지 만들어놓았던 노래를 녹음해보자는 친구 유준열의 제안으로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만들어 친구들끼리 기념품 삼아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듣고 김광석을 포함한 7명을 불러 진짜 음반을 내자고 했다. 그는 다름아닌 산울림의 리더인 김창완. '김창완과 꾸러기'에서 같이 활동하던 멤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음반은 제작에 들어갔고, 테이프에 있던 30개의 곡 중 11개가 추려져 마침내 '동물원'이라는 음반이 발매되었다. 친구들과 재미로 녹음하던 음악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대생만 공략해도 괜찮겠다', '이런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음반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매우 잘 팔렸다. 그리고 동물원의 성공은 김광석이 노찾사에서 나와 보다 대중적인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김광석은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로[27] 동물원 2집까지만 활동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김광석 1을 발매하게 된다.
2.2. 솔로 활동 (1989 - 1996)[편집]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 김광석, 「나의 노래」중
1989년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1년 10월 14일부터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4일,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29] 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간통죄 폐지였는데, 마광수가 간통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라며, 도덕성보단 솔직성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자 김광석이 맞는 말이라고 답하자 동조를 했다는 이유[30] 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요구 받았지만 방송법에 이러한 권한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광수 교수는 3개월, 김광석은 1개월 동안 불교방송에서만 방송 출연금지를 받았다. 뉴스1 뉴스2[92고단10092]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 등 그를 대표하는 여러 곡이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31]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를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32] 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 60대 노부부들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 18일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1월 23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그의 마지막 7시간 30분[33] 은 사망 문서에서 후술한다.
2.3. 사망[편집]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 주고, 열심이었다고,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 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하다.
무료하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박수치는 그 사람이, 사람들이 무료하다.
즐겁지 않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여전히 즐겁지 않다.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 김광석, 1995년 8월 中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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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6일, 자신의 거주지였던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원음빌딩 5층 계단에서 전깃줄에 목이 매여 숨진 채 발견되었다.
3. 음악성[편집]
3.1. 가창력[편집]
김광석에 관하여 설명할 때, 흔히 '진정성이 있는', '마음을 울리는', '우리들의 감정을 건드려주는 목소리' 등등의 말들. '전위적인 실험정신을 지닌', '뛰어난 기교를 지닌' 등의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김광석을 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없다. 그가 생전에 부르고 만들었던 노래와 앨범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내기란 솔직히 어렵다. 기교라는 측면에서건 아니면 전위성이라는 측면에서건, 김광석보다 훌륭한 대중음악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차라리 빠를 것이다. 다만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혹은 그가 남기고 간 노래가 청자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짧게 소개하는 것으로 본 항목의 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김광석의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음색과 거기에 실린 짙은 감정 때문이다. 특히 김광석의 바이브레이션은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35]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36][37][38] 이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영화 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꽤나 주목받기도 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김광석은 노래할 때 또박또박하게 발음한다. "광야에서"의 가사 중,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다만 처음 이 곡을 부른 안치환 또한 '흙이여'를 [흘기여]라고 발음하므로 이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테크닉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다. 그의 라이브 음원이나 영상을 들어보면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감정을 많이 실어서 부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인지, 단순히 발음 뿐만 아니라 음정을 내뱉은 입술의 모양도 불안정해진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김광석의 다른 공연 영상들을 보면 일부러 입술을 작게 한다거나 이를 앙다물고 노래를 부르는 등 발성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음낼 때 후두가 너무 올라가서 짜내듯이 소리가 나오는 인골라, 작게 벌리는 입,[39] 목을 잡는 소리[40] 등이 대표적이다. 즉, 좋지 못한 발성으로 노래를 하다보니 테크닉적으로도 떨어지는 것. 발성과 테크닉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김광석이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은커녕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은 트레이닝도 받은 적이 전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박자감각도 떨어지는 편이라 그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중간중간 박자를 자주 틀린다.
하지만 테크닉으로 점철된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그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비유컨대 프로바둑선수에게 왜 정석대로 수를 두지 않느냐고 하는 꼴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과 연륜[41] 이 있고 그 목소리로 자신이 부른 곡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가창력이란 결국 노래를 표현하는 능력,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광석은 자신의 곡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기에 엄청난 가창력의 소유자라할 수 있으며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김광석은 생전에 저런 창법으로 10년 넘게 녹음과 공연을 수없이 해왔음에도 라이브에서 기복이 거의 없었다. 김광석은 심지어 1000회 라이브 기록을 세워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가수 기준으로도 라이브 활동을 많이 갖는 가수였으며, 그럼에도 당대에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로 통해 대학 축제 등 여러 무대에서 사랑받던 사람이다.[42]
그런데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곡에선 3옥타브 레의 고음을 라이브에서도 원키로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즉 이것은 교과서적이지 못하단 소리를 들어도 본인에겐 노래하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 창법이었단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김광석의 발성이 좋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김광석 입장에선 큰 무리도 가지 않고 노래 표현에도 알맞은 좋은 창법인 것이다.[43]
애초에 대중음악은 성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성공한 가수들이 클래식에서 말하는 정석과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창법을 쓰며, 사람의 성대 역시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김광석이 저런 창법을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지점들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힘든 이유도 명확해진다. 흔히 김광석을 가리켜 '우리에게 독특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 음악가'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목할 부분은 '독특함'이다. 그 독특함은 그가 누구나 보편적으로 쓰는 효율 좋은 발성법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요즘에는 실용음악의 발달로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안정적인 발성을 배우고 데뷔를 준비하지만, 그때의 김광석은 뛰어난 발성보단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갈고 닦는 데 더 집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에는 보기 어려운 김광석의 독특한 개성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는 점이다.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김광석을 그리워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3.2. 편곡[편집]
그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거리에서, 먼지가 되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등병의 편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은 사실 그가 편곡하고 리메이크한 커버곡이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들을 모두 김광석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김광석의 뛰어난 편곡 실력을 알 수 있는 대목.
3.3. 성실성[편집]
김광석은 엄청난 노력가였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4집 앨범이나 2장의 다시부르기 앨범 중에서도 특히 2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3집이나 특히 다시부르기 1집은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 달리 말하면 김광석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찾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앨범으로 평한다. 이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을 높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후기 앨범들(4집과 다시부르기 2집)이 이룬 성과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뒤늦은 음악적 성취가[50] 그의 성실성이나 노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가 성실하고 노력가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소극장 공연을 1000회나 했다. 그가 처음 대학로에서 소극장 공연을 한 날은 91년 7월 1일이었고 1000회를 달성한 년도는 95년 8월 11일인데 91년 ~ 95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2일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발매 년도를 살펴보면 1집(89년) - 2집(91년) - 3집(92년) - 다시부르기 1집(93년) - 4집(94년) - 다시부르기 2집(95)년 순이다. 1집에서 2집의 2년 공백을 제외하면 전부 1년 마다 앨범 작업을 한 셈이며 새 앨범들은 전의 앨범들 보다 음악적으로도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로 판단컨대, 그의 음악적 성취라는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도 일부 있겠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3.4. 음악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편집]
국내의 장덕, 김현식, 유재하, 신해철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비운의 천재'로 평가받는 가수 중 하나이다. 그의 예술적 재능이 우선된 이야기지만, 인품마저 겸비했으니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그를 본받는 가수들이 계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가수이고 인물이었다.Q.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A.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그는 '19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장범준이 그 뒤를 잇고 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또한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하였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다. 원래는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51] 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52] ,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해나간다. 당시 김광석의 곡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편집]
4.1. 도서[편집]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수기, 작가 주변 인물들의 김광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출간한다. 2017년 기준으론 절판된 상태이다.#
2013년 말에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메모, 편지, 문서[53] 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 <미처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다. 책 뒷면에 김광석이 남긴 작곡 노트가 있는데,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미완성된 가사들[54] 을 그대로 실었다. 이로 인해 페이지의 절반 넘는 부분이 미완성된 채 비어 있는데, 보고 있으면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이 페이지가 다 차서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평이 많다. 이 외에도 <김광석 악보집>과 노래 가사 모음집 <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앤솔로지>등이 있다.
4.2. 뮤지컬[편집]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이 초연되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으로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Mamma Mia'(ABBA]) 외에도 'All Shook Up,'(엘비스 프레슬리), 'We Will Rock You'(퀸),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2016년에 김광석 20주기 기념으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그 여름, 동물원'이 시작한다. 2016년은 김광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4.2.1. 그날들[편집]
2013.4.4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2016년 충무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이 올라갔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주크박스 뮤지컬.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오종혁, 오만석, 민우혁, 강태을, 양요섭 등이 출연했다.(#)
김광석의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작법으로 편곡하고 일부는 매쉬업했다. 이런 탓에 혹자는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지만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부모님께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는 편지를 보내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뮤지션의 감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을 구축한 것이 단점이자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출가 장유정은 이런 비판에 대해 그의 음악 특유의 정서는 극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은 편이다.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한중수교의 비밀을 덮으려는 정부와 그 사건에 휘말린 두 남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과거와 영애양이라는 지위의 무게에 환멸을 느끼는 영애양과 경호인 대식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현재가 대응을 이뤄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장유정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다만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4.2.2. 바람이 불어오는 곳[편집]
2012년 11월 30일 대구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광석 추모 뮤지컬의 대표주자이다.
(사실, 2008년 5월 15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회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뮤지컬이 아니었음)
대구 초연 이후에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이후, 현재 2017.11.10~2018.1.21 예그린 시어터까지)
참고로, LP STORY 기획사(대표:이금구)에서 제작한 공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이풍세 역의 최승열은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우승은 김광석... 의외로 표차는 크지 않았는데 김광석 45표 최승열 35표.
박창근은 내일은 국민가수에 출연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4.2.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편집]
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2013년 12월 19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김광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작품성으로는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럼에도 또 김광석의 이름값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씬이 있었을 정도다. 이 씬은 프리뷰 1회 공연 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평을 받아 삭제되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은 성공한 작품으로, 특히 김광석의 생전 모습을 직접 보아 왔던 중년층 관객들이 많았다. 제작을 맡은 NEW 대표 김우택이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뮤지컬 디셈버의 흥행 수익이 엄청났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4.2.4. 기타[편집]
- 그 여름, 동물원
- 우리들의 사랑
- 다시, 동물원
4.3. 추모 공간[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5. 음반 목록[편집]
5.1. 기타[편집]
- 배트를 들라
5.2. 사후 출시된 앨범[편집]
김광석이 직접 낸 게 아니라 세상를 떠난 후 추모앨범,다시부르기1,2,김광석 베스트, 김광석 나의 노래 BOX등의 앨범이다. 김광석의 사후 앨범 확인 정보는 비트(BEAT),[56] 네이버 뮤직로 확인.
- 김광석 인생 이야기,노래 이야기(1996.7.1) : 김광석이 생전 소극장에서 부른 노래들를 모은 앨범이다. 즉 쉽게 말하다면 라이브 음반.
- 1+2(1998.7.1) : 1+2가 발매된 같은 날 가객- 부치지 않은 편지도 같이 발매.
- 가객-부치지 않은 편지(1998.7.1) : 같은 날 1+2도 발매.
- 다시부르기 1(2000.7.1) : 생전 다시부르기 1를 다시 판매 한것 같다. 이등병의 편지 라이브 버젼도 있다.
- Anthology 1(2001) :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후 2001년에 낸 추모앨범,김광석의 대표곡과 김광석이랑 친분이 있던 가수들이 부른 앨범이다. 참여한 가수들은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안치환, 김창기, 박학기, 여행스케치 등 꽤 인기가 있는 가수들이나 김광석의 절친한 친구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불렸다. 타이틀 곡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이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 모두가 함께 녹음한 합창곡.
- 5집 The Classic(2001) : 김광석의 대표 곡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앨범. 5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보니 김광석의 정규 앨범으로 착각되는데 절대 정규 앨범이 아닌 리메이크 앨범이다.
- Collection - My Way (1964 ~ 1996)(2002) : 김광석의 정규 앨범중에 인기가 좋았던 노래만 묶어서 판매한 노래. 즉 다시부르기에서 녹음한 노래가 아닌 원곡 노래만 모은 앨범이다. Disc 3에서는 미공개곡과 이미 발표된 곡의 미공개 버전, 라이브 버전 곡 등이 담겨져 있다.
- 김광석 베스트(2005) : 김광석의 인기 곡(베스트 노래)들만 모음.
- 김광석 셋,넷(2006) : 김광석의 정규앨범 3,4집을 묶음.
- 다시부르기1,2(2006) : 다시부르기 1,2를 묶음.
- 인생+노래 이야기(2007) : 1996년에 냈던 인생+노래 이야기를 묶음.
- 나의 노래 BOX SET(2012.7.9) : 김광석의 정규앨범+다시부르기1,2+인생,노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앨범.
- Unforgettable(2012.8.9) : 소개 저작권 때문인지 이 앨범의 경우 직접 앨범을 사서 들을수 밖에 없다.
-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2014.11.11) : 4집을 리마스터링 한 앨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에선 원곡과 꽤 차이가 있다.
- 연결의 신곡발표 프로젝트(2015. 10. 30) : 김광석의 미완성곡을 심현보, 성시경, 정재일[57] , 이지혜[58] 등 여러 사람들이 완성시켜 만들어진 신곡이다. 부른 가수는 성시경. 편곡은 심현보와 정재일. 하지만 김광석의 곡이라는 느낌보다 성시경-심현보의 느낌이 너무 강했는데다가 이 프로젝트 자체가 대기업 SK에서 내놓은 프로젝트인지라 호불호가 갈렸다. 호불호가 갈렸던 것과는 별개로 성적은 꽤 좋았던 편.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2016.4.27.) :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를 재발매한 앨범.슬픈 노래, 광야에서, 그대 웃음소리 등 3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LP에 스크래치에 손자국이 많아 수많은 구매자들이 환불을 요구한 바 있다. LP 표지는 민중화가 이종구가 디자인했고, 더블게이트식 양장형 LP커버, LP속봉투 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아트 콜렉터스 에디션 #2(2016.8.25) '전작과 다른 공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저번 레코드판에 흠집이 많아 구매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다시 발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창우 화가가 LP표지를 디자인했다. 제작 공장과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바뀐 것이 없다.
- 김광석, 다시(2016.12.7) : 12월 1일에 가수 정인과 콜라보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먼저 공개되었고 12월 7일에 로이킴과 콜라보한 김광석의 1집노래인 너에게 등 9곡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6. 어록[편집]
나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가슴에 안고 무대를 지켜본다. 특히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한 소극장 무대에선 눈빛만 마주쳐도 알 수 있다. '그 각각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 주는가'가 관건이다. 그럴 때 나는 광대이다.무대의 나와 객석의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드높아질 때 우리 모두 잠깐이나마 해방을 맛본다. 나는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때가 특히 그러하다. 장교로 복무하다[59]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는데, 와이셔츠 입은 관객들이 이 노래의 동심원 속으로 빨려 드는 저릿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 결국 무대는 '노는' 장소이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모두에게 의미가 없다. 이 이외의 목적이 무대에선 존재하면 안된다.
우리의 문화에서 가장 큰 위기는 전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단지 옛날의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며 전통이 없으면 손쉽게 서구의 문화,특히 미국과 일본의 대중 문화에 경도된다. 하나가 유행하면 너도나도 뒤따라 그 일색이 되는 거리의 패션과, 하다 못해 한 자리에서 5년도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갈아 치우는 카페들을 보라. 뉴욕의 음악 거리인 그리니치의 작은 카페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곳은 별 특징도 없었지만 무려 80년이나 되었단다. 나는 그 곳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아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대중 문화의 저역을 느꼈다. 나는 아빠가 느낀 것을 딸래미가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2, 3세대가 공유하는 공간이 있는 문화는 손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끝 인사'는 이런 말을 하겠습니다.
"행복하셔요" 인데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사시고, 보람도 느끼시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행복하셔요.
― 콘서트를 비롯해 그가 언제나 사람들과 헤어질 때의 인사말인 '행복하세요'에 대한 본인의 설명[60]
[61]
이 사회가 기피하는 부분들을 은폐하려고만 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알고 어디서 느끼나요?
― 김광석, 1993년 2월
종현님도 행복하세요
1995/06/02 20:46 | 김광석 (김광석) | 조회 62
인연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우연히 얘기치 않게 만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우연들 말입니다.
(중략)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밝지만은 않았죠??
그런 세월을 넘어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어제는 집에 꽃을 심었지요.
잠시지만 행복했지요.
앞으로 꽃이 피어나고 자라고 지더라도, 그것이 나와 우리 식구들을 행복하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꽃은 아름답지요
꽃처럼 어여쁘게 세상이 되었으면...
여기서라도 자주 만나게 되길 빌고 언젠가 정말 감자탕에 소주잔이라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 둥근소리 1995년 6월 2일 게시판에 팬의 인사에 대한 김광석의 답변
아저씨..가슴이 두근거리면 사랑인가요?
1995/06/28 15:46 | 외기러기 ( 이연수 ) | 조회 56
음.. 그냥 질문이기보다는 좀 그런..
좀 인생선배로서.. 한가지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뭐랄까, 좀 관심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나도 근1년이 지나고도
그 사람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게 사랑일까요? 아니면, 뭘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 사람 앞에서는 너무 작아보이는 제 자신이
너무 애처러워 보입니다
[to연수]사랑의 시작이 설레임일까요?
1995/06/29 23:31 | 김광석 (김광석) | 조회 217
(중략)
내 기본적인 생각은,
'시도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아프고 깨지더라도 시도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일텐데,
그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것은, '만나서 서로 자잘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서로를 얼마나 많이 이해할 수 있는가' 가 중요한 것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시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시도하는 방법은 알아서 하기를
다음 곡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인데요. 사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 (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에,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많이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62]
그,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뭐, 스스로 투자한 시간이나, 주었던 정이나, 이게 아까워서 아플수도 있구요. 혹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줘서, 그럴수도 있구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아플수도 있습니다. 여튼. 근데 안아프면, 사랑이라고 할수가 없겠죠? 그만큼 희생이 따르고, 그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 전문 펼치기 · 접기 ] <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아가다 보면 가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주어진 삶의 무게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둠과 함께 텅 빈 외로움이 찾아든다. 바로 이런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인생을 조율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김광석(金光石, 32세, 마포구 서교동 398-2[오기] 원음빌딩 202호). 노래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라는 믿음으로 지난 '84년부터 줄곧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져온 그가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라이브 공연 1천회를 맞아 서울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8.1~8.31)
BBS '밤의 창가에서' 녹음차 불교 방송국에 들른 그를 17층 로비에서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바로 이웃집 형을 생각게 하는 외모와 말투, 가슴에 범선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우선 1천회 공연 기념 콘서트를 축하드립니다. 라이브 무대를 고집해 오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천(千)을 바라보고 노래하진 않았어요. 바둑을 둘 때처럼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집 한집 만들어가는 데 정성을 다하듯 매번 공연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84년 민중노래 서클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그는 '88년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라이브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호소력 짙은 그의 음악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듣는 이에게 가슴을 휘어잡는 잔잔한 울림과 함께 조래가 끝난 뒤에도 뭔가를 생각게 하는 독특한 흡인력이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비상구>
"김광석씨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노래와 삶에 관한 철학이 있다면......"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는 자신의 노래가 자칫 교과서적 충고나 교훈조로 흐르지는 않을까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유당 시절, 아버님께서 교원노조[1] 사건으로 교단을 떠나셔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대학시절 민중음악을 선택하신 계기가 아닌지......"
"직업적인 계기는 아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상 남들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말고, 경우에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사회라는 체계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더군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러한 현실이 제겐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려던 제겐 다행히도 음악이 있었습니다."
'90년 6월 동갑내기 서해순 씨와 결혼, 다섯 살 난 딸 서연이를 두고 있는 김광석씨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결혼하고 나서 4, 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0'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 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 아내는 직장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더군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요즈음은 콘서트 외의 시간은 딸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서연이에겐 항상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맑은 향기 나누며 살자>
'94년 4집 앨범 출반 이후 김광석 씨의 30대 가수로서의 완숙미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지게 된 때가 있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부터 허무가 몰려 왔다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20대의 가능성들은 대부분 좌절되고 30대의 한계를 분명 인정해야만 했었죠. '서른 즈음에'라는 곡은 그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죠."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그는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어나'를 힘차게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4집 앨범에 수록된 '맑고 향기롭게'라는 곡은 법정 스님이 함께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대한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법정 스님을 뵈면서 마음을 잘 닦으신 분은 절로 몸에서 향기가 베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가만히 옆에만 계셔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상의 조그마한 얘깃거리, 재밋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삶의 큰 힘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큰 의미만 좇다보면 마치 동화속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허황될 것이라며 웃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 1995년 샘터 9월호 김광석 인터뷰 중에서
(중략)
무엇보다도 공연을 하면, 내 스스로의 존재가 확인도 되고,
가수로서 보람도 가장 크더군요
해서 기회가 되는데로 큰공연 작은공연 가리지 않고
하다 보니 8월1일부터 하는 학전 소극장 공연에서
1000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수로서 열심히 살아왔구나' 라는
자기만족도 있습니다만,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내 스스로 선택한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려 노력할겁니다
주변에, 살아가시는 분들이 다들 자기 직업에 충실해서 직장 다니시고 그러듯이, 저도 제 가수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연 열심히 하다 보니까 1,000회 되데요?
― 김광석. 1995년 8월 11일 1000회 공연 기록 달성 직후 SBS와의 인터뷰에서
(중략)
있을때 잘 해.
참 실천하기 힘든 말이다
누군가 옆에 있을때 그에게 충실할 수 있는가?
나는 늘 옆에 누군가 있을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고,
막상 옆에 없으면 그리워 하는가?
모순이다
내안의 모순
가을철 이맘때 쯤 되면요, 묘하게도 저는 그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방학 지나고 나서 한참 놀 떄 생각이 납니다.
그맘때 뭐, 성적표가 일찍 왔나 싶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근데 아버님이 성적표를 이러고 보시더니, "광슥아, 고마 쉬이라"
그래, 휴학계 내고, 1년 놀고, 그리고 6개월 갔다 오고, 그리고 학기 안 맞는다고 6개월 또 놀고. 노니깐 참 좋데요.
뭐 사실 하는 일 없고,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니깐 "밥 주세요" 밥 먹고. 심심하니깐 나가서 (놀고), 할 일 없죠.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구경이나 하고 멀뚱히 보다가 배고파지면 또 집에 가서 "엄마 밥 줘" 그러고 또 밥 먹고 자고.
아마 20대 초반에 누구나 비슷한 경험들 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뭐 기대도 크고, 가능성도 많고. 하지만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좀 불확실하고요. 구체적이지 못하다 보니깐 아무래도 어떤 조급함이나 답답함, 뭐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이 노래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 다음 부를 곡이요. 다는 못 보내드릴 것 같고요. 조금만 보내드리면, '불행아'라고 하는 노래인데요, 그맘때 뭐 허구한 날 부르고 그랬던 노래입니다. 뭐 그런 심정하고 비슷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보내드릴게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이문세 : 앞으로도 계속 공연하실 거에요?) 아마 내년부터는 그렇게 많이 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어디로 공부를 하러 가는데, 아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애 봐야 돼요. (집에서, 아니면 외국에서 같이?) 외국에서 같이요. 해마다 하는 여름 정기 공연은 계속 해야죠. 그래야 생활이 될 테니깐.
― 김광석, 1995년 10월 28일 이문세쇼[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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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추모글[편집]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 오경필 중사(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의 배역)
Q: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서 나온 명언. 김광석과 그의 음악에 대한 정의.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는 그가 있어서 80년대를 버텨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찬욱
아주 오랜 후에 이 시절의 모든 음악이 다 잊히는 날이 올지라도 김광석의 노래는 기억될 것이다.
―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中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이 세상 떠나갔나요?
대단한 순정이고 열정이네요. 삶을, 노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요?
속없이 웃고 있는 광석이가 보고 싶다.
남들에게 욕을 먹었으면 좀 더 오래 살았을 텐데. 해맑은 네 목소리라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이세상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너의 짧고 뜨거웠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나의 친구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고맙기도하지만, 나는 네가 기억되기보다는 내 옆에 있었으면 한단다. 나를 이해해주고 좋아해 주었던 친구는 흔치 않거든. 나 역시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었었니?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 괴롭단다. 네가 우리와 함께 나이 들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너에 대해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취하고 껴안을 수 있으련만... 또 똑같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면 가끔 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단다.
음악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하는 힘이 있다. 암울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깊고 우수 어린 목소리로 젊은 세대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작은 거인 김광석을 그리운 마음으로 추억하며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평소 김광석씨의 “서른 즈음에”라는 곡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드라마 <고백> 촬영 시에 직접 부르기도 했구요. 그 곡은 서른에 들어도 또 마흔에 들어도 좋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라디오 DJ시절에 김광석씨도 게스트로 여러 번 나오셨었는데 가수 같지 않은 소탈한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다만, 김광석이란 친구가 너무 일찍 인생을 많이 알았다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너와 나이 차이가 많아서 깊은 교우를 못 나눴다. 내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늘 알고 있었다. 니가 나의 동신교회 새까만 후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형주보다 너는 몇 년 후배였다. 나는 윤형주나 너나 같은 교회 성가대 출신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너는 나쁜 놈이다. 늙은 선배를 놔두고... 뭐가 급해서 먼저 갔는지... 매우 불쾌하다. 거기서 잘 있길 바란다. 곧 만날 거다. 이만 총총...
그 분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분, 꽤나 순수했던 사람이었나 봐요. 그런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들을 통해 좋은 에너지, 좋은 영감들을 껴안게 될 것 같군요.
김광석은 이 시대가 아끼는 뮤지션이다. 한 때 아꼈던 뮤지션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아끼고 있다는 사실에 밑줄을 그어야 할 것이다. 그는 남은 인연을 다 잇지 못하고 일찍 먼 길을 떠났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김광석이란 이름은 그 어떤 추억보다도 더 진하게 박혀 있게 될 것이다.
독일로 유학간 친구가 잠시 귀국했을 때 강원도로 가는 국도변의 밤 자동차 안에서 처음 들었던 그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일순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여행길에 그의 노래는 먼 불빛이 되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한번만 들으면 금방 다른 목소리들과 구분이 된다. 자갈이 깔린 길을 몇 년쯤 홀로 걸어온 사람이 내는 소리 같으므로. 어느 날 열심히 일을 하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혼자 있을 때면 가끔 그의 노래 한 소절이 입안에서 맴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에... 그랬음에.
요즘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김광석 버전이다. 나는 저녁 공기 속에서 쓸쓸하게 새어 나오는 <거리에서>를 사랑하고, 세월 때문에 마음이 울컥해질 때 문득 떠오르는 <서른 즈음에>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등병의 편지>를, <부치지 않은 편지>를 지독히도 사랑한다. 그의 노래에 감염된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나는 삶의 여러 요건 가운데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이유로 김광석을 좋아합니다. 김광석의 말하는 속도, 목소리의 색깔, 그리고 그가 노래할 때의 가라앉은 음색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적은 마음 안에 가을이 지나 벌써 겨울이 가득합니다.
내가 만났던 김광석은 늘 소탈(疏脫)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또 통기타 하나에 하모니카 하나로 온 몸으로 노래 부르던 그를 기억한다.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모던 포크음악을 대표했던 김광석. 안타깝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남아 그리운 마음으로 애창된다.
첫인상, 진짜 후줄근했지.
차림새, 완전 변두리.
목소리, 청승맞다고 생각했지.
이제 내게 기억되는 건 그의 얼굴 가득 주름 지으며 웃던 웃음 뿐.
나 이제 광석이 형 노래 안 들어. 도저히 CD를 손에 들 수가 없어서.
나 형 미워해.
살아있었으면, '나 형 졸라 맘에 안 들어' 라고 꼭 얘기하고 싶은데,
그럼 또 그 주름 쫙 만들면서 웃어줄 텐데.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 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 전문 펼치기 · 접기 ] 너무나 슬픈 목소리의 가객 김광석
김광석과 필자와의 인연은 91년 필자가 연출하던 FM심야프로에 그를 디스크 자키로 기용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약 4년간 같이 방송일을 해왔고 타계하기전까지 PD와 DJ라는 공식적 관계를 넘어 호형호제하는 개인적 친분을 유지해 왔다.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음악에 관한 견해 이외에도 91년에서 95년까지 가까이서 본 인간 김광석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도 이제 고인이 된 김광석을 그의 음악과 더불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슈퍼맨, 김광석
김광석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다. 그는 근래에 로드매니저를 잠시 고용한적이 있으나, 그의 활동기간을 통틀어 매니저 없이 거의 혼자서 모든 활동을 꾸려왔다. 그의 활동 영역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콘서트, 그리고 봄, 가을로 붐비게 되는 각 대학 축제등의 초대가수, 또 음반 녹음, 방송 프로그램의 DJ, 기타 다른 방송 활동이나 행사 및 공연 등에 초대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활동을 섭외나 홍보 그리고 스케줄 관리를 전담하는 매니저 없이 혼자서 처리한다는 것은 실로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김광석은 홀로 그일을 다해냈다. 그리고 왜 매니저를 두지 않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를 둘만한 가수가 아니라서.."
그의 주된 일과는 아침에 보통 방송사 한 두곳을 가서 녹음이나 녹화를 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자신의 공연이나, 서울 혹은 전국의 대학이나 단체에서 초청한 행사에 응하고 밤에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신문이나 잡지를 위한 인터뷰, 혹은 음반을 위한 녹음 작업을 하고 새벽에는 컴퓨터통신을 통한 팬들과의 온라인 대화나 작곡이나 작사 또는 연습, 혹은 독서에 몰두하는... 옆에서 보기에 정말 대단하다싶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보여왔다.
그는 선천적으로 자그마한 체구에 걸맞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체질이었고, 주변에서는 흔히 그 성실함을 빗대어 슈퍼맨이라 불렀다.
여린 감성과 깊은 통찰력의 타고난 가수
김광석의 성격은 감성적으로는 상당시 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무척 강한 두가지 면을 동시에 보였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철저함을 추구하였지만 주위에 관해서는 동시에 늘 관대히 대해왔다. 음반을 낸 초창기 형편없는 대우에 몇마디 불평만으로 막대한 이윤을 그대로 저버렸으며, 힘들게 살아도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늘 자신의 삶의 방식과 그 해답에 대해 목말라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젊은이 중의 한 명으로서 우리들이 처한 이 시대 상황에서의 작은 감정의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려 애썼다. 그리고 잘 살려고 힘썼고,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철저한 자기훈련의 결과로 매사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그는 자신의 여린 감성으로 이 타락한 세상과 결국 타협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언제나 다정다감했으며, 바르게, 진정으로 착하고 올곧게 이 세상을 살고자 했다. 늘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자로 예쁜 딸의 아빠로 그리고 좋은 후배로 선배로 친구로..
김광석 노래의 핵심은 사랑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의 그룹을 거쳐 모두 6장의 독집앨범을 남겼다. 1989년에 '기다려줘'가 수록된 1집 음반을 시작으로 '사랑했지만'이 수록된 2집이 1991년.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이 1992년에, 그리고 '일어나'가 수록된 마지막 앨범 4집이 1994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1993년에 자신의 곡과 다른 가수의 곡을 리바이벌한 다시 부르기 1이 1993년에, 다시 부르기 2가 1995년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김광석의 음악여정은 노찾사와 동물원의 그룹시절, 그리고 4장의 독집앨범 그리고 2장의 다시부르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노찾사나 동물원시절은 김광석 스스로 나이로나 음악적 연륜으로나 자신의 음악의 형성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찾사라는 그룹의 성격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결국 아마추어적 성격을 버릴 수 없는 동물원이라는 그룹을 나와서 솔로, 즉 전업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는 행위부터가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1집에서는 10곡의 수록곡중 6곡의 자작곡을 싣고 있는데 보컬(창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김광석 고유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정립이 아직 확고 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편곡을 맡은 연석원의 영향이 이 음반에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집에서는 연주곡 1곡과 이장수가 작사한 '슬픈 노래'에 곡을 붙인것 이외에 나머지 8곡을 모두 다른 작곡가의 곡을 수록했다. 이 때부터 김광석 고유의 음악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조동익이 편곡에 가세함으로서 1집보다 훨씬 더 그의 노래를 심도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김형석이 대중적인 편곡으로 만든 '사랑했지만'이나 '사랑이라는 이유로' 같은 곡들은 훗날 김광석의 노래와는 음악적 스타일의 측면에서 구별된다.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부터는 김광석 스스로 전적으로 앨범을 프로듀서하는 본격적인 김광석 음악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오래전에 써두었다가 3집에서야 수록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포함 '행복의 문'등을 수록,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발표한 앨범이다.
그리고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수록된 4집은 이제 담담히 희망과 좌절을 관조하며 삶을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본격적인 포크, 컨트리적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4집 음반과 다시 부르기 1, 2집은 예전 앨범과 달리 김광석 고유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앨범들이기도 하다. 특히 다시 부르기 2는 경지에 이른듯한 보컬과 포크와 컨트리 혹은 블루스의 흔적까지 엿보이는 음악적 성숙도가 깊은 앨범이다. 선곡에 있어서는 다시 부르기 1이 동물원 시절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나 노찾사 시절의 '광야에서', '그루터기'등 자신의 예전 곡들을 중심으로 했다면, 다시 부르기 2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 생명을 아직 잃지 않는 곡인, 한국 포크의 정신이 담겨진 '바람과 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등의 노래를 과감히 리바이벌하여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방향의 확고한 설정과 더불어 앞으로의 새로운 영역과 음악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큰음악적 변화기의 단계에 다다른 상태를 보여주었다.
김광석은 생리적으로 포크적 성향을 많이 가진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악자체가 통기타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자연스레 그의 음악이 포크에 가까울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김광석의 심성 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국화된 장르, 즉 70년대 김민기, 조동진, 한대수 등의 포크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포크적 성향위에 김광석은 늘 컨트리와 블루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포크음악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메세지송의 전유물이었다면, 김광석은 자신의 음악적 심화를 컨트리나 블루스 특히 '블루 그래스'나 '힐리빌리' 등의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 (생전에 내쉬빌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컨트리 풍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물론 김광석의 음악감상의 폭은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음악적 방향은 컨트리나 블루스였을 것이다. 그것을 예시한 음반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된 다시 부르기 2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음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주제는 늘 사랑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그다지 원만히 대해주지 않았고, 그는 늘 처절한 사랑의 아픔으로 속을 삭였다. 그리고 노래로 표현했다. 잊음에 대한 그의 열망은 1집에 '내 꿈', '슬픈 우연'에서, 2집의 '너 하나뿐임을', '슬픈 노래', 3집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행복의 문'으로 그리고 4집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유롭게' 등 직접 곡을 쓰거나 가사를 붙힌 곡들에서 계속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잊음의 고통과 더불어 '나의 노래'나 '일어나'같은 희망찬 노래들을 동시에 부름으로서 그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결국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자 했다. 그의 노래에 그리고 그의 가슴에...
"행복하세요.."
김광석은 방송 때나 헤어질 때나 그리고 사인을 할때에 늘 쭈글쭈글 웃으며 '행복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얼마나 그가 행복에 대해 갈망했으면 그다지도 외쳤을까. 그는 늘 진솔하게 인생을 살고자 했고, 무엇보다 솔직한 삶을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힘의 원천이 자신의 노래로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의 노래로도 치유될 수 없었는지..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 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 구경모, '김광석의 밤의 창가에서' 담당 PD
7. 방송[편집]
7.1. 라디오[편집]
8.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8.1. 아내와의 갈등[편집]
8.1.1. 아내의 내연녀 및 가정폭력 주장[편집]
- 이는 모두 아내 서해순의 일방적인 주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읽으며 참고할 것.
그는 불교방송 FM프로그램의 고정진행을 맡으면서 알게 된 한 여성과 사귀어오다 최근 헤어져 한동안 상심했고 부인과도 성격차로 이혼 직전까지 가는 등 불화를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71]
또한 서씨는 고 김광석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서씨는 “광석씨는 부부싸움을 하면 물건을 던지거나 부수는 일이 많았다”라며 “화를 내면 감당이 안됐다”라고 말했다.서씨는 “어느 날 광석씨가 생방송을 펑크 냈다는 연락을 받았다”라며 “알고 보니 내연녀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 병원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병원에 가보니 내연녀 가족들과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광석씨가 나에게 ‘먼저 집에 가 있어’라고 말해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마음이 멀어졌다”고 말했다.
김광석이 생전 불륜을 했다는 의혹과 아내 서해순에게 가정폭력을 행하였다는 의혹.
2017년 11월 말, 아내 서해순이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광석이 불교방송 관계자와[72] 바람을 피고 있었으며, 갈등이 일어나면 물건을 부수거나 던지는 등 친근한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서해순에게 한참 인식이 부정적일 시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묻혔다.
8.1.1.1. 반박[편집]
서해순 씨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결혼 생활에 처음 문제가 있었던 것이 김광석 씨 때문이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나에 대한 예를 들면 동거남에 대한 얘기[73]
를 하기 전에 김광석 씨가 먼저 내연관계에 있었던 여성이 있었다고 하는 소위 말해서 편지 등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다른 인터뷰에 의하면 처음에는 착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라는 얘기 자체는 결국은 내가 생각했던 김광석 씨가 아니었다고 하는 그래서 결혼관계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게 내 탓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요.
또 한편으로는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가 있었다 이 얘기는 아무래도 감정에 있어서 기복이 상당히 심했다. 조증과 울증이 이렇게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걸 거꾸로 생각을 해 보게 되면 정말 그런 것인지 그리고 지금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아침에 가게 되면 접시들이 상당 부분 깨져 있었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 부분이 시점을 보면 동거남으로 알려졌던 이 사람이 1995년 연말에 뉴욕에 갔을 때 갑자기 등장을 해서 2박 3일 사라진 그 얘기를 알고 나서부터 사실 가정의 접시라든가 이것이 깨졌다. 그렇게 보면 사실 사망 전에 상당한 문제가 서해순 씨에게 있었던 아니었나 거꾸로 해석이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진위 여부가, 누구 얘기가 맞는지 추정적 해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술도 덜 깨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당신을 데리고, 호텔로 짐을 옮기고 호텔로 왔지요.
목욕도 하고, 먹을 것도 좀 먹고 하니
조금 정신이 든 당신의 말 속엔 여전히 그의 냄새가 나요.
미안해요. 내 탓이에요.
(모자이크)
미안해요.
날 용서해줘요.
, 김광석이 본인의 일기장에 작성한 내용.
어제까지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이러면서 살아가는 건지
23일 24일 이틀동안 아내는 전화 한 통 없이 나를 애타게 했다.
우찾사 사람들과 경찰서에도 들르고, 새벽 2시까지 혹시나 해서 병원 응급실을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꼬박 24시간 ○○이나 □□이 친구 ◇◇씨 집에서 술마셨단다.
할 말이 없다.
타지에서 전화 한 번 없이, 그것도 여기 와서 처음 만난 나의 고교동창과 그의 친구네 집에서 술 마시면서.
뉴욕 공연을 하루 앞두고서 말이다.
(중략) 말해보라고.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랬드니 '너한테 쪽팔린다' 그러더군요.
무슨 뜻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실수였다는 결론이더군요.
당신은 맘을 주었는데 당신이 불쌍해지더군요. 그 순간에 다시 생각했지요.
잊어버립시다.
'그저 꿈을 꾸었다고, 당신의 슬픈 로멘스는 여기서 끝냅시다' 라구요.
당신도 잠이 들고 OO이도 잠이 들고.
3일 밤을 안 잤는데도 잠이 오질 않아 가만히 앉아 생각만 했지요.
미안하다는 결론, 내 잘못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여보. 잘 할게요.
그 누가 다가와도 당신의 맘은 뺏기지 않도록 노력할거에요.
여보 사랑해요.
OO! To my friend
(중략) 좋은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나를 이해하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이를 가진 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을 좋은 분들과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는 멋진 시간들이 되면 좋겠군요.
당신의 영혼과 나의 영혼의 교감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시간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멀리 있더라도 우린 서로 느낄 수 있을 거에요.
잘 지내세요. 건강하셔야 되구요.
당신도 저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보내겠지만 잘 지내려고 노력할게요.
행복하세요.
당신의 친구 해순
1995년 (날짜 미상), 아내 서해순이 김광석의 고등학교 동창 OO에게 쓴 편지
김광석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머킨 콘서트 홀에서 '우리문화찾기회'의 주관으로 열린 공연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는데, 콘서트 기간 내내 아내가 보이지 않자 콘서트 주관 단체와 뉴욕 경찰국과 병원 응급실에 들리는 등 아내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75] 아내가 동창[76] 들과 함께 술을 마신 것을 알게 되고 느낀 배신감과 절망감이 노트에 그대로 적혀 있던 것이 밝혀졌다.[77]
22년 뒤, 이 김광석의 메모가 공개되자 사건의 당사자였던 아내 서해순은 자기(김광석)가 질투가 나서 그렇게 써 놓을 수 있다고 답했다.
8.1.2. 김광석 관련 사업 논란[편집]
"미발표곡 하나 넣고 김광석이란 이름을 달고 나오고…. 더 이상 그의 이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걸 방치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79]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2003년 1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광석 사후 아내인 서해순이 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불거진 논란.
위 음반 뿐만 아니라, 서해순 주도로 발매된 김광석의 1~4집 음반 중 4집 음반에 오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80] 무려 20여년만에 재발매한 음반인데 신경을 쓰지 않았던 모양.
이 논란으로 인해 이전에 김광석의 의문사 의혹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졌던[81] 서해순이 남편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매하겠다는 팬들의 반응도 나오고 있다.[82]
8.2. 사망 관련 논란[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부모님 놔두고, 친구들 다 놔두고, 그냥 실수에요. 그냥 술먹고 장난하다가 그렇게 된 거에요."[83]
-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1996년 1월 6일 이상호와의 인터뷰 中
김광석은 사망 전 날까지도 이후의 일정들을 계획해두고 있었고, 갑자기 사망한 것에 대해 많은 추측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는 이상호 기자가 동명의 영화를 만들며 사망 관련 음모론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9. 사용 악기[편집]
- 김광석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기타 목록 (어쿠스틱 기타 혹은 클래식 기타는 ☆, 일렉트릭 기타는 ★) / 출처는 #
- Gibson J-200 클래식 :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 Guild D-100NS : 길드기타답게 따스한 중저음이 특징이었던 기타. ☆
- Taylor 910 :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사용했던 밝은 색상의 기타.☆
- Santa Cruze H13 : 산타크루즈는 캘리포니아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는 수제 공방이다. 밥 딜런이 해당 모델을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 Ibanez 12현 기타 : 정확히 어떤 모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 Fender Stratocaster : 오리지날 70년산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
- 삼익 클래식 기타 : 김광석이 노찾사 시절 사용하던 기타. 정확한 모델명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 Godin : 캐나다산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84] 라고 한다.☆
- Ovation 1717 : 88년도에 구입한 기타로, 김광석의 형이 김광석이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 위해 처음으로 김광석에게 사줬다는 기타로 추정된다. ☆
- Martin D-45: 마틴 드레드넛 바디 기타 중 하이엔드 모델로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김광석이 너무 갖고 싶어 카피 버전을 구매했다고 한다. ☆
- Martin M-36 : 일명 '김광석 기타'라고도 알려져 있다. 테일러 910 기타와 마찬가지로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하모니카를 차고 연주한 누런빛 기타. 김광석 사후 20주기에 마틴에서 52대 한정으로 김광석 트리뷰트 모델을 출시했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에 조성된 거대한 기타 조형물이 이 모델이다. ☆
- Martin Backpacker : 일명 '트래블러스기타'로 바디를 부채꼴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서 야외 캠핑장이나 여행을 갈때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진 기타이다. ☆
박학기가 95년 9월쯤에 공연하던 기타. 박학기 왈, "김광석씨가 이 기타가 섹시하다고 매우 탐을 내요" - Cort 스틸 기타 : 정확히 어떤 모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0. 가족[편집]
아내 서해순과 결혼하여 1녀를 뒀다. 서해순과는 과거 서 씨가 재수학원을 다니던 시절 우연히 만났지만 얼마 안가 바쁜 스케줄 탓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공연장에서 다시 재회했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1990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했지만 김광석의 공연 수입이 일정치 않은 탓에 서해순 씨는 계속 직장을 다니다가, 이듬 해 5월 딸 서연이 태어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딸 김서연은 1991년 5월 20일 생으로, 자폐성 발달장애를 앓고 있었다. 김광석은 생전 딸을 끔찍히 사랑했고 딸의 이러한 장애를 가슴 아파했다. 서연은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 서해순 씨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외국 생활을 했다. 2002년 여름 어머니 서해순이 김광석 추모앨범 발매를 위해 잠시 대한민국에 들어왔을 때 잠시 한국에서 생활하다, 이듬 해 다시 미국으로 떠나 2006년 여름에 완전히 귀국했다. 2006년 8월 김광석의 10주기 추도 콘서트에 직접 보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때의 인터뷰를 여길 참고하자. 그 뒤로 정확한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그저 미국 유학중이라고만 나왔으나, 2017년 9월 보도를 통해 2007년 12월 23일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년 16세. 유골이 청량산에 뿌려진 아버지와 달리, 서연의 유골은 납골당에 안치되어있다.
11. 성격[편집]
좋은 인상답게 성격도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인. 특히, 후배들을 많이 아껴서 돈이 궁한 후배가 있으면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가 힘든 후배들을 위해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치킨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후배들이 있는 대기실에서 곧잘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김광석이 오는 날에는 대기실에서는 치킨냄새가 퍼진 날이 많았다고 한다. 갓 가수가 된 후배들을 위해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성격 까칠하고 주위 가수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은미도 방송에서 종종 김광석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참았으며 가수 윤종신도 신인 시절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절히 말을 걸어 주었던 김광석을 회고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도현은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힘들었던 무명시절에 김광석은 윤도현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85] 이에 윤도현은 김광석이 죽은 이후 매해 그의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답을 하고 있다.
폐쇄적인 성격의 이소라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송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라이브 공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또한, 가수 채환은 히든싱어2-김광석 편에서 김광석을 좋아해서 그가 태어난 동네까지 알던 정도로 김광석을 좋아 했다고. 이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이 증명되는 셈이다. 김광석의 후배 가수들이 그가 눈을 감은 후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링크) 알쓸신잡2에서 유희열이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국내에서 유희열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라며 부러워할 정도로 국내 팬들과 가수들 사이에서 김광석은 여러모로 받는 대접이 남다르다고 볼수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와 마주해서 좋은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의 이야기도 여럿 눈에 띈다. 한 팬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김광석에게 주었다고 한다. 김광석은 "보답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네요"라는 대답을 하면서 즉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또 한 팬은 춘천으로 입대를 하는 길이었는데 김광석을 춘천가는 길에 만났다고 한다. 김광석은 "입대하세요?"라고 물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었다고.
이러한 성격 덕에 많은 이들이 더욱 그를 기억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12. 기타[편집]
- 법정 스님, 마광수 교수와 서로 인연으로 연결된다. 법정 스님에게는 직접적으로 법명[86] 을 받은 바 있고, 윤동주 연구로 명성이 높은 마광수는 김광석의 고교 선배이면서 동시에 위의 불교방송에서의 일 때문에 개신교 사학인 연세대학교에 속한 인물이 불교 쪽에서 오히려 두둔받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마광수가 발굴한 안도현 시인은 백석을 롤모델 삼았는데, 그 백석에게 자야라는 필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자신이 소유한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현재의 길상사가 되었다.
- 김광석은 포크라는 형식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음악에 목말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얼터너티브, 슬라브, 컨트리, 특히 락이나 블루스 형식의 음악을 앞으로 해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87] / 출처# 34번문항에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
- 버킷 리스트를 짜 두었던 듯 하다. 공연 중 자신이 40살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을 여행하고 싶다고 언급하였다.[88] 60살이 되면 로맨스를 하고 싶었다고.
- 어릴 적 꿈이 회사원이랑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꿈은 이루었다.
- 즐겨부르던 노래는 김민기의 '친구'였다.
- 인터넷을 활발하게 이용하였다. 본인의 나우누리 사이트인 '둥근소리'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오후 11시나 새벽에 활동하였다. 여기서 '물어보기/답해주기' 채널에 사망 6일 전인 1995년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남긴 'wkf tkfwl?(잘 살지?)' 라는 글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훗날 제16대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을 만난 적이 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의 일부인 미니 콘서트에 리드싱어로 출연하였는데, 이때 같이 진행되었던 청소년을 위한 교양강좌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참석하게 된 것.[89] 해당 공개방송의 마지막에도 이문세가 '노무현 국회의원에게 개인적으로, 또 별밤가족을 대표에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남기며 마무리했다.
- 김광석의 노래에 가사를 써준 시인도 있는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를 쓴 류근이라는 시인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 2014년 2월 9일 E16편에서 본인이 작사한걸 밝혔다. 정작 본인은 곡과 김광석의 유명세와 달리 조용히 지내다가 2010년 등단 후 첫 시집 《상처적 체질》을 내면서 이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다. 해당 곡의 가사는 실려있지 않으나, 〈너무 아픈 사랑〉이라는 시에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라는 부분이 있다.
- 소시민적 감성과 아름다운 노랫말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곡은 여전히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추모 음반이나 추모 콘서트의 인기는 웬만한 뮤지션을 뛰어넘는다.
- 김광석은 우리나라에서도 매해 가장 많은 추모 콘서트가 열리는 가수 중 한 명이며 그가 출근하듯이 공연했던[90] 대학로 쪽에 김광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성시경, 박효신, 타이거 JK, 김범수, 리쌍, 장기하 등 수많은 가수들과 김제동 등의 연예인들도 존경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가창력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면에서도 기억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가수들 뿐이 아니라 국내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힌 적도 있다. 가요를 전혀 듣지 않고 클래식 음악만 듣고 살았다던 소설가 윤대녕도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마자 빠져들어 팬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 정이현도 김광석을 추모하는 글귀를 쓴 적이 있고 김경욱은 출판한 책에서 김광석에 관한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인들도 종종 김광석을 추모하는 시를 쓰고는 했으며 소설가인 신경숙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로 김광석이란 가수를 알게 되었다가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문학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 혈액형의 대한 정보는 미상이다. A형이나 O형이라는 추측이 많으며 일부는 B형이라는 정보도 있지만, 생전에 혈액형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지금으로써는 그의 유족이 공개하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다.
- 2013년 김광석의 노래들을 기초로 한 뮤지컬 <그날들>이 대학로에서 초연되었다.
- 2013년 지산월드락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유명 밴드 Weezer가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된 '먼지가 되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국 팬들에게 제대로 된 팬서비스였다는 후문이다. 보러가기
- 히든싱어2 12회는 김광석 편으로 꾸며졌다. 이미 고인이 된 가수였던 데다가, 당시 음반도 전부 아날로그 방식이었던지라 불가능할 듯했으나, 제작진은 김광석의 음성을 디지털로 변환하는데 성공했다.[93] 그리고 엄청난 화제였던 만큼 시청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레전드 TOP 10의 1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다시 돌아온 그대' 라는 미발표곡이 히든싱어2에서 방송 최초로 공개되었다. 김광석의 유작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인데 김광석의 음악을 사용하는 디셈버라는 뮤지컬의 출연진들이 나와 미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방송에 패널로 출연한 김광석의 절친인 동물원 출신의 김창기는 이 노래는 자기가 만들어 김광석한테 줬으나 김광석이 버린 노래라고 하였다.
- 김광석이 속했던 그룹의 멤버인 김창기가 2013년에 발표한 정규 2집의 타이틀곡이 '광석이에게' 이다.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김광석을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는 내용의 곡이며, 김광석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나의 노래'를 단조 형식으로 편곡한 곡이라고 한다.
- 박찬욱이 2000년에 감독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가 OST로 삽입되었으며 영화의 히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94]
- 2023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상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AI 기술과 관련된 딥페이크 관련 범죄 피해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김광석의 영상에 유인촌의 얼굴을 합성하고 그의 음성을 학습시켜 그가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영상을 공개한 적이 있다.
13. 참고 문헌[편집]
- 김광석, 『미처 다 하지 못한』, 예담(2013), p75-93 등
- 이윤옥, 『김광석 평전(부치지 않은 편지)』, 세창미디어(2009),
- 김동하, “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샘터 1995년 9월호, 날짜미상, #
- 김광석, "신기하고 불확실하며 극단적이던... 스무살 적 방황의 깊이, 내 노래의 깊이", 렛츠 1995년 12월호, 날짜미상
- 이춘호, "김광석은 ‘ing’… 멈추지 않는 ‘김광석 신드롬’", 영남일보, 2014. 02. 07, #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상북도 대구부 수북면 범어동(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범어동)-012 0268', 1910, #
- 이수정, "김광석 노래의 가사 연구 : 대중성과 일상성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2023,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