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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책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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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주장
2.1. 인근 지역에 비해 적은 한반도의 부족한 생산력과 자원
2.2. 불균형한 기후
2.3.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
2.3.1. 교통 문제
2.3.2. 강대국들의 위협
3. 반론
3.1. 중간은 가는 농업 생산량
3.2. 풍부하고 깨끗한 물
3.3. 자원 관련
3.4. 근현대에 치중된 지정학적 관점
3.5. 산지의 효용성
3.6. 단군한반도가 아니라 랴오닝에 터를 잡았다
4. 진짜 단군이 터 잡은 랴오닝은?
4.1. 풍부한 농업 생산량과 자원
4.2. 기후와 인구 부양력
4.3. 방어 난이도
4.4. 결론
5. 사회문화적 요소와의 관계
6. 유사 개념
6.1. 신라 책임론
6.3. 공룡 책임론(?)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인 '한반도의 지리적 단점의 책임이 단군에게 있다'는 인터넷 밈. 물론 실존 여부조차 불확실한데다 후술되어있듯 애초에 초기엔 한반도에 터를 잡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고조선 시대 단군 운운이야 개그가 섞인 농담이긴 하지만, 이 드립의 핵심은 한반도는 지리적 입지가 좋지 않다(=터가 안 좋다)는 것이다.

사실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조선의 영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로 현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 남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단군이 언급되는 이유는 기록된 한국사의 군주단군왕검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1] 단군이 한국사 한민족의 시조로서 국가의 터를 잡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현재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인구 집단이 터를 잘못 잡았다는 주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전제를 바탕에 둔 관점이다. '한민족 국가'라는 민족국가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개념 자체를 배제 혹은 부정한다면 '단군에게 책임을 물' 주체인 한민족조차 상정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나기 전 주어진 입지와 배경이 자기 인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 단위 수저 계급론이라 볼 수도 있다.

위 인용 댓글처럼 단군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바리에이션도 있고,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게임 중 가장 유명한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용어에 빗대어 단군이 처음으로 자리잡은 것을 두고 '스타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주장[편집]



2.1. 인근 지역에 비해 적은 한반도의 부족한 생산력과 자원[편집]


우선 한반도 자체가 산지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나 자원이 풍부한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단, 상식적인 선에서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불모지라는 것은 물론 아니고, 한국의 주된 비교 대상이 되는 동아시아 이웃국, 미국 등의 국가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특히나 옆에 있는 중국일본과 비교하면 생산력의 열세가 확연하다.

  • 중국: 중국 대륙은 농토의 면적이 한반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대륙이다. 특히 농경 생산력이 월등한 강남 지역 개발이 마무리된 당나라, 송나라 이후부터는 한 지역의 단위면적당 생산력도 한반도를 압도한다.
  • 일본: 일본 열도는 전체적으로 한반도보다 위도가 낮고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난한 편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삼남보다도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 더 넓고 농토 자체도 많다. 이런 이유로 전근대 인구 추정에서도 일본 열도의 인구가 더 높게 추정된다.

자원도 부족하다. 그나마 나오는 자원들은 광물의 표본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종류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품질이 좋은 편이 못 되거나, 매장량이 적거나, 채산성이 부족해 내수를 충당하기에도 힘든 수준이다. 예를 들어 석탄은 나오긴 나오는데 무연탄이라 산업에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고, 텅스텐이나 희토류도 있지만 중국산이 압도적으로 싸다보니 한국에서 안 캐는 케이스다. 심지어 동해 앞바다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도 나온 적 있지만 이 역시 매장량이 매우 부족하다. 그나마 예외가 되는 것이 석회석, 텅스텐, 무연탄, 고령토 정도뿐이다. 결국 자체적으로 구할 수 없는 자원들을 구하려고 막대한 돈을 들여서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형편이다.


2.2. 불균형한 기후[편집]


강우량이 여름에만 치중되어 있어서 여름철에는 홍수에 취약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화재와 가뭄에 취약하다. 게다가 강우량이 뒤죽박죽이어서 수력 발전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또 중국 북부의 사막 지대와 인접해 있어서 황사까지 날아온다.

편서풍으로 인해 대륙 동안은 대륙 서안에 비해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로 생활 여건이 좀 더 열악하다. 특히나 북대서양 해류의 도움을 받는 유럽과 비교해보면 이따금 시베리아급으로 추워지는 한반도의 북단은 유럽에서 매우 온난한 이탈리아와 위도가 비슷하다. 그나마 아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의 생산량은 중간 그 이상이어서 어느 정도 인구 규모는 되는데, 그 때문에 한반도 ~ 만주 일대는 인구 밀집 지역 가운데 제일 추운 지역 중 하나이다.

때문에 미합중국 해병대 37대 사령관 로버트 넬러'대한민국은 온갖 기후가 다 있어서 훈련하기 좋다'고 한 말이 떠돌기도 하고, 실제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무더위만 경험하고 겨울 준비를 하지 않아 장진호 전투에서 크게 고전하기도 했다. 35도 가까운 찜통더위와 -10도까지 떨어지는 동장군을 같은 지역, 그것도 어디 산간오지가 아니라 시민이 다수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생활에 좋지 않은 부분이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본의 아니게 이점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쓸 물건은 추운 곳에서도 더운 곳에서도 모두 작동해야 하기에 기술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내용이 계절 문서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사계절이 뚜렷하다"라는 게 그다지 좋은 점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2.3.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편집]



2.3.1. 교통 문제[편집]


반도의 교통상의 우위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일본과 중국과 둘러싸인 형국도 중국이 일본으로 진출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만 그렇지, 한반도 주민으로서는 중개무역 같은 걸로 둘 사이에서 이득을 본 역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 외부와의 교류로부터 조선을 틀어막는 병풍처럼 되어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일례로 유럽에서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던 대항해시대에 일본은 일찍이 16세기에 가톨릭 전파로 인한 마찰을 겪었지만 조선에는 조선이 쇄국하고 말고를 떠나서 애초에 그런 선교사가 오질 않았다. 그나마 왔다는 서양인인 벨테브레하멜 같은 사람도 조선에 오려고 해서 온 게 아니라 표류해서 온 것이었다.

그나마도 중화권 중원 세계가 역사의 주도권을 계속 쥐어나갔다면 중국과 가장 인접한 변방의 이웃나라 겸 동아시아 문명의 선진국으로서 안정적인 자리를 계속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2] 근대 구한말 서구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서구와 빠르게 접촉해야지만 사회 개혁을 촉구할 수 있었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런 고립된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다. 조선과 일본을 가른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도 어쩌면 이것이다. 유교 성리학적 경직된 이념과 체제, 화이관이나 상업 경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서구권과 만날 기회 자체가 절망적으로 적었다. 이런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확실한 시장 가치를 증명해야 했지만, 앞서 나열한 수많은 악조건을 뚫고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속적인 북방의 위협으로 인해 그나마의 육로 활용도 침략을 우려하여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육로를 정비할 경우 우수한 기병 전력을 보유한 북방 민족이나 한족 왕조가 침입했을 때 주요 도시가 바로 함락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도로 확충에 힘쓰기보다 강과 해안 운송에 집중한 것은 선박의 우월한 수송 능력뿐 아니라 이러한 국방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통적 열세는 해양 운송이 활발해진 대한민국 시대에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3] 육로는 여전히 최악의 폐쇄국가 북한의 존재로 교류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사실상의 이나 다름없는 지경이다.[4]

2.3.2. 강대국들의 위협[편집]


현재 한반도의 서쪽에서는 중국이, 동쪽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이 두 국가 모두 국력이 매우 강해서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상황이다. 게다가 비슷하게 러시아라는 강국으로부터 위협받는 폴란드핀란드와 달리 유사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접한 동맹국[5]도 없어서 더욱 불리하다.

이는 과거에도 다르지 않아서 과거부터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계, 퉁구스계 등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 끼어 있어 항상 양면전선 혹은 그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6] 중국-만주 쪽에는 압록강개마고원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고, 일본은 바다가 막고 있다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쳐들어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잘만 쳐들어 왔다.[7] 되려 반도의 지리적 입지상 교통의 요충지였던 탓에 수많은 침략에 시달렸다. 이렇게 주변에 나라를 많이 낀데다가 요충지이고, 규모조차도 어중간하거나 작은 나라들은 주변국들 등쌀 때문에 강국으로 성장하기 힘들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형세가 이어져 한반도는 인구와 자원이 모두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지형적 단점까지 더해져 한반도는 개화까지 한참 늦게 된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끝내 일제 강점기남북분단을 겪었고, 그 잔재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한민국한반도 주변 4대 강국, 그중에서 중국일본 사이에서[8]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단군 책임론의 내용이다.

다만 이것은 민족 정체성의 유지 측면에서[9] 반드시 악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고려의 삼한 통일 이후 남북이 분단되는 1945년까지 천 년 동안 지방 세력의 난립과 분열 없이 통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적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뭉쳐도 살까 말까 하는 마당에 여러 세력으로 분열까지 되면 결국 모두가 공멸한다는 위기 의식이 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민족의 성립은 시발점은 삼국통일에 있으나 실제 민족성의 확립은 고려시대 북방민족에 대항하면서 생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덧붙여 외세의 침입으로 지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에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들이 중앙 정부에 맞설 정도의 세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3. 반론[편집]



3.1. 중간은 가는 농업 생산량[편집]


한반도의 농업 생산량은 중국사천 분지, 튀르키예아나톨리아라던지, 우크라이나초르노젬이라던지 북미대평원, 남미팜파스 같은 기름이 철철 넘쳐흐르는 땅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사람이 사는 땅들 가운데 평균은 간다. 평야 지역이 많으며 바다와 인접해 해산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었던 서부와 남부 지역은 전근대에도 그럭저럭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먹고 살만한 땅이었다.

산지가 많은 건 교통에 악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산지에서 강이 흘러내려와 평야를 이루는 지형 자체는 일반적인 평야보다 생산성이 높다. 프리츠 하버가 20세기 초에 질소를 잡아 두는 화학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를 지으면 지력을 회복시키고자 땅을 휴식시켜야 했다. 매년 쉬지 않고 농사가 가능한 건 나일강 하류, 황하 하류처럼 수시로 강이 상류에서 토양과 미네랄을 가져와 지력을 회복시켜주는 곳뿐이었다.[10]그런데 한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나일강이나 황하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에 해당되고, 모든 강이 산에서 흘러나오므로 수량도 안정적이다. 또 한반도 같은 온대 기후면서 한번에 비 쏟아지는 지역은 사막화가 잘 되지 않는다. 쌓인 염류와 토양 독성이 금방금방 다 씻겨내려가서 토양 염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반도는 아주 비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척박하지도 않은 것이다.[11]

한반도 중남부가 인구를 부양하기 좋은 작물인 를 기르기에 좋은 지역이었던 점도 한반도가 높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요인이다.[12] 벼는 열대 저습성 작물인 까닭에 일조량이 많고 강우량이 풍부한 곳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한반도는 이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다. 벼가 열대성 작물이라 베트남 같은 동남아 지역에선 이기작, 삼기작도 하니 한반도의 생산량이 초라해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여름에 집중적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논농사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해충이나 수인성 전염병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런 건 겨울철 추위가 모두 자동으로 처리해 주기 때문이다.[13] 결국 한반도 자체의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 벼를 기르면서도 문제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조건 덕분에 조선 후기 한반도에는 적어도 1,600만명 정도는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동시기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당장 비옥한 영토로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딸리지 않았고 전근대 유럽의 인구 대국으로 한반도보다 훨씬 컸던 프랑스 왕국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와 비슷한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추정 인구가 2,460만명이었으니 말이다. 한반도는 한민족이 저 정도 인구를 가지고도 생업을 영위하며 당시 동북아의 지역강국으로써 소 기르면서 소가죽을 수출할 정도의 인구 부양력은 제공해 줬다. 애초에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의 농업 생산력이 아니었으면 조선이 고립적 농본주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나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3.2. 풍부하고 깨끗한 물[편집]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문명이 발전하는 데에 물은 필수요소다. 하지만 한국에는 낭비한다는 뜻의 관용어로 "물 쓰듯 한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수자원이 풍부하다.

우선 한반도의 국토가 화강암 산지 투성이인데 화강암에는 물을 걸러 주는 기능이 있다보니 물을 깨끗한 상태로 공급받을 수 있었고,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호우 덕에 연평균 강수량 또한 적당한 수준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농사같은 경우에도, 더운 여름에 물까지 집중적으로 공급되니 논농사가 수월해진 점도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처럼 순수한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문화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중국에서 차 문화가 발달한 것도, 독일 등 유럽에서 맥주 문화가 발달한 것도 민물에 석회질이 섞여 있다 보니 식수를 주로 빗물에서 구해야했기 때문에 이 빗물들을 오래 보관하면서 마시기 위해 음료로 숙성시켜 마셨던 것이다. 또한 지나친 강우량은 농사에 필요한 양분이 쓸려나가도록 만들어서 농사를 오히려 망친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딱 그렇다. 이 지역은 전근대에도 지금처럼 농사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고 현재도 동아시아와 인도차이나반도에 비하면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지 않다. 참고1 참고2


3.3. 자원 관련[편집]


근대 들어와서는 지하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박토 취급이긴 하지만, 이것도 좀 과장된 부분이 있는게 20세기 들어 석유 가치가 폭등하고 이런 류의 자원을 가진 나라들이 언론을 타다보니 그런 인식이 생긴거지 실제 한반도도 자원이 거의 없는 사막지대 따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원의 표본실이라 할 정도로 종류는 많다. 물론 종류 대비 매장량은 적은 자원이 상당한 편이나, 일부 자원은 양도 풍부하다. 대표적으로 무연탄, 시멘트, 텅스텐 같은 자원들이 그렇고 실제 이 자원들은 채산성이 떨어지기 전 20세기 탄광 산업에 큰 도움을 줬다. 21세기에도 북한 지역엔 아직 채광하지 않은 경제성 있는 자원들이 꽤 있다고 알려져있다.

애초에 지하자원이 철철 넘치는 땅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자원의 저주라 해서 자원이 풍족한 땅은 국가들 간의 쟁탈전이 벌어지기 쉬운 땅이고 자원으로 인해 분쟁지역이 되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원 위주 경제에 너무 의존하다가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나라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인 게 러시아로, 땅도 크고 자원도 풍부하지만 자원 의존 경제 탓에 관련 자원 값이 폭락하다가 서방 제재 등으로 수출길이 막히자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 나우루 역시 자원 덕에 한때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원 때문에 망할 위기에 놓인 나라로 유명하다. 해당 문서에도 있다시피 한때 인광석을 팔아 대박을 터뜨렸지만 무분별한 채굴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광석이 고갈되면서 쪽박찼다.


3.4. 근현대에 치중된 지정학적 관점[편집]


지정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은 오로지 근현대에 국한된 주장이다.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가 이렇게 서로를 직접적으로 침략할지도 모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1800년대 후반부터로,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산업 기술과 운송 수단이 발전하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를 침탈하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모두 내부의 혼란으로 북방 유목민족이나 왜구 등 외부 세력이 날뛰거나 군사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이를 해소해야 할 상황이 아닌 이상 대체로 고립주의를 지향했고, 한중일간 무력충돌이 발발한 사례도 19세기까지는 대부분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14] 따라서 한반도 또한 지난 19세기 중반까지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긴 해도 그냥 각자 알아서 살다가 가끔씩 교류하는 정도로만 보았지 당대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잠재적 적국으로 생각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최근 150여년 간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인한 서양 - 특히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 두 강대국미국러시아의 등장, 일본의 빠른 근대화로 인한 제국주의 전환, 이에 맞선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 전환 등으로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관계자가 늘어나면서 긴장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따라서 근 100~200년 사이의 지정학을 근거로 '애초에 흥성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 전체중 일부 부분만의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3.5. 산지의 효용성[편집]


흔히들 산지보다는 평지가 많은 곳이 살기 좋을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산지가 주는 효용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산지가 농경과 교통의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군사적으로는 적의 진격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켜 주는 천연 방벽이 되어 줄 수 있다.[15] 또한 경제적으로도 비록 곡물 등 농작물을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산지에 자라는 나무로부터 목재와 땔감을 얻을 수 있으며, 더욱이 산지는 하천의 발원지가 되기에 필요에 따라 물길을 막아 저수지로 활용하거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방아나 발전용 터빈을 돌릴 수도 있다.[16] 때문에 산지가 많은 건 물론 단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3.6. 단군한반도가 아니라 랴오닝에 터를 잡았다[편집]


한반도 지역의 지리적 문제점을 거론하는데 단군의 책임론을 운운하는 것은 단지 단군이 한국, 한민족의 시초라서 그런 것일 뿐이고, 사실 단군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요동-요서,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일대에 있었다. 그래서 단군 책임론 비슷한 드립이 나오면, 거의 100% 확률로 "단군 할아버지만주벌판에서 제대로 스타팅했는데, 무능한 후손들이 못 지켜내면서 쫒겨난 것이다!" 같은 또 다른 드립이 소환되곤 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실제 고조선이 있었던 랴오닝성의 지리적 특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4. 진짜 단군이 터 잡은 랴오닝은?[편집]



4.1. 풍부한 농업 생산량과 자원[편집]


랴오닝성은 랴오허쑹화강 유역 사이에 둥베이 평원, 일명 만주 평원이라는 한반도보다도 드넓고 독일 면적과 맞먹는 수준의 평야지대(35만 ㎢)가 있다. 또한 둥베이평원이 그냥 평야지대도 아니라 비료 없이도 농사가 가능한 비옥한 흑토지대가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성도 매우 높다. 벼농사는 부적합하지만 밀과 보리는 풍부하게 나와, 과거 식량부족 사태 때문에 곡물 수출에 제한이 많은 중국임에도 곡물을 수출하는 지역이다.[17] 이 곳은 과거에도 곡창지대여서, 이성계위화도 회군시 이성계가 군량부족을 핑계로 대자, 최영요동 정벌 강행을 요구하면서 "요동은 곡창이라 점령만 하면 군량부족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일화도 있다.

이 지역은 자원도 풍부하다. 중국의 주요 천연가스 산지 중 하나인데다가 보하이 만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유전지대가 있으며, 2021년에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다. # 이곳은 예전에 육지였기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전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랴오닝 성의 철광석은 유명하며, 석탄도 풍족하게 나 대규모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랴오닝성은 아니지만 북만주 헤이룽장성에는 중국 최대의 유전의 하나였던 다칭유전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민족이 고구려, 발해처럼 요녕을 계속 영역으로 보유했으면, 한반도와 합쳤을 때 365,000평방km로 독일(360,000)이나 일본(380,000) 급의 국토 면적을 보유하고, 인구도 1억 2천만[18]이 넘는데다가, 세계구급 농업지대와 석유를 포함해 웬만한 자원은 다 나는 자원부국으로서의 포텐셜도 가진다. 중원 본토의 압도적인 생산량 떄문에 중국을 능가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일본과 대등한 수준의 국력은 확보할 수 있다.

다만 이는 현대 시점에서의 이야기다. 랴오둥 반도는 한반도처럼 산이 많아 전근대 시점에서는 평안도와 대동소이한 수준이었고, 요동과 요서 사이의 드넓은 둥베이 평원은 요택이라는 거대한 늪지대여서 농업에 부적합했다. 반대로 요택을 메꿔서 농업지대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기도 하거니와) 중원 세력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또한 단군이 터를 잡을 때쯤엔 석유나 석탄은 고사하고 철광석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4.2. 기후와 인구 부양력[편집]


랴오닝성은 성도 선양의 1월 평균기온이 섭씨 -10도 이하로 한반도에 비해 겨울이 매우 춥다. 이 정도 추위는 현대 인구 밀집 지역 중에서는 한반도와 더불어 가장 추운 축에 속하지만, 사람이 못살 만한 추위까진 아니다.[19] 이곳의 성도인 심양경기도보다 약간 면적이 넓지만[20] 인구는 800만이며 바로 옆의 무순시까지 합하면 인구가 천만에 육박하니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구 밀집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추운 하얼빈시에도 3천만이 사는 중국의 인구를 고려하긴 해야겠지만, 어쨌든 일자리 등의 요인이 있다면 충분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다만 이 점 역시 현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전근대 시기에는 추위와 여러 지정학적 요소 때문에 딱히 살기 좋은 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예를 들어 (본 위키 문서의 서술이긴 하나) 틈관동 문서를 확인하면 청나라 성립 이전까지 만주 일대의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만주족(여진족)은 100만 명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 한반도 인구가 1000만 명은 거뜬히 넘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4.3. 방어 난이도[편집]


우선 지형 자체는 방어가 쉬운 축에 속한다. 북서부 지역인 창춘, 눙안 방면은 평야 지대이지만, 중남부지역은 오히려 첸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랴오허 동안 유역으로 북진하지 않는 이상은 랴오허의 제1지류인 훈허와 타이즈허가 중간에 횡측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부지역으로는 쑹화강과 지류인 후이파 강이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도 요동 지역에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세운 이후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의 60년 간 중국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고, 게다가 발해 시절에도 거란이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공략하는데 20년 가까이 세월을 허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부여부 쪽으로 우회하여 발해의 수도 홀한성 참수작전에 성공하여 발해를 멸망시킨다.[21]

이처럼 지형상으로만 보면 방어하기 쉬운 축에 속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주변에 세력이 너무 많고, 이들 모두가 랴오닝을 탐낸다는 것이다. 그냥 세력들도 아니고 근대 이전까지 그 엄청난 물량의 중국조차도 위협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말갈(이후 여진, 만주족), 서북쪽으로는 몽골 고원흉노, 선비, 돌궐, 거란족, 몽골족이 있었다. 서남쪽의 중국 본토의 한족도 고대 이래로 이곳을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요녕 지역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력들이 노리던 전쟁터였다. 이 지역을 거쳐간 세력과 민족은 대충 세어 봐도 고조선, 한나라, 선비족(전연-전진-후연), 고구려, 당나라, 소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족, 몽골 등의 기마민족, 명나라, 만주족(청나라),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만주국), 중국까지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즉 이곳을 안정적으로 차지하려면 주변의 유목 기마 전투민족들을 제압하고 중원 한족까지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한데, 고구려발해를 제외한 한국계 국가는 랴오닝을 제패할 이런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중원 대륙의 생산력을 보유한 한족의 중원정권도 랴오닝을 쉽게 장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한민족 특히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계 국가가 장악하기에는 애당초 역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발해 때 군사력이 강했던 것은 북방민족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인데, 발해 멸망 및 발해부흥운동 전후로 크게 성장한 북방민족들은 고려와 조선이 상대하기 버거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대로 둥베이 평원 자체는 흑토지대가 있을 정도로 농사짓기에는 괜찮은 땅이었지만 중간에 산 하나 찾기 힘든 개활지였으므로 거란족, 여진족몽골족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고려 말 만주에서 제일 가치가 있던 요동 반도 일대를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남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황야와 산악지대뿐이었고, 이 지역들에는 여진족들만 난무하니 매력이 떨어졌다는 것도 큰 요인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나 그 많은 민족들이 지나쳤고 이렇게 비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 만주 일대에 독자적 민족국가세우는 데 성공한 민족은 없다는 역사 역시 랴오닝 지역의 방어상의 어려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보다 더 풍요롭고 한반도만큼의 지형적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간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어야 정상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 지역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4.4. 결론[편집]


요녕 지역은 좀 춥긴 하지만, 토지도 비옥하고 자원도 풍부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방의 한국계 왕조들이 만주를 버린 것은, 이들이 무능해서 만주를 잃고 도망친 게 아니라 전근대 시점에서 볼 때는 애매한 땅이어서 포기한 것에 가깝다. [22]현대 시점에서 볼 때 만주는 좀 춥긴 하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고, 농사도 잘 되며, 석유와 철광이 흐르는 꿀땅이다. 하지만 전근대 시점에서 보면 사람이 살기에는 춥고, 기후변화가 일어나기 전인데다 작물 종자도 한정되었던 당시 시점에서는 농사를 짓기도 어려우며[23], 호전적인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라 방비하기도 어려운 계륵같은 땅이었다.

그래서 당장 이 지역의 패권국가로 꼽히던 고구려조차 한반도로 진출한 이후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후대의 조선북진 정책에 영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 또한, 땅을 정복하고 유지하기에 애매한 군사력도 있었지만 이 지역이 고생고생해서 먹어 봤자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계륵 같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24] 앞서 서술했듯 애시당초 당시엔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니었다. 삼국시대부터 상당한 개척이 이루어진 한반도 본토와 달리, 발해가 멸망한 이래로는 정주민이 거주하지 않은 채 유목민족의 터전이 되어 관개 시설이 개박살난 지역인지라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인프라를 처음부터 쌓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4군 6진 개척의 사례를 봐도, 이주 시 큰 혜택을 줘도 정작 장소 자체가 사람 살만한 땅이 아닌데다 개척하는 동안이 고생길이라 백성들이 이주를 기피해서 아예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죄인들을 이주시켰다는 것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5. 사회문화적 요소와의 관계[편집]


지정학보다 사회문화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반론도 있으나, 사회문화 역시 지정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조선의 폐쇄성을 비판하지만 중국과 일본 역시 서양에 폐쇄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지리적 이점 덕에 16세기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반면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서양과의 접촉을 개시했다는 큰 차이가 있을 뿐.

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단언하기도 곤란하다.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지만, 일단 정립된 후에는 지정학적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똑같이 만주 땅에 자리잡았던 고구려, 발해후금 역시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고구려는 나당연합군, 발해는 문왕 이후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유목민족인 거란에게 망했지만, 후금은 명나라와 대립했으며 해서여진, 몽골, 준가르 등의 유목민들을 전부 복속시켰다.


6. 유사 개념[편집]



6.1. 신라 책임론[편집]


일부 사람들은 현재 한민족이 만주에서 쫓겨나 한반도에서의 세력구도가 정립된 역사가 삼국통일부터라는 인식에서 신라 책임론, 신라 민족배반설 따위의 사이비 역사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일신라 형성 이전까지[25]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냥 타국 수준이 아니라 거의 경쟁국 겸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중앙집권국가는 아니었지만 연맹 체제와 비슷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금관국, 반파국, 안라국, 고자국 등)도 마찬가지였다.[26] 당대 시점에서는 같은 민족을 팔아먹고 타민족(중국)과 붙어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적국을 다른 국가와 연합해서 정벌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민족 배반'의 기원이 되는 단일한 민족성 자체가 사실 신라의 통일을 거침으로써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민족적 문제에 대해 신라를 탓할 수는 없다. 신라의 통일이 없었으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별개의 국가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IF 역사로 고구려 삼국통일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지만 여하간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한 IF 역사들은 어디까지나 상상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려운 것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신라/평가 문서 참고.


6.2. 이스라엘 모세 책임론[편집]


이스라엘 버전으로 모세가 석유가 나는 땅이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는 유대판 '모세 책임론'도 있다. 아직까지 웹상의 개드립인 단군 책임론과는 달리 이 모세 책임론은 실제 이스라엘 정치인이 언급한 바 있다. 듣보잡도 아니고 이스라엘 총리이던 골다 메이어가 "우리 이스라엘인이 모세에 대해 불만이 좀 있다. 그는 우리를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한 뒤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땅으로 이끌었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메이어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본토와 연안에서 채산성있는 가스전이 하나 둘씩 발견되면서 모세가 유대민족석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게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그 덕에 이제는 모세가 떠나온 애굽 땅에 가스를 수출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 해도 모세 시대에 석유는 별 쓸모가 없었으니[27] 당대에 중동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가나안 문서를 참고하면 농업 생산량은 그닥이지만 근동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가나안의 주요한 이점이라고 한다.[28]

6.3. 공룡 책임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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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책임론을 훨씬 넘어서서 공룡 책임론 같은 극단적인 개드립도 있다. 한반도의 공룡은 얼마나 무능하면 석유조차 못 되었냐는 개드립이다. 사실, 현재 석유 형성 과정의 정설인 유기물 기원설에서는 대부분의 석유를 해양 플랑크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현재는 아예 무기물 기원설도 힘을 얻고 있으며 유전 대부분은 공룡시대 중생대 이후 신생대에 생산되었다. 그러니 석유는커녕 인간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던 중생대의 공룡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정말 농담으로 하는 얘기긴 하지만 설령 죽어서 석유가 된다고 해도 공룡 입장에서 알지도 못하는 미래 이종족의 편리함을 위해 땔감이 되어줘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7. 관련 문서[편집]


[1] 지리적으로 따지자면 삼한의 유명한 인물이 더 적당하겠지만 삼한의 인물 중 오늘날까지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다.[2] 일본만 해도 중국과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끊어진 때가 비일비재했으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끊어진 적은 거의 없다. 때문에 중국에게 있어 한국은 적어도 중국 주변의 다른 이민족에 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변방이었다. 오늘날에는 중국이 다시금 주도권을 회복했지만, 서구의 침탈에 대한 방어 의식이 지나치게 작용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중국은 오늘날 매우 공격적인 외교로 인해 한중관계에서 그러한 오랜 인연을 잘 활용하진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속이나 긁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3] 이는 이웃국인 일본이 한국과 함께 제1세계가 됨에 따라 한국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덕도 있다. 지금도 일본 열도와 류큐 제도는 한국의 남쪽 출구인 동중국해를 감싸고 있어 충분히 한국을 봉쇄할 수 있을 만한 입지이다. 현대에는 같은 제1세계 (간접적) 동맹으로서 그럴 필요도 없고 큰형님 미국이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테니 그러지 않을 뿐이다.[4] 현재 국방부에서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의 육성에도 신경쓰는 이유가 유일한 보급로가 바다밖에 없기 때문이다.[5] 폴란드, 핀란드의 경우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붙어 있다.[6] 한민족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만주를 회복하려 할때 발목잡는 것이 바로 중국, 북방민족 그리고 일본의 존재였다. 고려의 요동 정벌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왜구의 침입이었다.[7] 중국: 나당전쟁, 여요전쟁, 병자호란, 6.25 전쟁 등. 일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몽골: 여몽전쟁.[8] 미국은 한반도와 거리가 멀고 러시아는 근원이 유럽(동유럽) 세력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역점을 두고 있다. 2020년대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일으키면서 더더욱 아시아에는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9]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민족국가의 유지와 타 국가로의 흡수 중 어느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상기한 대로 본 문서의 주제가 되는 단군 책임론이라는 담론은 민족국가를 전제하고 있다.[10] 그나마도 황하의 경우에는 상류에서 토양과 미네랄을 끌어다 쓰는 셈이라 황하 상류는 늦어도 당나라 시기에는 토지 염화와 토양 유실로 급속도로 척박해졌고, 이로 인한 황하의 토사 유입으로 인해 황하는 툭하면 수해가 터지고 강의 흐름이 바뀌는 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1] 실제로 위에서 한반도보다 낫다고 언급된 지역들은 대부분 건조기후라서 장강 상류 지류의 수많은 강들이 내부에서 흐르고 관개 시설이 잘 구비된 사천 분지나 드니프르 강 같은 큰 강이 배후 하천이 되어 주고 적당한 강수량을 가진 초르노젬을 제외하면 이런 위협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12] 한반도에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된 벼농사 유물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물론 벼의 원산지가 한반도라는 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체로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퍼졌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긴 하나, 어느 쪽이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를 지어 온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다.[13] 반면 연중 고온다습한 중국 남부동남아시아, 인도 아대륙아열대기후/열대기후 지역들은 일 년 내내 논에 물을 채워서 삼모작, 사모작을 했기에 수많은 해충이나 병원균이 서식할 최적의 장소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말라리아뇌염 등의 곤충, 기생충 혹은 수인성 전염병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중국 왕조들의 기록을 보면 남부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의 수명이 유의미하게 짧은 편이다.[14] 화약을 더 먼저 사용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화포류 무기 발전이 유럽보다 뒤처진 것도 이러한 오랜 평화 때문으로 볼 수 있다.[15] 한때 동유럽의 강자였던 폴란드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국토를 몽땅 털리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데에는 나라가 동유럽 대평원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적의 침입을 막거나 지연시켜 줄만한 천연 장벽이 없기에 방어에 불리했던 점도 작용한다.[16] 다만 한반도는 기후상 하상계수가 커서 수력발전에는 불리하다.[17] 한국에 들어오는 밀과 보리도 상당량이 랴오닝 산이다.[18] 한반도 7700만, 랴오닝 4400만[19] 비슷한 기후로 미국의 미네아폴리스가 있는데, 미국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매우 추운 지역이기는 하다.[20] 경기도는 약 11700 평방km이고, 심양시는 약 13000 평방km다.[21] 그럼에도 장령부를 위시로 한 발해의 서남부 요동 방어선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후에 발해부흥운동의 거점으로 변모한다.[22] 다만 단군이 터를 잡은 고조선을 기준으로 하면 쫓겨난 것이 맞다. 고조선-연 전쟁 이후 요서 지방이 연나라의 세력권으로 재편되고, 요동 지방도 연나라가 온전히 지배했는지는 다툼이 있지만(즉 고조선계 재지세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세력권에서 이탈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23] 4군 6진 개척 시절에는 서늘한 기후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인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밀 등이 전부 없었다.[24] 실제로 조선 성종혼춘 개척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이 이유 때문에 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25] 심지어 무신정권기인 13세기까지도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았다.[26] 삼국이 혈통적, 언어적으로 유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뿌리가 같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를 보듯 혈통/언어적 근연성과 (물론 큰 연관은 있기는 하나) 민족적 통합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도 고국원왕개로왕의 죽음 등의 사건에서 보듯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던 시절이 훨씬 길었다. [27] 석유는 현대에는 1860년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19세기 후반까지 석탄의 대체자원으로 쓰이다가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석유 보일러 선박 개발에 성공하면서 단번에 근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자원으로 급부상하였다.[28] 허나 이웃에 페니키아가 있어서 그런지 부유하진 못했던 듯하다. 당장에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 왕의 왕비는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의 공주였는데 시돈이 워낙 부유해서 아합 왕이 기죽이고 사는 신세였다. 정작 다스리는 땅은 시돈이 비빌 바가 못 될 정도로 넓고 아합 자신도 부침이 많은 북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왕이었는데도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