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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더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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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럼교구의 주교좌성당인 더럼대성당
1. 개요[편집]
성공회 더럼교구(Diocese Of Durham)는 요크관구의 교구로, 요크교구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고, 과거엔 아래와 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권위를 누렸었던 교구이다.
잉글랜드엔 왕이 둘 있다.
하나는 왕관을 쓰고 있는 잉글랜드 왕이고,
다른 하나는 주교관을 쓰고 있는 더럼주교이다.
앤서니 벡 주교(Anthony Bek, 1245 ~ 1311)[3]
교구장인 더럼 주교는 영국 귀족원의 당연직 의원이다.
2. 역사[편집]
635년에 노섬벌랜드 해안에 있는 린디스판 섬에 린디스판교구(Diocese of Lindisfarne)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점차 내륙으로 관할을 옮기며 995년에 더럼 일대, 나아가 노섬벌랜드 전체를 관할하는 교구로 정착되었다. 1075년에 노섬벌랜드의 백작이었던 월터프[4] 가 파직되어 처형되었고, 윌리엄 1세가 당시 교구장이였던 윌리엄 월처 주교[5] 를 주교후에 앉히며, 더럼교구장은 막대한 권력을 가진 자리가 되었다. 더럼주 일대의 자치령을 관할하며, 자치 의회와 자치 종교법정을 만들어 법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치리할 수 있었고, 자신의 군대도 가지고 있었으며, 과세권과 상업권 등 지역의 모든 이권을 움켜쥐고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13~14세기에 들어서는 왕의 신임을 크게 얻어 더럼교구장은 최고의 권위를 과시하였고, 상술한 '두 왕의 비유'도 1300년에 당시 더럼교구장인 앤서니 벡[6] 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다가, 1536년 헨리 8세 시기부터 종교 개혁을 시작하면서 더럼교구장의 권한을 추가했다가 박탈했다가 하는 식으로 점차 축소시켰고, 영국 내전을 겪고 왕이 더럼교구장을 견제할 백작들을 봉하며, 더럼교구장의 정치적 권위는 서서히 붕괴되었다. 1832년 국민대표조례 개정으로 더럼교구장의 주교후 권한 박탈이 확실시되었고, 윌리엄 밴 밀더트 주교[7] 가 1836년에 선종하자마자 교회특별법이 발동, 군통수권과 자치법정 운영권마저 정리되었다. 군통수권 박탈과 함께 자치 기사단도 영국군에 병합되었고, 자치 법정은 세속법정이 되어 더럼 주정부 관할로 넘어갔다가 1971년 영국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공식 해체되어 영국정부 관할로 이전되었다. 1882년에 노섬벌랜드 북부가 뉴캐슬교구로 분할되어 종교적 권위도 약해진 것은 덤이다.
현재는 249개 전도구, 292개 교회를 가지고 있으며, 교구장을 보좌하는 보좌주교 1명과 대리구(더럼, 오클랜드, 선덜랜드)를 관할하는 대부제 3명이 교구를 책임지고 있다.
3. 여담[편집]
- 더럼교구장은 현재 명목상으로 3개의 주교관을 제공받지만, 실질적으론 더럼시 서남쪽의 소도시에 위치한 오클랜드[8] 궁(Auckland Palace)만을 공관으로 쓰고 있다. 다른 하나는 더럼 대학교 관내에 있는 더럼궁이고, 나머지 하나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경계에 있는 노럼궁(Norham Palace)이다.
- 현 캔터베리 대주교인 저스틴 웰비 대주교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기 직전에 교구장으로 있었던 교구이다.
- 잉글랜드 성공회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한국 개신교계에서 2010년대 전후로 큰 인기를 얻은 톰 라이트 주교가 저스틴 웰비 대주교의 바로 전임[9] 더럼교구장이었다.
[1] 성직귀족, 잉글랜드 성공회 내 연공서열 4위[2] 재로우의 주교[3] 이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람은 앤서니 벡이 아니라 그의 가신이었던 윌리엄이었기 때문에, 이 발언이 윌리엄이 한 발언이 아니겠냐는 학계의 연구도 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칭찬을 했을리가[4] Waltheof, ? ~ 1076, 아버지로부터 징검다리 식으로 백작위를 세습받았고, 1075년 동료 백작들과 함께 윌리엄 1세 상대로 반란을 벌였다가 대패하여 백작위를 잃고, 반란수괴 중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다음 해에 본보기로 참수당했다. 사형집행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5] William Walcher, ? ~ 1080. 1071년에 교구장으로 착좌했으며, 학식이 높고 성인군자 같은 성품, 나쁘게 말해 물러터진 성격 때문에 영주로서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부하 관리도 엉망이어서 그의 친척 중 한 명이 그의 참모장을 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그의 실정을 참지 못한 반란군에 의해 부하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당했다.[6] Anthony Bek, 1245 ~ 1311. 당시 영국 사회는 물론이고, 가톨릭 내에서도 신망을 크게 얻은 인물이어서, 영국 왕과 교황의 비호를 받으며 1306년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자리를 얻기도 하였다. 그의 후광에 힘입어, 그의 형과 친척들도 주교품 혹은 작위를 받아냈다.[7] William Van Mildert, 1765 ~ 1836. 웨일스관구 랜더프교구장 주교를 역임하고, 1826년에 더럼교구장으로 착좌했으며, 더럼 대학교의 공동설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8] 20연승한 그 구단이 있는 동네가 아니다...[9] 10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