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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일본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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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성
3.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
4. 사례와 검증
5. 오해
6. 관련 학설
6.1. 일본어족 기원 가설
6.3. 원시 한반도어설
6.4.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
7. 특이사항
8. 링크



1. 개요[편집]


반도 일본어(; Peninsular Japonic)설이란, 과거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의미한다. 일본어족은 현대 일본어 및 방언과 고일본어는 물론 류큐어 까지 포괄하는 어족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알렉산더 보빈이 있다. 그는 대표 논문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ŏ to T’amna)」에서 반도 일본어설을 제시했다. 번역 2020년경부터 한국 인터넷상에서 퍼져서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아직 가설 단계이다.


2. 구성[편집]


파일:Japonic_Vovin_Kor.png
파일:Japonic_Robbeets_Kor.png
"반도 일본어설"이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1][2]
마르티너 로베이츠가 내놓은 대안 가설.[3][4]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야요이인이고,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명을 시작하고 일본 열도에 고일본어(Old Japanese)를 퍼뜨렸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한편 일본 열도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만주에서 남하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밀려, 결국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로 동화·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언어학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유사한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 등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든다.


3.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편집]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百濟傳)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우선 고구려어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는 없다. 양서(梁書)에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고 서술되어 있으며, '신라는 중국인과 말을 할 때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言語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어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다만] 백제의 경우 토착 세력인 피지배층과 고구려 유민 계통의 지배층이 서로 다른 언어를 썼다는 이중언어설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 가설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늘날 들어서는 고구려의 변체한문(變體漢文) 문법 구조가 한국어의 문법적 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나 백제 목간에서 현대 한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수사가 확인됨으로써, 이들이 한국어족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족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도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재구는 모두 삼국사기 지리지나 일본서기, 삼국지 등 중국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비교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을 참고하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고구려-백제어와 한어를 별개로 보는 이중언어설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가 다른 계통이라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백제어, 즉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한다.[5] 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설은 없다.

고구려(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나 동류의식 자체는 언어계통의 논박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6]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해당 언어의 화자인 문화 그룹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아,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세력으로는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만주족 연구자들[7]이 있으며 이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8],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4. 사례와 검증[편집]


파일:미오야마국.png
'미오야마(彌烏邪馬)', '사이기(斯二岐)'와 같은 어휘는 한국어 음운과 비교하여 낯설다.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예를 들면 위 이미지에 있는 나라 이름 미오야마국에서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 山)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미오야마 지명 반도일본어설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9]

다른 예로, 삼국사기 44권에는 '가야에서는 ''을 문(門)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加羅語謂門為梁云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 이른다.


량>양은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고 실제 梁이 표기하는 발음은 '돌(twol)'인데 고일본어에서 문을 의미하는 '토(と; 戶)'와는 음운이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가야어-일본어 간의 관계를 추측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울돌목’, ‘돌쩌귀’ 등 순우리말에 문을 돌로 지칭하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고한국어에서도 원래 돌이나 그 비슷한 발음으로 발음했으나 한자어 ‘문’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야어가 한국어족 언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늦게 대체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10] 즉, 돌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공유했던 어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11]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고대 일본어를 가야에서 사용된 고대한어(韓語)와 구분짓고 한어(韓語)라고 기록하는 등의 에피소드를 보면 당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듯 하다. 예를 들면 가야를 능욕하기 위해 작성된 기사로 보이는 가야의 지배층의 아녀자들이 임나일본부의 왜국측 인사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헤 ‘너의 뿌리를 나의 뿌리에 넣어라’라고 발언한 기사가 있는데 거기서 임나일본부측 왜국 인사는 아녀자들이 하는 고대 가야어를 이해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도일본어설은 엄격한 사료검증을 요한다 .예시

보다 이전에는 규슈대학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郎) 등이 수사의 유사성을 제기한 바 있다. 수사의 유사성은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로서,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가 있는 등. 고구려와 일본어의 수사가 유사하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언어, 문장학 교양서에서 인용되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벡위드 등이 주장한 부여어족 가설도 이러한 어휘 비교를 근거로 했었다.

수사
고구려어
한국 한자음
구결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3


mv

밋츠[みっつ]
5
于次
우차
u-ts
이투
이츠츠[いつつ]
7
難隱
난은
na-n
나나
나나츠[ななつ][12]
10


tv
토워
토ー[とお]

위의 수사 비교는 모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 이력을 근거로 했다. 《삼국사기》의 지명은 대개 한문을 훈과 음 양 쪽으로 읽던 시기의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명의 고유명사에서 실질 형태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계통 연구에서 상당히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며 실제 '물(勿)'이 '수(水)'와 통한다는 것[13]이나 '달(達)'이 '산(山)'과 통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

문제는 이를 근거로 분리된 수사에 대한 신뢰성이다. '물'과 '달' 같은 후보는 수많은 지명에서 사용되어 표본이 확실하나, 수사의 경우 이를 재구할 수 있는 표본이 굉장히 적다.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숫자 '10'이 '덕'인 이유를 두고 삼국사기 지명 '십곡현(十谷縣)'을 다른 말로는 '덕돈홀(德頓忽)'로 불렀는데, '골 곡()'자가 '조아릴 돈()'과 통하므로 '열 십()'이 '큰 덕()'이라고 비정했다. 7의 '난은' 역시 '칠중현(七重縣)'을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일곱 칠()'이 '난은'이라는 주장이며, '오곡군(五谷郡)'은 '우차탄홀(于次呑忽)',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는 기록에서 각각 5, 3이 이츠츠(いつつ)와 밋츠(みっ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량화현(良火縣)' 또는 '량화현(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벡위드나 이기문 등이 고구려-백제 계통에서 분리하는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와 매우 가깝다고 추정한 보빈의 경우에는 이 지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어 지명만으로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후자는 다른 지명 기록에서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이 곧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5'의 경우에도 이를 '우차'로 인정하더라도 고일본어 '이투'와의 대응이 문제이다. 이를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기 어렵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14]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15]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상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파일:osaham.png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16],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오히려 한자의 고대어 음가를 생각하면 고구려 독음과 고일본어 독음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신라어를 반도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온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17]이 필요하다는 문헌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으며 반도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서기1>, <일본서기2>,[18] <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1>, <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리고 중국 역대 사서 동이열전에서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은 중국 방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하고 언어 관련해서도 중국과의 언어적 관련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주로 설명하지 일본어 계통과의 관련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신라 건국설화를 봐도 주류 신라인은 신라 성립기부터 이미 북쪽 고조선에서 내려온 이주민이라고 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신라어 문서에 있는 것처럼 중세 한국어와 연결되는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근거가 된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직접적인 신라어 사료는 중대 이후의 것이 많지만 신라는 삼한시절 사로국부터 후대의 통일신라까지 단절이나 별다른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흐름이 드러나므로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어렵다. 이런 사실과 엮어보면, 한국 언어학계의 추정대로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의 권역이었거나, 반도 일본어설을 그대로 밀고나간다는 가정 하에, 이미 신라 건국 시기쯤에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 사용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19].


5. 오해[편집]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해당 학설이 한일 양국 고대사와 연관될 여지가 있어 일부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고대에 일본어 화자들이 한국어 화자에 밀려났다',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만 따와 곡해하기도 한다.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학설로도 볼 수 있는데, 현대 일본인 즉 야마토 민족의 근원지는 한반도 중남부이며 이후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고대 일본계 종족인 야요이인[20]의 후예가 오늘날 현대 일본인이라는 학설을 더욱 탄탄하게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를 침공, 지배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한반도에 있었다가 일본 열도로 옮겨 간 것이 옳다는 학설이다.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 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킬 수 있으나,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논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기본적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설들의 중론이 지적하는 한국어족 남하 시점은 한반도 국가 쪽이든 일본 열도 국가 쪽이든 부(府)니 뭐니 하는 그런 지배 기구를 논할 시기보다 한참 이전이다. 게다가 보빈은 일본의 역대 덴노들 중의 몇몇 사람들이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왜곡 단골 주제인 진구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인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보빈의 논문을 제대로 읽어봤다면 뒷목 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와 일본어 연구에서 가장 큰 난점으로 꼽은 부분으로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적 요소를 집어넣으려는 것을 지목했다. 한반도 남부가 고 일본어권이라는 주장을 일본의 극우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우기거나, 반대로 한국의 극좌들이 친일주의자의 날조라고 치부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사의 초반부에 한국계 군주들이 통치한 시기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한일 양국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사실 보빈은 억울할만 한 것이 보빈의 가설이 설명한 과정은 언어학적 세계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아주 대단히 특수하다고 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켈트어군도 유럽 대륙에서 발생하고 브리튼제도를 걸쳐 아일랜드로 넘어가서 한동안 주류 어군으로 자리잡았지만 정작 대륙에서의 켈트어군은 일찍이 소멸되었고 도서지역 켈트어군(Insular Celtic)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자세한건 켈트어파 참조. 쉽게 말하자면 일본어족도 켈트어파랑 비슷한 루트(대륙에서 발생 후 영불 해협을 지나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로 전파되고 막상 대륙에서는 기층언어만 남기고 흡수소멸/대륙에서 발생 후 대한 해협을 지나 일본 열도로 전파되고 막상 대륙에서는 기층언어만 남기고 소멸)탔다는 주장이다. 프랑스도 옛날에 대륙 켈트어파에 속한 갈리아어를 썼었고 이제는 흡수소멸된 언어의 흔적이, 아직까지 규명된 바로는 반도 일본어족의 그 고대어가 현대 한국어에 미친 영향보다도 현대 프랑스어에 더 짙게 남아있는데(갈리아어 영향으로 숫자 세는 법이 굉장히 특이해졌다) 이것을 가지고 아일랜드가 프랑스를 정복했다거나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우월하다거나 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자.

비교언어학이란,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언어의 역사와 진화 과정을 밝혀내는 과학의 한 분야인 만큼, 그 이론 자체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옛날에 자기네 언어의 조상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는 사실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다시 그 땅을 회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한다.

학설을 불쾌하게 여기는 부분은 일본 우익들에게서도 관찰되는데, 반도 일본어설을 두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진하는 한국인의 직계 조상들에게 축출당해 일본으로 밀려났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유쾌하지 못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도 일본어설 관련 언어학 유튜브 채널들을 보면, 하플로그룹까지 운운하며 한반도와 엮지 말라고 비분강개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에 해당 내용에서 한국어에 반도 일본어의 잔재만을 강조하여 한국어의 기원에 일본어가 개입했다는 식으로 짜깁기를 하기도 한다.

6. 관련 학설[편집]


반도 일본어설과 유사한 학설 또는 연관성은 있으나 주장하는 바가 다른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있다.


6.1. 일본어족 기원 가설[편집]


상술한 알렉산더 보빈이 추가적으로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일본어족의 조어는 한반도에 넘어온 것보다도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21] 사실 소위 '남방언어'들과 일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지적은 옛날부터 있어서, 크라다이어족은 물론이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등까지 묶은 남방어족(Austric languages)이라는 대어족 가설을 세우는 소수 학자들이 있었다. 다만 보빈은 이걸 부정하면서도 크라다이어족과 일본어족은 서로 별개의 어족이기는 하나 고대에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되었기에 접촉에 의해 어휘나 문법요소가 가까워졌을 수 있다며 중국티베트어족의 확장 이전 선사시대 중국 동~남부쯤에서 일본어족의 조어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다만 본인도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단순 가설임에 주의.

일본어족의 기원이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가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의 일부가 배를 타고 한반도 중남부로 건너와 터전을 잡았다가 다시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집단에 밀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의 상고한어 발음이 일본어 1인칭의 어근과 유사하다. 일본 의 어원이 1인칭 대명사임을 생각하면 오나라의 국명도 같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에 한때 오나라의 공용어로 'proto-Japonic(원시 일본어)'이라고 적혀 있던 적이 한때 있었다. 일본어족의 기원을 논하는 한 논문에서도 종종 오나라와의 관계, 특히 오태백과의 관계를 다룬 사서의 내용을 다룰 뿐 아니라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된 벼농사의 전파를 같이 고려해 일본어족의 원향(urheimat)을 중국 남동부로 보는 때가 많기 때문에 비록 춘추시대 오나라의 언어가 전적으로 고대 일본어는 아니었을지언정 각 지역의 언어 중 하나가 일본어족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면 오나라 일본어족설에서 해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역사에서 오나라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왔음을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 적어도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라도, 한반도 남부에 자신들이 오나라 출신임을 밝히는 게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 거기에 오나라가 당대로서는 첨단 문물이었던 철기로 유명했다면 한반도 남부의 반도 일본어 사용자들이 청동기 및 철기를 쓰던 북방의 한국어족에 밀려났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오나라 유민들이 정말 한반도 중남부의 반도 일본어를 사용했다면, 이들이 오나라의 계승 의식으로 유의미한 정치 집단을 이뤄야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다. 굳이 이 난점들을 뚫고 오나라와 반도 일본어설을 엮자면, 원시 일본어족이 오나라뿐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에 동시대에 같이 살았고, 그래서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유사성이나 접점이 없었다고 보는 것 말고는 없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6.2.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편집]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로는 미국언어학자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가 있는데, 이쪽은 가설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벡위드는 일본어고구려어를 '부여어족'으로 묶고[22] 오늘날의 한국어는 이 계통에서 철저히 떼어놓았다.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어휘 차용 이외에는 친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어휘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보빈이 지적하듯이 그의 분석에는 결함이 많아서,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자의적으로 차용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어기본적인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의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표기할 때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본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적었을 뿐인 것을 몰랐다. 또 한국어 특유의 'n+r→ll'의 자음동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였으며, 일본어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의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언어학자정광 선생에 의해 크리스토퍼 벡위드의 논문이 번역되어 출간된 뒤에 그의 주장은 굉장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이 가설은 일본어알타이 제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의 알타이어족 가설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6.3. 원시 한반도어설[편집]


한편 한국 학자 중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학교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 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는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 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 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 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김방한 교수는 그 기층언어를 니브흐어 등으로 추측했으나, 한국에는 니브흐어 부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으므로 이 설은 검증이 어렵다.


6.4.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편집]


또 다른 가설로 일본어족의 기원이 한반도 기원의 야요이인의 언어가 아니라 조몬어, 즉 원주민들의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 극히 최근 들어 제기된 새로운 가설로, 2017년 무렵 일본언어학자 이가라시 요스케가 주장한 이후, 2020년에 인도인류학자갸네시와르 차우베이네덜란드의 언어학자인 조르주 반 드리엄에 의해 다시금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은 본래 혼슈 서부의 조몬어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야요이인들과 융합하여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즉, 이 가설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과 달리 야요이인의 언어가 일본어족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몬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보빈의 학설과 비교하면 보빈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건너가 조몬어를 밀어냈지만, 이 가설에서는 이주 자체는 같으나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적으로는 야요이인이 조몬인(일본어족)에게 동화되었다고 본다.

한편, 이 가설을 채택하면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언어, 즉 보빈이 반도 일본어로 본 언어는 일본어족한국어족도 아닌 제3의 어족일 가능성이 커진다. 이 경우, 김방한 교수의 '원시 한반도어 가설'과도 많은 부분에서 비슷해진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동안 조몬인의 후계 민족으로 알려졌던 아이누족의 기원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새로 발생한다.[23] 다만 조몬 시대가 매우 오래 이어졌기 때문에 원래 같은 언어였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6.5. 일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편집]


일각에서는 일본어의 기원을 중국 남부 혹은 대만섬으로 보기도 했으며 폴리네시아어, 마인어 같은 언어들과 동계 언어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연구된 적도 있다.


7. 특이사항[편집]


알렉산더 보빈은 1994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0년, 2001년에 여러 연구 결과물을 내며 알타이어족 학설의 지지자였지만, 2001년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서 교환 교수로 재직(2001-2002년, 2008년)한 시기부터 알타이어족 학설의 비판자로 전향하고, 한반도 중남부가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2001년에도 Japanese, Korean and Tungusic. Evidence for genetic relationship from verbal morphology라는 저작물을 내놓으며 한국어, 일본어가 퉁구스어족과 언어형태적으로 유사하다는 저작물을 내놓았다. 하지만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 재직할 때는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왔다.

다만, 그가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온 시기는 알타이어족 가설 자체가 보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공격받던 시기이므로, 꼭 좋지 않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반도 일본어설의 화살표 방향은 반도→일본이라 일본 우익들도 불쾌해하는 입장이며, 이 학자가 가설로 내놓은 전파과정 및 소멸과정 자체도 다른 어파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이 아니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즉 특이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을 주의하자.[24]


8. 링크[편집]


https://gall.dcinside.com/scrap_smile/72397

https://www.fmkorea.com/3446499032

https://www.fmkorea.com/3566816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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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의 경우 남방계 국가 중 가장 일찍 한국어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요악하자면 진국에서 일본어족을 구사했고 이는 변한/가야와 진한으로 이어졌으나, 마한은 일찍이 한국어족을 구사했으며, 이는 백제에서 지속되었다는 주장. 진한의 언어는 일본어족, 신라의 언어는 한국어족으로 본다. 보빈은 백제에서도 일본어와 연관이 있는 어휘가 일부 발견되나, 초기 신라(=진한) 보다는 훨씬 적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마한 지역이 훨씬 먼저 한민족화 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가야어와 탐라어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지만 그나마 전해지는 어휘가 일본어족 계통이라고 봤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 마한진한이나 변한보다 일찍 한민족화 되었다는 주장은 준왕 전승과도 통하며, 고고학적 근거도 있다. 남한 일대에서 세형 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건마국 부근, 즉 금강 유역이었다.# 다만 이것은 서기전 300년경의 일로, 위만의 쿠데타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서기전 300년이라면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하여 중심지가 심양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한다.[3] 보다시피 보빈의 주장과 정반대이다. 그러나 로비츠의 논문은 보빈의 것처럼 기록에 남은 어휘를 연구하지 않고 고고학에만 의존했다는 한계가 있으며, 제주어중세 한국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에서 갈라져나왔다는 등 매우 비주류인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로비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을 동계어로 보며, 홍산 문화에 해당하는 요서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서기전 3500년경 (작물)을 기르는 이들이 남한 및 연해주로 이주하여 각각 한민족, 퉁구스인이 되었다고 하며, 서기전 1500년경 남은 일본어족 농부들이 일부 남하했는데, 이 중 계속 남하하면서 일본으로 넘어간 이들이 있었고, 만주에 남은 이들은 부여계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을 포함한 한국사의 모든 북방계 나라는 일본어족 화자가 세운 것이다.[4] 참고로 그의 주장은 알타이어족 가설의 수정판인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의 일환이다.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더 이상 알타이어족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 만큼, 로비츠의 주장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굳이 2020, 2021년 학설까지 가지 않아도 일찍이 보빈은 로비츠 등의 알타이어족 가설을 줄기차게 간접적으로 저격해 왔다. 로비츠의 주장은 말하자면 알타이어족 지지자의 마지막 발악(...)으로 취급받는 셈이다.[다만] 이 구절은 해석에 따라선 중국-백제-신라를 거친 중역으로도 해석할수 있다.[5] 인도 아대륙이나 발칸 반도의 언어들, 현대 한국어현대 일본어, 그리스어튀르키예어, 스웨덴어핀란드어, 아랍어페르시아어가 이런 사례이다.[6] 만약 고대 로마인들에게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고트족이 로마인들과 동류라고 말한다면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피꺼솟할 것이다. 애초에 고대 로마인도 이탈리아 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로마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7]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주에 있었던 고대 국가들은 죄다 만주족(퉁구스계)의 역사이며, 중국사로 편입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사는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신라로 축소된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조상인 청나라 지배층들은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만 자기들의 기원으로 끌어다 쓰려고 했다.다만 이들도 중화민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부정적이다.[8] 매우 일관적으로 명백하게 퉁구스어족과는 다르다고 하는 데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만주어 및 여진어 사료가 남아있어서 간간히 남은 고구려어 단어들과의 차이점도 이미 상당히 드러나 있다.[9] 말 마(馬) 자는 주조마국 같이 다른 나라 이름에서도 이름 뒤에 붙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접미사로 해석하는 경우다. 미오야마에서 마 자가 빠진다면 미오야가 되는데 구야국, 안야국처럼 삼국지 동이전에서 야(邪) 자로 끝나는 나라 이름은 꽤 많다. 그리고 만약 마 자가 따로 접미사라면 '야마'를 세트로 묶어서 추정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정된다.[10] '울돌목' 이나 '돌쩌귀' 의 '돌'은 '돌다' 즉 '회전'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회전축을 중심으로 문짝이 회전하는 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형태로 열고 닫는 문도 많다.[11] 석봉천자문에는 문의 순우리말을 '오래'라고 기술하였다.[12] 퉁구스어로 7은 'Nadan'이다.[13] 오늘날에도 '물'이라는 고유어가 수(水)를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므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북방 퉁구스어 계통에서도 '물(勿)', '말(末)' 등의 어휘가 곧 '강' 등으로 풀이되는 것이 비슷하며, 하술할 수사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어로 물을 가리키는 '미즈(みず)'의 고형 '밑', '미투'의 어원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14] 이에 대해서는 상대 특수 가나 표기법 항목의 サ행 파찰음설 참조. 대표적으로 千이 せん으로 옮겨진 것을 생각하면 된다.[15] 백제 멸망 이후 만들어졌으나 점령자인 신라의 문법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백제어의 흔적이라 추정했다.[16] 계림유사에서는 도끼를 烏子蓋(오자개)라고 기록하였으나, 鳥(조)의 오자다. 이렇게 하면, 15세기 국어 '돗귀'와 鳥子蓋(teu t͡sɨ kɑi)의 발음이 비슷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烏斯含(오사함)이 아닌, 鳥斯含(조사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중세국어 형태의 '톳기'와 한층 발음이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다름아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鳥를 烏로 잘못쓴 듯 보이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 가령 현 이름들 중에 猪足(저족)은 烏斯迴(오사회), 猪䢘穴(저수혈)은 烏斯押(오사압)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 烏斯에 猪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이 때 烏를 鳥의 오기로 보면 鳥斯(teu sie)가 되므로 돼지의 고어형 '돋', 방언형 '돗'과 비슷하고, 鳥斯含에서의 발음과 일치한다. 그러나 烏斯를 '우사기'에 착안해 '우사'로 읽는 경우 이렇게 일관된 설명이 어렵다. 상대 일본어로 猪에 해당하는 단어는 발음이 전혀 다른 '위(ゐ)'이기 때문이다. [17] 특히 백제에서 딸려보낸 일본어 통역관은 '오사(wos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18] 참고로 신라가 일본에 '인질'을 보냈다는 구절은 일본서기에서 원래 신라든 백제든 간에 외국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인질을 보냈다고 서술하는 게 일본서기의 일관적인(...) 서술 방식이므로 그러려니 하자. 사신이 일본에 갔던 건 일본서기 기록대로 사실이지만 그게 인질은 아니었다는 건 한국, 중국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인질이라는 의미 자체가 한국과 일본의 용법이 달라 일본에서는 단순히 정부측이 사람을 보냈다는 의미로 통한다. 이에 대해선 일본서기 항목 참조.[19] 물론, 가야의 구성국 중에 미오야마국 등의 일본어스러운 국명을 가진 나라들이 여럿 있으므로(선술했듯 이것도 논란이 있다.) 다 동화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알렉산더 보빈의 당초의 추정보다 더 빨리 한국어가 확산되었다는 뜻이 된다.[20] 다만 한반도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으로 정립되고, 일본 열도가 야마토로 점차적으로 통일되기 이전까지는 한반도든 일본 열도든 간에 하나의 단일국가로 통합되지 않았고, 요동과 한반도에서 고조선부여처럼 종주권을 지닌 강한 나라가 있었기는 했으나, 중앙집권화 되기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였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하에서 여러개의 종족들이 공존해있던 상태였고,(부여만 해도 읍루라는 문화와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 존재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기보다는 이합집산이 수백년간 지속되면서 주도권을 잡은 한국계 종족들이 일본계 종족들을 점차 언어적으로 동화시켜 나간 과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같은 시대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조몬인, 한국계, 일본계, 중국계의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일본 열도의 언어가 점차 일본계 언어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족의 뿌리는 다름에도 유전적으로 매우 흡사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21] 물론 중국어와 연관이 있다는 소리는 아닌데, 중국어(파)는 선사시대에 그다지 넓지 않은 지역에서 쓰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고대 중국 동남부에는 크라다이어족 등이 넓게 분포해있다가 중국어가 확장되면서 기층(substrate)언어로써 동화되어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22] 『고구려어 - 일본을 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 참조.[23] 현대 아이누족은 형질인류학적으로 조몬인의 직계 후손이다.[24] 켈트어파가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는 켈트계 언어가 널리 쓰이는 지역이었으나 로마의 확장으로 인해 라틴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현대의 로망스어군으로 이어진다. 로마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으로 켈트어 화자들은 이주했고 다시 대륙으로 건너간 브르타뉴어 화자를 제외하면 켈트어파는 유럽 대륙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섬에서 쓰인다. 라틴어를 한국어, 켈트어를 일본어로 등치시키면 이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