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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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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소련미국맨해튼 계획으로 핵개발을 성공하자 여기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스파이)[1]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고 결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개발에 성공하였다.

소련의 핵개발은 미국과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만들어 6.25 전쟁, 쿠바 핵 위기 같은 공격적 행보를 할 수 있게 하여 냉전을 심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역사[편집]


러시아 제국 시절인 1900년대에 이미 러시아 몇몇 연구기관들은 방사성 동위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후 들어선 소련은 1930년대부터 핵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엔 핵물리학 자체가 미지와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학문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서는 핵물리학 같은 실질적인 활용이 힘든 분야보다는 중공업을 활용할 수 있는 일반물리학이나 기계 등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조국전쟁이 한창인 1942년에 원자력 기술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게 된다.

1942년 4월, 소련 핵물리학자 게오르기 플료로프[2]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독일·미국·영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 등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들을 작성하지 않거나, 작성되었던 핵물리학 논문들이 사라지는 등의 양상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부친다.[3] 이는 독일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역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유력한 암시였고, 이에 스탈린도 뒤쳐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무기대여법으로 물자와 무기를 받고 있는데다 독일과의 끝도 없을 것만 같은 총력전이 현실인지라, 스탈린은 방첩/첩보 조직 NKVD를 시켜 정보를 빼오게 했다. 놀랍게도 소련의 핵개발은 독소전쟁의 전황이 불투명했던 1942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때 소련은 존망의 기로에 선 상태였다.[4]

그래서 NKVD의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야이고리 쿠르차토프[5]를 총수로 하는 핵무기 프로젝트를 가동하게 된다. 맨해튼 계획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마찬가지로 이고리 쿠르차토프도 당시 40대의 비교적 젊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페르세우스[6]클라우스 푹스 같은 간첩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이런 첩보들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핵무기의 제조는 이러한 단편적 정보보다는 거대한 설비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과 자금, 이 프로젝트에서 일할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독소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에게 핵개발의 규모와 어려움은 거의 맨해튼 계획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맨해튼 계획에서도 전체적인 진행상황은 오펜하이머만 알고 있었고, 나머지 과학자들은 그저 자기 맡은 분야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간첩들이 빼오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련은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구하는데는 별 어려움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의 사학자 브라이언 모이나한은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인들은 소련이 정상적인 코스를 밟는다면 빨라야 50년대에 핵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인들이 생각했던) 정상적인 방식으로 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주로 스파이들의 힘으로 핵개발에 성공했다는 시각이 있고, 냉전시기만 해도 소련이 맨해튼 계획을 베껴서 핵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편견으로써 소련의 핵개발은 맨해튼 계획의 첩보가 없었어도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미 스탈린 시절에 핵개발을 위한 광범위한 인력과 인프라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자원이 풍부한 소련에게 있어서 핵개발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냉전 종식 직후에 공개된 소련 정보기관원의 증언에 따르면 포섭된 간첩들이 빼낸 정보보다, 포섭되지 않은 과학자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차원으로 제공한 조언들이 훨씬 많고 내용도 좋았다고 한다.

소련의 오펜하이머라고 할 수 있는 이고리 쿠르차토프는 연구 회의를 할 때, 이렇게 정보원이 얻어온 단편적 정보를 그저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지 알아보라는 식으로 연구 방향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는 스파이 활동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1945년 소련 간첩망은 원자폭탄 초기 설계도 하나를 빼올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쨌든 이런 첩보 활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핵개발과 관련해서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매우 많았다.[7] 이런 정보들은 당시에 정확히 알지 못 하니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여 행한 실험[8]을 통해 나온 결과값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게 미국[9]이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던 소련의 과학자들은 어느 방법을 선택할 것이냐에 대한 결론을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올바른 길을 적은 비용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물론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얘기지만, 소련 과학자들의 핵분열에 대한 바탕 지식이 없었다면 도움이 안 될 자료들이었지만, 어떤 방법으로 가야하는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유능한 소련 과학자들에게는 그 정도의 자료로도 도움이 되었다. 물론 소련이 이렇게까지 미국의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독소전쟁의 화망에 소련의 원자력 프로그램이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1939년부터 사이클로트론이 건설되려 했지만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영향으로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서 건설되던 사이클로트론 역시 모스크바 공방전의 영향으로 중단되었다. 하르코프 물리-기술 연구소도 1940년, 핵폭발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냈지만 1년 만에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혀 연구가 중단되었다. 즉, 소련이 악조건 속에서 연구기간을 단축하려면 이러한 정보 수집도 필요했던 것.

그리고 열심히 첩보에 공들인 결과 DT 반응을 발표 공표 3년 전에 알아내는 쾌거도 이뤄냈다. 그러나 이미 비탈리 긴즈부르크사하로프같은 소련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핵개발에선 이런 첩보뿐만 아니라, 소련 과학자들의 연구도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소련은 1946년 12월 25일, 유럽 최초의 원자로인 F-1을 모스크바에 건설했다. 사용된 우라늄나치 독일우란프로옉트 연구 과정에서 사용되다 압류된 것을 사용했으며 미국으로부터도 일부 수입했다. 그리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에서도 우라늄이 채굴되었고 카자흐 SSR에서 대규모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면서 소련의 핵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소련은 핵개발에 필요한 우라늄을 주로 굴라그 죄수를 동원해 얻어냈는데, 당시 어떤 보호 장구도 없이 죄수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10년간 광산 사망자가 38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서 광부에 대한 위험 요소로써 단순히 방사선량 노출만 감안하는 것은 순전한 무지의 산물이다. 가공하지 않은 천연 우라늄 광석은 방사선 수치가 매우 낮으므로 딱히 방사능 오염을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그보다는 광산의 작업 환경 자체가 더 위험했던 것. 미국에서도 이 천연 우라늄 광석의 채굴은 일반 민간 광부들이 맡았다. 다만 굴라그 죄수가 아니라 핵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안전 조치 미비 때문에 방사능 오염으로 상당히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사실 방사능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자각이란 게 1950년대 이후로나 생겨난 것이다.

1948년에는 첼랴빈스크마야크 재처리 공장이 건설되어 소련은 본격적으로 군사용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거머쥐었다. 핵개발을 감독하던 라브렌티 베리야팻 맨과 유사한 내파형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e_one.jpg
여하튼 그렇게 해서 카자흐 SSR세미팔라틴스크의 실험장에서 1949년 8월 29일날 22kt급의 RDS-1을 터트리고 유럽 최초의 핵보유국으로 등극했다.[11]

그리고 소련은 그 뒤로도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여 1953년 8월 12일, 수소폭탄을 개발/시험했다고 발표했으나 사실은 이것 역시 냉전 시절의 프로파간다로써 기껏해야 강화된 핵융합 폭탄에 불과했다. 결국 사하로프가 독자적인 텔러-울람 설계를 만들어내어 1955년 비로소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서방측에 자랑하고 싶어하여 1961년 차르 봄바란 괴물을 만듦으로 핵 역량에 대해서 확고한 우위를 주장하려 했다.

소련은 이런 핵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도시들을 모두 비밀도시로 지정했으며, 보통 아톰그라드로 불렀다. 현재도 이 도시들에 위치한 핵 시설들이 가동되고 있다. 이 도시들의 문장은 모두 원자력과 관련이 되어있다.

소련 측은 핵개발에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미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48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아직 핵무기가 없었고, 그래서 미국이 독한 마음을 품고 핵무기를 내세워 압박을 가해오면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는 것. 그러나 미국도 아직 핵무기를 막 개발하기 시작했던 1942년에 이미 소련의 핵무기 개발이 개시되었으므로 이것은 사후에 내놓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애초에 미국에서 핵무기 개발을 총괄 지휘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설립조차 1943년에 있었던 일이다.

러시아의 아톰그라드
당시 이름
현이름
설립목적
아르자마스-16
사로프
핵무기 설계, 연구, 조립
스베르들롭스크-44
노보우랄스크
우라늄 농축
첼랴빈스크-40[12]
오조르스크
플루토늄 생산, 장비 제작
톰스크-7
세베르스크
우라늄 농축, 장비 생산
크라스노야르스크-16
젤레즈노고르스크
플루토늄 생산
즐라토우스트-36
트료흐고르니
핵무기 조립
펜자-19
자레치니
핵무기 조립
크라스노야르스크-45
젤레즈노고르스크
우라늄 농축
첼랴빈스크-70
스네진스크
핵무기 설계, 연구


3. 관련 문서[편집]



[1] 1900년대 초중반은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을 때라 명문대 같은 곳을 나온 엘리트마저 소련에 동화되어 스파이짓을 할 정도였다.[2] Георгий Флёров(Georgy Flyorov, 1913–1990). 두브나 시의 합동원자핵연구소 창설자. 플레로븀의 어원이 되었다.[3] 리처드 로즈의 '수소폭탄 만들기'라는 책을 참조하면, 플료로프는 자신의 핵분열과 관련한 연구실적이 국가적인 상과 딸려오는 부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논문이 서방학자들에게 얼마나 인용되고 있는지를 찾아서 평가위원회에 제출하려고 도서관을 뒤졌다. 그런데 인용한 자료도 많지 않고, 인용을 한 자료도 해당 논문의 상당 부분을 누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핵분열과 관련한 연구 결과 자체가 어느 시점부터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플료료프는 여기에서 핵분열과 관련된 자료들이 극비로 취급되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4] 독소전쟁의 역전의 계기가 된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8월에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3년 2월에 끝났다.[5] Игорь Курчатов(Igor Kurchatov, 1903–1960).[6] 실체가 불분명한 스파이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에서는 실존했다고 가정하고 페르세우스 캐릭터를 출연시켰다.[7] 이를테면 우라늄 235를 농축할 거냐 원자로를 가동해서 플루토늄을 생산해 분리할 것이냐, 우라늄 235의 농축은 기체확산법을 이용할 것이냐 원심분리기를 이용할 것이냐, 원자로를 가동한다면 중수를 감속재로 할 것이냐, 흑연을 감속재로 할 것이냐, 각 핵분열 관련 물질과 감속재들의 소립자 단위의 단면은 어느 정도이냐 등, 당시엔 양자물리학은 진정 미지의 구역이었다.[8] 우라늄의 채취와 농축, 중수(重水)의 확보 등.[9] 심지어 맨해튼 계획 당시 미국조차도 동남아시아, 태평양, 유럽 등지에서 복수의 전쟁을 수행하는라 물자 부족에 시달릴 정도였다. 때문에, 맨해튼 계획 연구진들도 꽤 심한 장비, 자원 통제를 받았었다.[10] 참고로 미국의 우라늄 농축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사망률은 원자로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사망률보다 다소 높았으나 그 차이의 원인은 (주로 방사성 물질의 오염이 원인인) 암과 무관했다고 한다. 정부기관인 NIH 논문[11] 핵개발 중 사고로 죽은 인원들을 "이 쓰레기들을 치우고 연구를 계속해라!"고 닦달하던 냉혹한 베리야가, 핵개발이 성공하자 어린 아이 처럼 기뻐하며 쿠르차토프를 꼭 껴안았다고 한다.[12] 후에 첼랴빈스크-65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