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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폴레토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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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폴레토 공국
Ducatus Spolitanorum
Ducato di Spoleto

파일:스폴레토 공국.jpg
570년 ~ 1276년
위치
이탈리아 중부
수도
스폴레토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파로알트 1세(570 ~ 592)
힐데프란트(774 ~ 789)
람베르토 2세(894 ~ 898)
알베리크(897 ~ 922)
우고 1세(989 ~ 996)
보니파초 3세(1043 ~ 1052)
토스카나의 마틸다(1057 ~ 1082/1086 ~ 1093)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1183 ~ 1190/1195 ~ 1198)
언어
이탈리아어, 랑고바르드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종족
랑고바르드인, 라틴인, 프랑스인, 독일인
종교
아리우스파가톨릭
주요사건
570년 건국
774년 카롤루스 1세에게 복종
949년 베렝가리오 2세의 스폴레토 공략
963년 베렝가리오 2세를 제압한 오토 1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됨
1198년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 구엘프파에 의해 스폴레토 상실
1201년 오토 4세, 스폴레토가 교황령에 귀속되는 것을 공식 인정.
성립 이전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해체 이후
교황령

1. 개요
2. 역사
2.4. 카노사 가문 치하
2.6. 이후
3. 역대 공작
3.3.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치하
3.4. 카노사 가문 치하
3.5.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인
3.6. 교황 대 신성 로마 제국



1. 개요[편집]


570년에서 1198년까지 스폴레토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지배한 랑고바르드계 공국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봉신국이었다가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 정복되었을 때 카롤루스 대제에게 복종한 후 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가 이탈리아 베렝가리오 2세가 오토 1세에 의해 제압된 뒤 신성 로마 제국에 귀속되었고, 1043년부터 토스카나 후작령을 장악한 카노사 가문에 귀속되었다.

1092년에 토스카나의 마틸다하인리히 4세와 대적하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베르너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카노사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인들이 통치하다가, 1198년에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가 축출된 뒤 친 교황 세력인 구엘프파가 스폴레토를 차지했고, 1201년에 오토 4세가 스폴레토가 교황령에 귀속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면서 교황령에 귀속되었다. 이후 우르슬링겐 가문이 1276년까지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했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2. 역사[편집]



2.1. 랑고바르드 왕국의 봉신[편집]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파도바를 수도로 삼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알보인 휘하 귀족들은 여세를 몰아 여러 독립 공국들을 세웠는데, 그 중엔 파로알트 1세라는 인물도 있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본래 라벤나 총독부가 관할하는 로마군에 복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577년 또는 579년에 로마 황제를 배신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귀순해 스폴레토 초대 공작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동로마 장군 바두아리우스가 576년 이탈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랑고바르드군과 맞붙었다가 참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뒤 파로알트가 랑고바르드 왕국에 귀순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579년경 라벤나 시의 항구인 클라세(Classe)를 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584년에서 588년 사이에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수에비 또는 알레만니 출신인 동로마 장성 드록툴프(Droctulf)가 클라세를 탈환했다. 이후 드룩툴프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우타리와 전쟁을 벌였을 때, 파로알트는 아우타리와 함께 드룩툴프를 대적해 라벤나로 후퇴하도록 강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91년 또는 592년 파로알트 1세가 사망한 뒤 '''아리울프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591년 여름, 아리울프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라벤나 총독 로마누스는 섣불리 로마를 구원하러 갔다간 랑고바르드군이 라벤나를 급습할 거라 여기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레고리오 1세는 아리울프와 협상해 공물을 바침으로써 그가 철수하게 했다. 이때 랑고바르드군에 전염병이 돌자 그레고리오 1세가 우유를 주식으로 삼으라고 권했고, 이에 따르자 전염병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의 조반니 대주교에게 "총독이 랑고바르드족에게 공물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아리울프는 제국과 평화를 맺거나 제국에 충성할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볼 때, 그레고리오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로마 제국의 편에 붙는 선택지를 고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이때 아리울프도 아길루프 왕의 원정에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98년, 오시모를 정복하고 나폴리를 포위 공격하는 베네벤토 공국아레치스 1세를 지원했다. 나폴리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환길에 올랐다가 카메리노 인근에서 '황실 공작(dux imperiale)' 바한의 급습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 파울 부제에 따르면, 스폴레토의 순교자인 성 사비누스가 카메라노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아리울프를 도와줬고, 그는 이에 감화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601년 아리울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파로알트 1세의 아들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가 테오델라피우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올랐다.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랑고바르드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650년 또는 653년 테오델라피우스의 뒤를 이어 공작에 오른 아토 역시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663년 랑고바르드 국왕 그리말트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온 콘스탄스 2세 황제의 동로마군을 격파했을 때 큰 공을 세운 트라사문트 1세는 그리말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하고 그리말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과 결혼했다. 파울 부제는 트라사문트 1세가 40년간 통치했다고 기술했지만 별다른 행적을 전하지 않는다.

703년 트라사문트 1세 사후 공작에 선임된 파로알트 2세는 폐허가 된 파르파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제공했으며, 파르파 수도원의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토마소를 선임했고, 교황청이 이 수도원을 관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교황청과 사이가 나빠져서 사바나의 교회 영지 일부를 강점했다. 712년 라벤나 총독부의 중심지인 라벤나 시의 클라세 항구를 공략했다. 그러나 당시 랑고바르드 국왕 리우프란트동로마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했기에 그에게 항구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717년 리우프란트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을 때, 그는 이에 가담하여 나르니 시를 점령했다.

720년, 파로알트 2세의 아들 트라사문트 2세가 아버지가 리우프란트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며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켜 축출한 후 공작에 선임되었다. 737년 또는 738년 갈레세를 공략해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와의 연락망을 단절한 뒤,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협상해 갈레세를 돌려주고 평화 협약을 맺는 대가로 막대한 공물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리우프란트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평화 협약을 맺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739년 6월 스폴레토를 무력으로 공략한 뒤 힐데리크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트라사문트 2세가 로마로 망명하자, 리우프란트는 그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며 교황청으로부터 아메리아, 오르테, 보마르초, 비에르다를 공략했다. 그레고리오 3세는 트라사문트 2세를 넘겨주길 거부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740년 12월, 트라사문트 2세는 교황과 베네벤토 공작 고데스칼의 지원에 힘입어 스폴레토 공국을 되찾고 힐데리크를 참수했다. 그러나 리우프란트가 빼앗았던 교청의 도시들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청과의 동맹이 깨졌다. 742년 리우프란트가 재차 공세를 개시해 트라사문트를 체포하고 수도원에 감금한 뒤 자신의 조카 아지프란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세웠다. 이후 교황청과 화해하기 위해 앞서 빼앗았던 도시들을 돌려줬으며, 그를 도와줬던 베네벤토 공작 고데스칼을 축출하고 기술프 2세를 새 베네벤토 공작으로 세웠다.

744년 리우프란트가 사망한 뒤, 트라사문트 2세는 지지자들 덕분에 수도원에서 빠져나온 뒤 아지프란트를 축출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했지만 1년 만인 745년에 사망했다. 이후 스폴레토 귀족들은 차기 공작 선출을 놓고 논의한 끝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 루푸스를 새 공작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747년 6월 루푸스가 아내 에르멜린트와 함께 파르파 수도원과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이 두 수도원 문서에서 확인된다.

751년경 라치스를 몰아내고 랑고바르드 왕국 새 국왕이 된 아이스툴프는 라치스의 지지자였던 루푸스를 폐위시키고 스폴레토 공국을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756년 아이스툴프가 사망한 뒤 아이스툴프에 의해 축출되었던 전임 국왕 라치스가 복위를 꾀했다가 757년 토스카나 공작 데시데리우스의 공세에 패해 수도원에 억류되었고, 데시데리우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다. 스폴레토 귀족 알보인은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해 스폴레토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758년 데시데리우스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사로잡힌 뒤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후 스폴레토 공국은 다시 한 번 랑고바르드 왕국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759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측근인 기술프를 새 공작으로 세우면서 부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761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기술프를 경질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2년간 직할 통치하다가 763년 또다른 측근인 테오디키우스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768년, 크리스토퍼와 세르지오 추기경이 로마에서 스폴레토로 망명한 뒤 대립 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폐위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디키우스는 이들을 파비아 궁정에 보냈고, 데시데리우스는 이들을 도와줌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그 해 7월 29일, 스폴레토 공국의 두 도시 리에티와 푸르토나의 분견대가 포함된 랑고바르드 군대가 로마에 입성한 뒤 대립 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폐위시켰다.

772년 새 교황에 선출된 하드리아노 1세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데시데리우스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스폴레토 공작 테오디키우스와 이브레아 공작 툰노, 왕실군 사령관 프란둘라로 구성된 사절단을 교황청에 보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1세는 "피핀 왕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테오디키우스는 이후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774년 파비아로 쳐들어온 프랑크 왕국군으로부터 데시데리우스를 지키기 위해 항전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공작에 선임된 힐데프란트는 즉시 카롤루스 대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교황청에도 복종할 의사를 밝혔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크 왕국교황령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775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힐데프란트가 프리울리 공작 흐로드가우트, 베네벤토 공작 아레치스 2세와 연합해 프랑크 왕국에 반역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즉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흐로드가우트를 제압하고 프랑크 백작을 세웠다. 하지만힐데프란트가 프랑크 왕국에 반역을 꾀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에, 힐데프란트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힐데프란트는 교황청의 강력한 적대자가 되었다.

779년 비르시니쿰(Virciniacum)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면서, 프랑크 국왕이 교황과 대립할 때 그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788년 시칠리아의 파트리키우스인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를 앞세워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그리말트 3세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과 함께 이들을 협공해 대파했다. 이듬해인 789년에 사망하면서 랑고바르드족이 스폴레토 공국을 다스리던 역사는 막을 내렸고, 프랑크 귀족 위니게스가 카롤루스 대제의 선택을 받고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면서 프랑크족이 스폴레토 공국을 이끌었다.


2.2. 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왕국의 봉신[편집]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위니게스는 799년 4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에서 성 로렌스 성전으로 가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성 에라스무스 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가서 교황을 카롤루스 대제가 있는 파데보른까지 호송하면서 신변을 보호했다. 802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루체리아에서 베네벤토 대공 그리말트 3세와 맞붙었다가 생포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815년 로마에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탈리아 국왕 베르나르도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군해 진압했다. 822년 고령으로 집무를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지자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위니게스 사후 브레시아 시의 백작이었던 수포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그는 브레시아를 아들 마우링에게 넘겨주고 스폴레토에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2년 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스폴레토 공국에서 궁전백을 역임하던 아델라트가 새 공작에 취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5개월 만에 사망했고, 수포 1세의 아들 마우링이 새 공작에 취임했다. 아인하르트(Eginhard)[1]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며칠 만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수포 1세의 또다른 아들 아델치스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아델치스는 10년간 공국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나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프랑크 국왕 루도비쿠스 1세에 의해 알 수 없는 이유로 낭트 백작 랑베르 1세로 교체되었다. 랑베르 1세는 부임한 지 2년 만인 836년 토스카나 일대를 강타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베렝게르가 새 공작에 선임되었다. 베렝게르에 대한 행적은 837년 7월에 파르파 수도원에 상당량의 기부금을 바친 사실만 알려졌으며, 843년 랑베르 1세와 롬바르디아 국왕 피핀 카를로만[2]의 딸 아델라에데의 아들인 귀도 1세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것을 볼 때 그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43년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귀도 1세는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지코의 딸 이타와 결혼함으로써 베네벤토 공국과의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 베네벤토 공국의 내전에 개입해 살레르노 공국지코눌프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지코눌프에 대적하는 라델치스 1세에게도 일부 병력을 비밀리에 보내주고 상당한 뇌물을 받아냈다. 846년 사라센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라치오에서 활개치자 토벌에 나서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사라센들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의 보물을 전부 챙기고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858년 카푸아 백국의 란도 1세와 살레르노 공국의 아데마르 대공이 맞붙었을 때 아데마르를 지원하면서 소라와 아르피노의 리리 강 계곡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860년 귀도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람베르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마르시 백작 제라르, 텔레세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 말레포토, 보이아노의 가스탈트 완델베르토와 함께 바리 토후국의 에미르 사우단이 카푸아와 테라 데 라보로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니 뒤이은 혈투 끝에 사라센이 길을 뚫는 데 성공하면서, 사우단이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860년 4월 카메리노 백작 힐데베르트와 함께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르시에서 루도비코 2세의 군대에게 패배한 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에게 망명했다. 루도비코 2세는 한동안 베네벤토를 포위했다가 람베르토 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재차 맹세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스폴레토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866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를 체포한 루도비코 2세는 자신을 도운 람베르토에게 카푸아 백국을 가지도록 허락했다.

867년 11월 13일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선출된 후 12월 13일 교황의 대관식이 열렸을 때, 람베르토 1세는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는 교황령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루도비코 2세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약탈했다. 람베르토는 즉시 파문당했지만, 정작 루도비코 2세는 하드리아노 2세와 화해하고 그를 복권시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람베르토 1세는 871년 루도비코 2세가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고 있을 때 살레르노 공국의 구아페르,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 때 루도비코 2세가 베네벤토에 억류되면서 반란이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델치스가 사라센의 침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루도비코 2세를 풀어주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북이탈리아에 돌아온 루도비코 2세는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대공위에서 해임하고 아델치스의 아들 수포 2세를 새 공작으로 선임했다. 람베르토 1세는 베네벤토로 망명했고, 루도비코 2세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그를 잡으러 시도할 수 없었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한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876년 수포 1세를 사임시키고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시켰다. 샤를 2세는 이에 더해 람베르토 1세의 형제 귀도 3세를 교황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샤를 2세는 그해 7월 16일 폰티온에서 스폴레토 공국의 상당 부분을 교황에게 기부하기로 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교황과 가급적 잘 지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했다. 람베르토 1세는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보다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로마로 진군해 878년 3월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토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람베르토 1세는 로마 공략에 실패한 뒤 목표를 카푸아로 돌리고 880년 카푸아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귀도 2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귀도 2세는 교황령을 공략하여 영토를 남서쪽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교황 요한 8세는 협상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령으로 쳐들어가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요한 8세는 카를 3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삼아줄 테니 교황령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질과 뇌졸중으로 시달리고 바이킹의 침략에 직면했던 카를 3세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882년 2월 카를 3세가 라벤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귀도 2세와 삼촌인 카메라노 변경백 귀도 3세는 빼앗아간 교황령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요한 8세는 '두 귀도'가 약속을 지킬 기미가 없다며 카를 3세에게 응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렇듯 카를 3세가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으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듯했지만, 귀도 2세는 883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귀도 4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삼촌 귀도 3세가 스폴레토 공작을 맡았다. 885년 1월 7일, 아르눌프가 이끄는 바이에른군과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가 스폴레토 공국 북쪽 경계에 이르자, 귀도 3세는 파비아로 달려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에게 그동안 자신이 교황령과 카를 3세에게 대적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해 사면을 받아냈다. 이후 새 교황 스테파노 5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사라센과 동맹을 맺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가 베네벤토를 공략하고 아이울프 2세를 포로로 잡았지만, 얼마 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스폴레토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이에 아이울프 2세가 감옥에서 탈출해 베네벤토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887년 11월 아르눌프가 카를 3세를 퇴위시키고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자, 랭스의 대주교이자 친척인 폴크가 카롤루스 왕조와 혈연 관계가 있었던 귀도 3세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에 추대했다. 귀도 3세는 즉시 호응해 프랑스로 향했지만, 888년 1월 파리 백작 외드가 바이킹족을 물리쳐 왕국을 구해낸 공로로 서프랑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외드와의 정쟁에서 밀려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889년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한 베렝가리오 1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그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은 귀도 3세의 조카이자 귀도 2세의 아들인 귀도 4세에게 돌아갔다.

귀도 4세는 스폴레토 공작이 된 뒤 귀도 3세의 통제를 받다가 894년 12월 귀도 3세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에게 패배한 뒤 후퇴하던 중 타로 강 근처에서 급사하면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895년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롬바르디아 테마를 건설한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레온 6세의 부름을 받고 발칸 반도로 돌아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시메온 대제와 맞섰다. 그는 이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한 동로마군이 약해진 틈을 노려 공세를 개시해 베네벤토에서 동로마군을 축출한 뒤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했다.

이후 여동생 이타의 남편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 섭정을 맡겼지만, 과이마르 1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트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해 포로로 삼았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7년 귀도 3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가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3세의 시종이었던 알베리크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알베리크는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에 선임되었고, 베네벤토 대공에는 지난날 스폴레토 공국에 망명했던 라델치스 2세가 귀도 3세의 아내이자 그의 누이인 아게투르데의 지원에 힘입어 복위했다.

알베리크는 귀도 4세를 살해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뒤 899년 또는 900년에 베렝가리오 1세의 대 마자르 전쟁에 참여한 공으로 베렝가리오 1세로부터 스폴레토와 카메라노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904년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와 함께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폐위시키고 세르지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909년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로치아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로치아가 세르지오 3세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태어난 사생아로 알려진 요한 11세는 사실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명백한 근거는 없다. 또한 훗날 로마의 통치자가 된 알베리크[3]와 네피 주교 세르지오,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아버지인 다비드 또는 테오다투스가 그의 자식으로 전해진다.

917년. 알베리크는 테오필락트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인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을 숙청하다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922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즈음에 스폴레토에서 보니파초 1세라는 인물이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볼 때 스폴레토에서도 권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니파초 1세의 통치에 관련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924년 교황 요한 10세의 형제인 피에트로가 마로치아의 권세에 위협을 느끼고 형을 설득해 스폴레토 공작에 부임했을 즈음에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에트로는 스폴레토 공작 부임 후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926년 로마로 귀환해 귀도와 마로치아를 일시적으로 제압하고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928년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귀도가 이리 나올 줄 예상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붙잡힌 뒤 형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절단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이후 보니파초 1세의 아들인 테오발트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929년 베네벤토 공국란둘프 1세, 살레르노 공국과이마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령인 루카니아와 칼라브리아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황제에게 봉사하는 내시로 삼겠다"며 전원 거세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과이마르 2세는 동로마 제국의 반격이 거세지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936년 테오발트 1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 위그는 이브레아 변경백이었던 안스카리오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했다. 939년 위그가 라벤나를 직할지로 삼고 중앙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추진하자, 안스카리오는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알베리크와 동맹을 맺고 위그에 대항하려 했다. 이에 위그는 그가 자신의 정책에 방해된다고 여기고, 940년 봄 스폴레토 귀족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에 맞서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사를리오에게 호응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를리오는 안스카리오의 뒤를 이어 스폴레토 공작이 되었지만, 943년 위그가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살해한 죄를 물어 수도원으로 은퇴하도록 강요하고 토스카나 변경백을 맡고 있던 사생아 우베르토가 스폴레토 공작을 겸하게 했다. 946년 이브레아 변경백 베렝가리오 2세가 위그를 몰아내고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우베르토는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에 못 이겨 스폴레토를 보니파초 2세에게 넘겼다. 보니파초 2세는 아들 테오발트 2세와 함께 스폴레토를 다스리다가 953년에 사망했다. 이후 테오발트 2세가 단독 공작이 되었지만, 959년 베렝가리오 2세가 오토 1세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숙청할 때 그 역시 오토파로 지목되어 축출되었다. 파르파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테오발트 2세가 물러난 후 '트라사문트(트라사문트 3세)'라는 인물이 공작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할 다른 문서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다.


2.3. 신성 로마 제국 치하[편집]


961년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하게 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967년 동로마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1세에게 스폴레토 공국을 겸임하게 하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판둘프 1세는 이에 따라 동생 란둘프 3세와 함께 병력을 소집한 뒤 968년 오토 1세의 남부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해 바리 포위전에 가담했지만, 969년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군의 역습으로 참패하고 생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끌려갔다. 이후 요안니스 1세니키포로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뒤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자신의 조카딸 테오파노를 결혼시키는 과정에서 석방되었다.

973년,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978년 기술프 1세가 사망한 뒤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인 베네벤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스폴레토 공국, 카메리노 공국, 카푸아 백국 전역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트리사문트 4세의 공작으로서의 업적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으며, 986년 사망한 뒤 토스카나 변경백 우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했다.

우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오토 2세 부자의 이탈리아 방면에서의 핵심 조언자로서 로마를 통제하길 원하는 두 황제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던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오토 3세가 3살의 나이에 로마왕이 되면서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우고는 이 때를 틈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993년 카푸아 대공이며 오토 3세의 가신을 자처했던 란테눌프 2세가 반란으로 인해 살해되자 군대를 이끌고 카푸아로 남하해 반란을 진압하고 판둘프 1세의 막내아들 라이둘프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또한 993년에 케른텐 공작이며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의 외손자인 오토의 딸 유디트와 결혼했다.

996년, 성년의 나이가 된 오토 3세는 우고의 위세가 너무 강하다고 여기고 스폴레토 공작의 직위를 이브레아의 콘라트에게 넘기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이 직위를 오래 맡지 못하고 997년에 사망했고, 카푸아 성직자 바사오의 아들 아데마르가 뒤이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99년, 오토 3세는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란데눌프 2세를 살해한 것에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이둘프를 공격해 생포하여 독일로 압송한 뒤 아데마르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그러나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판둘프 2세가 이에 불복해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에 반감을 품은 카푸아인들을 부추겨서 그해 7월 정변을 일으켜 카푸아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하게 한 뒤 동생 란둘프 7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이후 아키노의 가스탈트로 부임한 것을 끝으로, 아데마르의 기록은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1014년 토스카나 변경백 라니에리가 스폴레토 공작이 전통적으로 관할하는 사비리아에 자리잡은 파르파 수도원장 선임 문제에 개입하여 법령을 반포한 사실이 파르파 수도원 문서에서 확인된 것을 볼 때, 그가 1010년대에 이미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선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27년 초, 라니에리는 루카에 군대를 집결시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임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콘라트 2세에 대적하려 했다. 그러나 콘라트가 무사히 로마에 도착하여 황제로 선출된 것을 볼 때,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니파초 4세가 콘라트 2세의 황제 즉위를 지원한 뒤 곧바로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된 것을 볼 때, 라니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3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우고 2세를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후작에 선임했다. 1038년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고자 남하했다. 그는 카푸아를 공략하고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를 내쫓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에게 카푸아를 넘겼다. 우고 역시 이 원정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미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1043년 보니파초 4세가 콘라트 2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을 겸임하면서 물러났다.


2.4. 카노사 가문 치하[편집]


1043년. 카노사 가문의 가주 보니파초 4세는 토스카나 변경백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을 인정받아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받았다. 여기에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 후 만토바에 주로 거주하면서 자신이 관할하는 광할한 영토를 통치했다. 1046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한 뒤 로마왕에 오른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아그네스와 함께 피아첸차에 도착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그와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가 신하로서 과도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하인리히 3세의 이러한 우려는 보니파초가 교황 선임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1047년 8월 교황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한 후, 지난날 2번이나 교황에 선임되었다가 폐위되었던 베네딕토 9세가 보니파초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그 해 11월에 교황에 복위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하인리히 3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 교황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릭센의 주교 포포를 새 교황 다마소 2세로 선임했다.

보니파초는 로마로 향하는 다마소 2세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베네딕토 9세가 이미 교황에 올랐다며 그를 로마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마소 2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에게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송하고 베네딕토 9세를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보니파초는 이번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위하여 베네딕토 9세를 축출한 뒤 7월 17일에 다마소 2세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다마소 2세는 즉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9일에 로마시 외곽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 당대에는 보니파초가 교황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보니파초는 1052년 5월 6일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12살된 아들 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보니파초 4세를 위시한 카노사 가문의 강력한 권세를 질시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 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카노사 가문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이들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친히 피렌체로 진격해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하고 독일로 끌고 갔다. 페데리코는 독일로 끌려가던 중인 그 해 7월 병사했다. 그 후 로렌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드프리트 3세를 진압할 준비에 착수하던 하인리히 3세는 1056년 10월 5일 보드펠트에서 급사했고, 뒤이어 황위에 오른 6살된 하인리히 4세의 섭정을 맡은 아그네스 황후는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의 귀국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피렌체에 복귀한 마틸다는 토스카나 여변경백이자 스폴레토 여공작에 등극했고,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았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은 마틸다의 통치를 받다가 108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옹호하는 마틸다와 전쟁을 벌이자 1082년 스폴레토 귀족 라니에리 2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스폴레토 공작으로서 독립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물러난 후인 1086년 마틸다의 추종자들에게 패배하면서 축출되었고, 마틸다는 스폴레토 공국의 통제력을 확보했다.

1090년,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후 11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1091년 4월 만토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1091년 여름에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한 포 강 북쪽의 대다수 영역을 장악했으며, 1092년에 모데나와 레지오 등지를 공략했다. 마틸다가 이에 대적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틈을 타, 아드리아해 연안 지대에서 변경백을 자칭하던 베르너 2세가 1092년 하인리히 4세 지지를 천명하며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하인리히 4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1105년, 그는 안코나, 페르모, 카메리노 일대를 장악한 뒤 안코나 후작을 자칭했다. 그 해 11월 대립교황 실베스테르 4세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했고, 교황 파스칼 2세는 그를 피해 티베르 섬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파스칼 2세를 옹호하며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실베스테르 4세와 함께 오시모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안코나로 귀환했고 1119년 사망했다.


2.5. 토스카나 후작령 치하[편집]


베르너 2세 사후 기록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스폴레토 공국은 11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가 이스트리아 변경백 엥겔베르트 3세를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3세는 2년만인 1137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에게 직위를 넘기고 물러났다. 앞서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을 점유했던 하인리히 오만공은 이제 이탈리아 중부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인 프라이징(Freising) 수도자 오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서 바다로, 덴마크에서 시칠리아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급사한 뒤,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그가 오만하고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로타르 3세에게서 받은 황제복을 줄 테니 내가 작센 공국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신하가 두 개의 공국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며 거부하자, 그는 이에 분개해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1138년 8월 하인리히를 반역 혐의로 기소하고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를 바이에른 공작에 선임하고 전임 작센 공작 마그누스의 딸인 에일리카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를 작센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알브레히트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바이에른을 빼앗아간 레오폴트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1139년 10월 20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울리히 폰 아템스가 콘라트 3세에 의해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사라진 후 무주공산이 된 토스카나 일대에 대한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1140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루지에로 2세의 지시를 받은 카푸아 공작 알폰소가 스폴레토 공국의 일부 지역인 아브루초 북부 일대를 공략하고 트론토강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후에도 토스카나 일대의 도시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했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그의 역량으로는 토스카나를 장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벨프 가문벨프 6세에게 직위를 넘기도록 했다. 벨프 6세는 1160년 스폴레토 공국을 아들 벨프 7세에게 물려줬다가, 아들이 1167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자 스폴레토 공작을 재차 겸임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에 토스카나 후작 및 스폴레토 공작 직위는 그대로 맡다가 1173년 정식으로 물러났다. 이후 1177년 우르슬링겐 출신이며 토스카나 후작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의 행정 관료를 맡고 있던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가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했다.

1190년 구엘프파가 스폴레토에서 봉기하여 콘라트 1세를 몰아내고 판둘프 2세를 새 공작으로 세웠다. 1195년 하인리히 5세가 스폴레토를 탈환하면서 콘라트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했지만,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4세가 시칠리아 반란 진압을 수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해버리면서 입지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직위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1198년 구엘프 파에 밀려 독일로 달아났다.


2.6. 이후[편집]


120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도전한 오토 4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폴레토 공국에 대한 제국의 권리를 교황청에 헌납했다. 그러나 1209년 필리프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오토 4세는 약속을 없던 일로 하고 디에폴트를 스폴레토 공작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스폴레토는 구엘프파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디에폴트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1218년 오토 4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탈환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갔다.

한편,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의 아들인 우르슬링겐의 베르톨트 1세는 교황청에 스폴레토 공국을 자기 가문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222년 볼펜뷔텔의 군젤린과 함께 스폴레토로 쳐들어가서 폴리뇨, 구비오, 노케라, 트레비 시를 공략하고 주민들에게 프리드리히 2세를 받들고 자신을 스폴레토 공작으로 섬기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과의 마찰을 가능한 한 완화하고 싶었던 그는 베르톨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그가 스폴레토 공작이 될 수 있도록 교황과 중재할 의사가 없다며 당장 시칠리아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는 1223년 초 더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1228년 여름, 베르톨트는 형제이며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프리드리히 2세를 대신해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을 맡고 있던 우르슬링겐의 레이날트 1세로부터 교황령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스폴레토 공국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안코나 공화국에 속한 노케라에 주둔한 채 레이날트 1세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이에 분노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 해 11월 프리드리히 2세, 레이날트 1세, 베르톨트를 파문하고 구엘프파를 독려해 전쟁을 벌였다. 베르톨트는 조반니 콜론나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에 패한 뒤 시칠리아 왕국으로 도주했다.

1230년 7월 시칠리아로 귀환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화해한 뒤 자신이 없는 동안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멋대로 전쟁을 벌인 레이날트 1세를 체포했다. 이에 베르톨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231년 5월 안트로도코에 자리를 잡은 뒤 토마스 1세 다퀴노가 이끄는 제국군의 연이은 공세를 물리쳤다. 1233년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레이날트를 안트로도코로 압송해 그 앞에 보이며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베르톨트는 레이날트를 풀어주면 안트로도코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말에 따랐다. 그는 레이날트가 석방되자 안트로도코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넘긴 뒤 우르슬링겐으로 귀환했다. 이후 우르슬링겐 가문은 대대로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하다가 1276년 이후로 그만뒀다.

이후 스폴레토는 교황령의 지배를 받다가 14세기에 아비뇽 유수로 인해 교황이 이탈리아에 큰 힘을 쓰지 못하면서 구엘프파와 기벨린파 사이의 투쟁에 휩쓸렸다. 그러다 1354년 톨레도 대주교이자 추기경인 길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지시를 받들어 소규모 용병대를 이끌고 스폴레토를 탈환하면서 교황령에 재귀속되었다. 1809년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휩쓴 뒤 프랑스 제1제국에 귀속되었다가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교황령에 돌아왔다. 1860년 사르데냐 왕국에 의해 무력으로 병탄되었고, 이후 '스폴레토 공작'은 통일 이탈리아 국왕으로 군림한 사보이아 가문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


3. 역대 공작[편집]





3.1. 랑고바르드 왕국 치하[편집]




3.2. 프랑크 왕국 치하[편집]




3.3.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치하[편집]




3.4. 카노사 가문 치하[편집]


  • 보니파초 3세 (1043 ~ 1052)
  • 페데리코 (1052 ~ 1055)
    • 바르의 베아트릭스 (1052 ~ 1055): 보니파초 3세의 부인이자 페데리코의 어머니. 섭정.
    • 저지대 로렌 공작 '턱수염이 난' 고드프리트 3세 (1053 ~ 1055): 베아트릭스의 사촌이자 새 남편. 섭정.
  • 토스카나의 마틸다 (1055 ~ 1082)
    • 바르의 베아트릭스 (1055 ~ 1076): 보니파초 3세의 부인이자 페데리코의 어머니. 섭정.
    • 저지대 로렌 공작 '턱수염이 난' 고드프리트 3세 (1055 ~ 1069). 섭정.
  • 라니에리 2세 (1082 ~ 1086)
  • 토스카나의 마틸다 (1086 ~ 1093)


3.5.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인[편집]




3.6. 교황 대 신성 로마 제국[편집]





[1] 775 ~ 840, 프랑크 왕국의 궁정 시종이자 학자[2]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이다.[3] 알베리크 '2세'로도 칭해지나, 스폴레토 공작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