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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그로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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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외교관, 정치인이자 제10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57년부터 1985년까지의 소련의 외무장관으로써 재임하였다.
상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7명, 국무장관 9명[2] 을 상대할 만큼 장기간 동안 재임했으며, 냉전 시기 소련 외교를 대표하던 1인자로, 소련 외교사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09년 러시아 제국 모길료프현에 속해있던 고멜군[3] 의 스타리야 흐라미키에서 농부인 안드레이 마트베예비치 그로미코[4] 와 올가 예브게니예브나 베카레비치[5]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민스크 농업대학을 거쳐 193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1936년에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 과학원의 경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39년 외무인민위원회로 자리를 옮긴다. 주미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6] 하면서 본격적인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미코가 주미 대사관에서 일하던 시기 소련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인들과 미국 정계가 소련은 이내 무너질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을 때 그로미코는 소련이 시련을 이겨낼 것이라며 연합국의 협력을 독려하며 소련의 상황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에도 참석하였다.
1947년 1월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49년 3월 외무성 제1부상으로 승진하였다. 1952년 6월 외무성 부상 겸 주영대사에 임명되어 8월에 신임장을 제정하고 8개월 정도 있다가 1953년 4월에 귀국하여 다시 외무성 제1부상을 맡았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2월 15일 소련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85년까지 재임하면서 사실상 냉전 후반기 소련 외교를 이끌었다. 특히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1970년대에는 데탕트를 주도하면서 미국과 소련 양국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에 서명하도록 이끌어내어 냉전 완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1985년 소련 서기장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그로미코는 개혁파의 기수인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1985년 7월 27일 그로미코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소비에트 연방의 명목상 국가원수)에 임명했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로미코의 지지에 대한 보답이었지만, 동시에 서방국가들에 보다 유화적인 외무장관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7]
1988년 10월 1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은퇴한 그로미코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1989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1] 벨라루스어로는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흐라미카(Андрэ́й Андрэ́евіч Грамы́ка)[2] 존 덜레스(1953-1959), 크리스챤 허터(1959-1961), 딘 러스크(1961-1969), 윌리엄 로저스(1969-1973), 헨리 키신저(1973-1977), 사이런스 반스(1977-1980), 에드먼드 머스키(1980-1981), 알렉산더 헤이그(1981-1982), 조지 슐츠(1982-1989).[3] 현 벨라루스 호멜 주 벳카 구[4] 벨라루스어로는 안드레이 마츠베예비치 흐라미카(Андрэй Мацвеевіч Грамы́ка).[5] 벨라루스어로는 볼하 야우헤나우나(Вольга Яўгенаўна)[6] 강철의 대원수와 바텐더가 직접 임명했다. 이 때 스탈린을 처음으로 직접 봤다고.[7] 실제로 그로미코의 후임으로 취임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맞게 보다 유화적인 외교노선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