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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코시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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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정치인. 1964년부터 1980년까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다음 가는 권력자였으며, 주요 직책으로는 소련 내각총리가 있다. 서방 세계나 중국으로부터 협상을 잘 이끌어내어 소련을 조금 더 외교적으로 가깝게 다가가게 한 주역으로 뽑히며, 후술할 아프간 전쟁 투입에도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후에 권력 다툼이 심해지고 브레즈네프가 절대 권력을 구축하면서 후기에는 반쯤 실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2. 생애[편집]
2.1. 브레즈네프 집권 이전[편집]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15세가 되었을 때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였다. 1924년 레닌그라드 협동 기술 학교를 마친 후, 시베리아로 건너가 협동 운동에서 다양한 직위에 일하였다.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1927년 그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5년 레닌그라드 섬유 전문 학교를 졸업했다. 거기에서 그는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만나게 되고, 1938년에는 레닌그라드 주지사가 되었다. 1939년에 그는 섬유 산업을 위해 인민위원회로 임명되었고 중앙위원회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1952년, 그는 상임국원 신분에서 후보국원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그것마저 떨어지게 되어서 그는 부수상직을 사퇴한다. 그렇게 그는 1957년에 들어서야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반당집단으로 몰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등의 고위 정치인들의 대거 몰락으로 인하여 후보국원으로 복원 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64년 자신이 총리가 될 때까지 제1부의장을 지냈다.
2.2.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편집]
1964년,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힘들어진 공산당원들은 그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흐루쇼프 대신 권력을 양분하여 코시긴은 브레즈네프 휘하 총리로 지내게 되었다.
후에 그는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 때에 핵무기를 동원하여 중국을 지도상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고 경고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소련이 핵공격을 시작 시 미국 역시 핵을 이용해 중국을 돕겠다" 라고 경고하자 브레즈네프 서기장 휘하 소련 총리였던 알렉세이 코시긴이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공항에서 극적으로 화해함으로써 다행히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한편 그는 일명 '코시긴 개혁'(Косыгинская реформа)으로 불리는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1965년에 행한 1차 개혁의 가장 큰 골자는 중앙통제식 경제를 탈피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촉진시키기 위해 기업의 이윤을 허락했고 성과금까지 지급했다. 그러나 중앙의 통제가 완화된 부작용으로 각 기업소들은 허위 보고와 부패, 근무태만 등을 저지르며 성과금을 타는데 급급했고 각 기업소에 대한 기금 무상제공이 폐지되면서 생산비용의 급증과 암시장의 급증을 야기해버렸다. 이러한 개혁 정책의 실패로 인해 브레즈네프 서기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더군다나 프라하의 봄으로 인한 자유화의 불똥이 소련에도 튈까 염려한 소련 보수파 집권층의 반발로 1차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결국 코시긴의 개혁 실패로 인해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집단지도체제는 붕괴되고 브레즈네프의 1인 독재권력이 강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1973년에는 중앙 부처의 권력 기능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지방의 경제 정책 입안자들에게 권한과 기능을 부여하는 2차 경제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1979년에는 반대로 경제 시스템을 다시 집중화시키려는 3차 개혁을 실시했지만 역으로 어느 정도의 자유를 맛본 기업들은 자신의 이권을 내놓지 않았고 개혁도 지지부진해졌다. 결국 니콜라이 티호노프가 이를 중단시키면서 실패로 끝난다.
이러한 3차례의 개혁 실패로 인해 코시긴은 거의 권력을 잃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고 막후 실세인 미하일 수슬로프 공산당 제2서기에 비하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1980년 10월, 그는 지병으로 입원하였다. 결국 두 달 뒤인 1980년 12월 18일, 사망했고 그의 화장된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1] 후에 장관회의로 개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