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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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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의 정치인. 제 26대 총리를 지냈으며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의 당수를 역임했다.
20세기 후반기 두 번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현대 복지 국가의 모범으로 꼽히는 스웨덴의 복지 체계를 완성시켰으며, 중립국으로서 독자적 외교노선을 표방해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사실상 오늘날의 스웨덴을 설계한 인물. 그러나 1986년 신원 미상의 범인이 쏜 총에 암살당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2. 약력[편집]
- 1950.2. 스웨덴 학생회연맹 국제분과위원회 위원장
- 1952.3. 스웨덴 학생회연맹 의장
- 1955. 스웨덴 사회민주청년연맹 이사
- 1957. 상원의원 (옌셰핑 /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 1963. 무임소장관
- 1965. 교통통신부 장관
- 1967. 교육부 장관
- 1969. 5. 제26대 스웨덴 총리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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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갑작스런 죽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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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의 야당 시절을 거쳐 1982년 다시 총리로 재직한 팔메였지만, 1986년 2월 28일 저녁, 아내와 단둘이서 스톡홀름 시내의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 길에서 끝내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향년 59세.
본래 팔메 총리는 격식 차리는 것을 안 좋아해서 국왕 다음의 상서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경호원 없이 다니는 걸 즐겼다고 한다. 그 날도 마침 경호원이 없었다. 그 탓에 속절없이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물론 지하철 타고 돌아다닐 정도면 경호원이 있어도 완벽한 경호는 불가능했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현직 총리가 길에서 암살당한 사건인데도 현재까지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제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찾을 수 없다.[1] 이외에도 추정 용의자들은 많이 거론되었지만 아직 해결되진 않았다.
4. 소속 정당[편집]
5. 기타[편집]
- 종종 존 F. 케네디나 로버트 F. 케네디와 비교되곤 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진보 정당에서 활동하며 젊은 나이에 총리에 취임해 평화주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비극적으로 암살되었다는 점까지 똑같기 때문이다.
- 팔메는 국내정치뿐 아니라 국제외교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 정치인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군사 행위를 비난하였고 이란-이라크 전쟁을 중재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소련의 동유럽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문제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등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했다.
- 덕분에 대한민국과도 인연이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였던 시절 군부 출신 권위주의 정권인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을 때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함께 여러차례 국제 여론을 움직여 DJ를 구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스웨덴어를 비롯해 어머니가 사용한 언어인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또한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에도 조예가 깊었고, 다른 언어들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운동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재능 있는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특히 스키를 매우 잘 탔던 터라 여러 국제 대회에서 스웨덴 국가대표로 출전한 경험도 있다. 또한 열렬한 축구 팬이었고 스톡홀름의 지역 팀에서 뛰기도 했다.
- 열렬한 여행자이기도 했는데, 방학을 할 때면 유럽과 미주 전역의 여러 나라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에 노출시켰고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절친이었던 잉바르 칼손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모습이 많다. 칼손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환경에 학교가 끝나면 집 근처의 공장에서 8시간 이상 중노동을 했었던 반면, 팔메는 스톡홀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두 사람 모두 타게 엘란데르의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총리 재임 시절 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가 재집권한 적이 있다.
- 팔메와 칼손 두 사람은 사회적 배경이 달랐는데도 정치를 지적이고 전술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공유했다. 칼손은 팔메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특히 1980년 스웨덴 원자력 발전소 국민투표에 관한 투표 직전 당내 논의에서 '특급 해결사'가 되어주었다.
- 핵확산 방지 노력과 아프리카 민족회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폴리사리오 전선 등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렇게 꽃피운 스웨덴의 중재외교가 현재까지도 스웨덴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국왕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2]
- 배우 셜리 맥클레인에 따르면 한때 내연 관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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