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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F.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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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리시 딘
William Frishe Dea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William_F._Dean.jpg

출생
1899년 8월 1일
미국 일리노이주 칼라일
사망
1981년 8월 24일 (향년 82세)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21 ~ 1955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신체
180cm 96kg

1. 개요
2. 생애
3. 잘못 알려졌던 사실
4. 가족 관계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미국의 군인이다.

다른 유명 장성은 웨스트포인트 등 사관학교 출신이 많지만 윌리엄 딘은 특이하게 ROTC 출신이다.


2. 생애[편집]


제2차 세계 대전연대장으로 참전하면서 혁혁한 공훈을 세워 종전 이후에는 사단장에 이르렀다. 특히 2차 대전 당시에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최고의 치욕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부하들이 포로로 잡히지 않으면서 전투를 하도록 최대한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의 부대원이 다른 부대원에 비해 포로로 잡히는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1945년 9월 주한미군으로 파견되어 같은 해에 미군정청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제24보병사단장으로 보직되면서 다시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 때 자신의 제24보병사단 직할 수색대대인 찰스 스미스 대대를 먼저 파견하여 오산 전투를 치르면서 북한군을 막으려 했으나 찰스 스미스 대대는 북한군에게 완패했으며 그 때문에 본인이 본대를 이끌고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과 직접 싸우게 되었는데 어찌나 상황이 말이 아니었는지 딘 본인이 직접 무반동총을 들고 쏴서 T-34-85를 공격해야 할 정도였다. 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차화기를 직접 다루면서 계속해서 북한군 전차를 공격했지만 문제는 딘 혼자 여러 대의 전차를 상대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힘든 싸움이었다.

결국 제24보병사단마저 북한군에게 궤멸당했으며 딘 소장은 충북 옥천으로 철수하던 제2제보병사단은 세천터널에서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사단장도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길을 잘못들어 실종되고 만다. 그 후 역시 낙오했던 제24보병사단 2대대 소속 스탠리 테이버(Stanley Eugene Tabor) 소위를 만나 같이 본대를 찾아가던 중 민가에 숨어있었는데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이 급습하였고 테이버 소위가 주위를 분산시켜 탈출에 성공하였지만[1] 테이버 소위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스탠리 테이버 소위 역시 결국 포로로 잡혔는데 잡힐 때 이미 중상을 당한 상태였으며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고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Hall of Valor: The Military Medals Database

그 후 계속 혼자 본대를 찾아 산야를 헤메다가 8월 20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농부 박종구의 집에서 2박 3일간 머물며 닭고기 등 후한 대접을 받고 대구로 향하였다.# (주한미군이었던 딘 장군의 아들이 1961년 혹은 1963년(기사마다 시점이 다름) 박종구에게 감사인사차 방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7월 20일 행방불명 된 후 36일 후인 8월 25일에 전라도 진안의 주민인 한두규(40세)와 최모(24세)가 각각 북한군에 당시 한화로 약 3천원에 해당하는 5달러를 받고 팔아넘겨 포로가 되었다. 위치는 전라도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이다.근거기록자료 이 과정에서 딘이 어찌나 고생했는지 키 180cm의 딘은 해방 직후 96kg였던 몸무게가 59kg까지 줄어 있었다.

딘은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여러번 겪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다. 게다가 고문을 통해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기밀을 추궁할 것을 우려해서 실제로도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자살에는 실패했다. 참고로 이 딘 소장이 미군 포로 최선임자였는데 천만 다행히도 북한군 측에서는 딘이 누군지도 모르고 생포한 덕분에 그가 장성급 장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그 덕분에 딘은 하급자 포로들 사이에 묻어갈 수 있었다. 물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

한편 미군에서는 실종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가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한다.'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에서는 북한군 포로의 진술 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을 추서하였으며[2] 최일선 장병들에게 주어지는 전투보병휘장 2등급을 수여받았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18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체트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장군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되었다.

포로가 된 이후 딘 소장은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반 포로들을 교환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의해 1953년 9월 4일 석방되어 귀환하였다.[3]

딘은 석방된 이후 미국으로 귀국해서 미 제6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잠깐 역임한 후 퇴역했다. 그리고 여생을 조용히 살다가 1981년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사족으로 딘을 팔아넘긴 두 한국인은 체포되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두 사람은 동맹국의 사령관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이적죄여적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으니 좋은 판결은 못 받았을 것이고, 당시 좌익이나 빨치산이나 공산당에 협조했거나 그런 '의혹'이 있는 이들을 다수 처형하고 학살했으므로 이들 역시 비밀리에 국군에 보복당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위에 한두규는 1954년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7년 전향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3. 잘못 알려졌던 사실[편집]


김재현 철도 기관사 문서 참고

그 동안 국내에서 대전 전투 당시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기관사가 운전하는 기관차에 탑승했던 30여명의 미군 특공대에 의한 미제24보병사단 사단장 구출 작전 일명 ' 소장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철도공사, 국가보훈처와 같은 정부기관 및 언론 등에서 검증없이 그대로 인용하면서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대전역에 적재되어 있던 군수물자 후방 이송 작전이 와전된 것으로 과거부터 현재 기밀해제된 최신 미군 측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 모두 군수물자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p. 536)에서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생존 기관사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문단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군수물자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군수물자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부연하자면 딘 소장이 7월 20일 낮에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군수물자가 적재된 화차 10량의 후방 이송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김재현 기관사 및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가 운전을 맡고 30여명의 특공대원이 아닌 6명의 미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미군 6명이 호송병으로 탑승한 기관차가 대전역에 진입하였으나 탄수차가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화차 10량을 견인할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여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실패하고 되돌아가던 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부기관사가 부상을 당하였다.(결국 후송에 실패한 대전역의 화차 10량은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4. 가족 관계[편집]


그는 마일드리드 던 (Mildred Dern)과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딘 2세 (William Dean Jr)와 딸 매로리 준 딘 (Majorie June Dean)을 낳았다. 아들 윌리엄 딘 2세는 주한 미공군으로 군산 공군 기지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이때 1961년 혹은 1963년(기사마다 시점이 다름), 대전 전투 이후 낙오하여 도피 중이었던 딘 소장에게 닭고기 등 후한 대접을 하며 2박 3일간 은신처를 제공했던 농부 박종구의 집에 찾아가 감사함을 전했다.딘少将(소장) 숨겨줬던 德裕山幕(덕유산막)에 「報恩(보은)의 별나무」한국전 교환포로 1호 美딘소장 일화 冊 펴내장군 면모 지금도 생생..." 박종구옹 회고미군 '딘' 소장


5. 참고 자료[편집]


* 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책 캡춰 버전)
* 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텍스트 추출 버전)



[1] 도리어 딘 소장이 "제발 나를 버리고 빨리 도망가라!"라며 엄명했지만 테이버 소위는 이를 무시하고 자기 목숨을 바쳐 딘 소장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다.[2] 딘 본인은 명예 훈장을 받은 것을 과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3] 딘 소장이 유엔군이 붙잡은 공산군 측 최고 계급의 포로인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으로 귀환했다는 설이 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를 했었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리학구라는 고위급 장교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딘 소장은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찾기 힘들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고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