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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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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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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대전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7월 16일 ~ 1950년 7월 20일
장소
대한민국 충청남도 대전시 (現 대전광역시)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윌리엄 F. 딘
파일:북한 국기.svg 리권무
파일:북한 국기.svg 리영호
결과
북한의 전술적 승리
영향
유엔군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지연전 성공
병력
총 11,400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제24보병사단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국군 병력 일부
총 13,500명 ~ 17,600명
파일:북한 국기.svg 제3보병사단
파일:북한 국기.svg 제4보병사단
파일:북한 국기.svg 제105기갑사단
피해규모
전사: 465명
실종 및 포로: 295
피해 규모 미상

1. 개요
2. 전투 경과
3. 의의
4. 잘못 알려졌던 사실




1. 개요[편집]


대전 전투는 1950년 7월 16일 야간에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가 갑천 일대에 배치되면서부터 7월 20일까지(본격적인 전투는 19일에 시작되어 대전 시가전은 20일) 대전 일대에서 미 제24보병사단이 조선인민군 제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에 대응해 펼친 지연전이다.

일부 미국 전사에서는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를 대전 전투에 포함시켜 광의의 대전 전투 (7월 13일~7월 20일)로 설명하며 덧붙여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465명, 실종 및 포로 295명의 인적 손실을 보았는데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 전투의 인적 손실(전사: 317명, 실종 및 포로: 185명)를 포함시켜 전사자를 819명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 전투 경과[편집]


7월 19일 북한군이 대전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일단 북한군 제3사단은 유성구까지 진출해 대전~옥천 일대를 장악해 나갔고, 4사단도 유성을 공격하는 한편, 1개 연대를 금산 방향으로 우회시켰다.

7월 20일 새벽 3시, 공격준비사격 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한 미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허겁지겁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시가전으로 야기될 피해를 우려해서인지 주력을 대전 시내로 들이지 않고 오전 6시경 포격 지원 속에 전차 몇대만 시내로 보냈다.[1]

한편 갑천의 부대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미 34연대장과 윌리엄 F. 딘 미 제24보병사단장은 일부 병력과 전차만이 대전 시내에 들어온 것으로 판단하고 반격을 진두지휘해 수색중대와 공병중대의 3.5인치 로켓포로 8대, 야포로 2대를 파괴시켰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이 무렵 북한군은 금산과 옥천으로의 퇴로를 차단하고서야 주력을 시내로 진입시켰고, 이제서야 북한군의 진의를 파악한 딘 사단장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16시경 딘 소장은 철수 작전의 일환으로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전화를 걸어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 탄약 등 보급품이 실려 있는 화차 10량을 영동으로 후송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해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가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6명의 병사들과 함께 16시 20분경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전역 도착 전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손상된 탄수차로 인해 동력이 부족하여 화차 견인에 실패하고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한다. 결국 후방 이송에 실패한 화차 10량은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17시 55분에 딘 소장은 부관 클라크 중위를 대동하고 호위차량 1대를 앞세워 17시 55분에 연대 지휘소를 출발하였으며, 뒤이어 본대가 18시에 출발하면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이후 충북 옥천으로 철수하던 미 제24보병사단은 세천터널에서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사단장도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길을 잘못들어 실종되고 만다.[2]

북한은 대전 해방 전투라는 이름과 함께 인민군이 미군과 첫 교전한 전투가 대전 전투이고 여기서 미군을 전멸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과 미군의 첫 전투라는 말은 틀린 것이며, 미군이 사단장 실종 등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3. 의의[편집]


미 제24보병사단 입장에선 전력의 30%(3,933명 중 1,150명 사상)를 손실하고 사단장까지 실종된 것에 비해 겨우 이틀만 벌어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전투였다. 그래도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에 전개할 수 있도 요구한 이틀을 버티며 7월 20일까지 목표로 한 지연작전 측면에서는 성공했기 때문에 아주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후 미 제24보병사단은 22일 옥천에서 수습 후 충북 영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했으나, 딘 사단장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해 존 H. 처치(John H. Church)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4. 잘못 알려졌던 사실[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재현 철도 기관사 문서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 참고

그 동안 국내에서는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30명으로 구성된 미군 특공대(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는 '미군 결사대'로 명명)가 동승하여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일명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 중 김재현 기관사와 29명의 미군 특공대원들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의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이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기록되어있고, 1983년 경위서의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에서는 결사대 기록을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했던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 및 언론 등이 '구출 작전'이 아니없음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특공대원들의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하고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대전역에 적재되어 있던 보급품 후방 이송 작전이 와전된 것으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등의 과거 자료부터 현재 기밀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G2) 보고서 등 최신 자료까지 모든 미군 측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에서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문단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동승한 미군을 '특공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호송병 30명이 동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

부연하자면 딘 소장이 7월 20일 16시경에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 10량의 후방 이송 명령을 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하달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김재현 기관사와 부기관사에 해당하는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운전을 맡고 30명의 미군 특공대원이 아닌 6명의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미군 6명이 호송병으로 동승한 채 7월 20일 16시 20~30분경에 기관차가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전역 도착 전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손상된 탄수차로 인해 화차 10량을 견인할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여 보급품 후송 작전에 실패하고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부상을 당하였다.(결국 후송에 실패한 대전역의 화차 10량은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딘 소장은 7월 20일 18시 이후, 대전에 잔류하던 미 제24보병사단 34연대 병력들과 함께 대략 50여대의 차량을 이용해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대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 대열이 옥천가도에 들어선 이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당해 혼란이 생겼고 도보로 후퇴하던 중 낙오되어 본대를 찾아 대구로 남하하다 약 한 달 후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1] 이후 이 전차들은 대전시청의 34연대 지휘소를 공격하기도 했다.[2] 이후 딘 사단장은 역시 낙오된 19연대 2대대 소속스탠리 E. 테이버(Stanley E. Tabor) 중위를 만나 본대를 찾아가는 도중 북한군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헤어졌고 홀로 본대를 찾아가다 결국 무주, 진안 부근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붙잡혀 휴전 때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