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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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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코트디부아르에서 발생한 첫 번째 내전이다.
2. 배경[편집]
1960년 식민지배가 종식된 이후 코트디부아르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33년 동안 권좌에 군림했다. 이 시기의 코트디부아르는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프랑스에 의존적인 경제 구조가 한몫했고 결국 1978년부터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석유값이 급등하는 사태까지 겹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침체되어 1987년 파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1993년,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했고 당시 국민의회 의장이었던 앙리 코낭 베디에가 우푸에부아니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베디에에게는 우푸에부아니에 비견되는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정치적 혼란까지 벌어졌다. 한편 우푸에부아니는 재임시절 주변국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경기가 침체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불만의 화살이 향했다. 베디에는 또한 재임 시절 "코트디부아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에 외국인과 무슬림 탄압이 베디에의 재임 시절에 벌어졌다. 베디에가 강조하는 정체성으로 인해 결국 베디에의 정적이었던 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는 1995년 대선을 보이콧했고, 베디에는 재선에 성공했지만 요동치는 민심을 무마할 능력이 없었다.
1999년 로베르 게이의 쿠데타가 벌어져 베디에가 축출되었다. 2000년 실시된 대선에서 로베르 게이는 로랑 그바그보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했으나, 야당 후보들이 로랑 그바그보를 지지했기 때문에 로베르 게이는 대선에서 낙선했다. 로베르 게이는 대선 결과에 불복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이 봉기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3. 전개[편집]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이 2005년 월드컵 예선에서 승리하여 조별 리그 진출을 자축하고 있었는데, 국가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디디에 드록바가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으며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무기를 내려놓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4. 결과[편집]
2007년 협정이 체결되어 내전이 종식되었지만 반군이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것은 아니었다. 코트디부아르는 본래 2005년에 차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점점 연기되어 2010년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알라산 와타라가 로랑 그바그보를 앞서는 결과가 나왔지만, 로랑 그바그보가 선거 결과에 불복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는 다시 내전에 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