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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 크로포드

덤프버전 :

조안 크로포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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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주연상
제 17회
(1944년)


제 18회
(1945년)


제 19회
(1946년)

잉그리드 버그먼
(가스등)

조안 크로포드
(밀드러드 피어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투 이치 히즈 온)





조안 크로포드
Joan Crawford


본명
루실 페이 르슈어
Lucille Fay LeSueur
출생
1900년대 초반 3월 23일[1]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사망
1977년 5월 10일 (향년 69-73세)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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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배우, 무용수
신장
160cm
활동
1922년 – 1972년
배우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1929년~1933년 이혼)
프랜쵸우 토운(Franchot Tone)(1935년~1939년 이혼)
필립 테리(1942년~1946년 이혼)
앨프리드 스틸(1955년~1959년 사별)
자녀
모두 입양한 자녀들
딸 크리스티너 크로퍼드(1939년생)
아들 크리스터퍼 크로퍼드(1943년생)
딸 신디 크로퍼드(1947년생)
딸 캐시 크로퍼드 라론드(1947년생)
종교
가톨릭크리스천 사이언스
서명
파일:Lesueur_222222.jpg

1. 개요
2. 위상
3. 활동
4. 주요 출연 작품
5. 스타일
6. 사생활
6.1. 양녀 학대 논란
7. 미디어 매체 속 모습
8. 여담



1. 개요[편집]




미국배우, 무용수.


2. 위상[편집]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이며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10위에 올랐다. 오늘날엔 중년 이후의 이미지만이 유명하지만 젊었을 땐 멋진 몸매와 스타일로 당대 최고의 글래머 스타 중 하나였다.


3. 활동[편집]


노동자 계급 출생으로, 아버지가 떠나고 재혼 가정에서 사는 등 가정사가 불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닐 여력도 안 돼서 학력도 초졸에 가까웠다고 한다. 훗날 앙숙이 된 베티 데이비스는 그래도 중산층 출신인데다 제대로 대학을 나온 것과 대조적.

1925년 <Lady of the Night>에서 노마 시어러의 대역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에 바로 왐파스 베이비 스타즈[2]에 뽑혔다.

20대엔 청초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Our Dancing Daughters>(1928)


또한 당시의 아이돌 개념에 가까운 핀업 걸이나 플래퍼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자녀 방치/학대 문제에 있어 베티 데이비스, 헨리 폰다, 제임스 캐그니, 마를레네 디트리히, 말런 브랜도, 바버라 스탠윅은 많이 묻히고 크로퍼드와 메리 픽포드만 유독 대두됐던 이유는 전자의 스타들은 악역 이미지도 강했던 반면 픽포드와 크로퍼드는 이처럼 사랑스러운 이미지만을 굳혔던 시기가 있어서 대중의 배신감이 더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 시기의 크로퍼드를 굿걸 시절의 크로퍼드라고 부르며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돼버린 현 크로퍼드와 구분하기도 한다.

무용수 출신이라 춤을 잘 췄고 이를 영화 속에서 많이 써먹었다.




<Dance, Fools, Dance>(1931)
<Dancing Lady>(1933)

1930년대 초중반 명실상부한 최정상의 인기 배우였다.

1940년대 초반 크로퍼드의 인기 순위가 하락했다. 그래도 소속사인 MGM은 크로퍼드의 주연작들이 계속 일정 수익을 거뒀기에 계속 주연으로 썼지만, 극장주들 사정은 달랐다. 흥행국밥[3]으로 불리면서 MGM에서도 나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칼럼니스트인 헤더 하퍼가 1945년 <밀드러드 피어스> 평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감으로 크로퍼드를 밀면서 상황이 반전돼 수상에 성공하고 경력 흐름도 바뀌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흔해진 아카데미상 캠페인의 시초로 불린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대배우 베티 데이비스와의 불화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을 참조. 둘이 말년에 공동주연으로 출연한 <제인의 말로>(1964)는 대박을 쳤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할머니 연기도 많이 했다. <I Saw What You Did>(1965), <Night Gallery>(1969)가 대표적. 데이비스 뿐만 아니라 니컬러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에 함께 출연했던 머세이디즈 머케임브리지와 스털링 헤이든하고도 사이가 지독히 나빴다.


4. 주요 출연 작품[편집]


연도
작품
1927
The Taxi Dancer
Twelve Miles Out
1928
Across to Singapore
Our Dancing Daughters
1929
야성녀
1930
Montana Moon
Our Blushing Brides
Paid
1931
Dance, Fools, Dance
Laughing Sinners
Possessed
1932
그랜드 호텔
Letty Lynton

1933
오늘만의 생명
Dancing Lady
1934
세이디 맥키
Chained
Forsaking All Others
1935
No More Ladies
I Live My Life
1936
The Gorgeous Hussy
사랑의 도피
1937
The Last of Mrs. Cheyney
The Bride Wore Red
Mannequin
1938
The Shining Hour
1939
The Ice Follies of 1939
여자들
1940
Strange Cargo
Susan and God
1941
A Woman's Face
1942
Reunion in France
1943
Above Suspicion
1945
밀드러드 피어스
1946
유머레스크
1949
Flamingo Road
1950
The Damned Don't Cry
1951
Goodbye, My Fancy
1952
This Woman Is Dangerous
1953
Torch Song
1954
쟈니 기타
1963
The Caretakers
1964
Strait-Jacket
제인의 말로
1965
I Saw What You Did
1967
가라데 킬러스
1969
Night Gallery


5. 스타일[편집]


  • 탁월한 몸매로 주목 받았던 소위 글래머 스타 중의 하나였다. 중년 이후에도 관리를 잘한 편이었다. 아래는 1953년작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찍힌 것으로, 49세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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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드레스에 최적화된 신체 비율의 보유자였다. 어깨가 직각이라 위엄 있어 보이는데, 이 어깨를 드러내는 디자인을 자주 입었다. 드레스 착용 사진들은 오늘날에도 자주 소환된다. 난해한 디자인도 잘 소화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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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전에는 1908년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딸은 1904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조차 공식 확정된 건 아니라, 영문 위키에서도 물음표 했을 정도로 출생년도 논쟁이 있다.[2] WAMPAS Baby Stars. 영화 광고주 서부 연합(Western Association of Motion Picture Advertisers)이 1922년부터 34년까지 매해 13명씩 뽑던 여배우 유망주 명단. 출신 중엔 클래러 보우(1924), 재닛 게이너(1926), <킹콩>(1933)의 페이 레이(1926), <말타의 매>(1941)의 메리 애스터(1926), 로레타 영(1929), 진 아서(1929), 조운 블란델(1931), 진저 라저스(1932) 등이 있다.[3] Box-Office Poison.

특히 (1932)에서 입고 나온 드레스는 소위 레티 린튼 현상을 낳았다. MGM 소속 디자이너 에이드리안[5]의 디자인으로, 메이시즈 백화점에서만 5만 벌이 팔렸으며 미국 전역에서 무려 수천여종이 넘는 모조품이 만들어졌다. 천을 최대한 조금 써서 몸의 선과 피부를 드러내던 당대 유행과 정반대로 오건디 소재의 천을 특히 상체 윗부분에 잔뜩 덧붙인 이 드레스는 낭만주의로의 회귀 흐름을 만들어냈다. 랑방을 만든 잔 랑뱅[6], 마들렌 비오네[7]도 영향을 받은 드레스들을 만들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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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에이드리안은 어깨에 특별히 고안한 퍼프를 넣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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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여성들이 멋지다고 너도나도 따라하던 이 "어깨뽕" 디자인이 실은 크로퍼드를 위해 발명된 몸매보정용 장치라는 게 알려진 뒤 갑자기 당대 대중들 사이에 크로퍼드의 몸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니면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된 것에 불과한가를 주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자주 다뤄서 많은 할리우드 황금기 관계자들이 말을 얹었고 오늘날에도 관련 칼럼과 기사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스타에게 자신감이 왜 중요한지를 시사하는 좋은 예시로 거론된다.

  • 이 어깨뽕과 관련한 안 좋은 일화가 있다. <밀드러드 피어스>(1945)의 주인공 역은 처음엔 베티 데이비스에게 갔으나 데이비스가 거절하면서 크로퍼드가 어부지리로 얻게 된 자리였다.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크로퍼드를 너무 싫어해서 바버라 스탠윅을 꽂아달라고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에 요청했는데 무시 당했고, 평소 욱하기로 유명했던[8] 커티즈는 왜 자신이 "거들먹거리는" "한물 간" 배우랑 일해야하냐며 항의하더니 의상 시착 때 크로퍼드가 어깨에 뽕을 넣은 것 같다고 의심하며 갑자기 드레스를 찢어발겼다.[9]


6. 사생활[편집]


  • 4번 결혼했다. 3번 이혼했고 마지막 남편은 병으로 죽었다.

  •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생활 중에 클라크 게이블과 바람피웠다. 페어뱅크스도 마찬가지로 맞바람을 피우는 등 둘의 관계는 순탄치 않아 빠르게 파국을 맞았다. 오히려 이혼 후 서로 반성하고 잘 지냈다고 한다.



6.1. 양녀 학대 논란[편집]




아이들 4명[10]은 모두 입양으로 얻었는데 그 중 하나인 양녀 크리스티너[11]가 조운 크로퍼드가 죽은지 1년 만에 회고록을 써서 조운 크로퍼드가 알콜 중독으로 아이들을 학대해왔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크리스티너는 유산도 받지 못했다.

지인들은 반응은 극과 극이었는데, 회고록에 동감하는 측도 있었지만 악랄하게 왜곡해 돈벌이를 한다며 크리스티너를 비난하는 의견도 있었다.

양아들 크리스터퍼는 크리스티너의 말이 사실이라고 했다. 크리스터퍼가 더 심하게 당했다는 얘기가 있다. 반면 나이차가 나는 캐시와 신디는 거짓말이라고 맞섰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도 "내가 아는 그 당시의 크로퍼드는 토라지거나 말씨름은 해도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며 크로퍼드를 변호했다.

크리스티너는 캐시와 신디가 애기 때까진 조운 크로퍼드의 상태가 나빴는데 네 번째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 그와 만나는 동시에 가정이 모든 점에서 나아져 조운 크로퍼드가 안정됐고 학대도 멎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캐시와 신디는 자신과 크리스터퍼와는 조운 크로퍼드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크리스티너는 주변 어른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경찰 등에게 얘기해본 적도 있지만 아무도 개입하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폭로 전부터 업계에 이미 공공연하게 소문이 퍼져있었는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자기 애들을 때려대는 그 끔찍하고 천박한 퉁방울눈의 여자"라고 욕한 적이 있다.[12]

1970년대 초까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려왔던 것은 사실이고, 당시에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었다.


7. 미디어 매체 속 모습[편집]


조운 크로퍼드를 다룬 <존경하는 어머니(Mommie Dearest)>(1981)는 컬트 영화로 추앙받고 있다.

양녀 크리스티너 크로퍼드가 쓴 같은 제목을 가진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평이 매우 나빴다. 심지어 원작자 크리스티너 크로퍼드조차도 "터무니 없고 부정확한 허구"라고 비난했다. 조운 크로퍼드는 "도끼로 나무를 내리친 적도, 자신을 옷걸이로 때린 적도 없다"며.

조운 크로퍼드 역을 맡은 페이 더너웨이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공동으로 받았을 정도. 더너웨이의 이후 경력 전체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10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해 1900만 달러 가량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양녀를 옷걸이로 학대하는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힌다.[13]
<존경하는 어머니>(1981)

퀴어들의 패러디 필수요소로 쓰이기도 하며 컬트 영화로서 생명력이 길게 유지되고 있다.영상링크


8. 여담[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oan_hal.jpg}}} ||
<세이디 맥키>(1934) 촬영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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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931c0a60c774b6e514dad699ac8fad6.jpg}}} ||





[4] 허리 둘레와 엉덩이 둘레가 3사이즈 이상 차이가 났다. 즉 엉덩이 둘레 실측정치가 '허리 대비 엉덩이' 표준 치수보다 4인치 가량 컸던 것.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은 적 없었다. 크로퍼드 본인만의 미적 기준으로 집착한 것.[5] Adrian. 본명은 에이드리언 애덜프 그린버그(Adrian Adolph Greenburg). 재넛 게이너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6] Jeanne-Marie Lanvin. 1867 - 1946.[7] Madeleine Vionnet. 1876 - 1975.[8] 제임스 캐그니는 이를 두고 "헝가리인 특유의 성질머리"라고 표현했다.[9] 크로퍼드는 당연히 어깨뽕을 미착용한 상태였다. 크로퍼드는 나중에 "그나마 브래지어를 차고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10] 5번 입양했으나, 그 중 한 명은 생모 때문에 입양이 취소되었다.[11] 1939-.[12] 그러나 디트리히 역시 폭력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자기 딸을 학대한 건 마찬가지였다.[13] 파라마운트 픽처스 100주년 심볼에서도 보인다.[14] Hal Hays LeSueur. 1903 - 1963.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