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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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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 학장

초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2대

존 데일리
서강대학교 총장

초대

존 데일리

2대

존 데일리

3대

델마 스킬링스태드

4대

델마 스킬링스태드

5대

John D. Mace

6대

서인석

7대

박홍

8대

박홍

9대

이상일

10대

이한택

11대

류장선

12대

손병두

13대

이종욱

14대

유기풍

15대

박종구

16대

심종혁



1. 개요
2. 출생과 가계, 예수회 입회
3. 한국 입국과 서강대학교 설립
4. 조안 리와의 만남과 사랑
6. 가정생활과 말년
7. 자녀
8. 여담


1. 개요[편집]


Kenneth Edward Killoren, 1919년~1986년 7월 3일 (향년 67세)

서강대학교 초대 총장(학장)을 지낸 가톨릭 예수회 신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귀화 외국인 1호. 한국식 이름은 길로련()으로 ‘서강 길씨’의 시조. 서강대를 설립하고 기틀을 닦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이후 서강대 재직 중에 만난 제자 조안 리사랑에 빠져 환속해서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은, 도저히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장벽을 1가지도 아닌 무려 4가지나 뛰어넘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귀화했다지만) 케네스는 미국인이었으며, 조안은 한국인이었다. 또한 케네스는 조안보다 무려 26년이나 연상이었다. 케네스는 서강대 설립자 중의 하나이자 교수였고, 조안은 서강대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앞선 3가지의 커다란 어려움들을 순식간에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가톨릭 신부와 여성 평신도의 금단의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1960년대 중후반 당시 서강대와 예수회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전체를 온통 떠들썩하게 뒤흔들어놓은 어마어마한 스캔들이었다.

아래 내용들은 아내 조안 리가 1994년에 출판한 회고록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을 상당 부분 참조했다.


2. 출생과 가계, 예수회 입회[편집]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은 1919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시에서 부유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의 3남 1녀 중 맏이로 출생했고, 위스콘신주에서 성장했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킬로렌 가문은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했고, 넓은 농장도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계답게[1] 킬로렌 가문도 가톨릭을 믿었고, 자연스럽게 케네스도 어려서부터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케네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군인(미 해군)이었다. 케네스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유진 킬로렌(Eugene Killoren)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어머니 메리 킬로렌(Mary Killoren)은 1961년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시절 케네스는 진로에 대해 고심한 끝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고, 의사신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케네스는 18세의 나이로 가톨릭 남자 수도회예수회에 입회한다. 자신에게 돌아올 막대한 상속분을 모두 예수회에 기부하고, 킬로렌 가문의 사업도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예수회 수도자가 된 케네스는 사제서품을 받아 수도사제[2]가 되었고, 대학에서 가톨릭신학교육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3. 한국 입국과 서강대학교 설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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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앞줄 가운데). 함께 서강대학교를 설립한 예수회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는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에게 ‘한국으로 가서 대학을 설립하라’고 명한다. 1955년, 36세의 케네스 신부는 예수회 장상들의 명에 순명하여 한국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폐허뿐인 한국 땅을 밟는다.

‘한국에서 가톨릭을 선교하고 가톨릭계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케네스 신부는 많은 노력을 한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에서도 제일 가난하고 낙후된 외딴 시골마을에서의 생활과 체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서울대학교 이희승 교수, 이종영 교수, 고병익 교수로부터 한국어한국사도 배웠다. ‘길로연’이라는 한국식 이름도 이희승 교수가 지어준 것이다.

한국에 대해 공부하는 동시에, 케네스 신부는 예수회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대학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대학을 어디에 설립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는데,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노원구 상계동, 한국인 김태관() 토비아 신부는 강북구 우이동, 그리고 케네스 신부는 지금의 서강대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마포구 신수동을 주장했다. 결국 케네스 신부의 의견대로 학교는 신수동에 세워졌고, 학교의 이름도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케네스 신부가 주장한 ‘서강(西)’이 채택되었다. ‘서강’은 ‘(한강)의 서쪽’이라는 의미이다. ‘신수동’과 ‘서강’을 고집한 이유에 대하여 그는 ‘강이 가까우니까’라는 것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예를 들며) ‘학교의 이름은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것이 오랜 전통이기 때문’이라는 역사를 들었다.

케네스 신부를 포함한 당시 예수회 신부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수차례 면담한 끝에 어렵사리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아냈고, 이후로도 황량했던 신촌에 대학을 짓고 시설과 시스템[3]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케네스 신부는 직접 매일같이 공사현장에 나와 학교가 지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고,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캠퍼스에 밤이고 낮이고 살다시피 했다. 마침내 1960년 4월 18일 서강대학이 개교되고, 41세의 케네스 신부가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불과 다음날인 4월 19일4.19 혁명이 일어나 학교는 개교하자마자 무기한 휴업 상태에 돌입하게 되지만, 수업이 재개되고 학교 운영이 정상화되면서 서강대는 점점 발전한다.

‘종교인’이자 ‘대학의 학장’이라는 지위에서 흔히 연상되는 선입견과 달리, 케네스 신부는 권위주의나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활달하고 쾌활한 성품이었던 그는 격의 없이 학생들과 어울렸으며, 학생들을 몹시 사랑했다. 아직 한국 사회가 엄격하고 보수적이던 1960년대에, 그는 남녀 학생들에게 직접 포크댄스를 가르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국인 동료 신부들조차도 ‘한국의 남녀칠세부동석 전통’과 ‘학장의 체면’을 이유로 들며 염려하고 만류했지만, 케네스 신부는 “남녀가 서로 어울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라며 동료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1964~1965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는 6.3 항쟁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여했고, 서강대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케네스 신부는 학생들과 함께 단식투쟁에 참가했다. 기자들이 그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 학생들이 나에게는 아들딸들과도 같은데,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밥을 굶고 있으니 나 역시 밥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명랑하고 친근하며 학교와 학생들을 사랑한 케네스 신부를, 많은 서강대생들이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랐다. 1966년 케네스 신부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국적을 아예 한국으로 바꾸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제1호 귀화 외국인’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의 한국 귀화 사연


4. 조안 리와의 만남과 사랑[편집]


이처럼 사제이자 교육자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던 케네스 신부에게 새로운 인연이 하나 찾아온다. 1964년 초반의 일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던 성심수녀회의 주매분()[4] 수녀가, 무척 아끼는 제자를 하나 데리고 서강대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주 수녀는 성심수녀회가 운영하는 성심여자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그녀가 데려온 제자는 곧 성심여고를 졸업하는 이영자 요안나라는 학생이었다. 주 수녀는 케네스 신부에게 요안나를 소개했고, 케네스 신부는 그녀의 세례명인 ‘요안나’[5]영어식 발음인 ‘조안(Joanne)’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조안 리라는 이름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주 수녀가 요안나를 케네스 신부에게 데려온 용건은 ‘요안나가 서강대에 진학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6년간 성심여중고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요안나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요안나를 총애한 주 수녀는 그녀에게 가톨릭 미션스쿨인 서강대를 추천했다. 하지만 요안나가 좀처럼 내켜하지 않자, 그녀를 직접 서강대에 데려와서 자신과 친분이 있고 각별히 신뢰하는 케네스 신부에게 설득을 부탁한 것이다. 주 수녀는 아직 신앙심이 깊지 못한 요안나가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신앙을 더욱 키우길 바랐고, 자신이 성심여중고에서 요안나를 지도하고 보살폈던 것처럼 서강대에서 케네스 신부가 요안나를 돌봐주길 바랐다.

주 수녀는 자신의 설득에도 좀처럼 내켜하지 않는 요안나를 데리고 서강대에 가서 케네스 신부에게 인사시킨다. 그러나 이 만남이 훗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케네스 신부도, 주 수녀도, 요안나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케네스 신부는 주 수녀와 요안나를 이끌고 서강대 캠퍼스 이곳저곳을 다니며 안내해주었다. 누구보다도 서강대 구석구석을 잘 아는 케네스 신부는 열의에 차서 열심히 설명해주었고, 요안나에게 “혹시 마음이 바뀌어 우리 학교로 온다면 대환영이다.”라고 말하며 캠퍼스 투어를 마쳤다. 케네스 신부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은 요안나의 마음은 짧은 시간 동안 180도로 바뀌었고, 당시 서강대에는 심리학과가 없었으나 요안나는 지망 학과를 철학과로 바꾸면서까지 서울대 대신 서강대에 입학원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차석으로 합격한다.[6]

1964년 3월, 이영자 요안나는 서강대학교에 입학한다. 신입생들 중에서 성적우수자들은 학장인 케네스 신부와의 다과회에 따로 초대되었는데, 케네스 신부는 몇 달 전에 교복 차림으로 주매분 수녀를 따라왔던 요안나를 알아보고 ‘조안’이라고 부르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입학 직후부터 조안 리는 케네스 신부의 제안을 받아, 그의 원고 번역을 돕게 되었다. 당시 학장직을 존 데일리(John Daly) 신부에게 내주고 학생처장직을 맡고 있던 케네스 신부는 한국의 여러 신문잡지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영어가 모국어인 그로서는 한국어한국인만큼 완벽하게 글을 쓸 수 없었고, 그래서 ‘영어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한국인 학생인 조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아침마다 만나서 함께 영어-한국어 번역 작업을 했고, 서로에게 각자의 모국어를 가르쳐주었다.

조안은 어려서부터 공부는 빼어나게 잘 했지만 사람들과 사귀고 또래들과 어울리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향적인 성격이었고, 그것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학교도서관에 틀어박혀 혼자서 책 읽는 것을 즐겼다. 그런 조안을 위해 케네스 신부는 “이번 여름방학 때 캠프에 참가해보라”고 권했고, 조안은 내키지 않았지만 존경하며 따르는 스승인 케네스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강원도 양양군 하조대에서 진행되는 여름캠프에 참가했다. 며칠간 바닷가에서 또래 학생들과 어울려 뛰어놀며 그녀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마음을 열게 되었고, 몸도 마음도 한층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1학년 2학기가 되어 다시 캠퍼스에서 만난 케네스 신부에게 조안은 여름의 추억들을 들려주다가 문득 바다에 빠져 물을 잔뜩 먹었던 이야기를 꺼냈고, 조안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에 놀란 케네스 신부는 그때부터 직접 조안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수영뿐 아니라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마다 함께 등산을 즐기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해진다.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조안에게, 케네스 신부는 너무도 간단하게 ‘친구’라는 답을 내놓는다. 2학년 2학기부터 조안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하자, 케네스 신부는 종종 그녀의 자취방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고, 를 마시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주변에서는 좋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오갔고, 특히 케네스 신부가 조안 리의 자취방에 드나들자 소문은 더욱 심해졌다. 조안은 억울해하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급기야는 학장 존 데일리 신부가 케네스 신부에게 정식으로 “한 제자와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주의하십시오.”라는 경고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단 둘만의 만남은 자제하되,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울리자’고 합의했지만, 막상 그렇게 하니 두 사람 모두 이전의 만남과 교류가 너무도 그리웠다.

1966년, 대학 3학년이 된 조안은 철학과에서 영문과전과한다. 그리고 케네스 신부는 서강대학교를 떠나 머나먼 전라남도 광주시[7]에 있는 대건신학대학[8]의 제2대 학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학생처장’에서 ‘학장’으로 부임하는 것이니 좌천은 아니지만, 아직 서강대 학생처장 임기가 한참 남아있는데 다른 곳으로, 그것도 서울에서 한참 머나먼 광주로 옮겨지는 것은, 역시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멀리 떨어져서도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계속했고, 케네스 신부는 어쩌다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으면 꼭 조안을 만나곤 했다. 때로는 조안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일을 만들어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다.

5. 환속결혼[편집]


만약 발전시키고 완성시킬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러한 사랑의 확인은 차라리 ‘종신징역’의 형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몇 년 동안 만남과 교류를 거듭해오면서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했고,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1967년의 일이었다. 1919년생인 케네스 신부는 당시 48세의 미국인 출신 중년 교수였고, 1945년생인 조안은 토종 한국인이며 고작 22세의 대학 4학년 학생이었다. 무엇보다도 케네스 신부는 평생 독신으로 정결을 지키며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데 헌신하겠노라고 맹세한 가톨릭 신부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예수회에 입회하여 30년의 세월을 모범적인 수도자ㆍ신부ㆍ교육자로서 살아온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즉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기꺼이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케네스 신부와 조안이 결혼하겠다고 밝히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쪽 집안, 서강대학교, 예수회, 가톨릭교회 모두 경악하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고, 두 사람은 손가락질을 받는다. 케네스 신부는 조안의 집에 방문하여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적도 있고, 조안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한 적도 있었기에, 조안의 부모도 케네스 신부를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딸의 스승으로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결혼’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럼에도 조안이 끝내 뜻을 꺾지 않자, 아버지는 아예 조안과 의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는데, 집안에서 조안은 그저 ‘철없는 딸’일 뿐이었지만 집밖에서는 그야말로 ‘마녀()’로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판의 화살은 조안에게 더욱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조안을 ‘신부를 유혹한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여자’[9], ‘재산과 명예를 탐내어 아버지뻘인 중년 남성과 결혼하려는 꽃뱀’으로 취급했다. 서강대 캠퍼스 어디에서나 조안은 차가운 눈초리와 맞닥뜨렸고, 손가락질을 당했고, 험담을 들었다.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학교에서는 그녀에게 자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퇴 권유를 거부하고 계속 학교에 다녔다.

예수회에서는 케네스 신부를 성모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시켜 요양하게 했지만, 조안이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병원까지 찾아오자 아예 케네스 신부를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조안 리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환속하여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케네스 신부에게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장 신부는 ‘잘 생각해 보라’고 거듭 당부했고, 환속과 결혼을 마음먹었지만 아직까지는 사제이고 수도자였던 케네스 신부는 장상의 명에 순명한다. 그는 예수회 수도원에 머물며 치열하게 기도하고 묵상하며, 자신과 조안의 결정이 옳은 것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끝내 변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예수회에서 퇴회하여 30년 만에 ‘일반인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이 된다. 하지만 킬로렌 일가는 일반인이 되어 돌아온 케네스를 환영하지 않았다. 케네스는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간신히 불우 아동ㆍ청소년 시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가 받는 금액은 월급이라기에는 너무도 민망한 액수였다.

그러는 사이 조안 리는 1968년 2월 서강대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애쓴 끝에, 심지어는 자신과 케네스 신부를 갈라놓으려고 애썼던 서강대 제2대 총장 존 데일리 신부에게까지 끈질기게 매달려 애원한 끝에, 어렵게 여권비자를 발급받아[10] 혈혈단신으로 미국비행기에 올라 케네스가 있는 미국으로 찾아온다.

케네스와 조안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하여 기뻐했지만, 두 사람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소문을 듣고 케네스의 오랜 친구인 부유한 사업가[11] 랭로이즈가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랭로이즈의 저택에 신세를 지며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랭로이즈는 케네스에게 “대학 총장에 교수까지 했던 경력을 왜 아깝게 썩히고 있느냐”며 교수직을 알선해주려 애썼고, 케네스와 조안이 마침내 결혼에 성공하자 (결혼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집에서 축하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가 결혼하려면 성당에서 혼인성사[12]를 받거나 관면혼인[13]을 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혼인조당(혼인장애)이 되어 정상적으로 성사(聖事)에 참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즉 혼인성사나 관면혼인 없이 사회에서의 혼인신고와 일반 예식장에서의 결혼식만 치른 신자는 성체성사(영성체),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성품성사를 받아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직을 그만둔 후에도 혼인성사를 받을 수 없다. 사제직을 그만두어도 그것은 사제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 면해주는 것뿐이지, ‘사제’라는 신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14] 환속 사제와 그의 아내가 혼인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무려 교황청[15]의 허가가 필요한데, 교황청에서 허가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16]

그동안 무수히 많은 따가운 시선과 비판을 받으며 질려 있었던 조안은 ‘가톨릭교회법이나 혼인성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관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여 사회법적인 부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안 리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하느님가톨릭교회에 대한 사랑도 극진했던 케네스는 ‘반드시 혼인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거의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케네스는 자신과 조안이 혼인성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낙담하지 않고 교황청의 이곳저곳에 꾸준히 탄원서를 보냈고, 교계 내의 여러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정말 기적적으로 탄원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케네스와 조안은 혼인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교황청의 허가에는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즉 보통의 결혼식처럼 하객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거행해서는 안 되고, 집전 사제와 그가 부른 두어 명의 증인과 신랑신부만 참석한 가운데 혼인성사필수요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생략하고 최대한 간단하고 비밀스럽게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몸부림치며 기약 없이 기다려왔던 케네스와 조안은 감격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68년 8월 30일 시카고의 록후드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는다. 턱시도도, 웨딩드레스도, 부케도, 결혼행진곡축가도, 하객 1명도 없이, 명동성당의 4~5배는 되는 거대한 대성당의 문을 모두 닫아건 채, 집전자인 시카고대교구 추기경과 그가 증인으로 부른 2명의 신부[17]만이 참석한 채였다. 당시 케네스는 49세, 조안은 23세였다. 이제 두 사람은 교회법적으로나 사회법적으로나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6. 가정생활과 말년[편집]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한 후, 두 사람은 작은 임대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가난한 신혼생활을 했다. 조안 리는 낯선 외국 땅에서 직장을 구해 일하기 시작했고, 케네스도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케네스가 강의뿐 아니라 학교 발전기금 모금위원회 책임자까지 맡게 되면서 살림은 더욱 나아졌고, 조안은 일리노이 대학교/시카고 캠퍼스 대학원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심리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70년에는 시카고에서 큰딸 안젤라(Angela)를, 1972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작은딸 에이미(Amy)를 낳았다. 조안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두 딸을 출산했고, 케네스는 출산하는 아내의 곁을 내내 지키다가 직접 아이를 받았다. 케네스와 조안은 교대로 안젤라를 돌보며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다. 에이미가 태어날 무렵에는 조안의 친정부모가 캘리포니아로 찾아왔고, 비로소 조안은 부모와 화해했다. 조안과의 의절을 선언했던 아버지도, 비로소 노여움을 풀고 케네스를 사위로 받아들인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후 케네스는 Metal Deco라는 대기업의 서부지역 판촉책임자로, 조안은 심리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캘리포니아주 주정부 민원담당 카운슬러로 취업한다. 크고 넓은 집을 마련하고 아이까지 둘이나 낳아 기르며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즐기던 것도 잠시, 케네스와 조안은 1973년 여름 휴가차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가 아예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한국에서 조안은 조선호텔 P.R. 매니저를 거쳐 헤드헌팅 업체인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하는 등 한국의 제1세대 여성 사업가로 활약했고, 케네스는 홍익대학교 특수대학원장과 한미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항상 바쁜 아내 대신에 두 딸을 돌보는 것은 주로 케네스의 몫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케네스는 1986년 7월 3일, 미국 위스콘신주 애플톤에 있는 남동생의 집에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조안 리는 41세, 큰딸 안젤라는 16세, 작은딸 에이미는 14세 때였다. 그리고 조안 리도 2022년 9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7. 자녀[편집]


파일:killoren1.jpg
두 딸이 아직 어릴 때. 왼쪽부터 작은딸 에이미, 케네스, 큰딸 안젤라, 아내 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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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왼쪽부터 에이미, 조안, 안젤라.
케네스와 조안은 두 딸에게 한국미국을 모두 가르치기 위해 애썼다. 미국에서 태어난 각각 3살과 1살에 한국으로 이주한 자매는, 처음에는 외국인학교에 다녔으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배워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로 옮겼다. 덕분에 자매는 한국어영어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한다. 중학교부터는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 차녀 에이미 킬로렌: 한국식 이름은 길현미(吉美). 1972년생(52세).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16세 연상[18]프랑스인과 결혼하여 2녀(니나, 다프네)를 두었다. 스위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8. 여담[편집]


  • 키가 몹시 컸다. 190cm라는 키는 오늘날도 무척 큰 키인데, 1950~1960년대의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큰 키였다. 덕분에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 케네스 신부는 어디서나 시선을 끌었다. 조안 리의 키는 168cm였는데, 이 역시 (지금도 크지만) 당시 여성의 키로서는 매우 큰 키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 더욱 눈에 확 띄었다고 한다.

  • 훗날 케네스는 조안에게 끌렸던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과 신자들은 나를 많이 어려워하는데, 조안은 그런 기색이 없고 자연스럽고 당당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가 권위의식 없이 소탈하고 편안하게 다가가려고 해도, 주변에서는 ‘종교인’이자 ‘교수’인 그를 어려워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성격은 때로 동료 외국인 신부들도 한소리 늘어놓을 정도였다. 때문에 케네스 신부는 동료 신부들의 틈에서도, 평신도들과 학생들의 틈에서도 마음이 꼭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는데, 그래서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역시 또래 학생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던 조안과 죽이 맞았던 것이라고.


[1] 아일랜드가톨릭 전통이 오래된 나라이고, 인구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는다.[2] 수도회 소속의 사제. ‘수사신부’, ‘성직수사’라고도 부른다. 일선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부들은 교구 소속의 신부(교구사제)이다.[3] 미국리버럴 아츠 칼리지[4]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주 수녀님’이다.[5] 성녀 잔 다르크의 이름 ‘잔(Jeanne)’을 라틴어로 발음한 것이다.[6] 필기점수만으로는 수석이었지만, 그해부터 대학입시에 반영된 체력장 점수를 합하니 차석으로 밀려났다.[7] 당시에는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전라남도 광주시였다.[8]광주가톨릭대학교[9] 물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유혹이나 강압이 아니라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이기에, 조안 리에게만 비판이 가해졌던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비판한다면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조안보다, 성직자이고 나이도 인생경험도 훨씬 많아 더욱 지혜롭게 행동해야 했을 케네스 신부의 처신을 비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10] 당시 ‘조안 리에게 여권비자를 발급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서들이 외무부주한미국대사관에 무수히 날아왔다고 한다.[11] 일찍 결혼하여 자녀도 9명이나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는데, 첫째(장녀)가 조안 리와 비슷한 또래였다.[12] 가톨릭 신자끼리 결혼할 경우[13]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가 결혼할 경우[14] 비유하자면 세례성사견진성사를 받은 가톨릭 신자가 언제부터인가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더라도, 그의 세례와 견진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고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톨릭에서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를 받으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가 새겨진다고 하며, 때문에 이 성사들은 일생에 딱 한차례만 받을 수 있다. (성품성사는 부제품<사제품<주교품의 3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의 품은 1번씩만 받을 수 있다.)[15] 당시 교황바오로 6세였다.[16]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이토록 엄격한 이유는, 만에 하나라도 환속 사제가 다시 사제직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한다.[17] 록후드성당의 주임신부와 보좌신부[18] 작은딸 에이미가 16세 연상의 남성과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조안 리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느끼셨을 아찔한 마음을 이해했다고 한다. 물론 에이미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혼을 했던 조안이, 에이미의 결혼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