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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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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의 장수. 자는 조작(朝爵). 호는 용애(龍厓). 시호는 충강(忠康).
대한민국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되어 이순신과 깊은 우애를 나누며 함께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의 성 씨인 광동 진씨의 직계 조상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2.1. 군복을 입고 공을 세우다[편집]
광동성 옹원현 사람으로 세종 가정제의 치세 말기에 지휘첨사가 되었으며, 영덕현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참가하여 광동수비가 되었다. 도적 뇌원작을 평정하고 영동의 도적들을 물리쳤으며, 신종 만력제의 치세 초기에는 고요현의 도적 등승룡, 계양현의 도적 종월천 등을 평정했다.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무장으로, 특히 남방 평정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여러 차례 승진해 도지휘첨사, 첨서광동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성립이 도적을 평정하기 위해 제양보를 공격했지만 패배하자 그의 뒤를 이어 참전하여, 도적을 평정하고 조경유격장군, 고주참장이 되었다. 남방의 묘족을 정벌해 부총병으로 옮겨 동안첨장사가 되었지만 그 곳에서 살아남은 자가 백성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책망을 받고 죄를 얻었으며, 주문달과 함께 석우 및 청수의 여러 망루를 깨뜨려 36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용서를 받았다.
동안현이 평정되자 토목공사를 일으켜 영채, 관성, 사당 등을 지었는데, 재물을 반출하는 것도 금지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현을 약탈하자 나응학에게 탄핵받아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적을 사로잡으면서 죄가 사해져 낭산 부총병이 되었다. 모략이 있어 병사를 잘 부렸지만 탐욕이 심해 다시 탄핵을 받고 관직을 빼앗겼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진린의 재주를 아깝게 여겼지만 천거하지는 않았다.
위의 ‘탐욕이 심했다’는 평가에 대하여 최근 중국 측 사료의 검토 결과, 진린이 시행했던 토목공사 등의 사업들은 전몰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한 기간 시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뿐, 개인적인 치부를 위한 것은 없었다는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다른 기록에서도 진린은 조선에 참전했을 때 조선 왕실에서 보내준 선물들을 대부분 거절하고, 종이 정도만 받았다고 한다.
전략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소극적으로 일관한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진린은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력했고, 그로 인해 이순신도 그를 믿고 함께 작전에 나갈 수 있었다. 진린이 국내에서 그 동안 일부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간 있었던 명나라 장수들의 전쟁 기피와 횡포로 조선 내 여론이 좋지 못했던 점이 크다. 진린 본인도 찰방(역참 하급 관리) 이상규가 본인의 송별회에 늦게 참석했다는 이유로 그의 목에 줄을 매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끌고 다닌 전적이 있다. 다만 이러한 조선군과 명군의 갈등은 다른 나라 군대들이 연합을 위해 모였을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임을 고려해야 한다. 서로 다른 지휘 체계와 문화 차이로 인해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 이는 조선과 명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한데, 가령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영국군과 미국군은 서로 증오하기까지 했다.
2.2. 정유년, 조선으로[편집]
1592년에 적에게 패배한 일이 참작되어 관직이 회복되었고, 광동의 병사 5,000명을 이끌며 조선을 구원했다. 1593년 2월에 어왜총병관이 되어 마귀, 유정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병사 3,000여 명, 전함 수백 척을 나누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해구에 포진시켰다. 어위도총관 겸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이 되어 수군 5,000명을 이끌고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했다.
《징비록》에 의하면 류성룡을 비롯한 많은 조선 조정의 대신들이
라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말에 즉시 군대를 동원해 고기와 생선 등을 푸짐하게 차리고[3] 진린뿐 아니라 모든 명군의 장병들까지 배부르고 취하게 하여 인심을 샀고, 섬에 왜구가 왔다는 말에 그들을 격퇴한 후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모두 바쳐 더욱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한다.[4]'통제공이 진린의 횡포[2]
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고, 분명 명나라 군대와 갈등이 생길테니 패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처음에 명나라 수군의 행패를 핑계로 백성들과 함께 본진에서 떠나려는 척을 해서 진린에게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가 하면,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해 그를 마음으로 감복시켜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서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을 직접 겪어서인지 처음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던 진린이었지만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게 되었다.[5]
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조선군 장수를 당시 깔보고 무시하던 다른 명군과 달리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6] 라는 호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였다.[7] 이에 그치지않고 진린은 아예 이순신에게 조선에서 왕이나 신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 바에, 함께 명나라로 가서 황상을 모시며 제 능력을 떨치고 부귀를 누려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 푹 빠져있었던 명나라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8][9]"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노량 해전 후 귀국하면서 선조를 만났을 때 이순신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발언을 하는 등 조선 수군의 공적을 가로챘다고는 하지만 이순신의 입장에선 백의종군 이전에 명성을 계속 쌓았다가 선조에게 죽을 뻔[10] 한 이후로 오히려 공을 드러내길 꺼리게 되었기에 이순신은 부담없이 자기 공적을 진린에게 퍼주다시피 넘겨주곤 했었다.[11](전략)상이 이르기를,
"대인의 신묘하신 계책을 힘입어 8년간의 강적이 하루아침에 섬멸되었으니 고마우신 은덕은 형용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진린이 말하기를,
"한창 적이 포위해 올 때 내 배는 큰북을 치고 먼저 나아가고 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하였는데 그 두 장수는 다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요하지 않아 다행히 패배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입니다."(후략)
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7일 정사 1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그래도 만일을 위해 이순신은 장계를 올릴 때 아예 진린의 공을 적은 거짓 장계와 실제 공로를 적은 진짜 장계 두 개를 올려서 조정에서도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었고, 나중에 명나라에서 진린이 조선군의 전과를 뺏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 조사를 할 때 진린이 공을 세운 내용의 가짜 장계를 보여주어 넘어갔다.# 일설에는 선조와 이순신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알고, 이순신은 진린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기에 의도적으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 선조의 질투와 시기에 맞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순신을 보호하고, 자신은 실리를 챙겼다고도 한다. 반면 명나라에는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잘 보고했다고. 이순신도 이런 진린의 의도를 잘 알았던 것 같다. 심지어 진린은 어느날 천문을 보다가 별의 흔들림을 보고는 이순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제갈무후의 고사를 따라 제단을 쌓아 기도를 올려서 명을 늘려보라 간곡히 청하기도 했다. 물론 이순신은 자신의 충성과 덕망과 재주가 무후만 못하니 아니함만 못하다고 주저했다. 당시 중국 사람이 조선 사람을 성현에 준하다는 호평을 받는 제갈량에게 빗댈 정도였으니 이순신에 대한 진린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최후의 결전인 노량 해전 당시, 명군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일본 열도로 내쫓는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기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퇴각하는 일본군을 그냥 보내주라는 지령을 받았고, 그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를 잠시 주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린은 본인의 성정 자체도 강경파이기도 했고, 그간 이순신에 대한 개인적인 부채감과 존경심도 있어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나섰다.
여러 매체에서는 노량 해전 이전에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보내주려다가 이순신에게 들켜 호령을 듣는 식으로 묘사되는 일이 흔한데, 진린이 일본군의 로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12] 곧바로 이순신을 찾아가 그 사실을 전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당연히 오랜 전란으로 일본군에게 원한이 사무친 이순신은 퇴각할 길을 터달라는 적을 상대로 마지막 결전에 나섰고, 진린은 이러한 이순신을 따라 함께 전선에 나갔다.[13]
이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이전까지의 전투와 달리 포격전을 하는 대신 전면으로 돌격했고 곧이어 치열한 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함께 나선 진린과 부장 등자룡이 탑승한 판옥선이 포위당한 이순신을 돕기도 했지만 곧이어 다수의 일본 함선에 포위되었고, 등자룡은 구출되기 전에 일본군이 공격해와 백병전에 휘말려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순신은 그렇게 일본군에 포위된 진린을 구하다가 총상을 입어 전사하게 된다.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곧바로 이순신을 찾아가 전투 중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해 사례하고자 했으나 이미 이순신은 전사하고 난 후였다.[14] 진린은 이때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라며 통곡했고, 육군과는 달리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운구하여 이순신의 고향 아산을 찾아갔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했다."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2.3. 명나라로 돌아간 뒤[편집]
명나라에 돌아가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되었고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년 전인 1597년에 양응룡이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1598년에 호광총병관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어서 피림을 토벌했다.
1605년에는 신첨장관사로 옮겨 산묘를 토벌하는 것에 종군했으며, 광동성을 진무하고 관직을 마쳤다. 파주를 평정한 공으로 좌도독을 더하면서 지휘사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에 세상을 뜨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시호로 충강(忠康)을 받았다. 이순신이 조선의 태양과도 같은 성웅이었듯, 그와 뜻을 함께 한 진린도 내우외환으로 망해가는 명나라를 온 몸으로 떠받치던 둘도 없는 대명의 충신이었다.
3. 자손들[편집]
진린의 자손들 역시 격동의 시대였던 명청교체기의 난세속에서 충절을 지키며 외적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웠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나라의 국운을 두고 1646년[15] 에 애산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진린의 손자이자 진구경의 아들이었던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1644년에 멸망하고, 얼마 뒤에 애산에서의 부친의 비보를 접하고는
면서 식솔들을 데리고 고금도를 거쳐 해남에 정착해 조선에 귀화했다. 그 후 진영소의 후손들은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 진씨가 되었다. 즉, 진린의 직계 후손 명맥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현재 해남에 정착한 광동 진씨의 집성촌을 '황조리'라 하며, 진린을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黃朝別廟)가 있다. 2013년 3월에 한국의 후손이 광동으로 가서 중국에 남은 진린의 후손들과 같이 제례를 올리는 등의 교류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16] 이 외에도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를 통해 광동 진씨는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4.1.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편집]
국정환이 배역을 맡았다.
4.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편집]
배우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해당 작품의 다른 명나라 측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고증에 맞지 않게 청나라 관복에 가까운 형태의 복장으로 나온다.
4.3. <불멸의 이순신>[편집]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하며, 김하균이 배역을 맡았다.
왜교성 전투부터 시작하는 1~4화와 후반부의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 고니시로부터 수급 2,000두의 제안을 받고 어차피 이긴 전쟁이니 길을 열어주자고 하지만 통제사는 거부한다. 그러자 진중에 돌아와서 이순신을 영웅이라 찬양하며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등자룡은 어차피 조선이 이긴 전쟁이고, 이순신의 공이 크니 무슨 걱정이냐 하지만 진린은 이순신이 왕과 조정의 음해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전쟁이 끝나도 이순신이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을 예견하고 그때 내가 이순신의 손을 잡아줄 거라 말한다. 이후 유정의 모함으로 선전관이 와서 수군 지휘권을 유정에게 넘기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이 이순신을 버리려 하니 그가 외롭겠다며 탐탁지 않아 하지만 결국 조선을 구하는 것은 이순신이 될 거라 믿는다. 노량 해전이 일어나는 부분도 후반부와는 다르다. 후반에는 노량에서 전투가 일어나게 판을 깔아주고 전투 때 나대용을 수로향도로 앞세워 참전한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이미 명 수군의 피해가 크다며 그냥 왜교로 유인만 해달라고 하지만 이순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진린이 그냥 전장(관음포)으로 이동해 참전한다.[17]
극중 후반부에는 합류 이전 유정이 이순신을 극찬하자 못마땅해 했으며 합류하자마자 대명의 도독에게 무례하다며 접견나온 군관한테
환영회를 끝내고 돌아와 등자룡에게 이순신이 보통 놈이 아니며 유정이 쩔쩔매는 것도 이해가 간다고 말하며 12척 함대를 1년도 안 지나서 80척 함대로 만들어낸 것이 엄청난 일이라 환영회에 나온 음식들도 이순신으로서는 최대한 땡긴 것이란 걸 간파했다. 알면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는 이순신을 한번 떠보고 그래도 지휘권이 자신에게 있으니 기선 제압을 위해 그랬다고 한다.[18]
훗날 절이도 해전에서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군을 없애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교성 전투에서는 처음에 안 나가겠다고 뻐기다가 칼을 들이대는 이순신을 보고 유정에게 작전을 중지하자고 했는데 유정이 이를 거부하자 유정이 혼자 공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여 결국 출전한다. 이후 일본군에게 매수된 유정이 작전을 어길 테니 뒤에서 지켜보라는 전서구를 보냈는데, 이를 유정 혼자서 공을 세우려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이순신의 신호를 무시하고 개돌했다가 큰 피해(군사 2,000명+전선 30척)를 보고 조선 수군에 의해 구출된다. 이때 황세득이 자기 때문에 죽을 자리로 뛰어드는 걸 보고 등자룡과 함께 매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후 유정이 패전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떠넘기는 장계를 올렸다면서 얘기하자 닥치라는 강언까지 하면서 이순신은 끝까지 분전했고 내 생명을 구했다며 커버하지만, 유정은 황제가 진린 때문에 피해본 걸 알면 또 다시 파직될 거라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넘어간다. 이때 유정이 어차피 전쟁은 끝났고 길만 열어주면 철군하겠다는 일본군에게서 땡길 걸 땡기면서 본국에서 공을 크게 보이게 하자며 실리를 강조하자 매우 탐탁지 않아하면서 쳐다본다.
이후로는 일본이 길을 열어달라며 수급과 보물들을 보내자 요시라가 이순신에게 말을 전할 기회를 열어주고서는 스스로도 이순신에게 좋게 끝내자는 식으로 길을 열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계속 거부했고, 나중에는 일본이 수급 2,000두를 주기로 했는데 절반을 통제사에게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통제사가 끝까지 거부하자 연합함대의 장으로 길을 열라 명령하지만 이것도 거절했다.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을 아둔한 자가 아닌 장수 중의 장수로 생각하기로 하고[19] 받을 걸 이미 다 받아놓고서 고니시에게 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통보한다. 이미 이순신에게 마음이 가는 와중에 이순신이 새로 뽑은 판옥선 2척을 주면서 잘해보자고 하자[20] 이에 감복하여 이순신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유정에게는 판옥선을 선물받았다고 밝혔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판옥선까지 받은 마당에 뒤로 뺄 수 없으며 심기일전하여 왜군을 섬멸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유정이 그 동안 뇌물로 받은 수급 등으로 전공을 위조한 것을 비꼬며[21] 자신은 전장에서 떳떳하게 전공을 세우겠다며 훈련을 하러 간다. 진린이 마음가짐을 새로 한 것은 좋았는데 유정은 이 때문에 일본에게서 땡길 걸 못 땡기겠다고 생각했는지 조선 조정에 또 다시 이순신을 모함하여[22] 선전관이 내려오게 만든다. 노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찾아와 일본 함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거짓정보를 흘려달라고[23] 부탁하며 판옥선을 주면서 설파한 의미를 주지시키자 한번 해보자고 하며 정보를 흘려[24] 노량에서 전투가 일어나도록 판을 깔아준다. 이때 이순신의 계획을 듣고 유정의 협조없이 우리끼리만 싸우는 거냐며 자기는 당연히 참전한다는 투로 굴었다. 노량에서는 선물받은 판옥선에 부관(수로향도)으로 나대용을[25] 끼고 나와서 이순신과 목숨을 나눌 것이라 선언하고서는 관음포로 출격한다. 이순신과 본대가 일본 함대를 관음포로 몰고오자 위엄있게 등장하여 전투를 수행한다. 할 거 하다가 이순신이 쓰러지자 걱정하는 듯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서 극중에서 퇴장.[26]
이 드라마에서는 명군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면서 진린 또한 그런 기조가 있지만 작중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리분별은 하고 사건의 전개를 파악하는 능력은 있다. 갈수록 이순신에 대한 태도는 호의적으로 변하고 유정처럼 자기랑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고 음해하지도 않는다. 이순신이 자기에게 칼을 들이댔지만 자신을 구해주자 이순신탓으로 하자는 유정에게 분노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수급은 받았지만 길은 안 열어준 것/판옥선을 받은 후 해달라는 걸 다 해주는 것/하급 군관인 나대용에게 외관상이나마 부탁을 한 것 등을 보면 양면성이 공존하지만 결국 이순신의 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사족으로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유정과 대등한, 양호 바로 다음 급의 천장인 진린이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을 황제의 권위를 업고 있는 천장의 권위로 찍어눌렀다면 선전관이나 조정이 어찌하지 못하였을 텐데 극 전개를 위해서인지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진린이 조선의 선전관을 어찌하지 못한 건 고증에 맞는게 당시 명나라 조정은 파견 장수들에게 조선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기에 그런 점이 있으며 선전관 파견은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내정으로 진린이 천장의 권위로 선전관을 찍어내린다면 이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것으로 실제로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건 경리 양호가 선조에게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달라는 압박이 유일했다.
유정이 도움이라고는 안 되면서 초치고 음해만 해대고, 양호는 조선에 우호적이지만 비중이 극히 적고, 마귀 등은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가장 크게 도움이 되어준 명나라 장수라 할 수 있다.
4.4. 《칼의 노래》[편집]
《칼의 노래》에서는 부패한 명나라 수군 제독으로 등장하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거대한 체구의 인물로 묘사된다. 주연에서 사슴 다리를 통째로 뜯어먹으며 생마늘을 으득으득 씹어먹고 공훈을 세우는 것에 집착하여 전투 중 바다에 떨어진 수급에 욕심을 부리는 면모를 보인다. 충무공과의 첫 만남에서도 천병(天兵)이 천자의 곡식을 먹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며 조선 수군에게 군량을 부담시키고 싣고 온 곡식은 횡령하려는 모습을 보이나 충무공이 여러 방면으로 잘 어르고 달래가며 길들인 이후에는 충무공을 중국에서 높은 벼슬을 하며 큰 판을 주물러야 할 사람이라며 치켜세우고 크고 작은 일들에 대체적으로 원만히 협력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노량해전 때 왜군들에게 뇌물을 받아 활로를 터준 것으로 묘사되고 이것 때문에 충무공이 베어버릴까 고민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4.5. <임진록 2>[편집]
<임진록 2>에서는 명나라의 화승총 영웅으로 나온다. 이는 수군 영웅들이 모두 원거리 무기를 쓰기 때문. 다른 장수들마냥 그냥저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능은 딱 거기까지만이고 종합적인 능력은 별거 없다. 나중에 이순신이 조선의 반격에서 멋진 스킬까지 들고나온 반면 이 양반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 외에 조반에서 추가된 기술 기공신포는 본래 진린이 사용하던 기술이었으나, 정식 버전으로 오면서 이순신의 기술로 변경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진행시 <임진록 2> 조선 시나리오 8장에서 잠깐 언급된 것을 빼면 직접 스토리 진행(브리핑)에 나온 적이 없다.
4.6. 노량: 죽음의 바다[편집]
파일:노량 죽음의 바다 캐릭터 포스터 진린.jpg
2023년 개봉 예정인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할 <노량: 죽음의 바다>에선 배우 정재영이 진린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4.7. 기타[편집]
[1]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조선으로 귀화하며 광동 진씨가 한국에도 퍼지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2] 이순신을 만나기 이전에는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진린이 조선 관리 이상규를 폭행하고, 그의 목에 밧줄을 묶은 후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가서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 이순신의 군대는 조정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국빈급 인사임에도 스스로 챙겨야만 했던 것이다.[4] 당시 조선에서 왜구의 수급은 돈으로도 보상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일정 이상이 되면 노비조차 양반까지 될 수 있었다. 또한 장수의 경우, 전공의 증거가 되어 승진에 도움이 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특히 이순신의 주력인 해상 전투의 특성상 시체의 수급을 취하기 힘들었던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귀했다. 오죽하면 조선인 시체의 수급으로 속이려다가 귀고리 자국 때문에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5] 진린이 탐욕스러웠다는 평가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상반된 해석이 나오고 있으므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개인의 능력으로 출세한 인물이라 사람을 평가하는 눈이 더 엄격했을 것이다. 진린은 이순신과 특히 많은 교분을 쌓은 인물로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6] 손윗사람을 표현할 때 라오예(老爺)라고 한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어르신' 정도로 높여 부른 것이다. 이보다 높은 존칭은 尊, 賢이 들어가는 존칭이 많으나, 사실 진린이 이순신보다 두 살 많은데 저런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높여준 것이며, 진린의 성정과 공적을 봤을 때 그 정도의 예를 보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호의라 할 수 있다. [7]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로, 진린이 이순신에게 얼마나 존경을 표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건 당시 동아시아 정치 관계상 엄청난 일이었다. 뭘 해도 황제국인 명나라이고, 조선은 명시적으로 사대주의, 즉 명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명나라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전한 진린이 제후국인 조선의 이순신한테 의전 선순위를 내준 것인데, 진린이 진심으로 이순신한테 감복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8] 당시 명군은 조선을 제후국이라 하여 신하들은 물론 국왕인 선조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성과 업적이 임진년부터 자자했고, 특히나 조선 수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일구었으니 이순신에 대한 명군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양호를 비롯하여, 군문 형개와 같은 고위직은 물론 진린과 같은 일선에서 싸우는 명군 장수들에게도 이순신은 선조와 달리 인정을 받았고, 이 점이 더더욱 선조가 이순신을 질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9] 현대 기준으로 봐도 외교 결례이다. 미해군 제7함대 사령관이 한국 대통령을 쌩까고 한국군 해군 장성한테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하며 Sir라고 높여 부르며, 시민권 추천은 물론이고 그대로 미해군으로 스카웃하려고 시도한 모양새이니. 선조가 현대의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꼬투리를 잡아서 보직 해임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만 안 했을뿐 일국의 국가원수더러 사실상 "좆까"라고 선언한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명나라 본국에서도 진린이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보고하며 칭찬하는 상황이어서 아무도 의전관계상 막나가는 진린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런 의전관계의 결례는 선조가 명나라한테 찍힌 것도 있어서 명군 장수들이 무시하는 것도 있었으나 결국, 그 상대가 이순신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용납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이유로 선조는 이순신과 한편이었던 진린까지 깎아내리는 옹졸함까지 보였다.[10]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난세의 영웅이나 구국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걸 극도로 경계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징계나 편애 등을 자주 했다.[11]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자기 부하들의 공훈은 꼬박꼬박 챙겨줬다.[12] 합리적인 일본군이라면 이순신보다는 명군을 상대로 로비하는 것이 당연하다.[13] 특히 명량 해전 직후에 일본군이 이순신의 고향인 아산으로 보복기습을 가해 아들 이면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그 원한이 실로 깊을 수 밖에 없었다.[14]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그의 죽음은 전투 종료시까지 함구되었던 것.[15] 이때는 이미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멸망(1644년)한 뒤였다.[16] 한중 공동제작 특집다큐로도 만들어졌었다..[17] 이때 이순신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띄워주면서 자기도 명나라 최고의 장수라며 자찬한다.[18] 등자룡은 이순신이 작정하고 진린을 능멸했다고 했지만 진린은 오히려 작정은 내가 했다고 한다.[19] 진린이 아둔한 자vs장수 중의 장수인가로 고민할 때 등자룡은 이순신이 과거 황제의 명마저 거부하고 왜를 공격+진린에게 칼을 들이댄 것을 얘기하며 무슨 장수 중의 장수냐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도 이를 신경쓰지 않는다.[20] 전장에서 무기를 나누는 것의 의미(=목숨을 나누는 것)를 설파.[21] 이때 유정이 지난 왜교성 전투에서 수급 2,000두를 뇌물로 받고 공격하는 척만 하여 자신이 죽을 뻔했음을 언급하며 극딜을 넣는다.[22] 이순신은 피해를 봤지만 그래도 적선 수십 척을 부쉈다고 했는데 유정은 자기들이 졌다면서 이순신 탓을 했다.[23] 이순신이 일본군 사자와 자주 만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뻘쭘해한다.[24] 이때 리얼하게 행동하는 양 보이기 위해서 수급 1,000두를 주면 전투에서 빠져주겠다고 하여 수급을 받는다.[25] 무려 나대용에게 수로향도가 되어 안내해달라고 부탁을 한다.[26] 위에는 노량에서 진린이 포위되어 이를 구하다가 이순신이 전사했다고 되어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