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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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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의 왕비.
본관은 장동(安東), 시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 추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되었다. 그렇지만 사람들한테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 혹은 명순대비(明純大妃)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장동 김씨 세도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와 헌종의 첫번째 비인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 세 번째로 장동 김씨로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순원왕후에게는 조카 뻘인 친척.[1] 1851년(철종 2년) 9월 25일, 15살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철종과 가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가 없던 철종에게 자기 집안의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인정전에 나아가 책비례를 행할 때의 교명문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관저(關睢, 시경(詩經) 주남의 편명)가 왕도(王道)의 터전이 되었으니 주남(周南)의 교화가 집안과 나라를 다스렸고,
곤상(坤象)이 건원(乾元)에 화협하였으니 주역[羲經]의 점괘에 내외(內外)를 바로잡았다.
이에 어진 보좌(輔佐)의 아름다운 덕은 바로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이에 이장(彝章, 떳떳한 글)을 상고하여 곧 옥책문(玉冊文)을 선포한다.
그대 김씨는 충량(忠良)한 화벌(華閥)의 후예요, 시례(詩禮)의 세가(世家) 명문(名門)이다.
견매(俔妹, 하늘에 비유할 여인상)의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고, 성모(聖母)의 휘음(徽音)을 계승하기를 생각하였다.
단아(端雅)하고 근신(謹愼)하며, 유순하고 온공(溫恭)하였다.
자나깨나 좋은 짝을 구하였는데 하늘이 즉위(卽位)의 초두에 짝을 맺어 주었고,
숙덕(淑德)을 간택하여 장추전(長秋殿,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에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였다.
이에 지극히 존엄함에 짝하게 되어 마침내 주량(舟梁)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중략)
이에 사신(使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과 행 용양위 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서좌보(徐左輔)를 보내어
절(節)을 지니고 예(禮)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곤위(壼闈)에 임하고,
효경(孝敬)으로 가르침을 받들게 하라. 계명장(鷄鳴章)의 경계를 마음에 새겼으니, 만기(萬機)의 내조(內助)에 힘썼고,
자손(子孫)이 번성하여 후예(後裔)가 천억(千億)으로 늘어나리로다.
방유(芳猷, 아름다운 모책)를 모두가 송축하니, 큰 복록(福祿)이 길이 편안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들 알지어다."
하였다.
남편 철종이 1863년(철종 14년) 승하한 이후 고종 때에는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또한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858년(철종 9년), 남편 철종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원자(元子) 이융준을 소생으로 두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에 급작스런 열병으로 6개월 만에 향년 2세로 요절했다.
1878년(고종 15년) 5월 12일,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승하하였다.
대비전께서 승하하다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승하(昇遐)하였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비(大妃)'이다. 철인왕후 다음의 왕비들인 명성황후나 순명효황후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다음인 순정효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다.대비전의 상사를 발표하는 의식을 명정전에서 거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성의와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대비전(大妃殿)께서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끝없는 슬픔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궁성을 호위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거애(擧哀, 초상난 것을 발표함) 장소는 명정전(明政殿)으로 하라."
하였다.
2.1. 사후[편집]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에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예릉(睿陵)이다. 추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이르러 남편 철종이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라는 대한제국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그녀 역시 철인왕후에서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같이 추존되었다.
3. 가계[편집]
3.1. 친가(안동 김씨)[편집]
- 고조부: 김성행(金省行)
- 증조부: 김이장(金履長)
- 아버지: 영돈령부사 증 의정부 영의정 영은부원군(領敦寧府事 贈 議政府 領議政 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
- 어머니: 흥양부부인 민씨(興陽府夫人 閔氏)
- 오빠: 좌의정 예조판서 효정공(左議政 禮曹判書 孝貞公) 김병필(金炳弼)
3.2. 시가(전주 이씨)[편집]
3.2.1. 배우자 /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철인왕후는 조선의 대비들 중 유일하게 왕대비가 되지 못한 대비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 부인인 대비(大妃)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이다.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인수대비(소혜왕후), 소성대비(인목왕후)[2]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조씨),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대비(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비(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된 것이다. 그래서 효정왕후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대비(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존봉받았다. 그런데 철종 또한 젊은 나이에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효정왕후)보다[3] 먼저 승하하면서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어정쩡한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게다가 고종이나 신정왕후보다 일찍 승하해 왕대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대비(大妃)'로만 남았다.[4]
- 원자(元子) 융준을 잃고서 이후 남편 철종이 1863년(철종 14년) 승하하고 시조카 고종이 다음 국왕에 즉위하자, 그녀는 대비(大妃)가 된 뒤 자식 없이 생활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왕대비인 효정왕후와 함께 어린 궁녀를 자신의 대비전에서 돌보았었는데 이 아이가 조선의 마지막 궁녀인 천일청(千一淸) 상궁이다.
5. 대중매체[편집]
남편 철종부터 사극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다가 설령 철종이 등장하더라도 조연 또는 단역 수준으로 세도정치 시기 고통받는 민초들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잠깐 얼굴만 비춰지거나 고종의 즉위 직전에 골골거리다가 사망하는 역할로만 나온다. 그러한 입지로 인해 철인왕후도 사극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2020년~2021년까지 방영된 tvN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남편과 함께 주인공으로 재조명된 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