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최규식
덤프버전 :
분류
1953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최규식(1953)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1]
2. 생애[편집]
1932년 9월 9일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우두리(현 춘천시 우두동)에서 아버지 최정헌(崔廷憲)과 어머니 초계 정씨 정경덕(鄭慶德)[2] 사이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당시 5년제)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학교를 중퇴하고 그해 4월 1일 단기 장교후보생으로 입대하여 훈련을 수료하고 9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로 비로소 임관했다.
이후 2차례에 걸쳐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오기도 했다. 1960년 군수기지사령부에서 정보장교(대위)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당시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의 부관으로 있었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근무하였다.
같은 해 경찰공무원이 되었고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7년 10월 서울특별시 종로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인 김신조 일당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정부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기습하였다. 사건 당일 무장공비 일당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위장하여 종로구 신영동 168-6번지 세검정을 거쳐 청운동 산1-1번지 창의문을 지나다가 형사 2명에게 검문을 당했다. 최규식 서장은 형사들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 무장공비들에게 직접 수하를 하며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으나 무장공비들이 먼저 총격을 가하여 제일 앞에 있던 최 서장은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당시 자하문검문소를 근무했던 정종수 경사 역시 총격으로 순직하였다. 사후 이튿날 경무관으로 특진했으며, 1월 25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은 뒤 당일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앞(청운공원 부근)에 그를 기념하는 최규식경무관동상이 세워져 있다. 경찰대학 내에도 기념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신조 사건' 순직 故최규식 경무관 동상 48년만에 재정비 경찰박물관에 그가 순직 시 착용했던 근무복과 점퍼, 기동모 등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비록 전쟁 때문에 중퇴하긴 했지만 당시 연세대학교를 다닐정도로 수재였으며 경찰관이 되고 나서도 그때 학업을 미쳐 마치치 못한 것에 대한 한 때문인지 부산시경 재직 중에도 동아대학교 야간반을 다니며 틈틈히 공부하여 결국 졸업장을 따냈다. 서울로 발령받은 후에도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서울까지 상경해 가며 도와준 덕분에 논문을 발표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1.21 사태로 순직하여 학위 수여는 그의 미망인이 받게 되었다.
육영수 여사가 그를 상당히 신뢰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그의 일하는 모습이나 인품 등을 자주 칭찬했었고 경찰 임관 7년만에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경찰서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자 매우 안타까워했고 최 서장의 아내 유정화 여사에게 육 여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울면서 부고를 알릴 정도였다.